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한 곡 - 김동률 교수의 음악 여행 에세이
김동률 지음, 권태균.석재현 사진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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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 선생의 <인생한곡>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노년의 문턱이 저만치 보이는 사내의 회고담이다. 그 회고는 한국 현대사의 축약이랄 수 있는 노래를 매개로 한 것이어서, 그리고 그 노래들이 죄다 신산한 삶의 얼룩을 담고 있는 것이어서, 처연하고 슬프면서도 애틋하고 정겹다. 제목 그대로 인생은 노래 한 곡속에 꽉 들어차 있으니, 그 노래는 대중가수의 입을 통해 불러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 전쟁과 가난, 농촌과 도시의 설움을 여린 몸뚱이로 버텨왔던 평균적 한국인의 삶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유년의 평온을 지나 사랑에 목메던 청춘을 거쳐 반백의 머리를 한 초로의 사내가 소주 서너 잔 걸치고 부르는 인생만가와도 같다. 평소의 다소간 느릿하고 낭만적(?)인 어투 그대로인 김선생의 문장과 소박하고 선하기 그지없던 심성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권태균의 사진은 한 몸으로 뒤섞여 처음부터 끝까지 담백한 센티멘털리즘으로 일관한다.


나로서는 김선생의 이런 센티멘털리즘이 불편하지 않다. 그리고, 그 센티멘털리즘은 먹고 살기 힘든 세월을 살아왔던 한국인들이라면, 마음 저 밑바닥에 누구나 한움큼 씩은 가지고 있을 만큼 보편적인 것이기도 하다. 여기 나오는 모든 노래들은 나 역시도 아는 노래이거니와(적어도 사십대 아래는 모르는 노래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 노래에 얽힌 사연 한 두 개는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감성이자 경험치가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낙엽 떨어지는 가을날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며 광화문 연가를 읊조려 봤을 것이고, ‘서른 즈음에를 서럽게 불렀던 만 서른살의 생일이 있었을 것이며, 3차로 간 노래방에서 낭만에 대하여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아저씨/아줌마틱하게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80-90년대 시위현장과 수상쩍은 술집에서 아침이슬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않은 자 많지 않으리라.


저자와 사진가, 그 둘과의 인연도 새삼스럽다. 김선생과 동유럽 일대를 차를 몰고 며칠 동안 돌면서 그가 음악과 문학, 클래식과 대중음악, 역사와 인문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음을 알았다. 그의 신문 칼럼들이 보여주는 고전적 중후함은 그 교양과 안목에서 나온 것임을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10여년 동안 클래식 음악 등을 담당한 일간지 문화부 기자였으며, 늦깎이로 언론학 박사를 한 뒤 국책연구기관에서 유일한 비경제학 부문 연구원을 지냈다.


TK 출신으로 다소간 보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으나 그보다는 리버럴리스트에 가깝고, 인문적 낭만주의자 부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그러니, 이 책에서 오빠 생각의 소박한 동심과 향수의 선험적 고향상실성과 세노야의 칠십년대적 낭만주의(청년문화론?)굳세어라 금순아의 영화 국제시장스런 아버지 세대에 대한 추모와 세월이 가면의 복고적 낭만주의와 부용산북한강에서의 장중한 비극미와 사계의 산업화 시대의 감성이 공존하는 것이다. 정치적 프리즘으로서의 좌우는 여기 적용되지 않으며, 노래와 거기 얽힌 삶, 그리고 동시대인과 전세대에 대한 깊은 공감과 눈물어린 회억이 페이지마다 출몰하는 것이다그리고, 사진가 권태균. 죽기 사흘전 광화문에서 만난 그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 자연다큐멘터리 사진의 대가, 교수직이 재미없어 때려치고 다시 현장 사진가로 복귀한 천생 찍사였던 그는 주름 패인 얼굴에 사람좋은 웃음을 남기고 헤어졌다. 그는 전국의 산과 바다, 강과 들판을 두루 다녔으며, 70년대 강운구 선생이 찾았던 강원도 마을을 30년 뒤에 다시 찾아 <마을 삼부작>을 다시 펴냈다. 그의 조수석에 앉아 사진과 살아온 내력을 풀어내며 고속도로를 달리던 시절이 새삼 그립다.


김선생의 노래 이야기가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이 책에서 다룬 상당수의 노래에 신촌이야기가 나와서이기도 하다. 고려대 출신인 그는 제기시장과 안암동의 후미진 골목에서 놀지 않고 연세대 이화여대가 있는 신촌에서 하숙을 했고, 80년대 신촌의 술집과 카페를 전전했던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유서깊은 카페와 술집들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 한 두 개만 겨우 버티고 살아 있는데, 그와 상당한 터울을 두고도 내가 그 곳들을 섭렵했으니, 이나는 이 책에서 묘사되는 문화감각과 거의 동시대를(아니 끝자락을) 맛본 셈이다. 아니, 그것은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신촌이라기보다 감성의 시간대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리라. 가령, 그것은 자유로를 달리는 차안에서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쯤을 함께 부르며 문득 가슴속이 더워짐을 느끼는, 그러한 동세대적 감성이다공감의 일체성, 감성의 공동체, 그렇게 노래는 그 노래를 온전히 향유할 수 있는 집단과 세대를 감성적으로 확연하게 갈라버린다. 그래서, 나는 저 아랫세대가 아니라 이 책의 김동률 선생의 세대군에 속해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책에서 김동률 선생이 자주 코끝이 찡해지고, 가슴이 먹먹해지듯이,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러했던 것이다. 그리고, 진짜배기 사진쟁이였던 권태균에게 다소 늦은 애도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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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정원
최영미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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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영미의 소설 <청동정원>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80년대에 청춘을 보낸 자의 자서전? 한국적 성장소설? 이 소설 아닌 소설의 스토리가 그녀의 직접적인 경험에, 근접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밀착된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은 이런 분류를 어렵게 만든다. 1990년대 초 어느 날인가, 한겨레에 실린 그녀의 시 선운사를 본 순간, , 이거 예사롭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녀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나 역시 남들처럼 흥미로운, 그리고 신선하고도 도발적인 시집으로 읽었다. 그녀의 시는 저 만치 떨어진 관조의 자리가 아니라 제 삶에서, 제 몸뚱아리로 겪고, 그 몸뚱아리에 얼룩져 있는 것들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시는 가장 직접적으로 제가 겪어온 삶을 정직하고 투명하게 보여주는 장르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최영미의 시는 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라 말해도 좋다. 그녀만큼 그녀의 시와 한몸임을 보여주는 시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 <청동정원>을 세모의 끝, 바람 불어 추운 겨울날 새벽에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잠시 끊었던 담배를 피다 끄다 하면서, 착잡하고 안타깝고 그립고 아쉬워하면서, 재미있게(라기보다 차라리 어이없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순식간에 넘겨 버렸다. 왜 소설 속 이애린(아니 최영미)는 이 모양 이 꼴로 살았던가. 그녀의 지난 삶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 살았다는 판단이 아니다. 개인에게 주어진 역사의 무게를 나름의 방식으로 짊어졌고, 그것과 불화하는 그녀의 욕망과 끌려가지 않으려는 그녀 자신에게서 비롯된 원심력을 팽팽하게 오가면서 그럭저럭 그녀는 살았다. 누구보다도 예민한 신경증을 지닌 그녀가 80년대 운동권의 한복판에서 버텨왔다는 것이 차라리 신기할 정도다. 제 욕망을 스스로 거세한 채, 집단의지에 몸을 내 맡기는 방식의 삶을 살았던 것이 그 시절의 삶의 윤리(?)일 진대, 그녀는 대체 왜 자신의 길이 아닌 길로 갔던 것일까.


그래, 나는 그녀가 말하는 서울대 건너편 강건너를 잘 알지 못한다. 대학시절, 어느 봄날 그 언저리에서 막걸리에 파전을 먹었던가 아니던가. 흐드러진 봄꽃과 걸쭉한 막걸리에 취해 휘청휘청 걸었던가, 아니던가. 하지만, 거기는 내가 놀던 곳도 아니고 술 마시던 곳도 아니었다. 그녀는 70년대 막바지에 서울대에 입학하여 80년대를 지나고, 짧은 결혼을 하고, 운동권에 몸을 담고, 자본 1권을 번역하고, 출판사에 들어가고, 소설을 쓰고, 시를 썼다.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그런 얘기다. 여기에 대학입학을 위해 보내야 했던 모진 고3 시절과 부동산으로 돈을 번 아버지, 차림새에 유난히 집착하던 여대생, ‘미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작은 에피소드들, 가난한 정치학도(철학도가 아니었던가)와의 결혼과 그로부터 받은 폭력, 사랑에 굶주린, 아니 사랑에 기꺼이 투신하는 저돌성, 욕망을 긍정하는 여자’, 감옥, 고급한 취향의 독재자 아들이 경영하는 출판사에서의 경험, 그리고 소설가로서의 삶이 나란히 병치돼 있다.


그래, 뒷표지에 실린 방민호의 발문처럼,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그녀가 오랫동안 묵혀왔던 일기. 80년대를 지나고 이제 중년을 넘은 여자의 내밀한 일기다. 그녀가 대학에 들어가서 패셔너블한 여대생이 되고, 중산층의 삶에 걸맞는 직업과 결혼을 하고, 우아한 중년으로 늙어갔다면 어떠했을까. 운동화를 신고 거리를 내달리며, 감옥에 갇혀 칸막이 없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운동권 사내에게 매질을 당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처단하려던 독재자의 아들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밥벌이를 하지 않고 말이다. 남학생들이 곁눈질을 하며 쫓아올 정도의 미모이던 그녀가 그에 걸맞는 삶을 살았다면 말이다. 운명이 타고난 기질의 다른 표현이라면, 그녀는 다시 80년대가 오더라도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역사구속적 존재로서 몸을 내던졌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랑과 결혼에는 거의 백치에 가까운 판단력을 보여주는 여자’, 그녀의 삶은 그렇게 운명지어졌을 것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그녀의 벗들은 국회의원이 되고, 각료가 되고, 유명 언론인이 되고, 벤처기업가가 되고, 이상한 전도사가 되고, 여전히 바닥에서 박박기는 또다른 운동권으로 살아가지만, 그녀는 시를 쓰고 소설을 쓴다. 글을 써서 제 몸의 새겨진 얼룩의 내력을 보여주고, 실패한 사랑의 기구한 역사를 들려주고, 혁명가 아닌 혁명가로 살았던 시절을 말하고, 이제야 갓 눈을 뜬 욕망을 솔직하게 토로한다. 중년을 넘어 이토록 정직하게 자기 삶을 속살까지 보여주는 것도 참으로 큰 용기다. 그녀의 삶에 연루된 자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음에도 그토록 투명하게 속생각을 뒤집어 보여주는 것도 용기다. 누군가는 만용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그녀의 한 대학동문처럼 아직도 80년대에 갇혀 있구려라고 지적질할 지도 모른다. 80학번은 여든 야든 단 한명의 국회의원도 없다는 소설 속 문장처럼, 대학새내기 시절에 광주를 겪은 자들의 운명은 오래 붙들려 있었다는 게 맞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광주와 역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단 한번으로 기억되는 스무살의 청춘, 이후의 삶이 그 시절로 인하여 경로의존적이 되는 시간에 사로잡히지 않을 자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최영미의 시가, 그녀의 소설이 늙지 않는 이유다. 그래서 그녀는 소설의 형식속에 거의 직접적인 사실과 경험들을 집어넣었으리라. 그녀는 여전히 과거진행형인 것이다. 


그녀의 서가에 옛책들이 그대로 있듯이 내 서가에도 옛 책들이 그대로 있다. 한때 밑줄을 그으며 읽었던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 없는 것도 같다. 그러니까, 이 소설이 내게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동반했다면, 그것은 이 소설이 다른 사람에 의해 쓰여진 내 일기 같아서였을 것이다. 비록 삶의 경로가 전혀 달랐으며, 생물학적 연대가 훨씬 더 멀었고, 고뇌의 깊이와 교유의 폭이 사뭇 달랐다 해도 말이다. 윤동주의 참회록이 구리거울속에 비친 모습이듯이, 과거의 반추는 일그러지고 거친 청동거울이라야 외려 잘 보이는 법이다. 그런 청동으로 만들어진 정원이라니, 그 정원의 꽃들은 시들고 지친 모습일 것이며, 예쁘고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럼에도 청동으로 만들어진 정원은 낡고 때에 절어 있어도 눈물겨운 그리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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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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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비드 하비의 <파리, 모더니티의 수도>는 발자크의 소설과 오노레 도미에의 그림으로부터 시작한다. 그에게 발자크는 근대성이라는 신화를 파리 밑바닥에서부터 파헤쳐온 소설가다. 도미에는 이 도시의 일상과 그 추악한 단면을 특유의 삽화로 그려내 보인다. 두 사람 모두 이 도시사회학자의 시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었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발자크를 애독했고, 엥겔스는 그를 두고 “리얼리즘의 승리”라는 테제를 이끌어 내었다. 


90여편의 소설로 이루어진 그의 <인간희극>을 읽지도 않았고, 볼 생각도 없는 내게, <고리오 영감>의 발자크는, 그러나, 이런 찬사를 받을 만한 소설가는 아니다. 이 소설과 하비의 책과 파리행이 우연히 겹쳐 있던 어느 날,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라고 주인공 라스티냐크가 결기어린 다짐을 하는 대목을 넘길 때, 새삼 소설읽기란 참으로 허망한 노릇이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왜 그런가. 


이 소설은 시골 출신 젊은 법학도(라고 하지만, 그는 이 소설에서 거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라스티냐크가 파리의 사교계에 데뷔하고, 어설프게 귀부인과의 사랑에 빠지고, 사치와 화려한 생활로 인해 부성마저 부인하게 되는 인간적 현실을 보면서 절망하는 이야기다. 그는 파리의 추악한 현실에 대해 절망하지만, 유명한 마지막 대목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이 속악한 도시 파리와의 대결의지를 밝힌다. 


주인공 라스티냐크를 중심으로 뇌브 생트 주느비에브 거리의 보케르 하숙집과 그 집에 기식하는 파리의 따라지 인생들이 있고, 딸들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부성의 화신 고리오 영감이 있으며, 그의 귀부인인 두 딸이 있다. 19세기 파리의 풍속화를 보여주기 위해 제2 제정기 파리의 여전히 화려한 무도회와 귀족들의 사치, 젊은 애인 하나 쯤은 가지고 있는 귀부인들의 치맛속 사랑 이야기, 범죄자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음모, 따라지 인생들의 세속적 욕망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그런데, 여기서 부정되거나 대결의 한쪽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은 자본주의적 근대성으로 대표되는 모더니티이기에는 좀 모자라 보인다. 이 소설에서 아이러니게도 자본주의적 가치를 체현하고 있는 인물은 오히려 고리오 영감이다. 제면업자 출신인 그는 지금의 용어로 말하자면 ‘기술과 유통의 혁신’으로 떼 돈을 번 인물이다. 그가 사업을 통해 번 돈은 모두 두 딸의 결혼비용으로, 그리고 두 딸의 사교계 진출을 위한 씨드머니로 허비되었다. 


그가 자본의 축적과 지속적 이윤창출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자본가’였다면, 이런 방식으로 자본을 허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본가적 방식으로 돈을 벌었지만, 바로 그 자본주의 방식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방식(자본이 아닌 사랑을 선택하는)을 되풀이 한 끝에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가버리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귀족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을 끊임없이 수혈받는 두 딸이 애써 붙들고자 하는 것은 귀족사회와 사교계에 어울리는 모양새와 ‘티내기’다. 


그러므로, 라스티냐크가 절망하고 대결하고자 하는 현실은, 근대사회의 경제적 질서거나 그로 인해 창출되는 추악한 현실이라 보기에는 분명치 않다. 여기서 도드라지는 것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도 지속되어온 봉건적 귀족질서와 그 질서가 만들어내는 부산물로서의 사교계이며, 그 사교계의 생리와 관계의 사슬이 보여주는 추악함인 것이다. 따라서 그가 “이제 나와 파리의 대결이야”라고 주먹을 불끈 쥘 때, 그는 이미 다 죽어가는 봉건적 질서를 향해 종주먹을 들이대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자본가이기에는 철저하지 못했던, 감정마저도 ‘거래’할 수 있을 정도로 자본가이지 못했던 고리오 영감의 장례 후에 내뱉은 그의 외마디 결기는 허공에 내지르는 주먹처럼 보였던 것이다. 


요즘 뜨고 있다는 토마스 피케티의 고리오 영감 인용에 대해서도 뜨악한 구석이 없지 않다. 그는 지금의 자본주의가 <고리오 영감>에 나오는 세습자본주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보케르 하숙집의 젊은 처녀 빅토린과 라스티냐크가 결혼했을 때, 이 젊은이가 결혼으로 인해 얼마를 벌 것인가하는 셈에서 나온 말이다. 부유한 아버지를 둔 처녀 빅토린은 남매 지간인 다른 상속자가 죽을 경우 백만 프랑의 돈을 손에 쥐게 된다. 


피케티로서는 부의 불평등과 세습화가 이뤄지고 있는 현재의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이 소설을 거론했겠지만, 중요한 것은 세습을 받는 당사자가 라스티냐크가 아니라 빅토린이라는 점이다. 세습보다 더 주목해야할 것은, 여성의 지참금을 배우자인 남성이 갖게 되는 봉건적 관습이다. 부의 세습과 함께 여기에는 남녀 사이의 봉건적 관계가 또 하나의 층위로 매개되어 있는 것이다. 차라리 부의 세습화와 더불어 봉건적 관계의 부당함을 말했어야 한다. 그런데, 부의 세습화가 어찌 자본주의 시대만의 문제인 것인가.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허망함의 내력은 대략 이러한 것이다. 


한마디 더. 프랑스어를 전혀 알지 못하지만, 번역자의 한국어 문장은 가끔씩 참담했고, 더러 우스꽝스러웠다. 더불어 뒷 표지에 쓰여진 말, “이 작품은 허구의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고 움직임을 부여하여, 실재의 세계로 변화시켜 내는 근대적 기획의 첫 시도이자 완성인 것이다.” 번역자가 붙였을 이 췌사는 대체 무슨 말인가. 허구의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고 움직임을 부여한다? 그게 소설을 비롯한 허구에 근거한 예술의 본질이 아니던가. 이 작품은 근대적 기획으로서, 허구의 세계를 실재의 세계로 변화시켜 낸다고?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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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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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태생의 소설가 산도르 마라이의 소설은 벌써 예닐곱권이나 번역되었다. 나는 일년 전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조차 몰랐다. 내가 읽은 유럽 작가들의 소설이 프랑스, 영국, 독일, 그리고 다른  한 두 개 나라에 집중된 탓이다. 동유럽의 가운데 처박힌 헝가리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무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헝가리는 나에게 게오르그 루카치의 나라로 기억되어 왔을 뿐이다. 산도르 마라이의 소설 <열정>을 소파에 반쯤 누워 듬성듬성 읽다가 책상 위에 스탠드를 켜고 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함을 잃지 않는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요즘 내게서 사라져가는 어떤 몰입의 경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 내가 왜 이 작가를 진작에 알지 못했던가.

 

주인공인 헨릭은 고독과 시간이 정신을 흐리게 하거나 심장과 영혼을 무디게 하지 않도록 회상으로 훈련을 한다. 이 소설은 그가 회상으로 만들어낸 치밀한 추론이다. ‘회상은 젊은 날의 사랑과 배신, 우정과 배반이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풀어가는 방식이다. 회상은 우리의 영혼을 좀 먹고 지금 여기서의 삶에 대한 활기를 잃게 만들기도 하지만, 고독의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 회상이 겨냥하는 것은 41년 전하고도 43일 전의 어느 날이다.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충격과 전환을 가져왔던 그날에 대한 회상, 이것이 그가 죽음을 눈에 앞둔 70대 노인이 될 때까지 하루도 멈추지 않았던 훈련이다.

 

그러하다. 삶의 어떤 순간은 너무나 강렬하여 우리의 심장과 뇌리 속에 뚜렷이 각인된다. 그 이후의 삶은 그 순간에 대한 기억과 그것이 주는 고통, 때로는 은밀한 회상의 즐거움 속에서 제 궤적을 그린다. 헨릭은 젊은 날의 절친했던 친구 콘라드와 둘도 없는 우정을 나눈다. 부유한 집 귀족 아들인 헨릭과 체코의 가난한 오스트리아 이민자의 아들인 콘라드는 제각기 서로 다른 본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니체식으로 디오니소스적인 인간과 아폴론적인 인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고, 시적 인간과 산문적 인간, 감성적 인간과 이성적 인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헨릭은 후자고, 콘라드는 전자다. 전자의 그것은 여기서는 음악의 세계로 나타난다. 음악을 아는 것, 자신의 삶을 음악으로 만들 줄 아는 것, 그것이 콘라드와 크리스티나, 그리고 헨릭의 어머니와 같은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이 소설은 이를 두고 삶의 이원성이라 부른다. 서로 다른 본질을 가진 인간의 두 부류, 그 중에서도 시적인/감성적인 인간은 이 산문적인 세계에서 오히려 마이너리티다. 한 사람의 본질 속에 그 이원성이 중첩되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로지 하나의 본질로서만 규정될 수 있는 인간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장 본질적인 태도를 이루는 것, 결정적이고도 중요한 순간에 선택을 하게 만드는 그의 본질은 어느 하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헨릭의 아버지가 아들의 친구를 거론하면서 하는 말, “그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는 말은 이 산문적 세계에서 마이너리티적 본질을 가진 소수자의 그것을 말하는 것일 게다. 다른 종류의 인간은 동일한 유적 본질을 가진 인간을 알아보고, 서로를 향해 눈짓한다.

 

콘라드는 헨릭의 아내 크리스티나와 남모를 연애에 빠진다. 어느 날 둘 사이의 관계를 모르는 헨릭은 콘라드와 함께 사냥을 나간다. 사냥감을 먼저 쫒던 헨릭이 문득 뒤통수에 느껴지는 살기를 느꼈을 때, 그는 절친인 콘라드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었음을 눈치 챈다. 그날 친구 헨릭을 쏘지 못한 콘라드는 도망치듯 아시아의 열대로 가버린다. 텅빈 친구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아내인 크리스티나가 이 집을 빈번하게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돌아간다. 집에 홀로 돌아온 아내 크리스티나는 8년의 세월을 남편도 애인도 없는 고독 속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소설 속의 회상은 그날 왜 콘라드가 자신에게 총을 겨누었는지, 왜 아내는 자신이 한 번도 찾은 적이 없는 친구 콘라드의 집을 알고 또 찾아온 것인지, 둘 사이의 관계는 무엇이었는지, 언제부터 어떻게 그러한 일들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 긴 회상은 41년 하고도 43일이 지난 어느 날, 늙은 콘라드가 늙은 헨릭을 다시 찾아오면서 비로소 말이라는 육체를 얻는다.


우리는 이 곳에 남았네. 자네가 순간을 놓쳤는지, 아니면 순간이 자네를 놓쳤는지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결과는 매한가지일세. 나도 살아 있고, 크리스티나도 한동안은 다른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살아 있지. 그녀는 기다릴 수밖에 없네. 그녀와 하나로 묶여 있지만 그녀를 피해간 두 남자. 자네와 내가 끝까지 입을 다물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기다려야 하네. 그녀는 이 침묵의 진실한 의미를 인식하고 알아네기 위해서 기다리지. 그리고는 세상을 떠나네. 그러나 나는 이 곳에 남아서 모든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것이 있네. 이제 내 물음에 답변을 들을 순간이 왔네. 자네가 그날 아침 사냥에서 나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크리스티나가 알고 있었나?”

 

이 소설을 산문적 세계의 문법대로 불륜과 치정, 그리고 치정에 따른 우정의 파산쯤으로 요약하는 것은 거장 산도르 마라이를 욕되게 하는 것일 터이다. 주인공 헨릭은 옛 친구 콘라드에게 자신의 회상으로 엮어낸 치밀한 파탄의 역사를 그려내 보인 후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의 하나는 자네가 그날 아침 사냥에서 나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크리스티나가 알고 있었나?”라는 것.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자네는 왜 네게 총을 겨누었나, 라고 질문했다면 그것은 이 소설을 삼류로 떨어뜨릴 것이다. 헨릭은 아내 크리스티나를 그녀를 고독에 유폐되도록 함으로써, 그리하여 그녀 스스로 8년간의 고독 속에서 죽어가게 함으로써 그녀의 배신에 대해 단죄했다.

 

이는 말하자면, 수동적 단죄다. 적극적/능동적 단죄라면 그것은 싸구려다. 첫 번째 질문의 의미는 둘 사이의 공모의 여부에 대한 것, 그것으로 친구-친구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나-아내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확대된다. 여기서는 헨릭과 크리스티나, 두 사람 사이의 진정한 관계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콘라드의 답변은 없다. 답변을 구구하게 늘어놓았다면 이 역시 이 소설을 싸구려로 만들 것이다. 긴 회상의 끝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자, 이것은 그의 회상의 깊이를 말해주는 것이면서 오랜 세월을 거쳐 숙성된 지혜와 본질적 사유가 다다른 경지이기도 하다. 두 번째 질문은 더 본질적이고 심오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 번째 물음은 우리가 과연 우리의 영리함, 오만, 자만심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하는 것일세. 이것이 두 번째 질문일세. 우리 삶의 진실한 내용은 죽은 여인을 향한 이 고통스러운 그리움이 아닐까. 어려운 질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네. 나는 답변할 수 없네. 이 세상 모든 것을 겪고 보았지만 이 물음에만은 답변할 수 없어. (...)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의 의미는 우리를 누군가에게 묶는 결합에 있지 않을까. 결합이든 정열이든 자네가 원하는 대로 부르게. (...) 어느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 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정열은 그렇게 심오하고 잔인하고 웅장하고 비인간적인가? 그것은 사람이 아닌 그리움을 향해서만도 불타오를 수 있을까? 이것이 질문일세. 아니면 선하든 악하든 신비스러운 어느 한 사람만을 향해서,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정열적일 수 있을까? 우리를 상대방에 결합시키는 정열의 강도는 그 사람의 특성이나 행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것은 젊은 날의 우정과 사랑을 평생 곱씹으며 살아온 자가 말년에 이르러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대인 친구 콘라드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 아니다. 헨릭, 그 자신에게, 그의 삶 전체에 스스로 던지는 물음인 것이다. 결합으로서의 열정은 대상적인 것이다. 대상이 없는 정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소설 속에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헨릭의 삶 자체가 답변이기 때문이다. 통찰과 깊이, 이 소설을 어떤 명장의 소설로 인식하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철학적 사유가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가끔씩 회상에 몸서리치는 자에게 내리치는 죽비 같기도 했으며, 흐릿하게 떠돌던 사유들을 또렷한 영상으로 만들어내는 번갯불 같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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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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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철 교수의 운문 번역으로 <리어왕>을 다시 읽다. 그의 번역은 행갈이와 조사의 사용이 조금 이상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이 비극의 장중한 맛을 잘 살리고 있다. 예고된 비극의 운명을 더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역시 시적 언술이 더 합당한 듯하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도 희미한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그 을 더 온전히 느끼려면 시에서 더 나아가 낭송, 그리고 암송이 맞다는 생각도 아울러 들었다. 점차 희미해져가는 기억력 덕에 암송은 불가능할 것 같고, 배우도 아닌 마당에 미친놈처럼 장중한 대사를 읊기도 어려운 일. 그냥 읽을 수 밖에.

 

<리어왕>사랑으로 침묵하라는 코딜리어의 방백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 비극의 11장은 리어와 세 딸들의 문답으로 시작되는데, 두 언니와 달리 코딜리어의 대답은 없습니다라는 말이다. 그 뒤로는 예견된 대로, 아버지와 딸이 결별하며, 두 언니가 아비를 배반하고, 치정과 권력이 얽힌 반란과 살인이 등장하고, 모두가 비극적으로 죽는다. 그러니까, 이 모든 비극의 출발점이 된 없습니다라는 말, 아비의 사랑에 대한 딸의 매정하리만큼 단호하고 간결한 이 말은 표상언어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언어는 우리의 마음결을 모두 담아내기에는 너무 작거나 깨지기 쉬운 그릇이다. 그럼에도 달리 도리가 없는 우리는 그 깨지기 쉬운 질그릇으로 마음과 생각을 담아내며, 그것이 온전히 타자에게로 전달될 수 있으리라 희망한다. 어쩌면 이 비극은 언어가 실어 나르는 커뮤니케이션의 한계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 행위 발생 이전에 그 언어는 사랑으로 침묵하라라는 전언에서 보여지듯이 언어화되지 않은언어 이전의 것이다. 코딜리어는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을 언어화하라는 아비의 명령 앞에 진실된 고백을 하지만, 그 진실은 아비의 몰이해 속에 미끄러지고 만다.

 

사랑의 본질은 언어 이전의 것이다. 사랑이 있었고 그 이후에 언어가 있었다. 그러니, 본질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언어화하기 이전의 날 것 그대로, 네안데르탈인의 , 거리는 고함 그대로, 바르뜨의 말처럼 시를 탄생시키기 이전의 태초의 비명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분절화한 언어, 시피니앙과 시니피에가 정교하게 결합된 언어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배반당해 왔는가. 그 언어의 배반은 고너릴과 리간이라는 리어의 두 딸이 보여주듯이 얼마나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하는가.

 

<리어왕>의 전언은 그래서 노자의 그것과 닮아 있다. ‘道可道非常道는 표상언어의 한계를 상징하는 말이거니와 오히려 언어 이전의 상태(침묵)가 진실임을 말해주는 것이다.(“진실이 네 지참금이다.”) 리어에게 딸(고너릴)너는 내 살, 내 피, 내 딸, 아니 넌 오히려 내 것이라 해야 하는 내 몸안의 질병이고 내 썩은 피가 만든 부스럼, 페스트 발진이나 부풀은 옹이와 같은 존재다. 다시 말해, “너는 나다”, =나라는 등식 속에서 타자와 타자를 매개하는 언어란 무슨 소용인가. 아니 그것은 불필요한 표상이자 매개가 아닐 것인가. 그러니, 사랑하는 이들이여, '언어의 감옥'에 갇히지 말고,  “사랑으로 침묵하라.”

 

이 비극의 또다른 기획자 에드먼드는 글로스터 백작의 서자다. 아주 오래전 세익스피어를 인용하기 좋아하는 평론가 최원식은 우리는 자연의 은밀한 욕정에 힘입어 지루하고 맥빠지고 싫증난 침대에서 잠결에 태어난 멍청이 한 족속을 낳는데 들어가는 것보다, 더 많은 자질과 맹렬한 정기를 부여받았는데?”라는 대사를 인용한 적이 있다. 사랑없는 결혼보다 결혼없는 사랑의 건강함을 예시하며 인용한 것이었는데, 이 말이 에드먼드의 대사라는 것을 <리어왕>을 다시 읽고서야 알았다.

 

부부의 나른한 침대보다 저 야생의 들판에서 태어난 아이(사생아)가 더 훌륭하고 건강하다는 게 최원식의 말이었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이 작품에서 음모가, 두 딸 사이를 오가는 바람둥이, 권력욕망에 사로잡힌 자, 아비와 형제를 배반한 자로 등장한다. 그의 말대로 사생아에 대한 옹호는 아니었던 것. 인용이 맥락을 벗어날 때, 현학의 과시는 될지언정, 적절성을 확보하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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