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판된 <사랑의 묘약>(문예출판사)과 최근 나온 <엘제아씨>(문학과 지성사) 두 책 모두에 실린 슈니츨러의 단편 <내가 만났던 중국인>은 총살 당하기 직전에도 책을 읽고 있는 중국인이 등장한다. 이 중국인은 의화단의 난에 연루된 인물로 3시간 뒤면 총살당할 처지다.  독일군 장교인 주인공은 그를 기이하게 바라본다. 도대체 죽음을 앞두고 천연덕스럽게, 그리고 태평스럽게 책이나 읽고 있다니, 저런 사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그에게 왜 책을 읽고 있냐고 묻자 세상일이란 어찌될지 모르니 그저 책이나 보는 수밖에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 중국인에게 감동한 독일군 장교는 상관에게 부탁해 그가 석방되도록 한다. 세상일이란 알 수 없는 법, 어디서 흘러오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법 아니겠는가.

말기암 환자 김현의 병상을 오고 갔던 이인성은 ‘죽음 앞에서 낙타다리 씹기’를 회고하고 있는데, 그런 죽음 직전의 ‘몽상’보다, 책을 읽을 수 있는 평정심을 얻을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과연, 세상일이란 알 수 없으며, 내 뜻대로 되지도 않고 느닷없이 축복과 벼락이 동시에 들이 닥치기도 하는 것이다. 마음의 망명지로서 책은 차라리 안전하고 오히려 쾌적하다. 거기가 환멸의 거처이며 패배의 귀착지일지언정, 마음을 고문할 주리와 형틀은 없으리니. 새된 목소리로 반경 100미터 이내에서 지저귀는 소리들은 제껴두고, 그저 책이나 보자. 세상일이란 어찌될지 알 수 없는 법이니, 알려는 시도도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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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qui 2010-12-17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러한 태도는 존 그레이식의 관상주의라고 불릴 수도 있을것 같군요...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에서 달린 리뷰를 보고 와봤는데 내공이 장난아니십니다 감탄하고 갑니다. 게다가 사라 워터스를 보는 남자분은 별로 못봤거든요ㅎ 혹시 언론사에 몸담그고 계시나요?

모든사이 2010-12-17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문 감사드립니다. 저는 조금 무료한(?) 직장에 다니는 회사원입니다. 최근에야 알라딘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사라워터스는 누군가의 소개로 알게 되어 읽었는데, 제 19세기 감성과 잘 맞아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님 아이디는 예의 그 '블랑키'이겠네요?

Blanqui 2010-12-17 15:0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예의 그 블랑키가 맞습니다ㅎ 저는 사실 사라 워터스를 영드로 먼저 접했지요. 영국 시대물 드라마가 또 참 재미있어요. 특히 빅토리아 시기의 문학작품을 드라마로 많이 제작하는데 디킨즈의 리틀 도릿이나 황폐한 집, 엘리자베스 개스캘의 '남과 북' 등 많은 작품들이 이미 영상물로 재탄생되었더라구요 이미 보셨을 것 같지만ㅎ

모든사이 2010-12-17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저도 사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를 영드로 보고 나서, 나중에야 <벨벳 애무하기>를 읽었는데, 책 읽고 나서 다시 그 드라마를 보고 나서야 작가가 사라워터스라는 걸 그때에야 알게 됐지요. 사라 워터스 열성팬 한명이 추천하는 바람에 읽고 알게 됐다는... 블랑키가 맞다면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도 좋아하시겠군요.. ㅎㅎ
 
꿈의 노벨레 (구) 문지 스펙트럼 9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백종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가고 있다. 남편은 단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 못했다며 죽음의 천사에게 그녀가 ‘한 시간만 더’ 살게 해 달라고 애원한다. 천사는 그녀에게 한 시간 동안의 생명을 빌려줄 사람을 찾아 나선다. 첫 번째 사람은 평생 “죽음이 인간에게 허용된 가장 소망스러운 상태”라고 떠들어온 철학자. 죽음이 최선이라고 말해왔던 이 철학자는 그러나, 한 시간 동안의 생명을 떼어 주기를 거절한다. 병이 들어 곧 죽어갈 남자도, 백살이 된 노파도, 곧 교수형을 당할 사형수도, 애인과 함께 죽고 싶다던 여자도 모두 ‘한 시간’을 거부한다. 모든 이들로부터 한 시간 동안의 생명을 빌려주기를 거절당한 죽음의 천사는 오직 한 사람, 맨 처음의 사내 곧, 남편만이 한 시간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사내는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내와 함께 죽겠노라고 맹세한다.  하지만 죽음의 천사는 그의 소망을 배반하고 사내의 생명을 데려가지 않는다. 사내는 “당신은 왜 나를 속였습니까?”라고 항변한다. 그러자 죽음의 천사는, “너는 네 입으로 한 말이라고 해서, 그게 너의 진심이라고 믿었단 말이냐, 네가 빠져 있는 모든 사랑, 네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 이런 것을 단숨에 꿰뚫어서, 그 뒤편에 숨어 있는 네 영혼의 깊고 깊은 곳, 너의 진정한 소망이 숨겨져 있는 그곳을 들여다보았다고 생각했단 말이냐, 아니 그런 능력이 인간인 너에게 허용되어 있다고 믿었단 말이냐.”


<사랑의 묘약>, 아쉽게도 절판이군.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소설집 <사랑의 묘약>에 수록된 ‘한 시간만 더’는 이렇듯 무의식이 어떻게 의식을 배반하는지를 보여주는 깔끔한 우화다. 프로이드가 왜 슈니츨러의 소설들을 좋아하고 높이 평가했는지를 짐작케 해주는 소설이다. 프로이드는 슈니츨러에게 “저는 평소 작가들을 찬미해왔는데, 이젠 그들을 시샘하지 않을 수 없군요”라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슈니츨러는 몰락해가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비엔나에서 활동한 세기말의 천재들 중 하나. (슈니츨러를 비롯해 프로이드, 코코슈카, 클림트, 쇤베르크 등으로 대표되는 세기말 비엔나의 천재들의 활약상은 칼 쇼르스케의 <비엔나, 천재들의 붉은 노을>(생각의 나무)에서 현저하다. 지난 여름에 읽기 시작한 이 책은 2장 링슈트라세와 도시적 모더니즘에 멈춰 있으니, 이 책을 선물해준 모씨에게 송구스럽기 그지없는 일) 지난 한 주 동안 슈니츨러의 소설 <꿈의 노벨레>(문학과 지성사), <사랑의 묘약>(문예출판사)을 읽으면서 세기말 비엔나의 어두운 밤거리를 홀로 산책하며 ‘말 속에 숨은 말’을 더듬었다. 


<꿈의 노벨레>는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나온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eyes wide shut>의 원작소설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서점에 갔을 때 주머니 사정은 좋지 않은데 그냥 나오기가 섭섭할 때 곧잘 손에 드는 시리즈가 문학과 지성사의 ‘문지스펙트럼’이다. 이 시리즈는 적당한 가격과 예쁜 장정, 그리고 컬렉션의 질도 괜찮다. 이중 외국소설 시리즈는 인문서의 레퍼런스용으로 선택된 것으로 보이는데, 에드가 알란 포의 <도둑맞은 편지>는 아마 라캉의 <에크리> 때문에 포함되었을 것이고, 발자크의 <사라진느>는 롤랑 바르트의 <S/Z> 때문에 포함된 것 같다. 슈니츨러는 아마도 프로이드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물론 모든 목록이 그러하진 않겠지만 이런 짐작이 맞다면 지극히 문지스러운(?) 선택인 셈이다. 하여간,<꿈의 노벨레>는 세기말 비엔나의 밤거리, 검은 옷자락과 함께 선명히 대비되는 빨간색, 가면무도회, 경쾌하고 밝은 왈츠, 그리고 인간의 어두운 무의식, 커피향이 풍기는 안락하고도 음울한 카페 등의 소품들로 인해 마치 한편의 느와르(noir)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소설은 비엔나의 한 부르주아 가정의 거실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린 딸은 동화책을 읽고 있고, 부모는 흐뭇한 미소를 띠고 대견한 듯 딸을 바라보는 거실. 동화책 읽기를 마친 딸은 보모의 손에 이끌려 자러 가고 부부는 어젯밤 그들이 참석했던 가면무도회 이야기를 꺼낸다. 가면무도회는 꼭꼭 감추어져 있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순간이다. 부르주아 가정의 평온하고 안락한 일상 속에서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적 욕망이 활개 치는 자리다. 이 부부는 가면무도회에서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겼던 ‘위험한 순간’을 토로하고, 뒤이어 각각 다른 이에게 욕망을 느꼈던 과거의 경험을 풀어 놓는다. “감추어진 욕망, 거의 예상치 못했던 욕망, 가장 명징하고 가장 순수한 영혼의 한가운데라 할지라도 위험천만한 돌개바람을 칙칙하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욕망.” 남편 프리돌린은 유능하고 전도유망한 의사, 아내 알베르티네는 “천사와 같은 눈빛에 가정 주부의 모성과 자태”가 흘러넘치는 인물. 그러나, 이 평온한 부부는 덴마크를 여행했을 때, 호텔 계단에서 스친 사내에게 모든 걸 내던질 각오를 하거나, 해변 탈의실에서 만난 나체 소녀의 눈빛과 마주친 뒤 “민절(悶絶)해서 쓰러질 뻔”한 경험을 감추고 있었다. 부부는 그런 욕망의 경험을 서로에게 털어놓은 뒤 “지금부터 그런 일이 있음 언제나 그 자리에서 서로 이야기하도록 해요”라고 서로 약속한다. 하지만, 남편은 반문한다. “꼭 말로 해야 하나?”

소설은 상당부분은 남편 프리돌린의 ‘욕망의 모험’으로 이뤄져 있다. 약혼을 앞둔 마리아네는 죽은 아버지를 사망진단을 위해 방문한 의사 프리돌린에게 돌연 눈물의 애정고백을 한다. : “당신이 여기에 다시 못 오신다 해도 당신을 더 이상 뵐 수 없다 해도, 저는 당신 곁에 살고 싶어요.” 프리돌린은 사창가에서 만난 소녀가 섹스를 거부하자 마치 양가집 규수에게 하듯 구애를 하나 결국 거절당한다. 그리고는 가면을 쓴 채 에로틱한 누드쇼를 관람하는 비밀클럽에 몰래 잠입했다가 신분이 탄로나지만 또다른 가면의 여인에 의해 가까스로 그곳을 벗어난다. 다음날 그 집을 다시 찾아가지만 만나려던 여인은 찾지 못하고 그러지 말라는 경고를 받게 된다. 그는 비밀클럽에서 자신을 구해준 여인에게서 아내의 모습을 떠올린다. 소설은 프리돌린의 모험을 마치 스릴러 영화처럼 박진감 넘치게, 그리고 음울한 비엔나의 밤거리와 함께 비주얼하게 보여준다. 검은 색과 빨간 색이 선명하게 교차하는 이미지들.

남편 프리돌린과 달리 아내 알베르티네의 모험은 “꿈”이다. 꿈 속에서 그녀는 나체로 사내들에게 에워쌓여 있고, 남편 프리돌린은 사슬에 묶인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프리돌린은 아내가 벌거벗은 사내들과 있는 동안 여왕으로부터 청혼을 받지만 이를 거부해 채찍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알베르티네의 꿈 속에서 욕망의 대상(나체의 사내들)과 현실적(사회적) 대상(남편 프리돌린)은 분리되어 있다. 반면, 프리돌린에게 욕망과 현실은 알베르티네에게로 집중되어 있다.(그는 아내 앞에서 여왕의 청혼을 거절한다.) 알베르티네에게 그것은 현실이 아닌 ‘꿈’의 세계일 뿐이고, 남편 프리돌린에게는 현실속에서의 실제적인 경험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경험을 통해 드러나는 욕망은 자신이 처한 부르주아적 일상과 양립할 수 없다. 그러니 프리돌린의 선택은? : “이 모든 질서, 이 모든 균형, 자신의 삶에 관한 이 모든 안정감은 그저 허상과 거짓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의식이 다시금 들었다. ... 일종의 이중적 삶을 사는 거야. 믿음직스럽고 앞날이 창창한 유능한 의사, 성실한 남편과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삶을 살고, 다른 한편에서는 난봉꾼으로, 호색한으로, 그리고 기분 내키는 대로 놀아나는 냉소주의로 사는  거야.”  손쉬운 해결책이나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프리돌린은 침대의 알베르티네 옆자리에서 자신이 쓰고 다녔던 가면을 발견한다. 현실의 자신과 욕망의 자신, 의식과 무의식, 내면과 외면이 전면적으로 벌거벗은 채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는 자신이 겪은 욕망의 모험을 아내에게 모두 털어 놓고 말한다 :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알베르티네의 대답 : “우리의 운명에 감사해야 겠지요. 그 모든 모험으로부터 우린 무사히 빠져나왔잖아요 - 현실에서의 모험, 그리고 꿈속에서의 모험, 이 두 가지에서 모두.” “당신도 정말 그걸 확신하오?” “네 확신해요, 하룻밤 동안 실제로 있었던 일, 아니 한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서 실제로 있었던 모든 일조차도 그 사람의 가장 내면적인 진실을 동시에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걸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 프리돌린은 ‘꿈’에서 영원히 깨어났다고 말하려 하지만, 알베르티네가 속삭인다 : “결코 미래를 속단하지 마세요.”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을 영화화한 <아이즈와이드셧>의 실제 주인공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은 이 영화를 찍은 뒤 이혼했다. 현실은 영화와 소설을 배반한 것, 그러니 “미래를 속단하지 마세요.”)

프로이드식으로 말하자면, 결국, 현실원칙의 승리로 귀결되지만 쾌락원칙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슈니츨러는 세기말 비엔나 상류사회의 부르주아적 가치 뒤에 숨어 있는 욕망과 무의식을 말하고 있지만, 프로이드를 따르자면, 그 시대 그 곳에서만이 아니라 근대 이후 인간이 처한 조건이기도 하다. 내면과 외면의 일치, 현실과 쾌락의 일치는 루카치에 따르자면,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고 가야만 하고 갈 수 있었던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그리스 서사시 세계에서나 가능했다. “환멸의 낭만주의” 이후, 현실 속에서 벌어지고 있거나 존재하는 것들은 “가장 내면적인 진실”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내면의 진실은 말하자면 일종의 “숨은 신”인 것인데, 그것은 ‘말’로서 나타나고(프리돌린과 알베르티네가 가진 내면적 경험과 무의식은 두 사람의 ‘말’로서  드러난다.)이고, 욕망의 불일치와 그것의 화해 역시 ‘말’로서 이뤄진다.(프리돌린의 실제적 모험과 알베르티네의 꿈속의 모험은 서로에게 ‘말’해지고, 이로서 둘은 서로의 욕망을 수락하고 화해한다.) “꼭 말로 해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결국 ‘말’일 수밖에 없다”라고 할 밖에. 우리는 아직 “말 속에 숨은 말”을 읽고 짐작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으니. 하지만, 슈니츨러는 ‘한 시간만 더’에서 그 말조차도 ‘숨은 신’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냉소를 보낸다. 그러니까, 정말로 “꼭 말로 해야 하나?” , 아니 그 말은 도대체 믿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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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토요일 아침 부스스한 눈으로 현관문을 열고 신문을 들어보니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해왔으니 부고기사를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그와 인연은 없지만 아주 오랫동안 그의 글을 읽어왔기 때문에 집안의 먼 친척 한분이 돌아가신 듯한 느낌이었다. 한겨레에 연재되던 칼럼을 꼬박꼬박 챙겨 읽었고, <사회와 사상>에 실린 논문을 밑줄 쳐가며 읽었으니 내 과거의 한 때 그는 내 일상의 어느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2. 한길사에서 나온 <리영희 저작집>을 검색해보니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이후 그의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리영희, 임헌영 두 분이 함께 나눈 <대화>는 물론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내가 처음 읽은 그의 책은 <분단을 넘어서>였던 것 같다. 대학 학보사 책장에 아무렇게나 꽂혀 이던 이 책을 집으로 돌아와 방바닥에 배를 깔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전환시대의 논리>야 그보다 이전에 나온 책이지만, <우상과 이성>을 읽은 뒤에야 펼쳐봤던 듯 싶다. 그 다음에 <역정>, <자유인>으로 넘어갔고, 어느 순간 리영희 선생의 글이 재미없어졌다. 직접 쓴 책은 아니지만 그가 엮은 <중국백서>나 <베트남 전쟁>류의 책들도 읽을만한 부분만 발췌해서 봤던 것 같다.

#3. 그와 그의 책에 대해서 떠오르는 몇 가지 사념들.  

 

그러니까, 오늘 아침 그의 부고기사를 읽은 뒤에 버스를 타고 출근하면서 창밖 풍경을 보며 떠올렸던 기억들이다.  


#4. 버스의 라디오에서 국가인권위원회가 대북 삐라를 살포하라는 '권고'를 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한국전쟁이 터졌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가 읽고 있었다는 에드워드 기번의 영어본 <로마제국쇠망사>. 지방의 어느 소도시에서 당시로서는 희귀한 재능이었을 영어 독해력으로, 두터운 기번의 책을 읽고 있는 젊은 청년의 모습. 전쟁이라는 소식에 마음이 다급해졌을 법한 데, 천년 전에 망한 한 제국의 역사를 탐독하는 모습은 기이한 열정으로 비춰졌다.

#5. 버스가 수색을 지나 모래내를 지난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어디선가 그는 한글본과 영어본, 불어본으로 세 번 읽었다고 고백하는데, 불어본을 본 것은 감옥에서였다. 영어와 중국어, 일어, 프랑스어까지도 능통했으니 빅토르 위고를 읽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한 에세이에서 그는 장발장의 생애를 읽어가면서 한국의 검사들이 가진 기본적 소양의 부족과 더불어 그다운 결론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자베르 경감이 장발장을 체포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이었는데, “체포영장”이 없어서 못했다는 것. 19세기의 프랑스에서도 영장을 통한 체포와 구속이라는 최소한의 사법적 절차가 지켜졌는데, 20세기 후반의 한국에서는 그조차도 없었다는 것. <레미제라블>을 읽으면서 그가 느꼈던 탄식을 나는 영화 <타인의 삶>을 보면서 느꼈는데, 이 영화는 동독 비밀경찰조차도 ‘영장’이 없어 용의자를 체포하지 못하고, 그들이 남긴 도청과 감시의 기록도 그대로 보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산당 지배에서조차 사법적 절차에 대한 준수와 기록물의 보존이 이뤄졌다는 얘기다.  


#6. 연세대에서 하차.  

 

1991년 1월 연세대 장기원 기념관. 거기서 리영희 선생은 ‘사회주의는 이기적 인간성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인가’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당시 언론은 ‘마르크스주의의 폐기선언’이라고 기사를 썼다. 굴곡진 얼굴로 발표문을 읽다가 가끔 청중을 보던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마르크스주의는 실패했으되, 초기 마르크스주의의 휴머니즘은 여전히 유효하며 앞으로도 보존되어야할 담론이라는 것. 알뛰세가 인식론적 단절이라고 불렀던 전기와 후기의 마르크스 중 전자만이 가치있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선언이었다. 좁은 공간에는 젊은 열정들이 눈을 초롱초롱 밝히고 있었다. 지금은 연세대 교수가 된 박명림이 그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메를로 퐁티와 사르트르의 결별’을 인용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당신의 선언은 메를로 퐁티의 전향과 무엇이 다르냐는 식의 질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니까, 한국전쟁을 둘러싼 프랑스 지식인들의 논쟁과 <휴머니즘과 폭력>을 썼을 당시의 메를로 퐁티를 거론했을 것이다. 그의 책들로 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라기보다는 이성적 합리주의자 정도로 생각했는데, 마르크스주의의 폐기라니, 언제 그가 마르크시스트였던가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 주 일요일에 가깝게 지내던 서울대 법대를 나온 선배 하나가 리영희 선생의 선언에 충격을 받았다며 소주잔을 기울이던 생각이 난다. 그는 <전환시대의 논리>의 세례를 받은 세대였던 것.  


#7. 환승 버스를 기다리며.  

 

1976년 당산 대지진. 미 국무부가 수집정리한 중국 관련 정보를 모은 <중국 백서>를 편역할 만큼 중국 전문가였던 리영희 선생은 당산 대지진과 그해 일어난 뉴욕의 정전사태를 비교하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인간형을 비교했었다. 당산에서는 약탈과 방화 같은 것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음에 비해 뉴욕은 잠깐 동안의 정전 사태에 가게 유리창이 부서지고 온갖 약탈이 자행되었던 것.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중국이 개혁개방이 된 이후 당산을 다녀온 신경림 선생은 당산에서도 마찬가지로 약탈 사태가 일어났다고 쓰고 있다. 리영희 선생은 중국의 ‘공식정보’에 과도하게 의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료와 사실에 근거한 그의 글쓰기에도 오점은 있었던 것.

#8. 버스가 독립문 고가를 지난다.  

 

저 건너 시사인이 있던 자리에 출판사 까치가 있었다.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대학시절 정운영 선생의 책을 얻기 위해 이 출판사에 갔었다.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 까치 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은 리영희 선생이 일본에 갔다가 발견해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책이다. 일종의 섹스와 그것을 둘러싼 풍속의 변천이라할 이 책은 소재와 달리 유물론적 사관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발터 벤야민은 푹스에 대해서 에세이 하나를 쓰기도 했다. 섹스의 풍속사와 리영희 선생은 어째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지인들은 술과 욕망에 대해 솔직하리만큼 충실했던 분으로 회고한다. 엄격하고 치밀한 글쓰기 저 편에 그런 세계가 존재했다는 것은 차라리 위안이다.  


#9. 버스 왼편으로 보이는 서대문형무소.  

 

열화당에서 나온 <서대문형무소>는 일제 때 세워진 서울 도심 부근의 이 형무소가 이사하던 것을 계기로 사진과 에세이를 묶은 책이다. 리 선생은 1964년 이 감옥에 갇혔던 경험을 이 책의 한 에세이에서 풀어 놓고 있다.  이 책을 보고 나서 개방된 지 얼마 안 된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갔다. 지금은 메이저 언론의 사진기자가 된 친구와 함께 형무소 담벼락에 기대어 사진을 찍고 어두컴컴한 옥사 복도 안으로 햇볕이 비치는 것을 오래도록 쳐다봤다. 내가 찍은 사진은 형편없었으나 친구가 찍은 사진은 전문가답게(?) 매우 훌륭했다. 건축 관련 사진을 리포트로 제출하라는 ‘한국건축사’ 수업에 친구의 사진을 제출해 A+를 받았다.  


#10. 광화문 광장 한가운데에서 남대문 방향을 보면 조선일보 코리아나 호텔이 정면으로 보인다. 광화문 광장의 시야는 저 흉물스러운 빌딩 하나가 망쳐 놓고 있다.  

 

조선일보 남재희-리영희 충돌사건. 당시 조선일보 정치부장과 외신부장 사이에 벌어진 이 싸움은 신경전을 넘어서 물리적 폭력이 동원된 사건인데, 어째 리영희 선생의 <대화>에 나오는 회고와 다른 지인들의 회고는 정반대다. 단순히 간부급 기자들의 충돌만이 아니라,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을 지배하던 두 지적 논객의 충돌이자 서로 다른 사상적 패러다임의 충돌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기이한 것은 이들 서로 다른 두 지성이 지주의 아들이자 천하의 바람둥이 소설가였던 이병주와의 교류와 친밀함에 있어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할 정도로 긴밀했다는 점이다. 이병주는 출옥한 뒤 세상물정을 공부한답시고 당시 신문을 샅샅이 뒤져 읽었는데, 그중 조선의 외신면이 탁월하다는 것을 알고 부장인 리영희와 교유를 텄고 둘은 아주 친해졌다. 리영희는 해고 뒤 이병주가 차린 출판사 ‘아폴로’(이 社名은 촌스럽기 그지 없으나 당대의 분위기에서는 아주 지적으로 보였나 보다.)의 외판사원 노릇을 잠시 했다. 남재희 선생은 이병주의 박람강기와 술, 여자에 대한 탐닉을 즐거워했다.(<언론정치 풍속사>, 민음사) 그런데, <지리산>의 이병주는 일급의 소설가라기보다 사실 삼류에 가깝다.

11. 어느새 버스가 회사 앞에 도착했다. 삼가, 내 한 시절의 지적 스승이었던 리영희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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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12-12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토요일은 아니고 월요일이었지 않나요.
-19일까지 통화 불갑니다. 출장이 좀 길어서요.
-예산안 날치기 보니 돌아가고싶은 맘 싹 가시네요.
그런다고 뭐 뾰족한 수 있는 건 아니고...
-남아공입니다

미국사람 2011-08-20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이에자이트님의 이영희 선생 글에 붙은 댓글을 보고 여기까지 타고 왔네요.

88년에 미국에 왔지만 이영희 선생책은 대충 다 찾아 읽었는데 박명림과 그런 일이 있었더군요. 남재희와 이병주의 일도 그렇게 연결이 되는군요.

유신 말기에 대학을 다닌 사람중에 이영희 선생을 자신의 거울로 삼은 사람이 꽤 될겁니다. 영어로 하면 role model 이라고 하나요.

요즘 한국소식은 참 우울한데 이 시대에는 이영희가 왜 없을까 생각해 봅니다. 민주화의 이익을 어떤 이상한 사람들이 전부 해먹었다하는 생각은 왜일까요.

이영희 선생 생각에 한마디 해 보았읍니다.
 
문명화 문화주의 기업문화 - 영국정부와 예술 정책
김정희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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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정환이 <기차에 대하여>(창비)라는 걸출한 ‘프롤레타리아 시집’을 내고 난 뒤 그당시 부상하던 ‘압구정 문화’에 대해 “우리는 사회주의의 미래를 24시간 편의점의 실내만큼 화려하게 그려본 적이 있던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노동해방과 사회주의를 말하던 한국의 숱한 자생적 사회주의자들은 19세기 러시아만큼이나 우중충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그려보이는 문화의 미래 또한 낫과 망치로 묘사될 수 있을 만큼 후진적인 것이었다. 제임슨이 후기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라고 말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지식수입상들에 의해 한국에 상륙했을 때조차도, 이들은 그것이 가진 소비자본주의와의 결탁과 반민중성을 분석하고 폭로했을 뿐, 이렇다할 대안적 논리도 보여주지 못했다. 20세기 초반 마야코프스키가 참여했던 시대착오적인(?) 미래파 운동인 프롤레트쿨트만큼도 ‘화사한 미래’를 그리지 못했다. 그들이 남긴 문화적 스타일은 저 누추한 개량한복이고, 남은 논리는 <문화과학>류의 ‘구라’일 뿐이다. (이건 너무 심한가?)

1970년대 이래 한국의 민중문화 운동이 대안적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듯이 한국의 주류문화도 이렇다할 문화적 유산을 남기지 못했다. 동물원 옆에 처박힌 과천 현대미술관에 가보아도, 예술의 전당에도, 세종문화회관에도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한국의 문화는 “없다.” 동남아와 아랍인들을 사로잡았다는 이른바 ‘한류’도 기실 따지고 보면, 헐리우드의 문화적 독점력이 약화된 시대에 그것의 손쉬운 대체물로서 선택되고 소비된 것일 따름이다. 일본문화는 로컬리티가 너무 강하고, 중국은 세련되지 못했으며, 유럽의 그것은 흡인력이 약하다. (백원담, <한류>) 최근 한달여 동안 꾸역꾸역 <문명화 문화주의 기업문화>(김정희 지음, 서울대출판문화원)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한국의 문화적 빈곤은 압축적 근대화가 낳은 부정적 유산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것이다. 문화적 성숙과 변동은 자본주의의 진전과 변화와 더불어 함께 진행되는 것이라는 얘기다. 제대로 된 복지국가를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에서 복지에 따른 병폐를 말하는 것이 우스운 것처럼 공공의 문화를 위한 시도를 해본 경험이 없는 나라에서 ‘문화국가’ 운운한다는 것도 가소로운 일이다.

이 책을 한겨레에 실린 작은 소개기사를 보자마자 주문했는데, ‘영국정부와 예술정책’이라는 부제가 유독 눈길을 끌었던 탓이다. 480여 쪽에 3만원씩이나 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영국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저력이 참으로 부러웠다. 감히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제국’과 우리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빈약한 유산과 얄팍한 문화는 빗대어 볼때 한층 더 초라하다. 영국은 알려진 대로 수백 년에 걸쳐 자본주의의 전형적 발전과정을 밟아온 국가다. 경제발전의 과정만큼이나 문화적 성취도 오랜 축적의 역사와 탄탄한 기반을 자랑한다. 이 책은 오늘의 영국과 그들이 만들어낸 문화가 상당부분 ‘국가의 역할’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서글픔과 초라함은 우리는 이제껏 그런 국가를 가져보지 못했다는 새삼스러운 자각 때문이다.

저자는 서울대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교수인데, 영국에서 일년간 연구년을 보내면서 이 책을 썼다. 그녀는 런던의 화랑가와 국립도서관, 미술관과 박물관을 돌아다니면서 영국을 사랑하게 된 모양이다. “사람들이 가졌으면 좋겠는 품격과 교양, 천천히 진행되는 북유럽의 봄, 영국 도서관의 고요함과 쾌적함, 사우스뱅크의 질이 있고 종류가 다양한 음악과 영화 프로그램, 런던 하늘의 드라마틱한 구름, 리전트 파크의 자작나무 이파리 소리와 그것이 만들어주는 바람의 느낌”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저자가 그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은 국립 박물관/미술관의 무료입장과 저렴한 음악회 티켓 가격 같은 것이다. 영국은 한 사회에서 예술이 어떻게 수용되어야 하고, 국가는 그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전범적 사례를 제공한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18세기 이후 영국의 문화정책과 그것이 목표로 한 바를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그 출발점은 1759년 1월 15일 개관한 런던의 대영박물관이다. 세계 최초의 박물관이자 대영제국의 영광을 그대로 집약해 놓은 이 거대한 박물관은 국민 교육을 통하여 영국사회를 ‘문명화’하는 것을 존재이유로 삼았다. 대영박물관의 이사들은 “컬렉션은 전체가 다 보존되어야 하고, 보기 위해 무료로 접근하고 숙독하고자 하는 일반 국민의 사용과 이익을 위해 보존되어야 한다”라는 조항이 담긴 문서에 서명을 했다. 국왕의 통치행위를 위한 보조기관으로 설립된 우리의 ‘규장각’과는 애시당초 비교가 안된다. 대영박물관은 엘리트계급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본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배우고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들 모두를 위해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다윈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와 간디도 이 곳에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할 수 있었으리라.

국립으로 세워진 대영박물관의 설립과 운영 원칙은 다른 국립 문화기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내셔널갤러리나 “영국 국민을 하나의 조직체로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설립된 테이트 갤러리, 빅토리아앤앨버트(V&A) 박물관 역시 국민에 대한 예술교육과 문명화를 위해 설립되고 운영되었다. 그 핵심이 바로 이들 국립 미술관/박물관의 무료입장 원칙. 미술관의 소장품은 “국가의 재산이고 국민의 교육이라는 공공의 목적을 위한 것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이 무료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짧은 영국 여행 동안 나같은 외국인 여행자가 공짜로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들 18세기 영국인들 덕분인 것이다. 국가가 박물관을 국민 계몽과 도덕교육의 주체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박물관의 정치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장품의 상당수는 제국주의적 침략에 따른 유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에 대한 국가의 ‘계몽주의적 열정’은 감동스럽다. 문명화의 과제는 빅토리아 시대에 이르러 중상주의와 결합하여 ‘공예산업’의 진흥과 같은 방향으로 바뀌었다. 도덕의 열정은 상업적 열정으로, 기술과 산업에 대한 강조로 변화했다. 1851년 5월 1일 시작되어 11월 31일까지 열린 국제 대박람회와 거기서 선보인 수정궁은 빅토리아 시대의 문화적 열정을 상징하는 예술과 산업, 기술의 집약체였다.

20세기 초부터 대처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영국의 문화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은 바로 존 메이너드 케인즈다. 케인즈는 주식투자에 능하고 매력있는 여자를 찾아내는 데만 귀신인 줄 알았는데, 그는 경제학자일 뿐만 아니라 문화정책가이기도 했다. 그는 영국의 CEMA(음악과 예술 장려회의)의 2대 의장이었는데, 이 기관은 “최대 다수에게 최고의 것을”(the best for the most)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예술적 성취에 있어서는 최고를 지향하고, 최대 다수(the most)의 국민들이 그것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에 대한 ‘사회적 접근성’을 내세운 CEMA의 전략은 복지국가론의 문화적 버전이라 할 만하다. 국가는 ‘팔길이 거리’ 원칙을 내세워 예술에 대해 공공적 지원을 하지만 간섭을 하지는 않는다. 국민의 세금이라는 공공재원을 통해 운영되기 때문에 대다수 문화예술기관들은 모든 국민들이 무료로 손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케인즈는 “과거에는 혜택받은 소수를 위해 비축됐던 순수미술의 즐거움을 도래하는 시대에는 대중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가 한 사회의 문화를 위해, 그 문화를 즐기고 수용하는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치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이 책의 두 번째 제목인 ‘문화주의’는 바로 이 시기의 패러다임을 설명하는 용어다.

문화적 케인즈주의로 불릴만한 이같은 논리는 20세기초부터 1979년 대처 집권 이전까지 영국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이었다. 문화적 복지국가가 거의 80여년을 지속했던 것이다. 1970년대말 이른바 광산노조의 파업으로 불거진 ‘불만의 겨울’(the winter of discontent)을 배경으로 등장한 대처정부는 빅토리아 시대 이후 계속된 ‘문명화’, ‘문화주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목표는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대처주의의 신념은 정부지원을 받는 공공기구(quango)들에게 강력한 민영화 프로그램을 강요했다. 이제 예술은 영국의 ‘기업문화’를 확산시키고,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게 대처리즘의 예술정책이었다. 대처시대에 많은 유적들과 공공박물관/미술관들은 먹고 살기 위해 ‘무료입장’ 전통을 바꾸기 시작했다. 유적의 상품화, 공공정책의 상품화, 공공문화의 상품화. 영국의 문화예술정책을 주도하는 아츠카운실은 “노동당의 요새”들이었기 때문에 폐지되거나 개혁 대상이 되었다. 아이러니 한 것은 민영화와 자율을 주장하는 대처리즘 시대에 공공예술기관들은 ‘팔길이 원칙’에서 벗어나 국가의 ‘간섭’이 이뤄지기 시작했다는 것. BBC도 ‘임명권’을 바탕으로 중앙정부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된다.(이 점에서 BBC는 KBS의 선례가 된다.) 복지국가 시기에 독립적 기관들은 ‘중앙’의 통제를 받는 기구들로 바뀌었다. “팔길이 원칙이 손목 길이 원칙으로 바뀌었다.”

“아츠카운실, 즉 ACGB는 케인즈에 의해 국민에게 ‘위대함과 선’을 교육하고 국민의 복지와 국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예술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중개하는 기구로 탄생했다. 케인즈와 같은 문화주의자들은 미술과 산업을, 문화를 실용성과 그리고 레저를 노동과 구분했다. 그들이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기금을 통한 국가의 예술지원을 주장한 가장 큰 이유는 예술을 상업주의와 물질주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아츠카운실이 기금을 분배할 때 ‘예술적 가치’, ‘기준’, ‘질’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원칙은 경제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77년까지도 지속됐다. 그러나 아츠카운실은 대처시대에 두명의 의장이 기업들로부터 기금을 받고 이름을 빌려 줌으로써 상업주의적인 기업들을 국가가 문화애호적인 것으로 ‘인증’해주는 역할을 하는 기관들로 변했다. 아츠 카운실이 기업들의 사업도구가 됨으로써 그것들로부터 보조금을 전달받는 예술기관들도 기업의 상업주의에 종속되어 갔다.”(278-279)

저자는 대처시대를 예술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시기로 묘사한다. 대처 시기에 테이트갤러리에는 다국적 기업인 일본의 노무라 증권에 의해 ‘노무라방’이 만들어지고, 기업들은 “문화경영자적 자본주의자들”이 되어 미술에 스폰서를 한다. 맥주회사 벡스는 영국 미술을 후원함으로써 벡스가 영국의 ‘아방가르드 술’이 되고, 앱솔루트 보드카는 옥스퍼드 현대미술관의 ‘새로운 영국 회화’전을 후원하면서 독특한 ‘예술적 아우라’를 획득한다.  영국의 유명 광고회사 사치&사치의 찰스 사치가 “슈퍼 컬렉터”로 등장한 것도 이 시기. 그는 자본의 힘으로 미술품을 사들이고, 젊은 미술가들을 후원해 그들을 키우고, 작품값을 높여 엄청난 수익을 내고 되판다. 데미안 허스트(수족관에 포르말린을 넣고 상어를 집어넣은 이 작자의 작품이 왜 그렇게 비싸야 하는지 도대체 나는 알 수 없다), 트레이시 에민 등 대처와 사치의 아이들인 'yBas' 그룹이 등장하여 천문학적인 작품값을 기록한다. “오늘날 미학적 산물은 일반적으로 상품생산속으로 통합됐다”(프레드릭 제임슨)

대처 시대의 문화와 예술정책이 ‘기업문화’로 요약된다면, 블레어 노동당 시기는 ‘문화경제’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노동당의 옷을 입은 대처라는 표현 그대로 블레어는 대처의 공공문화기구의 민영화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아예 문화 예술 자체를 ‘창조산업’(creative industry)로 변형시켰다. 예술은 이제 ‘가치(교환가치)’를 창출하고,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산업으로 재해석된 것이다. 무료입장과 같은 최소한의 공공성은 유지되었지만 민영화는 계속되었고, 예술은 더욱 기업화되었다. 블레어의 문화노선은 “예술과 문화를 창의적 산업들로 상표를 바꾼 것”이며, “문화활동과 에이전트 보다는 상품들의 경제적 이익들에 초점을 맞추고 경제적 글로벌화의 제국주의적 확산에 기여하면서 분명히 자율적으로 고립되어 실행되며 더 중립적으로 비치는 창의성이라는 것에 집중함으로써 사회적인 문화를 주변화하는 것”으로 평가됐다.

블레어가 문화경제 노선을 위해 만든 기구는 DCMS(department of culture, media, and sports)다. 이 부서의 목표는 “접근, 우수함, 교육, 경제적 가치”(access, exellence, education, economic value)로 설정된다. 접근은 모든 계층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수함은 예술의 질적 탁월함을, 교육은 국민계몽과 문화교육을, 경제적 가치는 말 그대로 부를 창출하는 문화를 의미한다. 블레어 이전의 문화예술이 담당한 문명화, 문화주의, 기업문화라는 패러다임은 모두 ‘문화경제’ 패러다임 안으로 수렴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대영제국 시대의 문명화라는 잔영과 복지국가 시대의 케인즈주의와 대처리즘이 공존한다. 이쯤 되면 우리의 문화체육관광부(MCST, ministry of culture, sports, and tourism)가 블레어의 DCMS에서 빌어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블레어 시대에 이르러 “예술이 방송과 영화를 통해서 문화의 범주 안으로 통합되면서 예술의 경계와 질적 수준의 차이”가 사라져 버렸다. 이제 예술은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과 아우라를 상실한 채 월마트 안에 쌓인 수많은 상품 중 하나가 돼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쯤 서 있을까. 문명화, 문화주의를 거쳐 기업문화와 문화경제에 이른 영국적 경로를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차라리 문명화 이전 혹은 거쳐야할 단계를 건너 뛰어 느닷없이 문화경제가 운운되는 시대에 진입한 것이 아닐까. (차라리 비동시성의 동시성?) 국가가 문화예술을 통한 교육과 계몽을 국민에게 한 번도 제대로 제공해준 적이 없는 역사적 빈곤 속에서, 문화강국이니 소프트웨어를 키우자느니 하는 것은 공허하고 허망한 노릇이 아닐까. DJ 정부는 콘텐츠 산업의 육성을, 노무현 정부는 창의산업을 외쳤지만 그것으로 역사를 뛰어넘지는 못한다. 그것은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런던의 테이트모던에서, V&A에서, 내셔널 갤러리에서 절망하고 서글퍼 했던 것은 아마도 그런 부재로서의 역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족 한가지. 이 책의 저자는 많은 자료와 논문에 근거해서 책을 쓰고 있는데, 인용문들은 거칠고 어색하게 번역되어 있고, 문장은 학자의 글이라고 보기에는 난삽하기 그지 없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 하나는 대학원생의 보고서 같다고 평가했는데, 수긍이 가는 평가다. 영국 문화정책의 역사를 다룬 책이라 미문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책을 비싸게 구입할 독자의 처지도 마땅히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좀더 정돈되고 압축된 문장이었다면 이 책이 그렇게 두꺼워질 이유도, 따라서 비쌀 이유도 없을 것이다. 대처리즘 시기의 서술은 지나치게 미술작품과 미술계 동향에 집중되어 있어 정책와 기구, 패러다임 중심의 서술인 앞부분에 비해 돌출적이다. 책 전체의 균형이 기우뚱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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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이라는 마니교적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행복이거나 불행, 둘 중 하나다. 사람도 그러해서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될 뿐이다. 악한 본성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해도 악할 수밖에 없으며, 선한 본성을 가진 사람은 어떤 비참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결국은 그의 본성이 드러나 사회적 배려와 축복을 받게 마련이다. 주말 동안 디킨즈의 오래된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윤혜준 옮김, 창비)를 읽으며 이 놀랍도록 단순해서 차라리 행복해지는 세계에 젖었다. 불운한 결혼으로 잉태되어 구빈원에서 태어나고 자란, ‘착한 소년’ 올리버와 그를 둘러싼 선인과 악인들의 이야기. 세상은 부유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의 선한의지와 자선과 배려에 의해서, 그리고 심성이 ‘원래’ 착한 사람들에 의해서 구원되리라는 소박한 전언은, 복잡한 이해와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구분되지 않는 이 복잡하고도 난해한 현실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는데, “착하게 살아라”라는 ‘크리스마스 철학’을 설파하는 이 19세기 작가에게 경의를 표해야 마땅하리라.

이런 소박한 철학은 사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지배하는 ‘사상’일 것이다. 불운한 출발, 험난한 역경과 의지로 이뤄낸 극복, 예기치 않은 도움과 구원의 손길,  그제서야 풀리는 오해와 인연, 지옥에 떨어지는 악한, 결국 사랑과 행복에 이르는 선한 사람들, 이런 멜로드라마는 브로드웨이와 피카딜리를 지배하는 삶의 철학 아니던가.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며 디킨즈는 절대로 우리의 정신을 고문하지 않고, 행복한 결합과 화해로 이끄는 뮤지컬 장르의 문법을 처음으로 세운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미국 중산층과 여피의 철학을 현대적 대중예술로 이끌어 올린 미국식 뮤지컬이, 왜 우리사회에,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서 유행하는지를 별로 따져보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런 멜로드라마의 선명한 이분법의 세계는, 소파에 다리를 뻗고 길게 누워 ‘즘생’처럼 퍼져있고 싶은 주말에 딱 어울린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을 뿐이다.


ps 1. <올리버 트위스트>는 하도 많이 나와 어지러울 정도다. 검색해보니 아동용으로 각색된 다이제스트본도 있는 것 같고, 수십 년 전에 나왔던 것을 표지와 활자만 바꿔 다시 펴낸 것도 있는 것 같다. 창비판에는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이 추천한 ‘최고의 번역본’이라는 레테르가 붙어 있는데, 과연,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하다. 19세기 런던 뒷골목의 지저분하고 음습한 분위기는 번역자의 뛰어난 문장 덕에 아주 실감나게 복원돼 있다.


ps 2. 디킨즈 소설을 읽다가 아주 오랜만에 아놀드 하우저를 뒤져 봤다. 기억할 만한 대목이 있어 인용해 둔다. 오늘은 12월 1일. 지금은 사회적 문제의 해결을 국가의 제도적 의지와 사회안전망이 아니라, 개인의 선의지와 자선에 기대어 풀어보려는 빨간색 자선냄비가 등장할 시간인데, 하우저의 디킨즈에 대한 지적은 이 ‘크리스마스 철학’이 은폐하고 있는 지점을 정확하게 가리킨다.  


 

“디킨즈는 처음부터 예술적으로 및 이념적으로 진보적인 문학의 새로운 타입을 대변했다. 호감을 사지 않는 곳에서도 그는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의 사회적 주장이 전혀 마음에 안들 때에도 사람들은 그의 소설에서 재미를 느꼈다. 그의 예술적 관점과 정치적 관점은 서로 분리될 수 있었다. 그는 사회의 여러 죄악, 부자들의 냉혹과 거만, 법의 가혹성과 몰이해성, 어린이에 대한 잔인한 취급, 감옥과 공장과 학교의 비인간적 조건들, 한마디로 모든 제도적 조직체의 속성인 개인적 고려의 결핍에 대해서 불꽃 튀는 어휘로 분노를 터트렸다. 그의 고발은 모든 사람들의 귀를 시끄럽게 울렸고, 사회 전체에 부정의 책임이 있다는 불안한 느낌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채웠다. 하지만 고난의 외침과 실컷 울고 난 다음에 으레 따르기 마련인 만족감을 뭔가 보다 확실한 것으로 인도하지는 못했다. 작가의 사회적 메시지는 정치적으로 결실이 없었으며, 그의 박애주의 역시 예술적으로 매우 고르지 않은 결실을 맺었다. 그것은 인물들의 심리학에 대한 작가의 공감을 깊게 했으나, 동시에 그의 눈초리를 흐리기 만들기 쉬운 하나의 감상주의를 낳았다. 그의 무비판적 인정주의, cheeryblism(막연한 온정주의), 소유계급의 사사로운 선의와 선행이 사회적 결함을 개선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은 마지막까지 분석해 본다면 그의 애매한 사회의식에서, 계급들 사이에서의 그의 소시민적인 미결정적 위치에서 기원한 것이었다. .. 그는 과거 부르주아지의 건강하고 비감성적인 이기주의를, 텐느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크리스마스 철학’으로 변질시켰다. “착하고 서로 사랑해라. 가슴의 느낌이 유일한 진짜 기쁨인 것이다. 학문은 학자에게, 자존심은 점잖은 사람들에게, 사치는 부자들에게 맡겨두어라.” 디킨즈는 이 사랑의 복음의 알맹이가 정말 어떤 것인지, 그리고 거기에 약속된 평화가 사회의 약자들에게 얼마나 비싼 희생을 치르게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현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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