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의 마지막 횡단 - 발터 벤야민 전기소설
제이 파리니 지음, 전혜림 옮김 / 솔출판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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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무실을 오고 가며 발터 벤야민의 전기소설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을 읽었다. 어디까지가 ‘팩트’이고 어느 부분이 허구인지는 잘 구분되지 않는다. 문학연구자이자 소설가인 저자 제이 파리니에게 주어진 자료는 게르숌 솔렘의 <한 우정의 역사>와 벤야민의 편지, 아샤 라시스의 회고록, 그리고 벤야민과 함께 피레네 산맥을 넘었던 리사 피트코와의 인터뷰 정도가 전부다. 이 재료들은 벤야민의 여정을 중심으로 짜이면서, 게르숌 솔렘, 아샤 라시스, 리사 피트코, 마담 루이스(그녀는 벤야민이 자살한 스페인 국경마을 포르부의 호텔 여주인이다)의 입으로 다시 태어나 벤야민의 삶을 증언한다. 저자는 이 부실한 자료를 가지고도 벤야민의 삶과 사랑을 정교하게 짜여진 직물처럼 아주 잘 직조해 놓았다. 벤야민이 파리를 떠나 피레네 산맥의 시골 호텔에서 모르핀으로 자살할 때까지 비교적 짧은 기간을 다루고 있지만, 그의 삶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 해도 무방하다. 누가 벤야민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이 책을 건네줘도 좋을 것 같다.

책을 덮고 나니 마드리드행 급행열차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진 벤야민의 마지막 원고뭉치가 눈에 밟힌다. 사라진 책은 몇가지 단서와 추론을 뒤로 한 채 신화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가득했던 파피루스 책들이 그러했고, 에코가 자기 소설의 재료로 써버린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이 그러할 것이다. 우리에게도 남아있다면 일본의 <만엽집>이 부럽지 않았을 <삼대목>도 그런 운명이다.(한국의 고대 시가가 절간 언저리에서 쓰여진 몇 편으로 남아 있다는 건 비극이다. 문학적 기록을 보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전혀 문화민족이 못된다.) 죽어가는 벤야민으로부터 원고뭉치가 든 서류가방을 부탁받은 꼬마 호세는 이 소설에서처럼 정말,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책의 눈물을 흘렸을까. 한 명민하고 예민한 정신이 한땀 한땀 써내려간 원고에 담겨있을 ‘파사주 프로젝트’는, 그 뒤 서너 명의 학자에 의해 다시 쓰여지긴 했어도 그건 벤야민 에피고넨들의 작품일 뿐이다.

발터 벤야민은 1892년에 태어나 1940년 만 48세로 죽었다. 1942년에 태어나 1990년에 죽은 김현과 똑같은 나이에 죽었으니 때 이른 죽음은 아니다. 그가 남긴 글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밖에 없는 사람이 남긴 기록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적다. 어떤 여자와도 성공적인 결합에 이르지 못했던 그의 부실한 연애처럼, 그가 남긴 기록은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미완성이고, 그나마도 단편적 에세이와 파편화된 이미지로 그쳐 있다. 그러나, 이 짧고도 시적인 에세이들의 매혹은 아주 독한 것이어서 몇 번을 다시 읽어야 겨우 그 의미의 파편을 건질 수 있음에도 거듭 찾게 되는 것이다. 그의 글에서는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와 같은 동세대 프랑크푸르트학파 학자들의 글이 가진 건조함이거나 논리적 견고함이 느껴지질 않는다. 벤야민의 에세이는 주관적 감성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으며, 곳곳에서 낯선 이미지들이 돌출한다. 대학 시절 그의 ‘역사철학테제’를 읽으며 내 지적 능력의 빈곤을 자책하고 한탄했었다.

벤야민의 시적인 에세이가 그렇듯이 이 책에 쓰인 그의 삶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다.(라고 나는 쓰고 싶다.) 부풀어 오른 곱슬머리, 동그란 안경, 투명하게 빛나지만 저편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한 눈, 그리고 그 눈에 스민 멜랑콜리, 작은 키에 볼록 튀어나온 배. 외모에서부터 섬약한 지식인의 아우라를 잔뜩 풍기는 그는 국경을 넘는 와중에도 괴테를 읽는 숙명적 독서가이며, 사랑고백을 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말이 진부한 클리쉐(cliche)가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인물이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그의 우유부단함, 수집한 소묘 한점을 팔자는 제안에 “차라리 자살을 하고 말지”라고 대답하는 부르주아적 예술취미, 그의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적 전망과 양립할 수 없는 소심함과 유약함, 맑스주의 변증법과 양립할 수 없는 카발라주의에 대한 심취, 제인 오스틴 소설에서나 볼 법한 깍듯한 예의와 완곡어법. 파리니의 글솜씨는 이런 벤야민의 면모를 보여주는 데서 가장 밝게 빛난다.

비극적이라 이름 붙이기에는 너무나 찌질하고 찌질한 그의 연애사는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사랑 없이 결혼한 아내 도라, 사랑했으나 한번도 행복한 충만에 이르지 못한 아샤 라시스와의 연애, 그리고 또 한명의 정부이자 연인 율라 콘. 어느 누구와도 성공적인 연애를 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섹스마저도 그러했다. 이 소설에서 아샤 라시스는 모스크바 역에서 벤야민을 떠나보내고 나서 “참으로 지긋지긋한 남자”라고 말한다. 그 지긋지긋함은 그러나, 권태와 역겨움의 토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라는 소리로 읽힌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똑같은 경험을 거듭거듭 반복할 것이다”라는 벤야민이 인용한 니체의 말대로, 그의 참담한 연애는 벤야민 자신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니, 그에게는 찌질한 연애가 운명이라고 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뛰어난 철학적 정신을 소유한 지성인들이라 할지라도 사랑이라는 문제에 도달하면 모두들 서로가 서로에게 저능아처럼 말한다.” 그가 사랑에 저능아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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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6 1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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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6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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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최종철 옮김, 민음사)를 다시 읽었다. 이 비극의 출발은 물론 ‘사랑과 질투’이겠지만, 오셀로가 검은 피부의 ‘무어인’이라는 점에서 이야기는 조금 더 복잡한 맥락에서 읽힌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또 하나의 장벽으로 가로놓인 ‘인종’이라는 요소는 탈식민주의적 해석을 가능케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김종엽이 이승연의 위안부 누드 파문에 대해 “그것을 바라보고 누리는 주체의 자리는 남성 일반의 자리가 아니라 일본 남성의 자리가 된다”고 했던 경우다. 남성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일본 남성에게 그 자리를 내줘야 하는 ‘한국 남성’들의 분노는 더 격렬하다. ‘지배자’로서 향유의 자리를 빼앗긴 자의 ‘분노’는 원래 더 큰 법이지 않겠는가.

이야고는 데스데모나의 아버지 브라반시오에게 “늙고 검은 숫양이 당신의 흰 암양을 올라타요”라며 분노를 부추긴다. 그 무어인은 “음탕하고 저속한 이방인”이다. 자신의 아름다운 딸이 늙고 검은 숫양과 같은 유색인과 사랑에 빠지는 건 “돌팔이가 파는 부적과 약물로 정신을 잃고 납치”됐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성을 가진 ‘베니스인’들 사이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데스데모나를 짝사랑하는 로데리고가 이야고의 간계를 빌려 오셀로를 함정에 빠뜨리게 하는 원동력도 질투 이상의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백인에게 흑인은 성적 경쟁자로 인식되나 성적으로 압도할 수 없다는 무기력의 대상이다. 그 무기력이 비극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보면, 이들 사내들을 눈멀게 하는 것은 ‘자리’에 대한 심리적 고뇌와 쟁투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것을 꿈꾸거나(로데리고), 자신의 자리를 의심하거나(오셀로), 본의 아니게 남의 자리에 앉았다고 오해를 받거나(카시오)이다. 오셀로의 자리에 대해서는 인종적 편견과 그로 말미암은 집단적 배타성이 똬리를 틀고 앉아 그가 제대로 앉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 인종주의를 벗겨내는 것은 다름 아닌 여성, 데스데모나다. “아버님은 제 모든 도리의 주인이시고/지금까지 전 아버님의 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제 남편이 있습니다./그래서 저는 어머님이 외할아버지 앞에서/아버님을 택했을 때 보여주었던 도리/바로 그만큼이 제 주인 무어인의 몫이라고/주장하고 밝히겠습니다. 그러니, 오셀로의 ‘자리’는 원래 없었던 것, 그를 사랑하는 여인이 만들어준 것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성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오셀로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준다. 오셀로가 사랑과 분노라는 감정의 양 극단을 오고가는 것에 비해, 데스데모나는 연인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순간에도 그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순정한 여인이다. 이야고의 ‘지옥의 신학’을 완성하는 것은 그 순정한 사랑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오셀로이다. 오셀로는 데스데모나의 사랑의 코드를 일면적으로 이해한다. “그녀는 제게 고마워했고 이르기를/그녀를 사랑하는 제 친구가 있다면/ 제 얘기를 하도록 가르쳐주는 것만으로/그녀에게 구애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그녀는 제가 겪은 위험 때문에 절 사랑했고/전 그녀가 그 위험을 동정했기 때문에/그녀를 사랑한 것입니다./이것이 제가 쓴 유일한 마법입니다.”(1막3장)

그의 사랑에 대한 독법은 이렇듯 여인이 자신의 무훈담 때문에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할 만큼 지리멸렬하다. ‘위험’ 때문에 사랑하고, ‘동정’ 때문에 사랑에 빠진다? 오셀로의 사랑에 대한 파악은 ‘허구가 만들어낸 산물로서의 사랑’이지만, 데스데모나의 그것은 ‘규범’과 ‘운명’을 넘어서는 실재적인 것이며, ‘가슴’과 ‘마음’, 그리고 몸을 통한 ‘사랑의 의식’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베니스의 인종주의를 넘어서는 ‘목숨을 건 도약’을 필요로 하는, 운명의 여신을 거스르는 고독한 결단의 행위다.

“전 이 무어인을 사랑했고, 함께 살 것임을/제가 철저하게 규범을 깨뜨리고/운명의 여신을 조롱한 사실로/온세상에 알립니다. 제 가슴은 주인님께/최대의 기쁨을 드릴만큼 정복되었습니다./전 오셀로의 얼굴을 그의 마음에서 보았고/그의 명성과 그의 용맹스런 자질에 제 영혼과 운명을 헌납하였습니다/그런데, 의원님들, 그는 전장으로 나가고/저는 한가로운 나방처럼 뒤처져 남는다면/전 그와 나눌 사랑의 의식을 빼앗기고/뼈아픈 그의 부재로 어려운 시간을/견뎌야할 것입니다. 함께 가게 해주십시오.”(1막 3장)

“... 내가 사고과정이나 실제 행동에서/내 의지로 그이의 사랑을 어긴 적이 있다면,/내 눈이나 귀 또는 다른 어떤 감각이/다른 어떤 모습에서 즐거움을 취했다면/그리고 (그이가 날 떨쳐버리고 이혼하여/거지 신세가 되더라도) 언제나 그이를/이전에도 앞으로도 깊이 사랑 않는다면/나에겐 아무런 안락도 없으리라/무정함은 커다란 타격이 될 수 있고/그이의 무정함은 내 생명을 앗아갈 수 있지만/내 사랑은 절대로 더럽히지 못할 거야.”(4막2장)

데스데모나에 대한 오셀로의 일면적 이해는 ‘손수건’ 하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로 인해 죽음과 살인에 이르게 된다. 손수건이 “예언자의 광기”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하는 오셀로는 그것을 자신의 자리를 상징하고 대변하는 물건으로 받아들인다. 애시당초 마음을 읽지 못했으므로 데스데모나의 운명적 결단과 두 사람이 가진 사랑의 결속력을 손수건 하나에 가탁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급기야 사랑하는 아내의 목을 졸라 살해하는 대형참사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세익스피어의 <오셀로>는 아름다운 베니스여인과 결혼한 북아프리카 출신 흑인의 사랑과 질투이야기가 아니라, 남성성의 폭력을 드러내는 이야기로 읽어야 마땅할 일이다. 한결같고 변함없는 사랑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 홀로 저 혼자 도깨비춤을 추다 자신도 연인도 망쳐버리는 폭력성 말이다. 스스로 초래한 일이니 “비참한 내 운명”은 데스데모나의 것이 아니라, 오셀로의 것이다.

“누가 자기 운명을 다스릴 있답니까?/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군요. 하지만 제가/무기를 가졌다고 겁내진 마십시오./여기가 제 여정의 끝이고 목표이며/가장 먼 항해의 바로 그 표적이랍니다. /움츠리며 물러서요? 쓸데없는 두려움일 뿐입니다./오셀로의 가슴을 갈대로 찔러봐요./그는 물러갑니다. 오셀로는 어디로 가야지요?/그런데 넌 지금 어떤 모습이냐? 오 불운한 것,/ 네 속옷처럼 창백하구나. 이런 모습 때문에/최후의 심판 날에 우리 둘이 만난다면/내 영혼은 천국에서 곤두박질칠 것이고/악마들이 가로채갈 것이다. 네 정절만큼이나/차디찬 내 님아. 오 저주받을 노예 놈!/악마들아 나를 쫓아내거라, /이 거룩한 모습을 간직하지 못하도록,/나를 바람속에 팽개치고 유황불에 태우고/불타는 심연 속에 깊이깊이 처 넣어라!/오 데스데모나, 데스데모나가 죽었다./ 오 오 오.”  

 

과연 그는 ‘불타는 심연’ 속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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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 자본주의 - 금융위기가 왜 발생했으며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스베르너 진 지음, 이헌대 옮김 / 에코피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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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인 노력없이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실감하기는 쉽지 않다. 시장에 넘쳐나는 중국산 물품을 보거나 홍어집에 우리와 거의 대척점에 가까이 가 있는 칠레산이 넘치더라도, 이런 물품들이 경유해왔을 멀고 먼 길을 쉽게 떠올리지는 못한다. 현실의 변화에 둔감한 탓이다. 하물며 2008년부터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더더욱 내 현실적 삶의 실감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했을 무렵에는 마침 뉴욕을 여행하고 있었는데, 거리에 나뒹구는 신문에 큼지막한 글씨로 ‘bailout'이라 쓰여져 있었어도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이 어쩌면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충격을 가장 덜 받는 곳이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카지노 자본주의>(한스베르너 진, 에코피아)를 읽게 된 것은 순전히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금융위기에 대한 지젝의 책을 사 놓고도 몇 달 째 2장 언저리에 머물고 있는 마당에 익숙하지 않는 금융용어가 무수히 튀어나오는 책을 자발적으로 구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저 비정규직과 저임금 노동자들, 혹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들’은 결국 따지고 보면 글로벌라이제이션이 낳은 부정적 유산들일 것이다. 금융권의 억대 연봉자들은 그들의 고액 연봉이 자신들의 능력에 따른 것인 줄 알지만, 기실 그것은 글로벌라이제이션이 가져온 과실이 불균등하게 분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이 내 둔감함에 약간의 충격을 가져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월러스틴은 글로벌라이제이션이 본격화되지 않았던,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 근대 이전의 사회가 훨씬 더 행복하고 풍요로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아나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근대 사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다는 것이다. 전세계의 곡물생산량은 차고 넘치는 데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는 부조리한 현실은 글로벌라이제이션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세계시장’을 언급했을 때 이미 그런 징조는 있었다. 한스베르너 진이 묘사하고 있는 글로벌 금융네트워크는 아슬아슬하고 부서지기 쉬운 유리로 만들어진 그물망처럼 보인다. 특정 국가의 재정위기는 금새 이웃나라로, 역내 경제권 전체로, 급기야 전세계로 급속히 확산된다. 엊그제 보도된 PIGS(포르투갈,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의 재정위기는 이미 시한폭탄인 듯 하다.

2008년 금융위기를 1930년대 대공황과 비교하는 글들이 쏟아져 나온 듯한데, 저자는 그때의 위기가 역사상 가장 심각했던 위기라고 평가한다. 1929년 10월 24일의 ‘검은 목요일’에는 주가가 10.1% 하락했지만 2008년 10월 10일 ‘검은 금요일’에는 전세계에서 주가가 18.2% 하락했다. 백 개 이상의 미국, 영국 금융기관이 사라지거나 국유화됐다. 최악의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고 있는 지금, 세계 최대의 수출국가는 독일에서 중국이 됐고, 이 거대한 나라는 “위기에서의 거대한 승리자”로 떠올랐다. G8에서 G20으로 서둘러 국제공조가 시작된 것은 위기로 인한 전세계 경제의 파국을 막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던 것이다.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위기, 미중간의 환율전쟁 등 여전히 불안정성은 남아 있는 듯하다.

저자가 분석하는 금융위기의 전개과정은, 내 둔한 이해력으로는, 상식적 해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위기의 출발지는 미국이다. 주택담보대출에 근거한 분에 넘치는 미국인들의 생활, 자본수입에 의존하는 미국의 재정위기, 끊임없이 파생금융상품을 만들어내는 월가와 미국의 투자은행들. 부실대출 채권이라는 약한 고리가 끊어지면서 와르르 무너졌고, 이것의 충격파는 전세계로 확산되었고, 그중 금융자본에 대한 개방성이 가장 컸던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영국 같은 나라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한스베르너 진은 은행도산 과정, 도박장이 된 메인스트리트,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금융자본에 대한 규제를 다 풀어버리고 감독기능도 수행하지 못했던 정부부문의 정책적 실패 과정 등을 통계와 수치와 나로서는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금융용어들로 풀어낸다. 망해가는 나라들의 목록의 상위에는 일본,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그리스, 벨기에, 미국, 캐나다, 헝가리, 포르투갈, 프랑스가 있고, 하위에는 에스토니아, 룩셈부르크, 부가리아, 호주, 루마니아, 뉴질랜드, 리투아니아, 한국이 있다. 우리가 비교적 안정적인 국가에 속해 있다는 것이 그래도 위안이라고 할까.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은 미국의 잠재적 위협이다. 그러나 디플레이션은 세계의 다른 나라들, 특히 유럽에게 실질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미국인은 이탈리아로, 유럽인은 일본으로 여행을 가게 될 것이다.”

저자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독일식 ‘질서 자유주의’인데, 이는 정부가 게임 규칙을 정해야만 시장이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디제이의 경제정책을 설명할 때 등장했던 이 용어를 나는  거의 10여년 만에 다시 접하게 됐다. 이른바 디제이노믹스의 요체는 “시장을 창출하고, 시장에 질서를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근대경제의 핵심으로서) 시장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근대적 과제’로 이해되었고, 시장을 넘어서는 탈근대적 과제로 이해되었다. 창비식으로 말해, 그것은 근대와 탈근대의 이중과제로 인식되었던 것이다.(이것이 오독인지 아닌지 나는 판단할 길이 없다.) 그런데, 금융위기를 겪고 난 뒤에 다시 “시장의 자율규제와 같은 것은 없다. 국가가 정한 확고한 규제의 틀 내에서의 자율질서만이 존재할 따름이다”와 같은 진단이 등장하다니, 격세지감이다.

이 책을 읽는 과정은 저물어가는 미국의 경제적 패권, 그리고 일본의 경제적 몰락을 수치와 통계로 확인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프레시안에 실린 월러스틴의 인터뷰를 보아도 미국의 몰락은 불가피한 것 같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01116114742&Section=05) 서울 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오바마가 여기저기에서 돌멩이를 맞고 쓸쓸히 빈손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봐도 그렇다. 이런 위기의 근본에는 저자가 말하는  “이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를 초래하는 부실한 금융시스템이 도사리고 있다. 잘 나갈 때 돈은 금융업자들이 챙기고, 망할 때는 국가와 납세자들이 부담을 져야 하는 이 부조리한 ‘욕망과 책임의 불일치’의 상황.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풍경 같지 않은가. 전성인 교수의 말을 빌자면, “재주는 곰이 넘고 실속은 왕서방이 챙기는 구조” 말이다. 조선일보는 ‘참 나쁜 신문’이지만, 송희영 칼럼은 가끔이라도 이 신문을 들춰보게 만든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0/01/201010010182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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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더글러스의 ‘오염’에 관한 설명은 흥미롭다. 그녀는 “깨끗하지 못한 것은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은 것”이라 말한다. 쓰레기가 쓰레기장이나 휴지통에 있을 때는 더럽지 않다. 하지만, 쓰레기가 식탁 위에 놓여 있거나 침대 위에 있다면 그것은 더러운 것이 된다. 물론, 그녀의 관심은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을 가르는 분류체계에 있을 것이다. 오염에 대한 그녀의 설명을 좀더 확대하자면 맥락을 떠난 말, 궤도를 이탈한 채 진행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내게 그것은 많은 경우 ‘자기만의 방’에 갇혀 몰입해 있을 순간에 벌어진다. 몰입은 상황과 조건, 맥락과 역사를 배제한 곳에서 시작된다.

나는 땅에 몸이 닿는 부분이 가장 적을 때 몰입의 강도가 가장 세진다는 터무니없는 속설을 근 20여 년째 믿고 있다. 이런 근거 없는 얘기를 어느 책에서 읽었는 데, 그게 어느 책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것은 시인 천상병이 두꺼운 ‘서양문화사’의 책장을 넘기면서 마산거리를 걸어갔다는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이 대목을 읽었을 때 천상병은 예의 그 속설을 믿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안락한 책상을 떠나 ‘걸어가면서’ 책을 읽었을 것이고, 읽고 난 뒤에도 생생한 기억력으로 르네상스와 빙켈만을 줄줄이 떠들어 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걷는 것보다야 뛰는 게 땅에 닿는 몸의 부위와 시간이 가장 적고 짧겠지만, 인간이 아직 뛰면서 책을 읽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니 읽으며 걷기가 아직은 최선이다.

<발터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제이 파리니, 솔)을 버스 정류장에 서서,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키들거리며 읽었다. 퇴근 시간의 버스는 복잡하기 마련인데, 내 두 발바닥의 면적만큼 땅에 닿았으므로, 그것은 낮 동안 두 발바닥과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때보다야 훨씬 적게 땅에 닿은 것이므로, 당연 몰입의 강도는 더 세질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벤야민의 전기소설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그의 절친이었던 게르숌 솔렘의 회고로부터 시작된다.  <한 우정의 역사>(게르숌 솔렘, 한길사)에서 그가 보여준 벤야민에 대한 애정과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탄식을 기억한다. 그는 내가 결코 좋아하지 않을 시오니스트이긴 하나 벤야민에 대해서만큼은 그의 기억과 기록을 신뢰해도 좋을 것이었다.

그의 기억을 빌어 작가가 묘사하고 있는 벤야민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우유부단함”으로 가득한 인물이다. 가령 그것은 식당에 가서도 몇 번이나 주문을 번복하다가 결국은 처음 주문한 생선을 먹거나, 음식이 왔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이 주문한 음식을 부럽게 쳐다보는 버릇에서 절정을 이룬다. 결국 보다 못해 “좋아, 발터 나랑 음식을 바꾸세. 내 접시를 자네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상황에선 식사를 못하겠어”하고 음식을 바꾸자마자, 벤야민은 한숨을 쉬며 “내가 주문을 잘 한거야. 그렇지? 자네 음식은 맛이 없군”이라고 말한다. 성질 급한 사람이라면 한대 쥐어박았을 우유부단과 머뭇거림의 극치다.

숄렘은 벤야민이 여자문제에 관해서 우유부단함의 극치를 보였다고 회고한다. 그는 “벤야민은 상대여성이 다른 남자와 살고 있거나 그에게 전혀 매력을 느끼지 않는 경우에만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니, 아샤 라시스에 대한 찌질한 구애의 맥락도 그의 본성에 비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지극히 벤야민스럽다. 그 대목에 밑줄을 긋는 데 버스가 흔들리면서 제대로 그어지지 않는다. 이 대목을 읽으며 혼자서 킬킬대는 내 모습을 옆자리의 여학생이 힐끗 봤던 것도 같다. 이런 벤야민이기 때문에 그의 삶에는 어찌할 수 없는 비극성이 간직되어 있었고, 종내에는 국경수비대가 온다는 낭설에 괴로워하다 자살을 했을 것이다. 나치의 예고된 공격으로 불안해진 파리를 빨리 떠나야 하는데도 파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차마 떠나지 못하고, 빨리 파리를 떠나라고 재촉하면서도 ‘수표’를 보내오지 않는 미국의 호르크하이머를 원망하고 있는 벤야민. 이 자가 가진 구제불능의 우유부단함과 섬약함이 어찌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갑작스럽게 솟아나는 벤야민에 대한 애정, 이것은 혼자만 간직하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퇴근 버스 안에서 이런 대목과 조우하는 순간은 유쾌한 경험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기안의 맥락 안에서의 움직임일 뿐이다. 책과 책속의 인물과 그것이 연쇄적으로 일으키는 읽기의 역사적 맥락은 다른 자리에 놓이게 되면, 애초에 간직한 ‘말끔한 유쾌’를 잃어버리게 마련이다. 유쾌함을 나누고자 하는 욕망은 다른 맥락과 자리에서는 추악한 것이 되거나, 때로는 폭력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책의 맥락과 현실의 맥락을 혼동하고, 아니 때로는 전자가 후자를 구축하는 만용이 벌어지기도 한다. 자기 몰입이 빚어내는 비극이자 몰입이 결과할 것을 망각한 자리에서 벌어지는 추태이기도 하다. 그것은 더글러스가 말한 대로 식탁위에 놓인 쓰레기다. 몰입을 경계할 일, 타자를 배제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심리적 집중은 질병 수준이다.

베르그송은 ‘웃음’에 관한 그의 책에서 웃음이 유발되는 순간은 적절한 기대를 배반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슬랩스틱 코미디에서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은 멀쩡하게 잘 걸어가던 사람이 휘청거리며 꽈당 넘어질 때 같은 경우다. 정상적인 맥락과 기대를 벗어나 의외의 순간이 연출될 때 웃음이 터진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읽을 때 웃음이 가진 폭력성을 떠올렸었다. 푸코의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런 웃음은 정상적 맥락을 단일한 회로로 가진 자들의 폭력적 감정이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수의 회로가 공존하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자기동일성이 타자에 대해 낳는 폭력적 결과가 웃음인 것이다. 그것이 폭력화되지 않으려면, 몽상의 거처는 자기안의 방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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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9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송상기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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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아우라>(송상기 옮김, 민음사)를 읽다. 한나절이면 충분히 읽을 만큼 얇은 ‘중편소설’이다. 푸엔테스 자신의 작가노트와 역자 해설을 빼면 사실 단편 정도 분량 밖에 되지 않는다. 본문 62쪽 분량의 소설을 단행본으로 묶은 편집자의 ‘만용’(?)이 조금 화가 날 정도였다. 하지만, 낯선 2인칭 시점과 어두운 고딕소설적 분위기 때문에 책장은 손쉽게 넘어가질 않았다. 푸엔테스의 이름이야 많이 들어봤지만 정작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이번이 처음.

이 소설의 첫 장에는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의 다음과 같은 말이 제사로 붙어 있다. “남자는 사냥을 하고 투쟁을 한다. 여자는 계략을 짜고 꿈을 꾼다. 그녀는 환상의 어머니이자 신들의 어머니다. 그녀에겐 또 다른 눈이 있고, 욕망과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무한정 비행할 수 있는 날개가 있다. 신은 남자와 같아서 여성의 품속에서 태어나고 죽는다.” 남자의 거처는 사냥과 투쟁이라는 생활세계인 반면, 여성은 환상과 욕망, 상상력의 세계에 산다, 라는 얘기일 것이다. 이 말의 정치성은 차치하더라도, 곧이어 펼쳐질 이 소설의 제사로서는 적절한 인용이다.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다. 젊은 역사학도인 펠리페 몬테로는 우익 군인이었던 요란테 장군의 일대기를 편집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콘수엘로 부인의 저택에서 일하게 된다. 거기서 그는 늙은 콘수엘로 부인과 그녀의 조카딸인 아우라를 만나게 되는데, 당연하게도(!) 젊고 어여쁜 아우라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지만, 알고 보니 그녀는 콘수엘로 부인의 또 다른 분신, 젊은 날의 그녀의 환생이었던 것. 그러니까 펠리페는 이 어둡고 음습한 집에 들어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뒤에야 그 둘이 동일한 인물임을 깨닫는다. 아우라는 콘수엘로의 욕망의 판타지가 만들어낸 그녀의 영원한 청춘, 요란테 장군과의 애절한 사랑을 영원히 현재화 하기 위해 불러낸 여인이었던 것.

“얼굴에 키스해 줘요, 얼굴에만.”
네 곁에 기댄 얼굴에 입술을 갖다 대고, 다시 한번 아우라의 긴 머리카락을 애무할 거야. 그녀의 날카로운 불평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약한 여인의 어깨를 매몰차게 잡을 거야. 그녀가 걸친 비단 가운을 잡아 채고 그녀를 안아, 네 품에서 작고 벌거벗은, 힘없이 스러질 것 같은 그녀를 느껴. 그녀의 신음 섞인 저항과 무기력한 울음도 무시하고 아무런 생각도 경황도 없이 그녀 얼굴에 입을 맞출 거야. 그녀의 처진 젖가슴을 만지는데, 한줄기 빛이 아스라이 들어오자, 너는 깜짝 놀라 그만 얼굴을 떼고, 달빛이 새어드는 벽의 틈을 찾아. 생쥐가 갉아 먹은 눈 모양 틈에서 은빛이 새어 들어와 아우라의 백발과 창백하고 메말라 양파 껍질처럼 푸석푸석하고 삶은 살구마냥 주름진 얼굴을 비춰. 이제까지 키스해온 살집없는 입술과 네 앞에 드러난 치아 없는 잇몸에서 너는 입술을 뗄거야. 달빛에 비친 늙은 콘수엘로 부인의 흐느적거리고, 주름지고, 작고, 오래된 나체를 보지. 네가 만져주고, 사랑해주고, 또한 돌아와 줘서 그녀는 가볍게 전율해....
너는 눈을 뜬 채로 콘수엘로의 은빛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을 거야. 달이 구름에 가려 앞이 안보이고 두 사람 역시 어둠 속에 가려 젊은 시절의 추억. 되살아난 기억의 어느 순간으로 대기중에 이끌려 갈 때 그녀는 다시 너를 끌어안을 거야.
“돌아올 거예요, 펠리페. 우리 함께 그녀를 데려와요. 내가 기운을 차리게 놔두세요. 그러면 그녀를 다시 돌아오게 할 거예요.....”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듯 돌연한 반전과 두 사람의 포옹으로 끝난다. 콘수엘로가 사랑의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그녀의 연인이었던 요란테 장군의 일대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과 그녀의 분신인 아우라와 펠리페의 사랑을 통해서 과거의 사랑을 반복하는 일이다. 그러니, 여기서 콘수엘로-아우라와 요란테-펠리페는 다르지만 동일한 커플이다. 두 커플은 스러져간 과거의 사랑을 반복함으로써, 그 사랑의 순간을 영원한 현재에 가두려는 콘수엘로의 욕망을 실현한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는 달빛 속에서 여자를 다시 껴안는다. 달이 여성을 상징한다는 오래된 은유를 기억한다면, 결국 남자는 여성의 세계 속에서, 그녀가 만든 상상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녀가 만든 영원한 현재에 머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장님처럼 나 이제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지만, 그 집은 영원한 사랑이 머무는 곳이다.

펠리페가 정리하고 있는 요란테 장군의 일대기는 “‘날 잡지 말아요. 난 나의 청춘을 향해 가고 있고, 청춘은 내게 오고 있어요. 벌써 들어왔고, 정원에 있고, 이미 도착했어요.’ .... 콘수엘로, 불쌍한 콘수엘로.... 콘수엘로, 악마도 천사였지, 한때는...”으로 끝난다. 두 사람은 사랑했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었고(미래를 기약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녀는 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는 미신으로 마약을 찾아 헤맨다. 그녀에게 돌아갈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은 청춘이자 그 청춘을 반복할 두 사람만의 아이. 그런데, 그 아이는 상상과 판타지에서 잉태된 여자, 바로 아우라다. 콘수엘로의 판타지이므로 그녀는 바로 자신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여성이 가진 섬뜩한 사랑의 욕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포크너의 단편 <에밀리에게 장미를, A rose for Emily>를 연상시킨다. 한 여자의 집요하고도 도저한 욕망을 보여주는 이 단편은 나에게 소설 말미에 등장하는 ‘철회색(iron-gray) 머리카락’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사랑하는 남자를 독살시켜 그와 함께 하기로 한 신혼방에 눕혀 놓은 채 74세로 죽을 때까지 함께 시체와 보내는 외로운 여자. 자신의 사랑을 어두운 신혼방의 시체로 가둬놓은 채, 죽어서야 그 비밀의 욕망이 드러나는 이 질기고 모진 사랑. 철회색 머리카락은 사랑의 한 순간을 영원히 지속하려는 욕망을 시간의 풍화작용을 견뎌내는 ‘금속성’의 이미지로 보여준다. 10여년 전에 읽은 단편임에도 그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이미지는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런데, 포크너와 달리 푸엔테스는 동일한 사랑의 욕망에 판타지의 옷을 입힌다. 포크너에게 철회색 머리카락이 등장한다면, 푸엔테스는 사실과도 같은 환영을 통해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포크너의 리얼리즘과 푸엔테스의 반리얼리즘인 셈인데, 후자의 판타지는 영원한 사랑을 다른 방식으로 ‘리얼’하게 재현한다. 지시대상은 여성의 욕망이지만, 그것을 말하는 방식, 그것을 재현하는 방식의 차이다. 푸엔테스는 뒤에 붙은 작가노트에서 이 소설의 문학적 기원으로서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와 그 영화의 원작인 일본 설화 <오토기보코>, 이 설화의 또다른 기원인 중국 <전등신화>의 ‘애경전’을 거론한다. 전등신화가 김시습의 <금오신화>의 기원임을 짐작한다면, 김시습과 푸엔테스는 동일한 젖줄을 대고 있는 셈.

푸엔테스가 실제적 기원으로서 거론하고 있는 사람은 1961년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한 소녀. 그리고 마리아 칼라스다. 라 트라비아타의 마리아 칼라스는 죽기 직전의 오페라에서 “한 여성의 목소리로 젊음과 노년, 삶과 죽음을 분리할 수 없고, 젊음, 노년, 삶, 죽음이라는 이 네 가지가 서로를 부른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디바가 부르는 노래가 열정과 감동으로, 시간이 사라진 영원한 지복의 순간을 담고 있듯이, 사랑의 한순간은 시간이 정지돼 있는 것. 시간을 가둬놓거나(에밀리), 시간이 부재한 판타지이거나(아우라) 간에  사랑의 순간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그나저나, 무섭고 섬뜩하지 않은가. 시간을 지배하려는 이 여자들의 욕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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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2010-11-18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모든사이님!^^ 알찬 서재 잘 구경하고갑니다
저는 이음출판사에서 나왔어요~
저희가 이번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를 연일 차지하여 화제가 되고있는 도서
<모터사이클 필로소피> 한국판 출판 기념으로 서평단을 모집하고있거든요^^
책을 사랑하시는 모든사이님께서 참여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리플 남기고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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