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의 당신 민음의 시 172
김요일 지음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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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요일의 시집 <애초의 당신>(민음사)를 읽다. 책 앞 날개에 소줏잔을 들이키는 시인의 사진이 실려 있는데, 술을 좋아하는 사람인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집 전체에서도 주정류(酒精類)의 향기가 독하게 뿜어져 나온다. 술을 마시며 사랑을 하고, 사랑에 실패하고, 혁명을 꿈꾸었던, 한때 모두가 혁명가였던 시절을 회고한다. 다행히 그의 회고취미는 누추하지 않은 것이어서 간결하고 압축적인 시어들은 그가 취기의 와중에도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즐겨 마시는 ‘독주’처럼, 몇 개의 시들은 가슴을 후벼 파더니 결국 저녁 술자리를 불러내어 “세속적으로, 세속적으로/빠르게 독주를 들이”켜게 만들었다. (이 점, 이 자의 시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의 전염력이리라.) 이 사람, 참으로 청승맞고 멜랑꼴리한 ‘술자리 낭만주의자’다. 
 

그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카치올리’라는 집시들의 마을에서 가서도 술을 마신다. 그는 카치올리에 있는 “급진고물소(急進古物所)”의 “음표 가공수리사”인데(카치올리의 음악가), 사람들은 그가 닦고 수리한 ‘음표’를 가지고 음악을 만든다. ‘시인을 위한 카덴차’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시는, 자신의, 그리고 시인의 운명을 우화적으로 보여주는데, 그건 버려진 음표들을 닦고 만들어 거리에 뿌려 마을에 음악이 흘러넘치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낮에도 “한 잔의/태양”(낮술)인 술을 마시며, “출렁이는 선창에서는 독주 한잔에도 취하는 법”(밀항)이니, “그늘 한 점 없는 마른 나무 밑동에 기대어/그도 한 잔, 나도 한 잔”하면서 “안주는 필요치 않”(순례의 노래)으니, 어김없이 그 옆에는 “밀주든 독주든 그윽이 잔을 치던 여자”(인어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리라. 말하자면, 그는 술마시고 음악에 빠진 음유(飮遊) 시인이다. 
 

그러니까, 그의 시가 내 눈을 끌게 된 것은 ‘우드스탁을 떠나며’라는 시 때문이다. “고백컨대, 신촌의 절반은 내것이었다”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대학로, 강남, 신촌에 퍼져 있는 몇군데의 우드스탁 중에 유독 ‘신촌의 우드스탁’을 불러내고 있다. 딱딱한 나무 의자와 잔 없이 병째 들이키는 맥주, 술집 바깥에까지 시끄럽게 울려퍼지던 음악소리, 옆 자리의 사람에게도 고함을 쳐야 대화가 가능한 그곳, 90년대 초반 신촌의 우드스탁을 떠오르게 했다. 그 때 저쪽 구석에서 뻑뻑 담배를 피며 헤드뱅잉을 하던 자가 바로 이 사람이었던가. 그때, 에릭 사티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던가, 낙서로 가득한 벽면에 걸린 그림은 에곤 쉴레의 그것이었던가. 나야 우드스탁의 그 ‘자폐적이고 매니어스러운’ 분위기가 싫어 길 건너 ‘놀이하는 사람들’에서 술벗들과 ‘anarchy in the UK'를 듣거나, ‘studio 70's’의 70년대적 낭만주의를 더 좋아했지만. 그도 아니라면, ‘케자르’에서 10여년째 철학과 박사과정을 다니며 비트겐슈타인을 공부하던 한 늙은 철학도를 술벗삼아 김추자 노래를 들으며 1천원짜리 치즈안주로 맥주를 마시거나. 
 

철없던 계절의 뒷골목아, 안녕
뒤돌아보지 않으마 
 

(3번테이블,볼셰비키앉아맥주를마신다) 
 

안녕, 쓸쓸히 머리 푼 가로수야 마른 잎들아
나는 너를 떠난다
색 바랜 청동의 영웅도, 자욱한 최루탄 연기 같은 추억도
이젠 게워내련다 돌아보지 않으련다 
 

(늦게떠나는바캉스처럼기대도낭만도담지않고이것저것아무거나배낭에구겨넣고서간다)
(에릭사티도,에곤쉴레도이젠없다이곳엔) 
 

푸른 피 가득한 거리를 지나
냄새나는 추억을 밟고
폭설이 퍼붓기 전에 처마의 고드름 심장에 처박히기 전에 
 

간다, 황급히 도망가련다 
 

(깊게패인옷을입은클라라의하얀가슴위엔반달이뜬다)
(숨이막힌다흩날리는꽃잎꽃잎꽃이파리들...) 
 

세월이 조롱할지라도, 이제 난 꿈을 꾸련다 
 

(지미핸드릭스의기타가부서진다)
(거리엔보르헤르트,비틀대며걷는다) 
 

누르고 참았던 슬픈 기억처럼
울컥,
태양이 솟는다, 찬란한 비애여! 
 

건배! 
 

 - ‘우드스탁을 떠나며’ , 고백컨대, 신촌의 절반은 내 것이었다
 

여기엔 볼세비키와 에곤 쉴레와 볼프강 보르헤르트, 그리고 지미 핸드릭스가 공존한다. 색바랜 청동의 영웅인 레닌의 동상, 최루탄 연기와 같은 그의 옛 시절은 “냄새나는 추억”인 모양이다. 그것들이 모여 옹송대는 거리를 그는 떠나려 한다. 하지만, 울컥, 찬란한 비애가 솟는다. 이 격정적인 회상과 돌연한 결별은, 신촌에서 사랑을 하고, 사랑에 실패하고, 술을 마시고 취해본 사람만이 온전히 알 수 있으리라. 그래서, 그는 어디로 떠났는가. 별로 갈 데도 없는 모양이다. 그가 건너간 곳은 신촌 우드스탁에서 겨우 1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신촌 현대백화점 부근의 족발집이었으니, 그 이름은 ‘은경이네’다. 하기야, 술과 추억에 취한 자가  몇 걸음이나 갔겠는가. 
 

별빛을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예수를 만나지 못한 바빌론 강가의 네 번째 동방박사처럼,
사내는 오지 않을 누군가의 잔에 술을 따른다
 

그녀는 졸고 있다
 

잠쫓던 그녀의 눈처럼 반쯤 열린
문밖으로
신촌의 밤이 지나가고, 쉰내 나는, 뒷골목의 계절이 지나가고
쓸쓸한 옆 얼굴들이 지나간다
 

그는 어디 있을까?
 

종국의 생에 자리잡은 듯 사내는
말라 가는 안주처럼
무료한 눈빛으로 앉아 다른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봄이 되어도 부활하지 않는 꽃들에 대한 낡은 소문을 듣는다
 

전생도 영원도 확신할 순 없지만
취한다는 건 종국의 생을 선명히 떠올리는 일
사내는 세속적으로, 세속적으로
빠르게 독주를 들이켠다. 
 

제 갈 길을 분명히 알고 떠나는 별들처럼
그도, 꽃들도 제 안식처로 유성처럼 홀연히 흘러들어 갔겠지
 

늙은 암탉처럼 꾸벅 꾸우벅 졸던 그녀가
푸드덕, 
 

홰를 치며 잠에서 깨어난다
- 은경이네
 

지금은 소설가가 된 한강이 등단작으로 쓴 시가 ‘신촌’에 대한 시였던가. 그녀가 “기어이 떠나리라”던 신촌, 그 “쉰내 나는” 후미진 뒷골목의 족발집에 앉아 시인은 ‘종국의 생’을 생각한다. 종국의 생은, 죽음이 아닐 것인가. 바타이유가 “에로스는 죽음에 이르는 삶의 희열”이라고 말했듯이, 취하여 이르는 “명정(酩酊)”의 순간은 죽음 직전의, 생이 도달한 마지막 고비가 아닐 것인가. 거기가 시인이 가고자 하는 카치올리이자, 체게바라와 ‘아바나의 피아니스트’가 있는 곳이다. 취한 시인의 청승이자 멜랑꼴리요, ‘환멸의 낭만주의’다. 신촌의 술집 ‘섬’도 사라지고 없는 시대, 김요일이 지난 연대의 신촌에 대한 먹먹한 그리움을 불러냈던 것이다. (그런데, 시에 대한 감각만큼 미각은 발달하지 못한 모양인데, ‘은경이네’의 족발은 찰지지 못해 푸석푸석한 것이어서 그닥 단골로 삼을 만한 곳이 못된다. 아무려나, 족발 먹으러 간 게 아니라 세속적으로 독주를 들이키기 위해 갔으니, 미각을 탓해 무엇하랴.) 이 시집에 실린 시는 ‘사랑’, ‘뿐’ 두 개의 시의 다음 구절로 기억하고 싶다. 
 

버릴 수 없다면 아무것도 낳을 수 없는 법
붉은 비에 젖어 떨고 있는
당신을, 버린 나는
당신을, 가진 나는
 

밥짓는 냄새에도
울컥,
입덧을 한다.
- 사랑
 

그래
그냥 어떤 사소한 사건이라고 못 박아 두자
꽃그늘 하나 드리우지 못하는 가여운 나무의,
그 깡마른 그림자의,
말라 가는 비애쯤이라 해두자
 

(........)
 

그냥
쓸쓸한 별의 벼랑 끝에서 잠시
아찔, 했을 뿐
황홀, 했을 뿐
 

뿐,
-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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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은 2011-08-08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크허,, 김요일의 시를 먹고 자신을 내비치는 솜씨하고는...
님이야말로 김요일의 시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시인이 써댄 시를 이렇게 공명하는 사람은, 숨어있는 '낭만주의자' 괴물일지도...^^
 
쿨하게 사과하라 - 정재승 + 김호, 신경과학에서 경영학까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신뢰 커뮤니케이션
김호.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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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6.10) 아침 신문을 읽는데 ‘반값 등록금’ 집회를 위해 광화문 광장에 앉아 있는 여대생이 들고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정재승과 김호가 쓴 <쿨하게 사과하라>(어크로스 펴냄)라는 책. 저간의 사정을 찾아보니 반값 등록금 시위를 응원하기 위해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가 참가 대학생들에게 이 책 100권을 기증한 모양이다. 제목 그대로 ‘쿨하게 사과하는 방법’을 담고 있는 책인데, 이들 표현대로 ‘미친 등록금‘을 두고 누가 누구에게 사과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벌써 몇 달 째 책장위에 놓여 있는 이 책을 최소한 같은 사무실 사람들에게라도 소개해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을 부추긴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는 늙어 백발이 휘날리는 써(Sir) 엘튼 존이 1976년부터 내리 30여 년간을 “사과란 말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이라고 노래하는 걸 보면 확실히 사과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그 뿐이랴. 팝그룹 시카고 또한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어려워”(Hard To Say I'm Sorry)라고 속삭이고 있으니, 이쯤 되면 사과는 만인의 공통적 고민거리 쯤 되는 것 같다. 명분 중시의 한국문화에서 사과를 주고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사과 자체도 어려운 마당에 ‘쿨하게 사과하라’니, 사과를 잘하지도, 게다가 쿨하지도 못한 사람들은 과연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아마도 이 책을 유용하게 참고해야할 사람들은 보통의 사람들보다는 장관 후보자 청문회 자리에 섰던 분들처럼, 자신의 잘못 혹은 높은 자리에 있다는 바로 그 사실 하나로 타인의 잘못까지 덤터기로 떠안고 불가피하게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들일 것 같다. 기자들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으며 마이크 앞에 서서 사과를 해야만 하는 사람의 외롭고 고독한 내면(?)을 범인이 어찌 알 수 있으랴만, 그 자리에 서기 전에 이 책 한번 들춰 봤으면 조금의 출구는 찾을 수 있을 듯 싶다. 저자들은 “사과는 결코 패자의 언어가 아니라 승자의 언어이며, 존경과 신뢰를 받기 위해서 갖춰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인 ‘리더의 언어’”라고 말한다. 연신 “국민여러분께 송구 스럽습니다”를 되뇌며 눈물 콧물 흘리느니, 쿨하게 사과하는 게 21세기 한국국민의 일반적 윤리감각에도 맞는 것 같다.

두 명의 공동 저자는 잘 알려진 물리학자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정재승은 카이스트 교수로 이미 <과학콘서트> 등의 검증된 베스트셀러를 낸 학자이고, 김호는 그쪽 동네에서 꽤나 내공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홍보전문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직업 탓인지 대체로 공허한 수사를 남발하는 경향이 강하다. 보통 ‘실용서’쯤으로 분류되는 책들의 경우도 대체로 허망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침형 인간이 되라’는 교훈을 얻기 위해 300여 페이지나 되는 같은 제목의 책을 읽느니, 그냥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나을 것이다. 이 책은 수사학의 공허함을 신경과학과 인지과학으로 무장한 과학자가 메워주고 있는 형국이다. 실용서치고는 꽤나 탄탄한 셈이다. (김호는 ‘사과’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는데, 세상에, 별게 다 논문이 되는 세상이다.)

이 책의 핵심 부분에 해당하는 대목만 살펴보자. 우선 잘못된 사과가 일으킬 2차 후폭풍을 막기 위해 피해야할 표현 세 가지. 그 첫째는 조건부 사과(conditional apologies)다. 가령, 이것은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겠다” 같은 경우다. 이런 사과는 듣는 사람을 별거 아닌 일에 기분 나빠하는 ‘옹졸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더 나아가 사과의 내용을 모호하게 흐려버린다. 백희영 여성부 장관 후보자는 다운 계약서 의혹에 대해 “적절치 않은 점 있었다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가 도리어 비난을 샀다. 김태호 총리후보자는 “그렇게 돼 있다면 저는 인정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가 결국 낙마했다. 이 경우, “사과하고 싶다”는 표현 역시 ‘사과 아닌 사과’란다. 사과하려면 쿨하게 ‘사과한다’고 단정해야 맞다는 얘기다. “살 빼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실질적인 체중감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두 번째는 ‘그러나, 하지만’ 같은 접속 부사를 쓰지 말라는 것이다. “미안합니다”라는 말 뒤에 붙는 “하지만”은 구차한 변명으로 이어지게 되고, 결국 사과 아닌 사과로 끝나고 만다. 한 철학자는 “사과란 동의를 전제로 하는데, ‘그러나’라는 접속사는 의견 불일치를 나타내기 위해 쓰는 표현”이라 지적한다. 9.11 테러 진상조사위원회에서 미국 NSC 대테러 자문담당관인 리처드 클라크는 ‘그러나’ 대신 ‘그리고’를 써서 이렇게 ‘쿨하게’ 사과했다. “정부가 여러분을 실망시켰습니다. 여러분을 보호할 사람들이 여러분을 실망시켰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을 실망시켰습니다. 이런 실패와 실망에 대해 여러분의 용서와 이해를 구합니다.”

세 번째는 “실수가 있었습니다”라는 식의 수동태 사과다. 일종의 전략적 모호성(deliberate ambiguity)을 깔고 있는 사과인 셈인데, 이런 경우 사과의 주체가 누구인지 애매모호하다. 저자들은 이를 두고 “워싱턴의 언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 정치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바다. 헨리 키신저는 전쟁범죄 관련 의혹에 대해 “내가 일했던 행정부에 의해서 실수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뭐가 뭔지 도대체 요령부득의 언어인 셈이다. 이는 비난의 표적이 되지 않으려는 사과의 방식으로 “실수는 있었으나 내가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비겁한 사과다. 이런 사과를 듣는 사람은 분노 게이지가 더 치솟게 마련이다.

언어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이 모여 바람직한 사과의 내용과 방식에 대해 연구를 한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1) 사과의 앞 뒤로 변명을 붙이지 마라(“미안해, 하지만 네가 약속을 너무 촉박하게 잡았잖아”) 2) 무엇이 미안한지 구체적으로 표현하라. (그냥 ‘미안해’가 아니라, “내가 약속을 까먹는 바람에 널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3)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의미로 “내가 잘못 했어”라고 명확히 표현해라. 4)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개선의 의지나 보상의사를 표현하라. 5) 재발방지 약속을 해라.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해 놓고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면 외려 무책임해 진다. 정말 방지를 해야 한다.) 6) 쉽지 않지만 용서를 구하라. (“나를 용서해 주겠니?”라는 말을 하라는 것인데, 이거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여섯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방식의 사과를 종합하면 이렇다 : 지난번 전화로 정보를 알려주기로 해놓고, 잊어 버린거 정말 미안해. (유감과 사과의 내용)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책임),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할 게(재발방지 약속), 조금이라도 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알려줘(개선책 제시). 그런데, 저자들이 주장하는 이런 ‘이상적 사과’를 보니, 평균적 한국인이라면 입밖으로 드러내기에 조금은 민망하다 느낄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이 했던 사과를 위의 기준으로 평가해보면 어떨까? 짐작컨대, 그리 만족할 만한 점수는 아닐 것 같다. 대통령의 ‘사과’ 이후에도 여론이 사그러들지 않았던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는 셈이다.

책 내용을 요약하고 보니, 커뮤니케이션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부부 혹은 연인 사이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두 사람 사이의 사소한 언쟁이 대형 참사로 이어졌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겠는가. 가장 좋은 것은 사과할 일 만들지 않는 것이고, 그런 일 있다하더라도, 제대로 ‘쿨하게’ 사과하면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만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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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라는 이름의 외국
유종호 지음 / 현대문학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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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 선생이 새로 낸 책은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선생은 이 제목을 에릭 홉스봄의 ‘과거는 타국이다’라는 말에서 차용했다고 하는데, 그보다 앞서 영국 작가 L.P 하틀리가 “과거는 외국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다르게 산다”라고 말했다는 점도 쓰고 있다. 방대한 독서에서 나오는 “적정한”(이 말은 선생이 책에서 자주 쓰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인용은 언제나 감탄스럽다. 내게는 얼마 전에 본 “과거는 낯선 나라다”라는 1986년 김세진․이재호의 분신과정을 다룬 영화 제목으로 떠오른다. 이 영화에서 죽은 두 사람의 벗들은 분신으로 사람이 죽었음에도 신림동 네거리의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별일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끔찍스러웠다고 회고하고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역사학자 데이비드 로웬덜이 쓴 책이 또한 <과거는 낯선 나라다>(개마고원)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책 제목으로 자주 쓰인다는 것은 그게 어떤 지혜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은 그의 현재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과거의 어떤 한순간에 대한 총체적인 열망일 것이다. 시간과 장소를 벗어난 존재는 그리움에 값하지 않는, 훼손된 이미지일 것이다. 그러니, 그리움이란 허망한 노릇일 터이다. 과거는 나의 조국이 아니며, 나는 거기를 떠나 다른 나라에 망명했기 때문이다.

유종호 선생의 문장을 따라가는 것은 내게 아주 편안한 경험이다. 만연체인데다 특유의 조어까지를 고려하면, 그의 문장은 보통의 독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수 있겠으나 벌써 20여년 가까이 그의 글을 읽어온 처지에서 보면 그렇다. 번뜩이는 통찰과 넉넉한 긍정, 노년에 걸맞지 않은 ‘캐주얼’한 재치, 아마 고급의 인문학 문장이 있다면 바로 유선생의 그것이 아닐까 한다. 그의 글에서는 백낙청의 지사적 ‘계몽주의’도, 김우창의 가끔 이해 못할 ‘철학’도, 김윤식의 도무지 요령부득의 ‘독백’도 찾아보기 어렵다. 유선생이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는 소식을 한겨레 최재봉 기자의 리뷰로 접했을 때, 나는 그것이 몇 년 전에 펴낸 <나의 해방전후>(민음사), 그리고 <그 겨울 그리고 가을>(현대문학)의 연장선일 것이라 생각했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정교한 기억력과 섬세한 사회사적 세목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이 ‘구술 사회사’들은 한국 현대사의 ‘생활세계’(lebenswelt)를 생생하게 증거하기에 충분한 사료일 것이다. 해방 전후에서 한국전쟁 전후까지 ‘증언’을 했으니 이제는 아마 50년대 대학시절 얘기쯤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랐다. 모두 3장으로 구성된 책 중 1장의 일부 글만 ‘회고’에 부응할 뿐, 나머지는 선생의 본령인 ‘에세이적 비평’이다. 그것도 이태준의 <사상의 월야>,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정지용의 <향수>, 손창섭의 소설들, 마르케스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로셀리니와 잉그리드 버그만, 프랭크 커모드와 조지 슈타이너 등의 텍스트를 종횡하면서 특유의 인문적 사유를 풀어놓고 있다. 송욱 교수가 'listen'을 “귀 기울여라”라고 번역했다거나 제자들의 높은 추앙을 받고 있는 고 서울대 철학과의 박홍규 교수가 기실은 이름값에 못미치는 부실한 강의를 했다거나 하는 등의 한국 전쟁 직후의 대학 강의실의 풍경은 당대의 지적 풍토에 대한 호사취미를 충족시켜줄 만하다. 놀라운 기억력으로 이미 정평이 높은 유선생이고보면, 아마도 그가 풀어놓고 있는 이런 ‘전근대의 대학풍경’은 실질에 부합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많은 에피소드의 경우 목동 아파트의 거실에서 서너 시간을 내리 구라를 푸는 과정에서 풀어놓은 것들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여전히 관통되고 있는 유선생의 사유는, 내 식대로 정리하자면, ‘북위 37도의 사유’, 그리고 ‘텍스트에 대한 경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북위 37°는 선생이 태어난 충청북도 증평의 위도이다. 북위 38°와 36°사이에 위치한 이 지리적 공간은 선생의 정치적, 사회적 사유를 상징하는 것이리라. 선생이 펴낸 <나의 해방전후>의 첫 장 소제목은 바로 이 위도를 가리킨다. 그것은 서울의 사유도 아니고, 변방의 사유도, 그렇다고 ‘남도’의 사유도 아니고, ‘좌’의 그것도, 온전히 ‘우’의 그것도 아니다. 때로 그것은 좌파에 대한 비판으로, 우파에 대한 부분적 수용과 비판으로, 혹은 엘리티즘에 대한 비판과 대중주의에 대한 혐오로 부단히 유동한다. 어정쩡한 정치-지리적 위상이다. 긍정적으로 말해 중용이겠고, 충청도스러운 기질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중용의 정치학은 대부분 보수로 귀결되는데, 그의 보수주의는 정치적 보수주의, 문화적 고전주의라는 내용을 갖고 있다. 식민지 시기 보기드문 섬세한 문장가였다가 월북한 이태준(그는 사상적으로 투철한 좌파는 아니었다), 한국시의 언어를 한단계 끌어올린 정지용과 청록파에 대한 과도할 정도의 고평, 좌파 역사가 홉스봄에 대한 ‘인식론적 수용(가치론적이 아닌)’, 아이자이어 벌린, 프랭크 커모드, 에드먼드 윌슨, 조지 슈타이너에 대한 경사(이들의 성향은 좌우로 나뉠 수 있으나 공유하는 것은 자기 분야에서 요구되는 고전적 기율에 철저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등으로 나타난다. 북위 37° 는 위 아래의 위도 사이에서 유동하되 한계를 넘지 않는다.

유선생은 선우휘의 회고를 빌어 해방 직후 국군이 조직될 때 “일찌기 X장군은 조국광복을 예견하시고 이에 대비하기 군에 입대하여 군사적 경륜을 쌓은 바”라는 식의 낯뜨거운 당시 장교들의 말을 써놓고 있다. 일본 육사에 들어간 행위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려는 낯뜨거운 자기기만이다. 정치사로는 포획되지 않는 당대의 풍경이자 ‘사회사’의 한 대목인 셈이다. 문학텍스트를 통하여 사회사적 세목을 확인하고 풀이하려는 노력은 이같은 타국으로서의 과거에 대한 세밀한 역사상을 그려보기 위함일 것이다. 비숍의 책을 빌어 ‘타자의 시각’이 가진 위력을 말하면서 민족주의의 문제를 지적할 때, 선생의 인식론적 진보성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비숍과 더불어 바흐찐의 ‘외재성’(exotopy)를 말할 때, 괴테가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세계문학’을 거론한 맥락이거나 중고등 교육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소르본 대학의 임용을 거부한 철학자 알랭을 말할 때, 인문학에서 그리고 역사적 에피소드에서 끌어올리는저 ‘적정한 인용’의 설득력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문화적 고전주의자로서의 풍모가 짙게 배어 있는 글은 하루키에 관한 에세이 <문학의 전락>이다. 하루키를 “고급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허드레 대중문학”이라 폄하하는 그는, <상실의 시대>를 두고, “감상적인 허무주의를 깔고 읽기 쉽게 쓰여진, 성적 일탈자와 괴짜들의 교제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이한 음담패설집”이라 혹평한다. 그 책과 반대편에 놓인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 보여주는 “성숙을 위한 모색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문학이 한때는 정신귀족으로 올라갈 수 있는 교양의 핵심부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자기파괴적 허드레 문학”이 득세하는 시대가 되었다. <보봐리 부인>은 <안나 카레니나>를 낳았지만, 하루키의 경쟁상대는 텔레비전과 스포츠와 비디오란다. 하루끼에 대한 평가에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으나, 나는 이런 비판이야말로 유선생과 같은 문화적 고전주의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마땅히 나와야 한다고 믿는다. 뛰어남, 곧 탁월함에 대한 경의가 사라지는 시대, 유선생의 비관주의는 이 부박한 시대에 문화적 고전주의의 필연적 귀결일 터이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향수는 인간에게 남겨진 몇 안되는 자율과 선택의 주체적 영역이다. 문학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다.”

표절과 상호텍스트성의 맥락을 말하는 <기이한 상봉>은 유선생의 특장이 발휘된 에세이다. 로셀리니와 사랑에 빠진 잉그릿 버그만이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커플이 된 이후 만든 영화 <이탈리아 여행>으로 시작하여,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사자>로, <안티고네>와 마르케스의 소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과 자서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 자크 티보와 알프레드 콜토가 연주하는 세자르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로 이어지는 ‘상호텍스트성’을 둘러싼 담론의 전개는 현란하면서도 “적정하다.” 칠십노인과 십대 소녀 사이의 성공하지 못한 섹스를 미학화하는 마르케스를 두고 “임박한 성적 무능이 빚어 내는 플라토닉 러브의 환상적 서사”라고 평가하거나, 조이스의 단편에서 “나이들어 볼품없이 시들고 쇠하기보다 어떤 열정의 찬연한 불길 속에서 과감히 저승으로 가는 편이 낫다”는 대목을 끄집어 내거나, 중간 중간에 삽입된 “불후의 연인을 그려낸 시인은 흔히 하숙의 평범한 하녀밖에 알지 못하였다”는 프루스트의 대목을 끌어들인 것도 그러하다. 다른 평론가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박람강기, 독서의 넓이와 깊이의 문제다.

가끔 막막한 장벽에 가로막힌 듯한 느낌도 준다. 그가 책 밖에서 내놓는 언설들을 통해서 나는 북위 37도의 유연성에서 문화적 고전주의의 완강한 보수주의로, 급기야 우파적 인식을 넘어 정치적 반동주의로 귀결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유선생의 정지용 <향수> 옹호가 그 정교한 분석과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는 배경이기도 하다. 홍난파의 친일 행적을 두고 그가 만든 동요가 없었다면 식민지 시기의 유년이 얼마나 황폐했었던가를 묻는 것은 타당한 문제제기다. 그러나, 유선생의 친일에 대한 상황논리적 이해와 청록파 혹은 정지용 비판에 대한 반비판의 맥락은 ‘문화적 진영 논리’의 자장 안에 스스로 기투하여 전사임을 자임한데서 벌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종부세에 대한 날선 비판과 전직 대통령에 대한 혐오에 가까운 비판도 그렇게 이해된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유튜브로 조지 슈타이너의 강연을 듣는 그에게, 괴테가 보여준 너그러움과 포용력을 기대하는 어려운 일일까. 프랭크 커모드를 두고 “에드먼드 윌슨 이후 마지막 박람강기의 문인이라는 말은 과장된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얼추 커모드의 위치를 가리켜 준다”고 하니, 그 말을 유종호 선생에게 돌려도 크게 과한 것은 아닐 것이다. 누가 있어 유종호 이후에 이런 에세이를 쓸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그의 정치적 수사도 문화적 보수주의도 조금은 유연하기를 기대해보는 것이다.


* ps. 유종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마지막 대목을 두고 말하면서 베르테르의 시체 옆에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가 놓여 있었다는 부분을 거론하고 있다. 흔히 베르테르는 실연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에밀리아 갈로티가 지배계층에 의한 성적 폭력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체제와의 창조적 유대가 불가능했던 생기발랄한 청년의 비극”으로 볼 수 있으며 로테와의 사랑은 죽음의 한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서문당 문고로 나온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었을 때, 아버지가 딸을 죽일 수밖에 없는 그 장중한 비극성에 감동받은 바 있는데, 그 책을 읽게 된 계기도 유종호 선생 때문이다. 문학독서의 수준을 가늠하기 위한 질문이었을 것인데, 나는 레싱도, 에밀리아 갈로티도, 그것을 인용한 하이네의 <독일, 겨울동화>도 잘 알지 못했던 것. 이 책을 읽고서야 10여년 저쪽에 유선생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 ps 2. 이 리뷰를 본 후배가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하이네의 작품은 <독일 겨울 동화>가 아니라, <아타트롤>이라고, 아, 찾아보니 그게 맞다. 창비에서 교양문고로 나란히 <아타트롤>과 <독일 겨울동화>가 출간된 터라 두 작품을 헷갈렸던 모양. 블로그 글인데도 부실한 기억에 기대 대충 쓰면 안되는 모양이다. <아타트롤>의 해당 대목은 이러하다. "시민으로서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 / 자기 딸 에밀리아 갈로티를 단도로 찔러 죽였던/아버지 오도라도처럼/아타트롤도 차라리/앞발을 들어올려 / 자기 딸을 죽여버리고 싶을 것이다." (23장, 김남주 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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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2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든사이 2011-06-02 08:56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이 책에서 <피아니스트>의 감독인 폴란스키 얘기가 나와서 제가 헷갈렸던 모양입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2011-06-09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앵보 2011-06-15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보니 더 잘 썼네. 님 글의 특장 - 유려하고 단정하고 '멜랑'하고 빠르고, 무엇보다 이 네 개가 같이 있다는 - 이 더할 나위 없이 잘 드러난다요. 삘이 제대로 꽉 찼던 모양.

페크pek0501 2011-07-09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방문했는데, 책장이 놀랍군요. 맘에 들어요. 책도 책장도 참 잘 생겼습니다. 글 당선을 축하 드리며...

다음 방문엔 글을 꼼꼼히 읽어보겠습니다. 오늘은 꽂혀 있는 책만 보고 감.

모든사이 2011-07-10 12:28   좋아요 0 | URL
방문 감사드립니다. 책장은... 보시다시피 좀 잡스러운데 맘에 드신다니 더 고맙습니다.
 


 내간체로 쓴 사랑의 경건주의 

아마 범우사에서 나온 사루비아 문고가 아니었을까. 사춘기 즈음에 읽으면 딱 어울릴 이 책을 20여년이 훨씬 넘어 다시 읽으면서 가끔 낯간지러웠고, 더 자주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이름부터가 지극히 사춘기스러운 ‘제롬과 알리사’. 사랑하면서도 ‘더 높은 사랑’을 위해 상대를 내치는 알리사의 선택은 ‘어른’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 가장 읽을 만한 부분은 뒷부분의 알리사의 일기 부분인데,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내간체로 쓴 사랑의 경건주의’라는 말을 떠올렸다. 내간체는 규방 여인들이 구사하던 문체, 그 문체로 알리사는 경건한 사랑, 사랑의 성스러움, 그것도 따라야할 의무로서의 성스러운 사랑을 말한다. 이런 사랑은 지상에 존재할 리 없다. 그런데, 100여년이 지난 뒤 한국의 소설가 김훈은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바다의 기별>, 생각의 나무) 실현될 수 없는, 가망 없는 희망으로 존재하는 것이 사랑이라니, 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관료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최장집의 말을 빌자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질적으로 더 나빠졌다. 그의 제자 정상호 박사는 더 나아가 민주화 이후에 ‘관료지배’가 더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관료는 국민에 의해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 세력. 민주화 이후에는 관료만 힘이 세진 게 아니라 똑같이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 “사법부"도 힘이 세졌다. 정치가 문제해결을 못하니 헌재와 법원의 사법적 판결에 모든 것이 좌우되는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가 비일비재해진 것. 정상호의 이 책은 관료지배의 연원과 해소방법에 대해 말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체계화된 정책이념, 민간 싱크탱크 등의 정책네트워크, 정치적 기획가로서의 정치 리더십 세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을 갖춘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성공했고, 그렇지 못한 노무현의 동반성장 전략은 실패했다. 이 책에서 정상호가 제기하고 있는 또 하나의 쟁점은 ‘이익을 수렴하고 대변하는 제도로서의 정당의 존재’다. 정당은 이해관계 집단의 이익을 정치적으로 수렴하고, 이를 의회라는 제도적 공간 안에서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구다. 정당은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한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신화’다. 한국정치와 정당에 대해 상당한 통찰을 제공해준 책.   

 

죽음에 이르는 사랑, 죽음으로 가는 사랑

몽파르나스의 마르그리트 뒤라스 묘지에는 그저 ‘M. D'라는 두 이니셜만 있을 뿐이었다. 뒤라스의 이 소설은 그녀의 묘지명만큼이나 간결하되 시적이다.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피아노 교습을 받으러 간 여인이 카페에서 한 여자의 죽음을 목격한다. 피흘리고 죽어 있는 여자의 곁에는 “내 사랑, 내 사랑”하며 울부짖는 한 남성이 있었다. 두 연인은 지상에서의 사랑을 절대적인 경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것. 사랑의 어떤 지극한 경지를 죽음이라고 말하면 어불성설일 것인가. 다음날부터 여인은 이 카페를 찾아 두 남녀의 사랑의 흔적과 내면의 고투를 더듬어 나간다. 카페에 단골로 와 있는 낯선 사내와의 대화를 통해 두 연인이 도달했던 경지를 추체험한다. 타자를 통해 자신의 내부에 침잠되어 있는 욕망의 근원을 찾아나서는 것. 결국 여인과 카페의 사내는 두 연인에 대한 대화를 통해 바로 그 두사람이 도달했던 사랑의 경지에 도달한다.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대로 되었어요.” 뒤라스의 문장은 대단히 밀도가 높고, 중층적이며 그래서 암시적이다.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지만, 암시적으로 보여지는 여인과 사내의 내면에는 폭풍우가 치고 있다. 들끓는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연인들의 죽음과 낯선 자와의 대화, 극도로 절제된 대사로 풀어낸다. 고급소설이다. 
 

 

무지와 부재의 고통 

파리에 정주한 체코 망명객 여인이 사회주의 정권이 망한 뒤 고향을 방문한다. 쿤데라 자신의 내력인 듯, 이런 스토리에는 공산정권이 무너진 뒤 고향으로 돌아갔던 다수의 체코 망명객들의 집단무의식이 반영돼 있는 듯 하다. 인상적인 대목은 앞 부분의 ‘향수’(nostalgia)의 어원을 기록한 부분이다. “그리스어로 귀환은 ‘노스토스’nostos이다. 그리스어로 ‘알고스’algos는 괴로움을 뜻한다. 노스토스와 알고스의 합성어인 ‘노스탈지’, 즉 향수란 돌아가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 (...) 체코인들도 그리스어에서 취한 ‘노스탈지’nostalgie란 단어 이외에 ‘스테스크’stesk라는 그들만의 명사와 동사를 갖고 있다. 체코어로 표현된 가장 감동적인 사랑의 문장은 ‘나는 너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인데, 이는 ‘나는 너의 부재로 인한 고통을 견딜 수 없다’는 뜻이다. (...) 어원상으로 볼때 향수는 무지의 상태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나타난다. 너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네가 어찌 되었는가를 알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 고통, 내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는 고통 말이다.”  그리하여, 무지는 고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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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경우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가족을 통한 복지공급 체계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가족단위에서 이루어지는 복지체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유럽형 복지체제인 보편적 복지구조를 도입하면, 복지에 대한 가족의 역할은 점차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우 복지제도는 가급적 자발적으로 형성된 가족을 통한 복지제공을 기반으로 하되, 가족을 통한 복지 영역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정부의 복지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이미 전통적으로 축적된 가족이라는 복지체제가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린 만큼 우리 환경에서는 북유럽식 복지제도를 반드시 따라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며칠 전 누군가 책 한권을 건네주었다. 아마 사무실에 주욱 돌린 모양인데, <복지 논쟁 : 무엇이 문제이고 어디로 가야하나>라는 제목이다. 저자는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을 지낸 현진권 아주대 교수이고, 펴낸 곳은 ‘자유기업원’이다. 위에 인용한 대목은 이 책의 ‘결론’에 해당하는 대목이다. 이 부분을 읽고 나는 할말을 잃었다. 한국의 보수층이 복지에 대한 ‘대안’이랍시고 내놓은 게 ‘가족’이라니. 노후 보장은 아들 딸이 하고, 병에 걸리면 사돈에 팔촌이 도와주고, 가장이 실직을 하면 마누라가 밖에 가서 돈 벌어야 한다는 얘기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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