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대선 이후 ‘힐링용’ 영화라는 <레미제라블>을 보았다. 퇴근 후 집에 가다 문득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서 신촌의 한 극장 뒷좌석에 앉아 영화를 보았다. 앤 해서웨이의 표정연기에 감탄했고, 휴 잭맨의 부실한 노래실력에 실망했지만, ‘Do you hear people sing’, 이 노래가 합창으로 흘러나올 때 나도 눈물 몇방울 흘렸다. 어떤 집단적 열망의 표현을 감성적으로 극대화시키는 것은 뮤지컬/오페라 같은 장르가 가장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승리의 기억보다는 패배의 쓰라림이 정서적 울림이 더 컸다. 언제나 현재의 성취는 좌절되고, 미래는 유보된 채로 남는 것.
이 영화의 배경이 된 프랑스 혁명은 종종 성공하기도 했지만, 기실 끝없는 패배의 연속이었다. 흔히 근대 프랑스의 혁명이라면 1789년의 대혁명과 1830년의 7월혁명, 그리고 1848년의 혁명을 꼽는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1832년의 6월봉기는 1789년 혁명의 시작에서 1875년 공화국 헌법 채택에 이르기까지 80여년 혁명 역사의 소소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 민중들의 봉기는 파리콤뮌의 비극이 잘 보여주듯이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시체와 무덤으로 쌓아올린 비극의 역사가 근대 프랑스의 공화정이다. 공화정, 총재정, 왕정, 입헌군주제 등 혁명 이후의 정치체제 변동도 현란하다. 그러니, 18세기 말 ~ 19세기의 프랑스는 영화로도, 소설로도 그만한 소재가 없을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영화를 보면서 빅토르 위고가 왜 소설 <레미제라블>의 첫 대목에서 성인의 경지에 오른 미리엘 주교와 늙은 국민의회 의원을 등장시켰는지 깨달았다. 소설 <레미제라블>은 장발장을 회개와 구원의 길로 인도한 일흔 다섯 살의 주교 샤를 프랑수아 비앵브뉘 미리엘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거의 성인에 가까운 인물로 묘사된다. 장발장의 이후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자 이 소설의 주제를 삶으로 보여주는 인물인 셈이다. 위고는 이 소설의 1부 앞 부분에서 그와 늙은 국민의회 의원과의 만남을 꽤 길고 상세하게 풀어놓는다.
국민의회는 구체제의 특권을 고수하려는 귀족과 성직자에 맞서 제3신분이 중심이 되어 만든 공화주의 의회다. 주권이 왕이 아닌 국민에게 있음을 천명한 국민의회는 바로 그 자체로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된 1812년 이후의 상황은 국민의회도 국민공회도 붕괴되고 나폴레옹도 물러간 왕정복고 시기로, 루이 왕가인 부르봉 왕조(1814-1830), 그리고 오를레앙 왕정(1830-1848)이 지배하던 시기다. 그러니, 옛 국민의회 의원은 몰락한 혁명가요, 그가 풀어놓은 이야기들은 일종의 ‘후일담’인 셈이다. 그는 혁명이 가져온 혼란과 분노에 대해 지적하는 미리엘 주교에게 이렇게 말한다.
“루이 16세로 말하자면, 난 반대했소. 나는 한 인간을 죽일 권리가 내게 있다고는 생각지 않소. 그러나 악을 절멸시킬 의무는 있다고 생각하오. 나는 폭군의 종말에 찬성했소. 다시 말해서, 여성에게는 매음의 종말, 남성에게는 노예 상태의 종말, 아동에게는 암흑의 종말이오. 나는 공화제에 찬성함으로써 이와 같은 것에 찬성한 거요. 우애와 화합, 여명에 찬성한 거요. 편견과 오류의 붕괴를 도운 거요. 오류와 편견의 붕괴는 광명을 가져오지. 우리는 낡은 세계를 무너뜨렸소. 그리하여 비참의 도나기였던 낡은 세계는 인류 위에 나동그러짐으로써 기쁨의 항아리가 된 거요.”
“프랑스 혁명은 이유가 있었소. 그 분노는 미래에 용서를 받을 것이오. 그 결과는 더 나은 세계요, 그 가장 무시무시한 타격으로부터 인류에 대한 책무가 나오는 거요. (...) 그렇소. 진보에 대한 난폭함을 혁명이라 부르오. 혁명이 끝나면 사람들은 인정하오. 인류는 곤욕을 치렀으나 진보했음을.”
이것은 그가 죽기 직전에 단말마처럼 내뱉은 웅변이다. 보수적인 프랑스 시골의 농부들에게조차 ‘악당 G’라는 이름으로 외면받은 이 늙은 혁명 투사의 말을 듣고 미리엘 주교는 공감과 경탄의 감정을 느낀다. 주교-장발장, 프랑스 혁명-마리우스가 연관되는 방식은 그러할 것이다. 장발장은 혁명의 동참자이자 열혈 투사는 아니지만, 혁명을 통해 인간애와 자기구원의 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 역시 왕정에 반대하다 추방당한 공화주의자였고, 1848년 국민의회 의원이자 자유와 진보의 신봉자였다. 망명지에서 대작을 써냈던 자신의 심정은 시골에 홀로 쳐박힌 이 늙은 국민의회 의원에게 투영되어 있었던 것.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을 하면서 사막의 열기에 시달리고, 밤의 추위에 떨며 사기가 땅에 떨어진 자신의 병사들에게 “이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4천년의 역사가 너희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연설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폴레옹의 연설이 뛰어나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다. 위의 국민의회 의원처럼, 당시의 프랑스 인들에게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행위 하나하나를 인류와 역사의 움직임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제왕정의 타도는 인류를 지배하는 앙시앙 레짐의 타도인 것이고, 그들의 혁명은 일국 혁명이 아닌 인류사적 혁명이었다는 인식 말이다. Viva Fr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