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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음악 순례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창비 / 2011년 11월
평점 :
서경식 선생을 알게 된 것은, 아마 국내의 다른 독자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박이엽 선생이 번역한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를 통해서였다. 그에게 미술은 단순한 미학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신과 주변의 삶을 성찰하게 하는 계기로서의 예술형식이었다. 파란많은 그의 가족사와 재일조선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그 책에서 미술이라는 매개를 통해 성찰되고 있었다. 창비 교양문고의 하나로 출간된 이 책의 반향은 나에게도 아주 깊은 것이어서 오래도록 서경식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 뒤로 그는 나에게 프리모 레비를 가르쳐 주었고, 재일조선인이라는 하위주체의 실존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소년의 눈물>과 같은 빼어낸 에세이거나 한겨레에 연재되는 심야통신도 개인의 실존과 사회적 삶이라는 서경식적 주제를 깊이 있게 드러내는 산문으로서 매혹적이었다. 철학자 김상봉과의 대화를 책으로 펴낸 <대담>(돌베개)도 두 사람의 개인적 이력 못지 않게 흥미로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 년 전이던가. <소년의 눈물>의 번역판 출간을 계기로 그를 만났을 때 생각과는 다른 퉁퉁한 풍채와 어눌한 한국어에 놀랐다. 그의 형들인 서승과 서준식의 면모는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서 보았지만, 정치범 가족이라는 선입견은 왠지 비만한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다고 느꼈던 것이다. (물론 편견이다. 그런데, 이런 편견은 ‘살찐 랭보’거나 ‘배나온 보들레르’처럼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상과도 같다.) 그는 산문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마디 한마디를 조용조용히 매우 사려깊게 풀어놓은 인물이었다. 그에게 모든 사유의 출발은 디아스포라와 재일조선인이라는 일본 내 타자의 실존이었다. 산문이란 한 개인의 내밀한 고뇌와 실존이 새겨진 주관적 형식이라는 것을 서경식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의 옆에는 일본인 여자가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바로 그 여인이 바로 이 책 <나의 서양음악 순례>에 등장하는 ‘F’이라는 이름의 여인이었던 것 같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는 음악과 여행, 그리고 서경식의 연인인 F와의 음악을 둘러싼 교유의 기록이라 할 만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음악가들과 그들의 음악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이름만 들어봤을 뿐인 지휘자, 작곡가가 숱하고 생전 처음 듣는 유럽의 음악축제도 많다. 그럼에도 이 책이 재미있게 읽혔던 까닭은 음악을 둘러싼 서경식의 삶과 사유를 따라가는 맛 때문이다. 정치범 가족이자 재일조선인인 그에게 음악이라는 예술형식은 불가피하게 정치적 현실과의 긴밀한 상호관련 속에서 사유될 수밖에 없으며, 그런 그의 관심은 이 책에서 윤이상과의 인연, 아우슈비치의 수인 오케스트라에 대한 고민으로 등장한다. (여성 수인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던 알마 로제에 관한 일화는 따로 기억할 만하다. 연주를 계속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지독할 정도로 엄격하게 단원들을 다뤘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을 시인 김갑수가 쓴 <텔레만을 듣는 아침에>라든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안동림의 <이 한 장의 명반>과 같은 음악 에세이들과 구별시켜주는 대목이다.
“음악이란 무서운 것이다. 한없는 청순과 고귀함, 그리고 바닥모를 질투와 욕망을 동시에 지닌 존재, 이쪽의 이해를 거부하면서 끌어당기고는 다시 뿌리치고 농락해 마지 않는 존재, ‘어디가 그렇게 좋다는 거지’하고 누가 물어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존재. 한마디로 불가해한 여성과 같은 존재, 그것이 음악이다. 음악에 깊이 빠지는 것은 여자한테 빠지는 것과 같아서 평온하게 살고 싶은 보통사람에겐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위험한데도 연을 끊어 버릴 수가 없다.” 이런 대목, 과연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라는 오래된 경구를 떠올리게 한다. 음악은 다른 예술형식과 달리 그 ‘직접성’으로 인하여 뚜렷이 구분된다. 언어와 캔버스와 같은 매개를 거치지 않고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직접 닿아 격랑을 일으키는 예술인 음악, 서경식이 말한 ‘무서움’이란 바로 그러한 것일 터이다.
음악에 대한 서경식의 생각은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는 제목의 에세이에서도 되풀이 된다. “다가가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끌려가는 것, 거절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음악이다”라는 말 끝에 “음은 피부를 알지 못하며 한계 또한 모른다. 거기에는 내부도 외부도 없다”라는 파스칼 키냐르의 말이 인용된다. 키냐르는 다시 “모든 경계를 없애버리는 음향은 귀를 개별화하기 보다는 집단화하는 데 기여해왔다. ... 특히 세련되고 복잡한 음악을 사랑하고 그것을 듣고 눈물까지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동시에 모질고 사납게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이 있다는 데 나는 놀란다. 예술은 야만의 반대가 아니다”는 구절에서 재인용되고 있다.
뛰어난 음악가들은 세이렌에게 몸을 바친 사람들이며 서경식 자신은 위험한 음악에 몰입하는 세이렌 앞에서 밧줄로 몸이 묶여 있는 오디세우스 같은 존재다. 그가 매년 짤즈부르크 음악제를 찾고, 유럽의 공연장을 누비며, 한국에 와서도 FM 라디오의 클래식 코너를 듣는 극성스러움을 보면 그는 음악에 사로잡힌 영혼 같다. 나로서는 서경식이 말하는 ‘위험한 음악같은 영혼을 지닌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쿤데라는 어느 소설에서 “바이올린의 영혼을 가진 여인”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육체성과 영혼이 결합된 존재로서의 여성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마음이 떨리면 몸도 떨리며, 몸이 울면 마음도 덩달아 통곡하며, 영혼의 울림이 몸으로 현현하는 그 흔연한 일체성 말이다. 바이올린처럼 민감하게 몸과 마음이 동시에 울리는 사람, 온갖 자극에 노출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타고난 천품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을 읽으면 질투가 난다. 서경식은 뛰어난 미술에세이스트에서 탁월한 음악에세이스트까지 겸비한 모양이다. 내 질투는 그의 빼어난 글솜씨와 깊이있는 사색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나같은 범인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이니 질투의 대상조차 못된다. 내 질투는 해마다 짤즈부르크 음악회를 찾는 그의 여유(?)에 대한 부러움이다. 결국은 경제력과 시간인가? 하기야 그것도 음악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야 불가능할 것, 결국 나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1만5천원짜리 밑줄을 그어가며 저자를 동경하다가 바닥모를 질투에 빠지는 것, 그거 말고는 없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