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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헝가리 태생의 소설가 산도르 마라이의 소설은 벌써 예닐곱권이나 번역되었다. 나는 일년 전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조차 몰랐다. 내가 읽은 유럽 작가들의 소설이 프랑스, 영국, 독일, 그리고 다른 한 두 개 나라에 집중된 탓이다. 동유럽의 가운데 처박힌 헝가리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무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헝가리는 나에게 게오르그 루카치의 나라로 기억되어 왔을 뿐이다. 산도르 마라이의 소설 <열정>을 소파에 반쯤 누워 듬성듬성 읽다가 책상 위에 스탠드를 켜고 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함을 잃지 않는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요즘 내게서 사라져가는 어떤 ‘몰입’의 경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 내가 왜 이 작가를 진작에 알지 못했던가.
주인공인 헨릭은 “고독과 시간이 정신을 흐리게 하거나 심장과 영혼을 무디게 하지 않도록 회상으로 훈련”을 한다. 이 소설은 그가 회상으로 만들어낸 치밀한 추론이다. ‘회상’은 젊은 날의 사랑과 배신, 우정과 배반이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풀어가는 방식이다. 회상은 우리의 영혼을 좀 먹고 지금 여기서의 삶에 대한 활기를 잃게 만들기도 하지만, 고독의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 회상이 겨냥하는 것은 41년 전하고도 43일 전의 어느 날이다.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충격과 전환을 가져왔던 그날에 대한 회상, 이것이 그가 죽음을 눈에 앞둔 70대 노인이 될 때까지 하루도 멈추지 않았던 ‘훈련’이다.
그러하다. 삶의 어떤 순간은 너무나 강렬하여 우리의 심장과 뇌리 속에 뚜렷이 각인된다. 그 이후의 삶은 그 순간에 대한 기억과 그것이 주는 고통, 때로는 은밀한 회상의 즐거움 속에서 제 궤적을 그린다. 헨릭은 젊은 날의 절친했던 친구 콘라드와 둘도 없는 우정을 나눈다. 부유한 집 귀족 아들인 헨릭과 체코의 가난한 오스트리아 이민자의 아들인 콘라드는 제각기 서로 다른 본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니체식으로 디오니소스적인 인간과 아폴론적인 인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고, 시적 인간과 산문적 인간, 감성적 인간과 이성적 인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헨릭은 후자고, 콘라드는 전자다. 전자의 그것은 여기서는 ‘음악’의 세계로 나타난다. 음악을 아는 것, 자신의 삶을 음악으로 만들 줄 아는 것, 그것이 콘라드와 크리스티나, 그리고 헨릭의 어머니와 같은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이 소설은 이를 두고 ‘삶의 이원성’이라 부른다. 서로 다른 본질을 가진 인간의 두 부류, 그 중에서도 시적인/감성적인 인간은 이 산문적인 세계에서 오히려 마이너리티다. 한 사람의 본질 속에 그 이원성이 중첩되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로지 하나의 본질로서만 규정될 수 있는 인간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장 본질적인 태도를 이루는 것, 결정적이고도 중요한 순간에 선택을 하게 만드는 그의 본질은 어느 하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헨릭의 아버지가 아들의 친구를 거론하면서 하는 말, “그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는 말은 이 산문적 세계에서 마이너리티적 본질을 가진 소수자의 그것을 말하는 것일 게다. 다른 종류의 인간은 동일한 유적 본질을 가진 인간을 알아보고, 서로를 향해 눈짓한다.
콘라드는 헨릭의 아내 크리스티나와 남모를 연애에 빠진다. 어느 날 둘 사이의 관계를 모르는 헨릭은 콘라드와 함께 사냥을 나간다. 사냥감을 먼저 쫒던 헨릭이 문득 뒤통수에 느껴지는 살기를 느꼈을 때, 그는 절친인 콘라드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었음을 눈치 챈다. 그날 친구 헨릭을 쏘지 못한 콘라드는 도망치듯 아시아의 열대로 가버린다. 텅빈 친구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아내인 크리스티나가 이 집을 빈번하게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돌아간다. 집에 홀로 돌아온 아내 크리스티나는 8년의 세월을 남편도 애인도 없는 고독 속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소설 속의 회상은 그날 왜 콘라드가 자신에게 총을 겨누었는지, 왜 아내는 자신이 한 번도 찾은 적이 없는 친구 콘라드의 집을 알고 또 찾아온 것인지, 둘 사이의 관계는 무엇이었는지, 언제부터 어떻게 그러한 일들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 긴 회상은 41년 하고도 43일이 지난 어느 날, 늙은 콘라드가 늙은 헨릭을 다시 찾아오면서 비로소 말이라는 육체를 얻는다.
“우리는 이 곳에 남았네. 자네가 순간을 놓쳤는지, 아니면 순간이 자네를 놓쳤는지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결과는 매한가지일세. 나도 살아 있고, 크리스티나도 한동안은 다른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살아 있지. 그녀는 기다릴 수밖에 없네. 그녀와 하나로 묶여 있지만 그녀를 피해간 두 남자. 자네와 내가 끝까지 입을 다물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기다려야 하네. 그녀는 이 침묵의 진실한 의미를 인식하고 알아네기 위해서 기다리지. 그리고는 세상을 떠나네. 그러나 나는 이 곳에 남아서 모든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것이 있네. 이제 내 물음에 답변을 들을 순간이 왔네. 자네가 그날 아침 사냥에서 나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크리스티나가 알고 있었나?”
이 소설을 산문적 세계의 문법대로 불륜과 치정, 그리고 치정에 따른 우정의 파산쯤으로 요약하는 것은 거장 산도르 마라이를 욕되게 하는 것일 터이다. 주인공 헨릭은 옛 친구 콘라드에게 자신의 회상으로 엮어낸 치밀한 파탄의 역사를 그려내 보인 후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의 하나는 “자네가 그날 아침 사냥에서 나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크리스티나가 알고 있었나?”라는 것.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자네는 왜 네게 총을 겨누었나, 라고 질문했다면 그것은 이 소설을 삼류로 떨어뜨릴 것이다. 헨릭은 아내 크리스티나를 그녀를 고독에 유폐되도록 함으로써, 그리하여 그녀 스스로 8년간의 고독 속에서 죽어가게 함으로써 그녀의 배신에 대해 단죄했다.
이는 말하자면, 수동적 단죄다. 적극적/능동적 단죄라면 그것은 싸구려다. 첫 번째 질문의 의미는 둘 사이의 공모의 여부에 대한 것, 그것으로 친구-친구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나-아내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확대된다. 여기서는 헨릭과 크리스티나, 두 사람 사이의 진정한 관계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콘라드의 답변은 없다. 답변을 구구하게 늘어놓았다면 이 역시 이 소설을 싸구려로 만들 것이다. 긴 회상의 끝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자, 이것은 그의 회상의 깊이를 말해주는 것이면서 오랜 세월을 거쳐 숙성된 지혜와 본질적 사유가 다다른 경지이기도 하다. 두 번째 질문은 더 본질적이고 심오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 번째 물음은 우리가 과연 우리의 영리함, 오만, 자만심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하는 것일세. 이것이 두 번째 질문일세. 우리 삶의 진실한 내용은 죽은 여인을 향한 이 고통스러운 그리움이 아닐까. 어려운 질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네. 나는 답변할 수 없네. 이 세상 모든 것을 겪고 보았지만 이 물음에만은 답변할 수 없어. (...)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의 의미는 우리를 누군가에게 묶는 결합에 있지 않을까. 결합이든 정열이든 자네가 원하는 대로 부르게. (...) 어느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 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정열은 그렇게 심오하고 잔인하고 웅장하고 비인간적인가? 그것은 사람이 아닌 그리움을 향해서만도 불타오를 수 있을까? 이것이 질문일세. 아니면 선하든 악하든 신비스러운 어느 한 사람만을 향해서,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정열적일 수 있을까? 우리를 상대방에 결합시키는 정열의 강도는 그 사람의 특성이나 행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것은 젊은 날의 우정과 사랑을 평생 곱씹으며 살아온 자가 말년에 이르러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대인 친구 콘라드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 아니다. 헨릭, 그 자신에게, 그의 삶 전체에 스스로 던지는 물음인 것이다. 결합으로서의 열정은 대상적인 것이다. 대상이 없는 정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소설 속에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헨릭의 삶 자체가 답변이기 때문이다. 통찰과 깊이, 이 소설을 어떤 명장의 소설로 인식하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철학적 사유가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가끔씩 회상에 몸서리치는 자에게 내리치는 죽비 같기도 했으며, 흐릿하게 떠돌던 사유들을 또렷한 영상으로 만들어내는 번갯불 같기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