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쏘다 - 이헌재가 전하는 대한민국 위기 극복 매뉴얼
이헌재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이헌재 전 부총리가 뜨고 있다. 참여정부 시기 경제부총리를 마지막으로 언론에서 사라졌던 그가 안철수의 멘토로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안철수의 출마선언장에 앉은 그의 얼굴은 예전에 봤던 매섭고 냉철한 경제인(homo economicus)이 아니라, 흰 머리칼에 주름이 여기저기 패여 있는 늙은 관료의 모습이었다. 진보진영에서는 그가 신자유주의자이며 모피아의 대부라는 이유로 비판한다. 안철수의 경제도 결국 모피아가 좌우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다. 그가 안철수 진영에서 어떻게 결합하고 어떤 역할을 할 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우려는 섣부른 감이 있다. 안철수의 경제=이헌재의 모피아 주도 신자유주의라는 식의 단순하기 그지없는 등식은 설득력이 없다. 나로서는 김상조등이 호들갑을 떠는 게 사실 좀 경박하고 우습다고 생각한다.

 

이헌재의 <위기를 쏘다>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그가 참 ‘잘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 잘남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은, 그의 명민한 두뇌,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 그리고 한국경제의 부침과 함께 흥망성쇠를 오가는 그의 삶의 우연성이다. 놀고 책만 보던 고삐리 이헌재는 고교 3학년부터 공부에 몰입하기 시작해 그해 대입학력고사 전국 수석을 하며 서울법대에 입학했다. 친구 소개로 만난 서울대 미대 출신의 부잣집 딸과 만나 무직자인 상태에서 한전 부사장이었던 장인이 몰아 부쳐 결혼을 했다. 직업이 없다고 투덜대는 마누라 때문에 “고시 그까짓 것 하면 되지”하며 5개월 공부해 행정고시 수석합격을 했다. 잘난 인간들만 모이던 재무부에 사무관으로 들어가 5년 만에 경제정책의 핵심부서인 금융정책과장이 됐다. 그리고초임사무관 발령난지 9년 만인 30대 초반에 국장이 됐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공직에서 퇴직한 이헌재는 보스턴대 유학, 대우, 한국신용평가, 조세연구원 등에서 낭인 아닌 낭인 생활을 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7년 공직에서 물러난지 20년만에 비상경제대책위원장, 금융위원장, 재경부 장관을 했고, 노무현 정부에서도 경제부총리를 역임했다. 그가 관료에 복귀할 때의 나이는 54세였다.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이 그는 정부와 기업, 대학과 연구원 등 다채로운 경험을 했으며, 그것은 그가 이른바 ‘시장’의 안팎에서 정책과 현장을 두루 꿰뚫어 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것이 그의 명민함에서 비롯된 개인적 이력이라면,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 역시 시장과 정부를 두루 오간 그의 독특한 경험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잘나가는 과장이었을 때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마침 그의 퇴사 이유가 됐던 율산사태가 터진 것이나, 김우중 대우회장으로부터 신임과 후원을 받은 것, IMF 구제금융 위기 당시 그가 관료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 등은 ‘우연성’을 이루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는 타고난 잘난 인간이면서도 운까지 좋은 인간이기도 했다.

 

이 책은 주로 김대중 정부 시절 그가 진두지휘했던 ‘한국경제의 구조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가 행한 기업구조조정, 은행권 구조개편, 대우몰락의 전후 등의 막전막후가 소설처럼 펼쳐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경제부총리 경험은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만큼 그의 삶에 있어서나 한국경제의 역사에 있어서나 김대중 정부 초기 2-3년은 그 뒤의 한국경제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산업화 시대의 한국경제의 ‘기원’이라면, 이헌재의 시대는 그 뒤 신자유주의 한국경제의 또다른 ‘기원’이 될 것이다. 이헌재 비판자들이 말하듯이 그가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라면, 그것은 그가 이 시기 만들어놓은 금융질서가 그 이후 한국경제를 좌우하는 원리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며, 그 질서가 여전히 완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터이다. <위기를 쏘다>는 그것을 경제학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그 당시 벌어졌던 사건과 사건의 뒤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서 풀어낸다. 이것은 경향각지의 군웅이 할거하여 일합을 겨루는 한국경제판 무협지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화두는 엉뚱하게도 백낙청 선생의 ‘근대와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는 창비의 명제였다. 이 말은 내 머릿속에서 아주 조악하게 ‘디제이노믹스’와 연결되었는데, 그것은 디제이 시기의 개혁이 시장 ‘이전’에 있는 한국경제에 ‘시장질서’를 부여하고, 동시에 그 시장의 문제를 넘어서는 문제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시장=근대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근대적 시장질서를 세우고(근대 성취), 시장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근대극복)이 김대중 정부 초기의 경제구조개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인 것이다. 이헌재는 관료가 가진 힘과 권력으로, 때론 침묵으로, 때론 자신의 멘토였던 김우중을 파산시키는 것으로, 시장에 규율과 질서를 도입했다. 또한 그렇게 형성된 시장질서에 국가의 역할을 대신하도록 넘겨주었다.

 

이헌재식 ‘관치경제’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여 질서와 규율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관치였던 것이다. 진보학자들은 이헌재식 관치를 비판하지만 결국 그것은 구제금융 시기라는 ‘상황논리’에 의해 기각당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관치조차도 ‘삼겹살 국장, 배추 과장’식의 MB물가 관리라는 조악한 관치경제와는 애시당초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장하준 식의 논리를 빌어, 그의 관치가 결국 경제권력을 ‘시장’에 넘겨주었다는 의미에서 ‘시장에서의 국가 퇴각’을 불러왔다는 점을 주목하고 싶다. 구조개혁의 칼은 국가에서 시장으로, 더 구체적으로는 ‘은행’으로 넘어갔고, 그 연장선에서 노무현의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선언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헌재의 내력은 관치경제의 이중성, 그것의 개혁적 의미와 퇴행적 양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실제적 사례로서 기억되어야 한다.

 

론스타의 먹튀 논란으로 주목받은 외환은행의 운명은, 이헌재에 의하면 잘못 끼운 첫 단추가 낳은 부정적 유산이다. 론스타를 비판하기에 앞서 외환은행은 감추어진 거대한 부실, 외자유치가 살길이라는 환상, 정부의 판단착오 등이 겹치면서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끼우는 것, 최근 하나은행이 외환은행을 인수했다. 다시 첫 단추를 끼운 셈이다.” 이헌재는 자신을 가리켜 “약간 개혁성향이 있지만 전반적 보수이며, 시장주의자요, 성장을 중시하는 친기업성향”이라고 규정한다. 맞다. 이헌재로 상징되는 경제의 앙시앙 레짐은 이제는 더 이상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세상이 아닌 것 같다.

 

생각해볼 문제는 또 있다. 모피아로 상징되는 이른바 경제관료들의 폐쇄적 네트워크. 이헌재의 멘토는 박정희 시대의 서강학파 남덕우 전 총리, 유신시대의 김용환 재무부 장관, 그리고 김우중 대우 회장이다. 김우중을 뺀다면 죄다 산업화 시대 한국경제를 이끌었던 모피아들의 대부들이고, 그들과 ‘이헌재 사단’이 지금까지도 한국경제를 이끌고 있다. (가령, 김석동 금융위원장) 그런데, 사실 이 ‘사단’은 별 내용이 없는 수사학적 과장에 불과한 것 같다. 개별개별의 특정한 인물군들의 패권이라기보다 하나의 ‘세력’으로서의 경제관료 집단이 존재하고, 그 집단이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신념체계가 문제일 것이다. 이헌재 본인은 이른바 ‘이헌재 사단’을 부인한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리고 이헌재로 대변되는 경제관료들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도대체 그들이 왜, 어떤 과정을 통하여 시장주의적 신념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특정한 상황에서 그의 판단과 논리는 보이지만, 굳이 하이에크, 레오 스트라우스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신념을 형성하고 강화해주었던 철학과 사상, 경제이론은 보이질 않는다. ‘현장’에서 몸을 쓰며 배운 ‘기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스웨덴 복지국가의 설계자였던 비그포르스 같은 인물과 비교해 보건대, 이헌재는 그 명민한 머리로, 구조조정의 칼을 휘둘렀을지언정, 구조개혁의 철학과 논리를 다듬거나 정리해내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비약하자면, 모피아들의 경제에는 ‘철학의 빈곤’이 내재하는 것이다. 질나쁜 관치경제의 대증요법만이 남은 지금의 경제관리도 그런 데서 비롯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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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s043 2012-10-01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 계획치않았는데 다 읽었네요. 피곤하고 졸려요 ㅠㅠ

모든사이 2012-10-01 15:50   좋아요 0 | URL
현실이 확실히 소설보다 드라마틱한 듯...그만큼 재밌었단 얘기? 새벽까지 니체를 보진 못할테니 재미는 확실히 독일철학자보다나은 모양이군.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