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하는 골짜기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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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어곡(別於谷)은 강원도 정선 부근의 간이역이다. 2005년 3월 21일 무인 간이역으로 격하된 뒤, 2009년 8월 민둥산 억새 전시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라고 임철우는 쓰고 있다.) “이별하는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이 역은, 간이역이 풍기는 쓸쓸한 낭만과 서러운 삶을 그대로 온축하고 있다. 소설가 임철우는 이 역 부근에 살았던 사람들의 인생유전을 같은 이름의 소설로 써냈다. <이별하는 골짜기>(문학과 지성사) 제목 그대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누군가와 이별을 하거나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다. 소설은 술술 잘 읽히고 등장인물들이 살아온 내력은 가슴시리다. 잘 쓴 소설이겠으나  내러티브의 밀도는 촘촘하지 않고 짓다만 건축물처럼 어딘지 허술하다.

임철우의 소설을 읽은 것은 꽤나 오래 전 일이다. <아버지의 땅>이니 <달빛 밟기>, <그 섬에 가고 싶다>같은 소설들. 그가 가장 공들여 썼다는 <봄날>은 아직 보지 않았다. 임철우의 예전 소설들이 그러했듯이, 그는 이 소설에서도 ‘역사의 서정화, 혹은 서정의 역사화’쯤으로 해석할 만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위안부로 끌려갔던 한 여인의 기구한 인생유전을 서정적인 문체로 보여주는 방식 말이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개인은 하나의 개별적 존재이되, 어느 날 닥쳐온 역사의 광기를 홀로 고스란히 감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의 전작들에서 개인에게 부과된 역사의 무게는 전쟁(6․25)이거나 광주학살이었다.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기차와 시골 간이역이 뿜어내는 향수와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남루한 시와 소설의 전통 속에서 기차와 역은 늘 그런 이미지로 재현되었다. 그것은 눈 내리는 날 시골 간이역의 풍경을 이야기하는 곽재구의 ‘사평역에서’와 같은 시에서 전형적일 것이다. 가난과 궁핍에 젖은 사람들이 대합실 톱밥난로 곁에 앉아 있는 모습.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사평역에서) 귀성열차를 탈 때마다 이 시구를 얼마나 자주 되뇌었던가. 내 손에 굴비와 사과가 없더라도 귀향의 내면은 언제나 상처와 얼룩들로 그득했었다.

귀향 열차에는 기형도의 ‘조치원’에 등장함직한 사내들도 언제나 쿨럭거리고 앉아 있었다.“간이역에서 속도를 늦추는 열차의 작은 진동에도/소스라쳐 깨어나는 사람들. 소지품마냥 펼쳐보이는/의심많은 눈빛이 다시 감기고/좀더 편안한 생을 차지하기 위하여/사투리처럼 몸을 뒤척이는 남자들/발 밑에는 몹쓸 꿈들이 빵봉지 몇 개로 뒹굴곤 하였다.”(조치원) 조치원 역의 그 허름한 역사에서 내려 버스를 탈 때마다 “견고한 지퍼의 모습”을 한 채 “가지런한 이빨을 단 한 번” 열어 보이는 사내들을 만나고, 그들이 “크고 검은 한 마리 새”가 되어 역사를 빠져나가는 것을 언제나 볼 수 있었다. 서울살이란 “내 삶에 있어서 하찮은 문장위에 찍힌 방점과도 같은 것”인 사내들. 내가 아는 그 사내들은 성수동 마찌꼬바에서 손가락이 뭉개져 귀향하거나, 지하철 공사장에서 허리를 다쳐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기차가 모더니티를 상징한다면, 곽재구나 기형도, 그리고 임철우가 보여주는 그 주변의 사람들은 모더니티가 부과하는 폭력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처와 얼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기차 그리고 역사(驛舍)는 한국적 모더니티의 슬픈 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본 것은 시골 소읍의 기차역에서 간호사로 취직이 되어 떠나는 큰 딸을 떠나보냈던 순간이었다(고 형은 내게 말했다.) 기차는 스물을 넘긴 처녀를 싣고 한국 모더니즘의 집약체인 도시로 내달릴 것이다. 제 품의 자식을 저 거친 대처로 내보내는 부성의 내면은 눈물범벅이었을 것이다. 말없이 이제 겨우 열 살을 넘긴 사내를 꽁무니에 달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내면은 한국적 모더니티가 부과한 슬픔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을까.

기차가 모더니티의 빠른 질주를 보여준다는 것은 그것이 초래하는 변화의 ‘물결’에 있을 것이다. 기차는 선으로 뻗으면서 면으로 확장한다. 비행기와 선박이 점에서 점으로 연결되는 것과는 다르다. 무슨 말인가. 기차는 철로와 철로를 둘러싼 지역을 서서히, 그리고 빠르게 모더니티의 세계로 바꾸어 놓는다. 선박과 비행기는 이차원적인 연결이 없어 그저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연결될 따름이다. 일본의 만주정복을 앞장서 이끌었던 만철은 일제의 싱크탱크이자 불모의 땅 만주에 모더니티의 신세계를 열어 젖혔다.(만철, 고바야시 히데오) 기차가 가는 어디든 이런 ‘근대의 질주’가 벌어졌는데(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박천홍), 그럼 초고속 열차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상징일 것인가.

질주하는 기차의 모더니티는 홀로 선 근대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겁다. 기차와 역사 주변을 다룬 시와 소설들에 등장하는 개인들이 한결같이 상처와 얼룩으로 번들거리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임철우의 이 소설에서처럼, 퇴락한 시골 역사에서 시를 쓰는 젊은 시인이거나, 업무상 과실로 사람을 죽게 만들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늙은 역무원이거나, 위안부로 한많은 생애를 살다가 들어온 노파이거나, 유년의 트라우마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중년 아낙이거나 죄다 기차와 역사 주변에 살아갈 인물들로는 딱 들어맞는 것이다.

어쩌면 기차가 주는 사비유(死比喩)적 인물들과 내러티브 때문에 이 책이 덜 재미있는 지도 모르겠다. 시골의 간이역은 퇴행성 낭만주의에나 어울릴 법한 배경이고, 개인이 감당하는 역사적 상처도 한국소설에서 모래알만큼이나 흔하다. 임철우의 서정의 역사화, 역사의 서정화는 그리 성공적이질 못했다고 봐야 한다. 한나절 집중해서 읽으면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는 이 소설을 후다닥 읽고도 못내 영 찜찜했던 것은 낭만이 끝간 데까지 간 것도 아니고, 낭만이 거세된 것도 아닌 이 어정쩡한 낭만주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촌기차역은 밀리오레라는 거대한 쇼핑몰 한구석에 옛모습 그대로 처박혀 있다. 문화유산으로서 보존하기 위해서라는데, 거대 쇼핑몰에 짓눌린 옛시절의 신촌역사는 낭만도 아니고, 뭣도 아니다. 임철우의 퇴행성 낭만주의가 꼭 그 짝이다. 그래도 주말 하루를 보내게 한 소설인데, 너무 혹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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