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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
김종인 지음 / 동화출판사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김종인을 두고 세가지 측면에서 우리 경제학계의 마이너리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영남이 아닌 호남 출신이고, 서울대가 아닌 외대 출신이며, 미국 박사가 아닌 독일 박사라는 것. 이는 한국 사회의 주류는 아닌 것이 분명하고, 더구나 경제학계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마이너리티적 측면이 김종인에게 그리 큰 약점으로 작용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독일 유학후 서강대 교수로 있으면서 박정희 정권의 정책수립에 깊숙하게 관여했으며, 전두환의 국보위에도 참여했고, 국회의원을 네 번 지냈으며, 노태우 정부에서 보건사회부 장관, 청와대 경제수석, 그리고 박근혜 캠프에서는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지냈다. 어느 모로 보나 마이너리티로 살아온 것은 아닌 셈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이런 주류세계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의 가족적 배경으로 풀이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초대 대법원장이었던 가인 김병로 선생이고, 그의 처는 박정희 대통령을 9년이상 보좌한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의 조카다. 출신의 마이너리티는 ‘빽’의 메이저리티로서 충분히 커버 가능한 것이었던 것.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동화출판사)는 김종인이 그 자신의 전매특허인 ‘경제민주화’에 대한 생각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은 학문적 저서라거나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 써내려간 ‘역저’라고 보기 힘들 것이다. 그도 4선을 지낸 정치인이고 보면, 구성이나 내용의 깊이는 총선을 앞두고 정치인이 펴내는 흔한 ‘이벤트용 저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이 읽을만한 까닭은 독일 경제와 미국 대공황을 깊이 있게 천착했던 김종인의 학문적 배경과 한국사회의 중심부에서 줄기차게 경제민주화 혹은 대기업집단의 개혁을 부르짖어온 경험이 녹록찮게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경제학계와 관료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미국 유학파들의 신자유주의 경제학과는 시각을 달리하는 ‘마이너리티 리포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그야말로 마이너리티 경제학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섭섭해 할지도 모르겠다. 김종인의 그것을 마이너리티라고 부르는 것은 그저 ‘상대적인 것’일 따름이다.)
그는 국정에 관여하기 시작한 70년대부터 줄곧 ‘분배’의 요구를 수용하여 경제질서를 재편해야한다는 주장을 해왔다. 모두가 성장을 외칠 때 그는 재벌중심의 성장은 한계에 봉착할 것이고, 노동자들의 분배요구를 외면할 때 한국사회가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가 노동자에게 무슨 대단한 애정이 있어서 이런 주장을 펼쳤던 것은 아니다. 이 책을 통하여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시장질서를 온전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분배의 요구를 수용하여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경계’를 절대로 넘어서지 않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보와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체제내적 개량주의’인 셈이다. 그런 정도의 입장임에도 그의 주장은 줄곧 재계의 반대에 부딪쳤고, 정치권에서는 외면을 받았다.
그는 이 책에서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 그리고 미국 자본주의가 어떻게 ‘수정’되어 오늘에 이르렀는가를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테오도르 루즈벨트가 록펠러가 소유한 거대재벌 스탠더드 오일을 강제분할 시켰다든가,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부자증세, 저소득층 감세를 했다거나 미국의 연금제도인 소셜시큐리티를 실시했다는 역사적 사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기업가 세력이 막강해지면 이를 상대하는 세력으로서 노동조합이 커져야 하고, 정부는 그런 약자를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갈브레이드가 말한 대로, “카운터 베일링 파워기 존재하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시장에 맡긴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고, 하나의 세력이 커지면 반대로 그를 견제하는 세력이 존재하고 지원되어야 시장경제가 건전하게 발전한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해결 못하면 보이는 손이 해결해야 한다는 것. 그가 만든 헌법119조 2항의 경제민주화 조항은 “양극화 등으로 경제사회적 긴장이 고조되어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위협받거나 흔들릴 우려가 커질 때 정부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붕괴를 막기 위해 원용할 수 있는 비상 안전장치”다.
그가 한국사회에 기여한 바는 적지 않다. 그가 만든 헌법119조2항에 따라 ‘공정거래위원회’가 규제를 할 수 있는 헌법적 근거를 얻었던 것이고, 70년대의 재산형성저축(재형저축) 도입을 통한 중산층 육성, 의료보험 도입, 노태우 정부 때의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을 통한 부동산 시장 안정 등 굵직한 개혁들이 그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이 책에는 그런 제도들이 도입되는 과정의 우여곡절과 그의 경험이 상세히 나와 있다. “정치민주화가 된지 25년이 지났는데, 경제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라는 약간은 지겹도록 반복되는 주장보다, 이런 야사들이 더 흥미로웠다. 한국의 여야정치권, 권력의 핵심부 인물들과 얽힌 가계가 그로 하여금 막후의 역할을 하도록 길을 터주었을 것이고, 김종인 특유의 치밀한 논리와 지식, 할아버지 김병로에게 내림받은 ‘배짱’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또 다른 흥미로운 대목들은, 그가 경험으로 터득한 통찰을 풀어놓을 때이다. 가령, 부마항쟁을 부가가치세의 졸속 도입에 따른 소상공인들의 저항으로 해석한 대목이나 연금개혁을 더 내고 덜 받는 방식의 개혁보다 ‘세대부양론’으로 제시한 대목 같은 것이 그렇다. 연금재정의 고갈문제는 연기금을 주식에 투자해 수익을 높이는 것보다 연금을 계속 불입할 수 있는 사람을 늘리는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저출산 문제의 해결이 연금개혁의 가장 근본적인 대안인 셈이다. 클린턴 정부 때 시작되어 우리 정부도 도입한 근로소득장려세제(EITC)를 두고 미국과 한국의 도입 배경이 다르다는 주장도 그러하다. 미국은 노동을 기피하고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이들 때문에 EITC를 도입했지만, 우리는 일자리가 없어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에서 이 정책은 타당성을 잃었던 것. 이 대목을 읽으면서 EITC 도입 당시에 이걸 대단한 제도라고 떠들었던 기재부 공무원들이 떠올랐다.
이 책으로 보건대 김종인은 좌파는커녕 코포라티즘론자쯤 되는 것 같다. 이 정도가 우리사회의 주류 시각으로 좌파로 분류된다면 할 말 없지만 말이다. 정작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가 거대기업집단에 대응한 사회세력의 중요성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의 해결을 ‘대통령의 철학과 의지’에서 찾는다는 점에 있다. 물론, 이는 이 책이 대선을 앞두고 급하게 출간되었다는 사정도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그가 박근혜 캠프에 가담하며 밝힌 이유도 박은 어느 이익집단에게도 혜택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민주화의 적임자라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 주목해 본다면, 김종인은 박정희 시대부터 최고권력자와의 ‘내부거래’를 통해 자신의 정책을 관철시키는 ‘경로’를 보여왔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그가 능력이 없다거나 모자란다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인연과 우연이 겹쳐 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경제권력보다 정치권력이 더 강했던 시절의 반영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처삼촌이자 박정희의 최측근인 김정렴을 통해서 자신의 경제구상을 정책에 반영할 수 있었고, 전두환 신군부의 국보위 참여, 그 연장선에서 노태우 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도 지냈다.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이라는 과감한 조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노태우의 신임과 그때까지도 ‘힘’이 있었던 청와대 권력을 등에 업었기 때문이다. 그가 대통령의 철학과 의지를 강조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거의 모든 언론은 지금 그를 대선과정에서 ‘토사구팽’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나는 자연인 김종인의 운명에 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이 없다. 문제는 그가 주장했던 경제민주화, 비정규직 해결, 양극화 해소, 재벌개혁, 노동자 배려의 노사관계, 성장과 복지의 균형, 조세 및 재정개혁이 얼마나 이뤄질 수 있을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별로 희망적일 것 같지는 않다.
蛇足) 이 책에서 읽은 일본의 에피소드. 일본은 1992년 장기경기 침체에 빠져들자 대대적인 경기부양책을 썼는데, 그 중의 하나가 큰 강 113개 가운데 무려 110개 강의 물줄기를 바꾸는 데 자금을 투자한 것. 강둑을 온통 시멘트로 만들었는데, 그렇게 해서 얻은 경제효과는 없고 재정적자만 커졌다. MB는 일본에서 배우지 말아야할 것을 배워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