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당의통략(黨議通略) - 모략과 음모의 당쟁사 ㅣ 자유문고 동양학총서 39
이건창 / 자유문고 / 1998년 4월
평점 :
품절
<강화학 최후의 광경>, 이 책을 어느 헌 책방에서 구했는지 이젠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툰 그림솜씨가 분명해 보이는 표지화가 인상적이었다. 의관을 정제하고 가야금을 뜯고 있는 백발의 노인. 그리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又半’이라는 출판사. 저자인 민영규 선생에 대해서는 대학시절 인문관 출입구의 교수명단에서 본 바가 있었으나 그가 어떤 학자였는지는 전혀 몰랐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가장 아끼는 ‘옛 책’이자 헌책방에서 구한 최고의 보물이다. 1994년에 나온 책이니 ‘古書’라 하기엔 다소 민망하다.
강화학은 구한말 강화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유학자들이 축적한 학문전통을 일컫는다.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 책에 기대어 송대 양명학의 조선적 지류로 섣불리 짐작할 뿐이다. 이 강화학파의 주요 인물들은 조선후기와 일제 식민지 시대에 두루 이름을 날렸던 인물들이다. 조선후기 가객 김천택이 麗韓八大家의 하나로 꼽은 영재 이건창, 그의 동생인 난곡 이건승, 일제 하의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 그리고 6.25 당시 납북된 양명학 연구의 대가 위당 정인보 선생이 바로 그 주역들. 위당의 제자인 저자 민영규 선생은 강화 양명학의 전통을 이은 직계 제자이자 마지막 세대이리라.
강화 양명학의 흐름은 멀리 지리산 인근 구례로까지 뻗어 매천 황현과 그의 동생 석전 황원으로 이어진다. 알다시피 황현은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자결’로 생을 마감한 인물. 이 책의 표제이자 여기 실린 글 중 가장 아름다운 글인 ‘강화학 최후의 광경’은 바로 매천의 동생인 석전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석전 황원은 형인 황현이 죽은 1910년으로부터 34년이 지난 1944년 구례 천은사 앞의 연못에 몸을 던진다. ‘강화학 최후의 광경’은 한국의 전통적 보수 지식인이라할 이 두 형제의 죽음 사이를 기록한 것이다. 이 시기에 유명을 달리한 강화 양명학자들의 ‘송장의 내력'을 더듬어간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황현은 “내가 꼭 죽어야할 이유가 있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 황은이 망극해서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저 분해서”라는 유서를 남긴다. 민영규 선생은 이러한 정신적 태도를 강화 양명학의 ‘엄숙한 動機論’으로 해석한다. 왕양명은 “일의 성패가 문제가 아니다.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다”라고 가르쳤다. 강화 양명학의 대가 이건창의 조부인 이시원은 손주에게 “질의 참됨만이 네가 갈 길이다. 결과의 大小高下는 물을 바가 아니다”라고 가르쳤다. 바로 이 지점, 지식인으로서의 한 개인의 실존적 선택이 어디에서 비롯하는가하는 자못 철학적인 질문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한홍구 교수는 참된 보수를 논하는 자리에서 강화학파와 영재 이건창을 불러온다.(http://www.moonmang.org/bbs/zboard.php?id=library&no=1094) 장엄하게 사라져간 한국의 전통적 보수지식인의 한 정점에 강화학파가 있다. 앎과 행함이 하나(知行合一)의 추상적 가르침은 강화학파에게서 그 구체적 현현으로 실감된다. 나는 이 책을 펼칠 때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죽음의 길을 택한 이들의 삶이 아름답고 슬퍼서 눈물을 찔끔거리곤 했다. 영재 이건창이 귀양지 전남 보성에서 돌아와 강화도로 내려오면서 비로소 만개한 강화학파는 이들의 죽음으로 원류가 끊겨 버렸다.
저자 민영규 선생. 2005년 유명을 달리함
이건창은 중세적 지배질서에 도전한 동학란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가 보수 지식인인 이유다. 갑오개혁 역시 그에게는 용납 불가능한 ‘개혁’이었다. “아닌 밤중에 일본군대가 기습해와서 서울의 요소와 궁궐의 안팎을 점령한 것이 무엇이 경사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나라 체모를 뜯어 고친다고들 하니 이것이 욕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이건방) 명성황후 시해 직후 대신들이 내린 詔書는 “죽임을 당한 왕비로 말하자면 극악무도 죄당만사하기로 이제부터 왕비라는 칭호를 폐하고 庶人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니 모두들 그렇게 알렷다”는 것이니, 갑오개혁으로 추진된 상투 자르기는 “상투를 자르고 안 자르고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근대개혁기의 '보수적 태도'는 ‘엄숙한 동기론’에 바탕했던 것.
1910년 10월 2일. 이건창의 동생 난곡 이건승과 이건방, 홍문원, 정기승 일행은 만주로 떠난다. 집안의 모든 재산을 정리한 채 가벼운 옷차림으로, 마치 이웃에게라도 가는 듯 길을 나서 북풍한설 몰아치는, 인연도 지인도 없는 만주의 회인현 홍도촌으로 향한다. 홍문원은 스물 둘에 대과에 급제하고 서른 여덟에 공조, 예조, 이조 참판을 지낸 명문 거족. 다른 인물들도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면서 고관을 지낸 거물들. 정기당과 이건승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 자결하기로 결심했으나 주변의 감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기당은 칼로 자결을 하려 했으나 주변에서 말리는 바람에 칼날에 손을 베어 한쪽 손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높은 벼슬에 올랐고, 재산도 넉넉했던 이들은 60이 훌쩍 넘어 자발적 가난과 고행의 길로, 만주의 허허벌판에서 송장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1914년 61세의 나이로 홍문원이 죽어 돌아오고, 이건승은 1924년 67세로 죽어 돌아오고, 정기당은 1925년 7월 72세의 나이로 죽어 돌아온다. 앞뒤 16년의 세월동안 이들은 부러 고행을 자처하고 죽었어도 관 하나 살돈이 없어 들것이 들린채로 옮겨야 했던, 극도의 자발적 궁핍 속에서 살다 죽어간다.
식민지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 중 하나는 아나키스트인 이회영 집안의 만주 집단이주일 것이다. 서울의 명문가이자 당대의 재산가였던 이회영 집안은 가산을 정리해 만주 삼원보로 이주한다.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간 이들 행렬은 마필 100여 마리, 포장마차 10여대, 이동식구만 67명에 이르는 대이동이었다고 전한다. 이덕일의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 말해주듯이 이회영의 만주행이 저항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래서 식민지 체제에 대한 집단적 저항이었다면, 강화학파 ‘노인’들의 만주행은 오로지 철저한 실존적 자기결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허망하고 부질없으며 무책임한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절망과 환멸의 한국 근대사에서 이같은 도저한 정신주의를 간직한 인물들의 존재만으로 나는 한줌의 위안을 얻는다.
이 책을 두고두고 곱씹어 읽는 이유는 이들의 정신주의가 지금 어떤 흔적으로 남아 있는가 하는 질문이 아프게 제기되기 때문이다. 소위 보수를 자처하는 한국의 누추하고 비루한 인간들에게 이만한 ‘엄숙한 동기론’을 기대하기란 참으로 난망한 노릇이다. 에드먼드 버크가 정리한 대로, 보수가 전통에 대한 존중의 태도에서 비롯한다면, 대체 이들에게 무슨 전통과 무슨 정신을 찾을 수 있을까. 고개 숙일 만한 원칙론과 동기론이 부재한 한국의 이른바 ‘보수’들의 지적 전통이나 교양은 참으로 참담한 지경이다. 빨치산이나 좌파 공산주의자, 비전향 장기수(가령, 이구영 선생)들 가운데 전통적 한학자 출신이 많은 이유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강화 양명학의 세례를 받은 인물 가운데 가장 늦게 죽은 인물은 석전 황원이다. 1944년 2월 17일, 황현과 이건창, 이건승, 홍문원, 정기당 등이 모두 죽은 뒤 황원은 ‘투신’으로서 내면의 약속을 지킨다. 구례의 황원과 만주의 이건승은 평생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다만 서신이 오갔을 뿐이며, 만주에서 고행을 하고 있는 이건승에게 海衣(김) 3백장을 보냈을 뿐이다. 민영규 선생은 “神交란 바로 그러한 것”이라 말한다. 한 도저한 정신이 다른 한 도저한 정신을 만나 지극한 경지에 이르는 것, 도저한 정신이 못되는 나는 신교와는 영 거리가 멀 모양이다.
追記 : <강화학 최후의 광경>은 한홍구, 김호기 두 사람에 의해 소개된 바가 있다. 아래는 동아일보에 실렸던 김호기 교수의 짧은 글이다.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책 / 김호기 연세대 교수 <강화학 최후의 광경>
마음이 쓸쓸할 때면 가끔 찾아가는 곳이 있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섬 아닌 섬 강화도다. 강화대교를 건너 전등사 옆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사기리라는 마을이 나온다. 평범한 이 바닷가 작은 마을이 바로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1852∼1898)이 태어난 곳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건창은 매천 황현(梅泉 黃玹), 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榮)과 함께 구한말 한시 3대가이자 유명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강화학(江華學)이라 알려진 조선 후기 양명학자 가운데 한 분이기도 하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우국충정에 분노해 자결했던 이시원(李是遠)이 다름 아닌 영재의 할아버지였으며, 영재는 이런 정신과 의리로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내 전공은 아니나 커다란 감동을 받았던 책 가운데 하나가 조금은 이색적인 제목인 ‘강화학 최후의 광경’(우반, 1994년 출간)이다. 이 책은 두 권으로 이뤄진 민영규 선생의 글 모음집 중 첫째 권으로, 강화학 관련글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사회학을 공부하는 내가 양명학에 대해 아는 바 거의 없지만, 이 책 1부에서 다뤄지는 구한말과 식민지 시대 강화학자들의 삶은 흥미로우면서도 한없이 가슴이 아프다. 그 가운데 특히 ‘강화학 최후의 광경’은 단연 이 책의 백미(白眉)다. 강화, 개성, 구례, 서울, 그리고 만주와 블라디보스톡을 무대로 강화학자들이 기품 있게 견뎌왔던 삶은 전통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대에 이 땅의 지식인들이 갈 수 있었던 가장 먼 길이기도 했다.
민영규 선생에 따르면, 일의 성패가 문제가 아니라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라는 것이 양명학의 가르침이라 한다. 결과의 대소고하(大小高下)를 물을 바가 아니라, 질(質)의 참됨만이 지식인이 갈 길이라 한다. 매천이 남긴 절명시의 한 구절인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날을 생각하니 글하는 사람 갈 길 헤아리기 어려워라’도 이와 뜻을 같이 한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그것은 지식인은 과연 자기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라는 지식사회학적 질문이다.
굳이 푸코를 떠올리지 않아도 담론에 내재된 권력을 성찰해야 하는 것은 어떤 시대라 하더라도 지식인의 당연한 의무이며, 그리고 이것이 강화학의 현재적 의미이기도 하다.
사기리에서 서쪽 해안을 따라 계속 가다 보면 역시 바닷가 마을인 건평리가 나온다. 그곳에는 영재의 무덤이 있다. 저녁 하늘을 물들이는 서해의 일몰이 아름다운 곳이다. (2001. 7.6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