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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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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은 소설보다 영화로 먼저 알게 된 작가였다. 뒤틀린 욕망과 서늘한 반전을 보여주었던 영화 <어톤먼트>와 젊은 날의 실수로 평생의 사랑과 행복을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청춘들의 이야기 <체실 비치에서>. 공교롭게도 두 영화에는 외모에서부터 심리적 복합성을 드러내는 시얼샤 로넌이 작가의 퍼소나처럼 등장한다. 그의 작품은 묘사보다는 서술이 도드라지는데, 이 서사적 기술은 치밀하고도 정교하며, 차가울 정도로 가차없다. ‘하드 보일드의 원조쯤 되는 토마스 하디의 계보를 잇는 영국 소설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하여간, 뒤늦게 발견한 이 현대 영국작가의 작품을 내리 읽기로 하고 첫 장편으로 <이노센트>를 골랐다. 영화로 만들어진 <속죄><체실 비치>는 다음에 읽을 참이다.

 

작가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간략한 소개가 나온다. “‘베를린 터널’, 작전명 골드는 CIAM16의 합동작전으로, 19564월까지 일년이 조금 못되는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CIA 지국장이었던 윌리엄 하비가 책임자였다. 19554월부터 플라타넨 길 26번지에 거주하도 있던 조지 블레이크는 작전 기획위원회 서기로 일하던 1953년에 이미 작전을 누설했다고 추정된다.” 이 냉전 하의 조그만 사건, ‘베를린 터널사건은 이 소설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베를린이 마악 동과 서로 나뉜 시기, 서방 연합군측인 영국과 미국은 동쪽의 소련 점령 지역 아래로 터널을 뚫어 동베를린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통신을 도청하려 한다. 이언 매큐언은 이 에피소드에 로맨스와 살인, 배신과 회한을 버무려 한편의 잘 빚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따라서, 이 소설은 냉전 시대의 스파이 소설이면서, 로맨스 소설이면서, 치정과 살인에 얽힌 엽기적 스토리이면서, ‘순진한 한 영국인의 뼈아픈 회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이 소설은 영화화할 수 있는 가능성과 그에 따른 흥행요소를 두루 갖춘 소설처럼 보인다. 그의 소설들이 계속 영화로 만들어지고 일정한 성공을 가져다준 이유도 바로 이런 점일 것이다. 단단하게 서술된 이야기들과 그 이야기들이 가진 극적인 재미들, 주인공들의 감정을 섬세하고 정교하게 드러내는 장치들, “두꺼운 타탄체크 스커트와 빨간 미제 캐시미어 스웨터 차림과 같은 정확한(아니 차라리 사실의 나열과 같은) 문장들. 이언 매큐언은 이름 모를 꽃들이라거나 따스해보이는 자켓따위의 두루뭉수리한 서술을 하지 않는다.

 

나이든 탓인가. 주인공 레너드 마넘과 마리아가 약혼을 하던 날 밤, 우연히 저지르게 된 마리아 전 남편 오토의 살해와 시체 유기장면은 책장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우연한 충돌과 그에 따른 구두주걱으로의 살인, 사체를 유기하기 위해 토막을 내고 그걸 베를린 터널로 운반해가는 과정에 대한 이언 매큐언의 서술은 끔찍할 정도로 냉정하다. 토막내기라는 행위의 급박함과 심리적 요동은 무정한 서술과 병치되어 효과가 배가되는데, 이를 이끌어나가는 솜씨는 과연, 대가의 그것이었다. 그가 창조한 인물의 다급한 심리와는 정반대로 그의 서술은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이 일상의 베를린을 서술하고 묘사한다. 이야기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소설가라야 가능한 일이다.

 

이노센트는 사실 역설적이다. 레너드 마넘이 순진하게냉전적 대결의 한복판에 서게 되고, 로맨스와 배신의 한 가운데에서 자신의 순정을 배반당한다는 의미일 것인데, 그의 비극은 연인 마리아가 배신했다고 믿는 또 한번의 순진함에 있다. 그녀의 진실은 배반이 아니었고, 정작 배반은 그의 순진한 오해가 낳은 참사였던 것. 이언 매큐언은 마치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에서처럼 극적인 사건들의 시간이 지난 뒤, 먼 시간이 지난 뒤의 에필로그에서 사태의 진상을 후술한다. 심리적 시간의 지속과 그것을 급격하게 단절시키며 과거를 정반대로 재생하는 현재. 이 작가가 뒤늦은 후회와 가련한 회상에 능한 작가라는 사실을 에필로그를 통해서야 알게 되었다. 그는 줄리안 반즈, 가즈오 이시구로 이후 가장 즐겨찾게 될 것 같은 영국 소설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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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
익명의 여인 지음, 염정용 옮김 / 마티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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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떠올렸던 것은 스베틀라나 알렉세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였다. 두 책 모두 2차 대전과 그 전쟁을 몸으로 겪었던 여자들의 이야기다. 전장에서 죽어간 것은 주로 전투병인 '남자'들이었지만, 그 전쟁의 후과를 가장 잔인하게 겪은 존재들은 여자들이었다. 특히 '패전국'의 여자들이 그러했다. 아마도 고대의 전쟁 이후로 모든 전쟁의 양상은 그러했을 것이다. 전쟁이 아니어도 제국의 지배하에 놓인 식민지의 여성들은 제국-식민 체제하의 최말단 '내부식민지'로서 이중적 억압과 폭력 속에 놓여 있었다. 스베틀라나의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주로 '민중'이라면, 이 책의 저자는 지식인 여성이다. 그녀는 독일의 패전과 전후의 상황을 섬세하게 관찰하며, 예민한 자의식으로 러시아 병사들에게 '그짓'을 당한 자신의 경험을 성찰적으로 드러낸다. 


"별안간 국민이 아닌 개인이 되었다."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 포성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쓰여진 문장이다. 이 짧은 문장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인 진술이다. 국가라는 보호막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공동체에 결속되어 있는 '국민'도 사라졌다. 어제까지 독일의 승리를 떠들던 나치 지도부와 미디어도 없어지고, 쓰라린 패배를 온 몸으로 겪어야 하는 것은 그저 나약한 '개인'일 뿐이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남의 집을 뒤지거나, 추위를 막기 위해 시체에서 신발과 옷을 벗기고, 감자 한알을 두고 서로 아귀다툼을 해야 하는 것은 이제 낱낱의 개별자들이다. 여자들은 정복자들에게 자신의 몸까지 내줘야 한다. 아니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몸'을 빵과 거래해야 한다. 함락직전에도 "구원이 가까워졌으며 승리가 확실하다고 믿고, '그분'은 그리스도 만큼이나 믿을만하다고 장담"하는 나치 광신도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보통 베를린 시민들은 자신의 아내와 딸이 러시아군에 겁탈을 당한 뒤에야 '패전의 현실'을 깨닫는다. 


"나약한 성이 된 남자들. 여자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움튼 일종의 집단적인 환멸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여자들을 지배하던 남자들, 강한 남자를 찬미하던 나치 세계가 흔들리고 있다. 나아가 '남성'이라는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전쟁에서 남자들은 조국을 위해 죽고 죽일 수 있는 특권이 남자에게만 있다고 주장해왔다. 전쟁은 우리를 변화시켰고 우리는 담대해졌다. 이 전쟁이 끝나면 수많은 패배와 더불어 '남자들'의 패배도 찾아올 것이다."(p.58)


그러니, 전쟁에서 진다는 것은 군대와 국가의 패배이자 남성성의 패배이기도 하다. 저자의 '애인'이었던 게르타가 나중에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애인이 쓴 이 일기를 읽고 나서 '겁탈'이라는 말을 듣고 "제정신이 아니라는 듯이 쳐다보더니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떠난다. 이 책이 미국에서 먼저 출간되고 나중에서야 스위스와 독일에서 출간된 것도 이해가 된다. 한국 남자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흥분하고 분노하는 심리의 저변에는 패배한 남성성을 부정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한 대목. "러시아 병사가 그녀를 끌어내려 하자 함께 지내던 어떤 남자가 이렇게 외쳤단다. '제발 빨리 따라가요. 당신이 우리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잖아요'" 이를 두고 저자는 "서구 몰락에 대한 간략한 주석"이라고 덧붙인다. 그 몰락한 서구는 '남성성으로서의 서구'다. 러시아 병사들은 동물적 강간을 일삼다가 더 나아가 독일 여성들에게 순정함과 자발적 애정까지 요구한다. "그들은 정복한 향락의 대상에게서 단정함과 순박함과 고귀한 성품까지를 요구한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몰락한 남성성 만이 아니라 폭력의 주체인 남성적 시각 저변의 무의식이 이러하다. 


이 내밀한 일기의 주인공은 오랫동안 익명으로 묻혀 있다가 나중에야 기자출신의 마르타 힐러스라는 여성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녀는 유럽 10개국을 여행했으며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를 할 줄 알고, 공산주의자로 러시아에 머물기도 했으나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전쟁을 맞았다. 그녀는 러시아군의 강제에 의해, 또는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내어 준다.(아니 강제당한다) 그녀 주변의 독일 여성들은 나이가 들거나 어리거나 간에 만나면 서로 "너도?"라고 물을 만큼, 러시아군에 의한 집단강간이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당시 270만명의 베를린 주민중 200만명이 여성이었고,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베를린 여성은 거의 없었다. 그녀의 선택. "다른 온갖 늑대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마리 늑대를 불러들여야 해, 장교를. 가능한 계급이 높아야 겠지. 지휘관이든 장성이든, 내가 데려올 수만 있다면." 전후의 혼란기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인 야만의 세월이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한 사망자와 학살자 수를 러시아의 그것과 단순비교했을 때, 베를린의 집단 강간사태는 어쩌면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죽은 러시아 민간인과 군인, 독일의 전격전, 나치친위대가 자행한 동유럽 유대인과 러시아인 학살과 강간은 훨씬 더 광범위했고 피해자도 많았다. 패전 당시 베를린 주민들도 자신들의 겪는 고통이 '인과응보'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 독일인 집에 거칠게 침입한 러시아 병사들은 '아기'를 보자 갑자기 온순해지며 폭력을 멈춘다. 그리곤 독일군이 고향마을에서 아이들을 찔러 죽이고 아이들의 머리를 벽에 내리쳐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 군인들도 그곳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야." 독일인들은 그들이 저 '농민'의 자식들인 러시아 병사들보다 더 문화적이며 문명화된 존재라고 인식하지만, 실상 독일 군대(그리고 히틀러를 지지함으로써 암묵적으로 그들의 살인에 정당성을 부여한 독일인들)의 폭력은 그들의 문화가 추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히틀러의 '대중독재'를 탄생시킨 독일적 특수성, 독일인의 기질들을 드러내는 대목들을 문득문득 보여준다. 스스로 낯설게 하기, 또는 자기 객관화할까. 내가 밑줄을 그은 대목들도 대개 파시즘을 가능케한 독일인의 심성구조를 보여주는 부분들이었다. 가령, 이런 문장들. "질서의 원칙을 떠올려보라. 그것은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해 있으며, 우리는 따를 뿐이다." "어떤 남자도 여자-자기부인이든 이웃의 부인이든 상관없이-를 정복자에게 내준다고 해서 체면을 구긴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지배자를 거역해 화나게 만든다고 못마땅해할 것이다." "독일 민족에게는 빨치산 기질이 없다. 우리는 영도와 명령을 필요로 한다.""한 여자를 마주쳤는데, 안마당 구석에서 치마를 까 뒤집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거리낌 없이 볼일을 보았다. 베를린에서, 독일 여자가 드러내놓고 이런 행동을 하다니." 


"베를린 방송이 흘러나왔다. 방송은 거의 언제나 뉴스와 비화, 피비린내나는 사건, 시신발굴, 잔학행위들을 보도했다. 동부지역에 있는 대형 강제수용소들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불태워졌으며 대부분 유대인들이었다고 했다. 그들의 시신을 태운 재로 비료를 만들었다고 한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모든 것이 두꺼운 장부들에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죽음마저 꼼꼼히 기록하다니, 그야말로 착실한 민족이다. 밤늦게 베토벤의 곡이 흘러나왔다. 잊고 있던 음악을 듣고 있자니 눈물이 났다. 나는 방송을 꺼버렸다. 지금은 들을 수가 없다."(p.275) 


저자는 스스로 유럽 여러 곳을 가보았고, 공산주의, 의회주의, 파시즘을 바로 가까이에서 경험한 지식인 여성이지만, '나찌즘'은 그녀에게조차 내면화되어 있다. 파리 여행 중 뤽상부르 공원에서 만난 한 네덜란드 남자와 로맨스가 펼쳐지려는 순간, 그녀는 그와 함께 걸으며 자신도 모르게 '군인들처럼' 걷기 시작한다. 그순간 남자는 "아, 총통의 딸이군!"이라 말한다. 자신은 네덜란드인이자 유대인이었던 것. 결국 그들은 다음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그녀는 이 에피소드를 두고두고 곱씹는다. 그녀는 나치체제에 대한 찬성여부와 상관없이 자신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비록 원하지 않았다하더라도 나를 둘러싸고 물들였던 공기를 들이 마셨다"는 사실을 토로한다. 그녀의 이 도저한 자기고백과 성찰들이 이 책을 단숨에 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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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당과 선군정치 - ‘미지의 나라 북한’이라는 신화에 도전한다
헤이즐 스미스 지음, 김재오 옮김 / 창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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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마당과 선군정치>의 원래 제목은 'North Korea : Market and Military rule'이다. 그대로 해석하면 '북한 : 시장과 군사정책' 정도가 될 것인데, 이 영어 제목은 우리말로 번역된 '장마당'과 '선군정치'라는 단어의 뉘앙스와 전혀 다르다. 장마당=market, 선군정치=military rule인가? 알려져있다시피, 장마당은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소규모 개인(또는 집단, 기업소) 간의 거래 장소라는 의미를 가진다. 자본주의적 의미의 '시장'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 시장의 초기적 형태, 원초적 형태에 더 가깝다. 선군정치 또한 북한의 경제적 군사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채택된 '군사력 우선주의'를 의미한다. 이런 독특한 배경을 가진 '북한식 언어'이기 때문에 영어에서 더 적절한 대체어를 찾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 제목, 장마당과 선군정치는 이 점에서는 아주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된다. 


북한은 우리에게 현실적인 위협이면서 화해와 협력, 나아가 통일의 당사자라는 이중적 지위를 부여받아 왔다. '햇볕정책' 10년이 지나 지난 두 정부의 '달빛 정책'이 이뤄지는 동안 북한은 화해와 협력의 대상에서 현존하는 최대의 위협이라는 지위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한반도 평화를 위한 협력 대상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시각이자 그동안의 변화된 남북관계라면, 북한이 스스로 '최대의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미국은 지금의 트럼프 행정부에까지 부시 행정부의 '악의 축'이라는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 같지 않다. 악의 축, 비정상국가, 악마적 제국, 인권유린의 나라, 사악하고 믿을 수 없으며 무자비한 독재국가 등 북한에 대한 수사학은 바뀌었으되 기본적인 시각은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에게 북한은 언제된 붕괴될 가능성이 내재한 국가였다. 서구의 시각에서는 지속불가능한, 이해불가능한 국가로서 여기에는 저자에 따르면 북한을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우주 공간에 있는 무언가"로 생각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헤이즐 스미스는 북한에서 2년여 체류를 하고, 이 지역에 대한 연구를 거듭해온 사람이다. 최근 북한 사회의 변화와 관련해서 이 책은 가장 신뢰할 만한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서구인(미국)이 가진 북한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북한 주민들의 삶에 대한 '현장연구'와 실제적인 자료를 가지고 지금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종석이 취했던 내재적 시각과 한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외재적 분석틀을 활용하여 북한의 '실상'과 '변모', '평가와 비판'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미국의 주류 언론이 크게 의지하고 있던 비정상국가론과 북한붕괴론에서 벗어나 북한사회가 가진 상대적 내구성, 밑바닥으로부터의 변화와 북한 체제 중심 세력의 정치적 군사적 선택에 이르기까지, 최근 몇년 동안 읽은 북한 관련 서적 중 얻는 바가 아주 컸다. 


지난 4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만났던 한 북한전문가는 "김정은이 왜 지금 회담에 나선 거냐"라는 질문에 "더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라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사태의 추이를 보면 그의 진단은 아주 정확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 상황"은 '인민경제'가 바닥으로부터 꿈틀거리기 시작하여 경제성장에의 욕구가 비등점에 달하고 있고, 이제 활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미국을 비롯한 경제제재에서 벗어나야 하는 형국을 의미하는 것일 터이다. 비핵화와 체제보장, 경제제재 해제를 둘러싼 '빅딜'은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타개책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이같은 북한의 선택 배후에 깔린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아주 적절한 참고서였다. 


그는 지금의 북한의 변화를 한마디로 '시장화'라고 규정한다. 북한에서 시장에 해당하는 장마당은 현재 전국적으로 500여개에 이르고, 이는 보다 광범위하게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식량위기 시기인 이른바 '고난의 행군' 이전에는 개인의 사적 영역에 이르기까지 당과 관료제에 의한 광범위한 국가통제가 이뤄졌다. 그러나 국가가 인민에게 '고통'을 감내할 것을 요구했던 '고난의 행군'은 역설적이게도 인민에 대한 국가통제가 완화되거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적영역'을 만들어 냈다. 국영 상점은 더이상 물품을 제공하지 못하며, 국가로부터 받은 배급표는 유명무실하고, 국영기업소는 가동되지 못했다. 아사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북한 인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살아야 했고, 스스로 물건을 만들어 '거래'에 나섰으며, 자생적인 장마당이 공개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굶주림과 같은 극한적 상태에서 가족의 '먹을 것'을 챙기는 것은 남자가 아닌 여성의 몫이었다. 장마당의 주역 또한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으며, 이들에 의해 북한식 시장주의는 싹이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적부문의 팽창과 장마당 경제의 부상으로 북한은 불가피하게 2002년 경제관리개선조치라는 시장 질서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북한의 '시장화'는 이제 불가역적인 상황이 되었다. 김정은의 선택 역시 북한 내부의 자생적 시장화를 수락하고, 이를 활성화하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것을 인식한데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북한 사회의 내구성, 지배체제의 견고함을 말할 때 '시민사회의 부재'를 꼽기도 했는데, 이런 상황을 고려하자면 북한에 없는 것은 '정치적 시민사회'이지 이미 '경제적 시민사회'는 형성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제 북한은 '제국주의에 맞선 애국심'에만 기댈 수 없는 지경인 것이다. 특히,  "청년을 시장화라는 사회적 역학으로부터 격리하려는 선군정책의 노력에도 벼락부자는 청년들에게 새로운 역할모델을 제공했다."(p.319)


이런 점에서 북한이 '핵무장'을 하고 비핵화 협상에 나선 것은 매우 '합리적'이다. 그들은 "카다피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리비아 정권을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알았고, 재래식 군사력에서도 남한에 한참 못미친다는 점(남한의 국방비는 북한의 연간 총 GDP에 해당한다)을 알기에 핵무장에 착수했던 것. "선군의 논리는 재래식 군사력과 외교수완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정권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대처방안은 '핵무장'이었다."(P.338) 그러니, 오로지 핵 하나로 체제보장과 경제제재 해제, 경제지원과 국교정상화까지 거의 모든 것을 얻어내야 하는 북한으로서는 미국과 그리고 한국과 끊임없이 '쪼개기식 주고받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매우 합리적인 '장사치'의 논리인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시장화, 위로부터의 핵무장과 비핵화 협상. 지금의 북한을 이해하는 두가지 키워드다. 


"냉전 기간 동안의 엄격한 명령경제에서 오늘날 시장화된 사회로 변모한 북한의 모습은 계획되거나 예견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이 아니라 주민들이 외부적 내부적 긴급사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이해하는 것으로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여성들을 중심으로 수백만명의 소상인들이 물품을 교환하고, 거래하고, 판매하면서 민간경제에 전면적으로 참여하는 자기주도적 활동이 아래로부터 그리고 안으로부터 사회를 변모시켰다. 북한 사회의 변화는 외부에서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일상생활에서 대부분의 북한 주민은 생존하기 위해,그리고 드물게는 번창하기 위해 정부의 통제를 피해가야 했다. 북한 정권이 생명과 생계유지에서 시장화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공식 발표와 실제 생활 사이의 괴리는 심화되었다. 정권은 경제적 고난을 종식시키지 못했고, 북한 주민들은 중국과 남한의 더 나은 생활수준을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선군 정권의 정당성이 위기를 맞았다. 남한을 향한 북한 당국의 공격적인 수사는 북한이 남한보다 부유하지 않지만 더 정당성있는 한국임을 북한 주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측면도 있었다. 오래전 디즈레일리가 언급했듯이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수단이었다."(p.355-356)


이 책의 초반부는 북한에 대한 서구의 일반화된 편견을 꼬집고 있는데, 이 부분은 또다른 의미의 '북한 바로 알기'가 필요한 지점이다. 1)우선 서구언론(그리고 한국의 보수언론 포함)의 보도와 달리 북한의 외교관들은 마약밀매와 위조지폐 혐의로 사법적 판결을 받거나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 2)북한의 핵탄두는 8개 내외로 추정되지만 미국은 2200개의 핵을 가지고 있어 비교불가능한 수준이다. 3)벼랑끝 전술은 북한의 특이한 외교행태라고 평가되지만, 세상의 모든 외교는 벼랑 끝 외교다. 4)미국은 북한의 무기수입을 금지시켰고 엄격히 통제했는데, 2013년 북한이 수입하려던 쿠바산 무기가 압류되었을 때, 그 안에는 '카스트로가 혁명을 시도했던 때'에나 쓰던 무기들이 담겨 있었다. 5)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 정부가 인민을 굶겨 죽인 것은 아니며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사자는 속출했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북한의 출산율은 동남아 국가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6) 어린이들의 보건상태가 고난의 행군 시기 최고조에 이르긴 했어도(체력저하율 15.6%) 곧 5%로 줄었고, 이는 동아시아 평균 4%보다 높은 것이다. 7) 북한의 기대수명은 보도와 달리 69세 정도로 식량부족으로 일찍 죽을 정도는 아니다. 등등 


이같은 서구의 언론이 만들어낸 북한에 대한 '악담'은 끝이 없는데, 대체로 김정은 체제가 유지되는 가운데 당과 국가의 통제가 이뤄지고 있기는 해도, '범죄국가'로서 '세뇌된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는 곳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러한 저자의 기술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그가 남한의 친북한 학자이거나 서구 정부의 일원으로 북한에 머무른 외교관이 아니라 독립적인 영국의 연구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일차적 독자들은 '무식하면서도 용감하기 그지 없는 NYT, WP, CNN의 소위 북한 관련 기자들'과 군수산업체로부터 자금을 수혈받는 미국 싱크탱크의 소위 동아시아 전문가들이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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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 한국인 유일의 단독 방북 취재
진천규 지음 / 타커스(끌레마)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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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진천규는 기자로서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다. 한겨레 창간 사진기자로 지금까지 6차례 방북을 하여 취재를 했고, 2000년 김정일과 김대중 대통령이 만나는 역사적 장면을 촬영한 기자로도 알려져 있다. 한국기자들의 방북취재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미국 시민권을 얻은 그는 미국의 대북폭격과 북한의 미사일 보복 등의 설전이 오가는 일촉즉발의 한반도 위기 상황속에서도 방북취재를 할 수 있었다. 책의 대부분은 사진이고, 한 두시간이면 후다닥 읽을 수 있는 분량의 텍스트로 이뤄진 이 책이 가진 미덕도 바로 이것이다. '잔혹한 독재자의 나라'이자 '비정상 국가'라는 미국 주류 언론의 지배적 인식에서 벗어나 '현장'에서 확인한 현재의 북한, 진천규는 그게 가능한 자리에 있었다. 


1989년 황석영의 방북이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삶이 거기서도 지속되고 있음을 일깨워 줬다면, 이 책은 경제제재하의 북한에서도 삶이 지속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한적이나마 경제가 성장하고 삶이 개선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서 구입한 도시락은 아주 알찼고, 옥류관에서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대동강변에서는 휴대폰을 들고 통화를 하거나 나들이를 나선 가족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북한의 일상은 과거의 이미지에서와 달리 단조롭거나 경직되어 있지 않고 경쾌하거나 심지어 발랄하기까지 하다. 북한이 고난의 행군 시기를 벗어나 활력을 되찾고 있음은 짐작했지만, 이 책에서 확인한 북한은 생각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 있었다. 제재와 압박이 북한의 붕괴를 가속화하리라는 '자기충족적 희망'은 미국 행정부의 일부에서나 통하는 전망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방북했을 때 연도에 늘어선 북한 주민들이 꽃다발을 들고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절망적인 느낌을 가졌었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그 자리에 나왔을리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순전히 강제적으로만 동원되었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온전한 개인의 자리가 여전히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판단과 행위의 주체로서 '시민적 개인'을 기대하는 것은 아직도 멀고 먼 길이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비록 '장마당'에서 거래의 주체로서의 '개인'이 부상하고 그들 개인과 개인의 상호작용이 현재 북한의 일상을 밀고 나간다 하더라도 정치적 의미에서 '개인'은 아득히 멀어보였던 것이다.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의 북한은 국가의 영역이 개인과 가족으로부터 일정하게 분리되어 가고 있는 중인 듯 했다. 국가의 전면적 지배에서 '사적 영역'이 분리되고 그것이 꿈틀거리면서 지금 북한의 일상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 


이 책에 실린 사진은 가장 큰 미덕이다. 게다가 저자는 사진가이면서도 글을 아주 잘 쓰는 기자다. 사진들은 그 자체로 북한의 일상에 대한 정직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표정 저 너머의 감정과 평상적 감각을 드러내보인다는 점에서도 뛰어나다. 여느 북한관련 책들과는 이런 점에서 다르고, 북한의 이해에 실제적인 도움이 된다. 그것은 북한을 '철의 장막 뒤의 이상한 왕조국가'라는 식의 대상화이거나 이국적인(?) 상품화의 시선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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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비 탁자
공원국 지음 / 나비클럽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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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비 탁자>는 한국어로 쓰여진 티벳 다큐멘터리 같다. '초모랑마'나 '실크로드'를 다룬 티비 다큐멘터리 속의 티벳은 문명의 검은 손길이 닿지 않은 전통적 삶의 방식이 유지되는 곳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 곳에서는 '문명'에 물들지 않는 '착한 사람들'이 산다. 이런 티벳에 관한 시각도 어쩌면 또다른 의미의 오리엔탈리즘 일 수도 있겠다. 우리들의 삶이 이미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으니, 그나마 아직 '순수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곳이 위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도, 중앙아시아, 티벳, 몽골, 부탄과 네팔에 대한 이상한 동경에는 이런 순수에의 욕망이 바닥에 깔려 있다. 거기에서 우리가 상정하는 순수가 보장되지도 않을 것이고, 실제로 그렇지 않을 테지만(가보지 않았으니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마는), 이 지역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오랫동안 지속적인 인기를 끌고, 간헐적으로 방영되는 이유는 그 욕망이 제법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왜 이 소설이 다큐멘터리 같다고 느꼈는가. 그것은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지역의 순수한 자연과 심성 때문이 아니라 거기서 진행되고 있는, 다큐 영상과는 정반대의 양상이 리얼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산을 깎아 고층 빌딩을 짓고, 협곡을 막아 댐을 만들고, 사람들이 몰려와 사막과 진흙 위에 신도시를 만들고, 건설 브로커와 사기꾼, 부패한 관리와 업자들이 창궐하는 오늘날의 '중국식 국가 자본주의'의 주변부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다큐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티벳스러운 것'은 가끔씩 묘사되고 있는 하늘과 별, 바람과 어둠이다. 전통적 방식의 건축을 고집하는 목수(체링의 아버지)거나 티벳 여인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여인 페마와 같은 토착인들의 심성과 의지도 세속 자본주의의 이익과는 무관해 보인다. 작가는 토착적인 심성을 가진 사람들과 상처를 입어 이 곳으로 스며든 외로운 외지인들을 주인공 삼아 이 소설을 밀고 나간다.주인공들을 닮은 문장들은 짧고 함축적이며, 티벳의 맑고 단순한 하늘을 닮았다.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사천성 대지진이다(라고 추정된다). 지진 앞에 수십층 건물 대도가원은 맥없이 무너지고, 급기야는 댐을 폭파하고 신도시와 구도시 전체가 물로 허물어진다. 소설은 지진 속에 묻힌 자들과 그들을 구하려는 사람들, 지진으로 드러난 부패와 이권의 고리,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펼쳐 보인다. 건물을 지어서는 안되는 산과 지형에 들어선 초대형 건물들은, 그것이 중국 자본주의의 서부 개발 상징이자 문명의 척도처럼 보이지만, 지진 앞에 속수무책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무너진 건물 안에 갇힌 사람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티벳의 가문비 나무로 만든 커다란 탁자 하나. 그 아래 아이 둘과 남자하나가 밀려드는 토사와 건물 잔해 속에서 밤하늘의 별 자리 이야기를 불빛 삼아 겨우 버텨 살아남는다. 남자가 지어낸 별 이야기는 지옥 저 너머의 이야기이자 미완의 이야기, 그 자체로 티벳인들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문비 나무에 의지하여 문명의 붕괴를 견뎌내기. 붕괴의 와중에서 이야기로 버텨내기, 중장비와 공병대가 아닌 티벳 여인의 삽으로 산 사람들 구조하기. 


이 소설은 인류학자인 작가가 처음으로 써낸 장편이라고 한다. 이 책의 첫 몇 페이지를 읽었을 때, 나는 이 작가는 대여섯권의 소설을 집필한 중견 소설가일 것이라 착각했다. 그의 문장은 처녀 소설을 써낸 자의 것으로는 보기에는 막히고 맺힌 데가 없이 그곳 사람들의 삶의 리듬처럼 흘렀던 것이다. 낯선 곳과 낯선 사람들을 배경으로 그들의 심성과 이력을 보여주는 방식도 고수급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내들, 체링, 지우, 왕빈, 장인우는 직업이 다르지만 모두가 비슷한 성격과 심성을 가진 사람들처럼 보인다. 식물성의 심성구조를 가진 자들. 소설의 각 장들은 영화의 시퀀스처럼 한편 한편 끊어질 듯 이어진다. 작가는 이런 인물들과 단편적으로, 내적으로 이어진 시퀀스들로 드라마틱할 수 있었던 이야기를 정지된 영상을 보여주듯이 써내려 간다. 오랜만에 만나는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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