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썼던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는 정운영 선생 칼럼집에 대한 서평이 이주의 마이리뷰에 뽑혀버렸다. 한동안 블로그를 방치하다 맘 먹고 다시 시작하자는 뜻으로 거의 1년만에 마이리뷰를 하나 썼는데, 이게 뽑혀버렸으니 스스로 의기충천...기분이 만땅꼬다.

별로 되먹지도 못한 글에 이렇게 큰 선물을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고 기쁠 따름이다. 대학 붙고, 취직했을 때보다도 더 기쁜게 사실인데, 이 사실을 알라딘에서 알아줄랑가 모르겠다. 진짠데....

이런 고마운 알라딘에게 오늘 되먹지 못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음...그건 말이지....사실 이런 꽁돈이 생기면 의례히 나누고 함께 즐기는게 당연한 일이라 생각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오늘 받은 적립금으로 왕창 책선물 세례를 퍼붓기로 마음을 먹고, 사무실 내선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오늘 내가 이러이러해서 꽁돈이 생겨 책을 사줄려고 하니...추천 눌러라...."

내가 보기에도 비굴하다. 그렇지...이런 짓 하면 안되는데...그러면서도 추천 한번 눌러주는 대가로 책 받는게 좋은지 다들 흔쾌히 추천을 심하게 눌러댔다. 속으로 비굴한 놈이라 놀렸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참 기쁘다. 나눔이 이렇게 좋은 걸. 이런 나눔을 있게 한 알라딘에 다시 감사하며...나의 비굴한 짓을 이실직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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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 전설적 포토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의 2차대전 종군기
로버트 카파 지음, 우태정 옮김 / 필맥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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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월에 이 책을 선물로 받았을 때 이미 상황은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카메라 셔터의 경쾌한 촉감도, 현상된 사진을 받아보는 그 설레임도 느껴본 지가 이미 오래 전이라, 이 책을 읽는 순간 내 생활에서 없어진 그 모든 것이 원치 않았던 이 상황 때문일거라는 생각이 들까 스스로 두려웠다. 살면서 지독스럽게 욕심부리는 것이 책이고, 그것도 '카파'의 책인데...

매그넘을 알게 된 건 몇 년전의 일이다. 한국에서 열린 전시회에도 몇 차례 둘러보았고, 매그넘 홈페이지에서 사진 한 장 내려받았다고 영어로 된 메일이 와서 깜짝 놀란 적도 있었다. 돈 내라는 건 줄 알고 정말 놀랬었다. 매그넘은 1947년에 이 책의 저자인 Robert Capa와 Henri Cartier Bresson, David Seymour가 창립한 보도사진 에이젼시이다. 이 책의 옮긴이의 말대로 잡지사의 청탁으로 잡지사의 요구에 맞는 사진을 찍어내기 보다, 사진사가 창의적으로 찍은 사진을 모아두고 잡지사가 사가도록 만듦으로써 보도사진의 유통체계를 바꾼 일종의 독립작가집단이라 보는게 좋을 것 같다. 흔히 자본과 검열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독립영화와 같은 체계랄까. 카파와 매그넘은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이 책을 다 읽고난 나는 서재에 굵직하게 버티고 있는 매그넘 사진집 "In Our Times : The World As Seen by Magnum Photographers"를 꺼내, 카파가 찍은 그 유명했던 사진들을 다시 뒤적이고 있었다. 한장..한장.. 만일 카파의 이 책을 읽지 않고서 매그넘 사진집에 실린 카파의 사진들을 이해하는 것은 화랑의 걸린 그림을 앞에두고 화가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만큼 말도 안되는 짓이었을 것이다. 전쟁보도사진이라면 누구나 보아도 전쟁의 참혹함을 느끼게끔 하는 수 많은 장면들이 있을터이나 나는 카파의 이 책에서 전혀 그렇지않으나 가슴이 저리는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D-Day)에 참가해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찍어온 흔들린 사진도 아니고, 병사의 처참한 죽음에 대한 사진도 아니다. 마치 퍼레이드하듯 수많은 군중이 함께 걷고있는 장면 가운데쯤 아이를 안은체 시선을 내려깔고 걷고 있는 삭발한 한 여인과 그 여인의 짐으로 보이는 보따리를 들고가는 표정없는 한 남자, 많은 군중이 함께 걸으며 곁눈질하고, 웃고있다. 그리고 저 뒤쪽편으로 건물에 프랑스 삼색기가 무심히 펄럭이고...연합군의 진격으로 해방된 사르트르 마을에서의 풍경이다. 이 당시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프랑스 도시에서는 독일군에 부역하거나 협조한 여성은 전부 삭발케 했다고 한다. 아마 이 여인은 그 마을에서 쫒겨나가는 중일터이다. 한참을 이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그리고 가슴이 저렸다.

이 책을 읽는 묘미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이 책은 사진과 세상과 더불어 그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한 책이기 때문이다.

만약 아들이 종군기자와 군인의 차이를 물어본다면 "종군기자는 군인보다 술도 더 마시고, 여자도 더 많고, 월급도 더 받고, 자유도 더 누리는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이번 게임에서 그들은 자기 입장을 자기 의사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만약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해서 그로 인해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심한 고민에 휩싸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기의 판돈, 즉 목숨을 자기 마음대로 걸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을 골라서 걸 수 있었고, 또 막판에 돈을 자기 호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어도 되는 사람들이었지.(180p)"라고 말하겠다고 했다. 그가 탁월한 종군기자인 것은 그 판돈을 위험한 전쟁마다 걸었을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사람들의 표정과 생각조차도 담아내는 사진을 찍어냈기 때문이다. 카파는 탁월하고도 철저한 종군기자였다.

독일군이 물러간 해방된 프랑스에서 카파는 스페인 내전시절의 취재를 추억한다. "장애물 뒤의 병사, 전진하는 탱크, 환호하는 사람들의 무리..." 이미 어디에선가 찍었을법한 판박이 사진을 찍는 것은 더이상 그에게는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 다만 그 꿈으로 인해 그가 곁으로 돌아오기를 2년이나 기다린 여인은 작별키스와 함께 그만 떠나버린다. 책의 내내 전쟁의 긴장감과 함께 맴도는 것이 연인과의 긴장감이다.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묘미이다. 카파도 사람이지 않은가? 아마도 아쉬운 기억은 아픔에서 시간이 흘러 아름다움으로 변했을 것이다.

지난 7월 선물로 받은 책은 며칠 뒤 바로 돌려주었다. 그리고 얼마 뒤 관계도 끝이 났다.

이 책을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의 사투 속에서 왜 사랑과 평화와 고향, 그리고 두고 온 낭만을 사람들이 떠올리는지 책을 읽는 내내 너무도 단순한 궁금증이 났다. 사랑과 낭만이 가슴에서 사라짐을 느낄 때 이 책을 들어보면 어떨지... 그리고 일상을 참으로 처절한 전쟁같이 살아보면 어떨지...하는 바보같은 단순한 생각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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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 정운영의 마지막 칼럼집
정운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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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1월. 강바람까지 더해져 그 날은 무척이나 추웠다. 다만 난생 처음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개최되었던 "전국노동자대회"를 참가하기 위해 여의도 "금성무대"(지금은 낯선 이름이 되어버렸다. 아마 위치가 LG 트윈타워 앞인데다가 그 야외무대를 금성(LG)에서 제작을 했는지 다들 "금성무대"라 불렀다.)에 모인 사람들의 열기만은 차가운 강바람도 비켜갈만큼 뜨거웠다. 입가에 번지는 허연 입김과 펄럭이는 수 많은 깃발들. 행진 대열의 맨 앞을 나섰던 현대중공업 노조원의 우람한 팔뚝은 그 큰 깃발을 한 손으로 불끈쥐고 행진할 수 있다는 것도 그 날 처음 경이롭게 본 것 중의 하나다. 그러나 따뜻한 남쪽동네에서 갖 대학에 들어온 나에게는 그 날 서울은 무척 추웠다는 기억만 생생하다. 그리고 며칠 뒤면 우리 동아리에서 개최하는 초청강연회 준비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준비할 것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것도 그 날 집회 내내 기억나던 것 중의 하나였다.

정운영 교수와는 그렇게 처음 만나게 되었다. 우리 동아리의 첫 행사이자, 나름대로 야심차게 준비했던 것이라 손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녔는데, 역시 그 분의 이름덕이었는지 대성황이었다. 그러고보니 그를 처음 대한 건 그해 여름 선배들의 권유로 샀던 "광대의 경제학(까치)"에서 이미 책 속에서 만나기는 했었다. 어린 시절 도대체 이해하기 힘들었던 그의 칼럼들.

추위에 결정적으로 약한 나는, 강연 내내 그가 입고 온 목까지 올라오는 폴라티셔츠가 인상에 많이 남는다. 지금 막 읽기를 끝낸 이 책의 표지도 역시 그 종류의 티셔츠다. 수수한 점버와 함께. 그렇게 그는 내게 호감덩어리 그 자체였고, 그의 글이 이해되기 시작할 때쯤은 읽자마자 당장이라도 그의 글을 통째로 외워 삼켜버리고 싶을 정도의 경이로움에 내내 젖었었다. 그의 생각과 말과 글들. 그 모든 것이 부족한 나에게는 존경스러움의 상징이었기에 나는 그 강연회를 위해 버린, 아니 투자한 나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으며, 내가 준비한 사소한 것들이 내게는 당당하고도 자랑스럽게 다가왔다.

"무엇이 무너지는가?"
1991년은 소련연방의 해체가 시작된 해로 기억한다. 그 분은 강연에는 응하되 전혀 원고를 주지 않으셨는데, 강연 역시도 원고 없이 그저 온 몸으로 강연을 했을 뿐이다. 다만 A4용지에 대략의 주제만 정해주었고 그 첫번째가 "무엇이 무너지는가?"였다. 그 시절 나름대로 운동하던 사람들에게는 구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급속한 해체는, 이게 현실이다...라고 하면서도 차마 두 눈 부릅뜨고 쳐다보며 인정하기는 어려웠던...뜨거운 감자덩어리였는지 모른다. 그 날 강연내용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한다. 뒷풀이조차 함께 할 시간없이 한신대로 가신다면 훌쩍 떠나버리셨으니까.

오히려 그렇게 그가 남긴 여운은 현재까지 내내 남아, 그의 글이라면 신문쪼가리를 찢어서라도 읽고 보관했다. 나의 나이 든 스크랩북에는 10년이 넘은 그의 칼럼들이 즐비하다. 직장생활 초기에는 그의 글 때문에 한겨레신문을 구독했는데, 우리 회사 우리 사업장에 한겨레는 딱 1부, 나의 신문만이 배달되었을 뿐이다. 이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참으로 그 분에 의해 얽힌 많은 것들이 되살아나 나 역시도 놀라울 지경이다. 아무 조건없는 존경이랄까?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이 칼럼집은 유고집이라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작년 9월 돌아가신 이후, 그간 중앙일보에 게재한 칼럼을 모아 "마지막 칼럼집"으로 출판이 된 책이라 한다. 그의 글쓰기는 언제 읽어도 여전하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있는 정치, 경제, 사회적 현상들을 수 많은 인용과 비유를 통해 아주 손쉽고도 적절하게 나타냄으로써 그의 다독(多讀)과 다식(多植)함에 기가 질리고, 결코 현학적이지 않은 명쾌한 해법 또한 읽는 이로 하여금 한결 화통하게 만든다. 적절한 분량에 적절한 비유에 적절한 해법에 적절한 눈높이. 내가 그를 고분고분 기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 역시도 그가 평소에 써 오던 칼럼의 글쓰기가 크게 틀리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듯 한겨레에서 중앙일보로 자리를 옮기면서 글쓰기가 틀려졌다는 단호한 비판들이 나오는 단초들을 나 역시도 이 칼럼집을 통해 여러 번 발견하게 되었다. "부자들의 전대를 풀게하라"는 칼럼에서 "부자를 달래라! 그들이 이뻐서가 아니라 그들이 전대를 풀어야 담배보다 급한 점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등과 같은 류의 해법은 예전에 비해 다분히 중도적이고 타협적인 대안, 어찌보면 예전의 모습에서 한참 오른쪽으로 옮겨간 모습으로 비춰지고, 이는 특히나 한겨레가 아닌 조중동 중의 하나인 중앙일보에 실리는 점이 본질적 의미의 해석에서 더 크게 확대되어 비춰지는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국내 정치경제, 특히 노무현 참여정부의 정책이나 실체적 정책구현 양식에서의 비평은 대기업(재벌)의 입장이나 보수적 견지에서 많은 부분 지면을 할애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그렇게 각박하게 몰아세우고 싶지는 않다. 어느 글에선가 중앙일보로 옮긴 뒷얘기도 본 적이 있고, 그 역시도 사람들의 그런 비판적 목소리를 못 들었을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겪고있는 이 '삶'이라는 것으로 변명을 삼아주는 것이 어떨까 싶다. 내가 안타까운 것은 더 이상 책을 지극히도 사랑하던 그를 뵐 수 없고, 그의 감칠맛나는 예리한 글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친구의 말대로 나는 그를 이해함으로써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함으로써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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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la1000 2006-12-07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지식인을위한 변명은 안하셔도 될듯 합니다. 여전히 그는.. 사상적 편견이 없고, 그의 책은 여전히 문장을 되새김질 하게 만들며, 또 여전히 학문에 대한 그리고 배움에 대한 자극을 줍니다... 그분은 변한것이 없습니다. 다만, 세월이 그분의 필체를 좀 부드럽게 만들지 않았을까요?

paviana 2006-12-08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리뷰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마지막 문단에, 저도 많이 공감하고 갑니다.

dalpan 2006-12-08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alla1000님, paviana님 감사합니다. 얼결에..소 뒷발차기에... 떡!하니 "이주의 마이리뷰"에 걸려들어 블로그 개설이래 이리도 급작스런 방문자에 저도 놀랍습니다. 정교수님의 글을 많이도 좋아했기에 책 얘기보다 소솔한 제 감정을 더 많이 적은 잡념의 단상인데...운이 좋았네요. 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비연 2006-12-08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의 리뷰 축하드려요^^ 정운영님의 이 책을 저도 최근에 읽고 너무 좋았더랬습니다. 누구나 비판하는 사람도 있고 결함도 있고 그렇겠지만, 항상 올곧은 자세를 견지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분은 존경할 만한 대상인 것 같아요^^

노바리 2006-12-12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운영 선생 글은 아직 하나도 읽어본 게 없는데, 책 꼭 읽어보고 싶단 생각이 듭니다. 기왕이면 이전의 책들도요.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dalpan 2006-12-12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바리님...정운영선생의 글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셨다니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저도 칼럼집이 나올때마다 빠짐없이 읽고 채워놓았는데 후회하지 않으실 글들입니다. 꼭 읽어보세요.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06-12-12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 좋은 리뷰를 읽고 잔잔한 여운을 느낍니다.
10년간의 스크랩 글들이 그분에 대한 님의 존경을 그대로 보여주네요.
 

386은 그날의 영광에 침뱉지 말라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전사’의 시대를 살다 일찍 시들어버린 세대…아직도 험한 길 가는 사람들에게 험한 얘기 하지 말자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지난 몇년간 <한겨레21>에 고정난을 갖고서 근 80회에 걸쳐 글을 쓰면서 개혁 또는 반수구 진영 내부의 논쟁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거리를 두어왔다. 아마 문부식씨의 이른바 ‘치열한 자기성찰’이 하필 <조선일보>에 실렸을 때 요란한 반성의 계보에 대해 한마디 한 게 유일한 예외였을 것이다(‘자기성찰, 하려면 조용히 하자’ 2002년 8월21일치, 423호).
운동 진영 내의 논쟁에 참견할 시간과 정력이 있으면 과거 청산 작업이나 평화운동에 힘을 쏟던지, 아니면 책 한권라도 더 보거나 잠 한숨 더 자는 게 남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지난번 역사이야기에 ‘386’ 의원들의 유시민 집단 비판에 대해 철들지 않고 사는 즐거움을 이야기하며 386 의원들을 비판했더니 역사이야기를 연재한 이래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1980년대, 죽음을 기억하는 시대


△ 이한열군 노제에 모인 인파는 2002년 월드컵 때보다 더 많았다. 그때의 영광은 어디로 갔을까. (사진/ 한겨레)

지난번 글은 유시민이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것이 계기가 돼 나온 것이지만, 내가 유시민의 친구라서 쓴 것이라기보다는 386 의원들에게 큰 기대를 갖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쓴 것이다. 그러나 책이 나오고 난 뒤에 읽어보니 분량 면에서 유시민에 대한 옛날 이야기가 너무 많이 들어가 균형이 깨진 것은 둘째치고라도, 유시민에 대해서는 ‘옛날’ 이야기만 하고 386 의원들에 대해서는 ‘현재’를 들어가며 비판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독자 중의 꽤 많은 분들이 386 의원 비판이라는 내 원래 의도와 상관없이 유시민 옹호로 읽으실 수 있었겠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이나 평화 문제에 대한 ‘현재’의 유시민이 갖는 한계에 대한 내용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 애독자들도 계셨다.

지난호에 실린 함돈균씨의 내 글에 대한 반론은 내용으로도 그렇고, 필자도 나보다는 유시민에게 답하라고 하고 있기에 꼭 내가 답글을 써야 할 것은 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열린우리당 경선이 끝난 뒤 386 의원 중 한 사람이 인터넷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쏟아부은 말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며 “OOO을 반동으로 몰면 도대체 누구와 함께 개혁을 하겠다는 겁니까”라고 푸념했다. 말이란 것이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기 때문에 글로 옮겨놓은 짧은 말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정말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는 것일까?

1990년대에 30대에 접어든 1960년대 출생의 80년대 학번들을 가리키는 386이란 말은 이들의 상당수가 40대에 접어들었음에도 여전히 언론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386이란 말은 그 시절 대학에 가지 못한 숱한 동년배들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80년대의 민중 지향성에서 한참 벗어난 용어이지만, 한번 붙은 딱지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 이전에도 4·19 세대, 6·3 세대, 3선개헌 세대, 교련반대 세대, 긴급조치 세대 등이 있었지만, 4∼5년 단위로 끊어서 그룹을 지어주었지 10년을 통째로 한데 묶은 것은 386 세대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질풍노도의 80년대란 하나의 경험으로 묶어버리기에는 광주와 6월항쟁과 냉전 체제의 붕괴와 1990년 벽두의 3당 합당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버린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386도 가지가지다. 386이란 말이 쓰이기 전이었던 1980년대, 그때는 ‘백만학도의 대동단결’이란 말이 가능했다. 그러나 20년 세월이 훌쩍 흐른 지금, 누구는 국회의원으로, 누구는 청와대나 정부의 고위직으로, 누구는 벤처기업 사장으로, 누구는 변호사로, 누구는 교수로 잘 풀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학교를 다니는 사람도 있고, 아직도 철이 안 들어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386은 위장 취업할 필요 없이, 그 시절 노래마냥 ‘진짜 노동자’가 되어 있고, 그 상당수는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그래도 같은 것이라곤 눈가에 자리잡아가는 주름일 뿐. 무슨 동창회를 하려는 것도 아닐 터인데, 이제 와 386을 커다란 하나의 세대로 묶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과 광주 학살로 시작된 1980년대는 특별한 시대였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100만명의 학살은 그 기억마저 학살당해야 했지만, 우리는 광주를 그렇게 보내지 않았다. 그 여름 학살은 계엄합동수사단에서의 임기윤 목사 의문사와 청주보안감호소에서 변형만·김용성 두분 비전향 장기수의 의문사로 이어졌다. 밖에서는 서강대생 김의기가 진압 작전 직후인 5월30일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몸을 던진 것을 시작으로 학살 정권과의 투쟁에서 숱한 청년들이 목숨을 내놓았다. 1970년대에도 전태일·김상진 열사가 있었고, 인혁당 사건 관련자 여덟분에 대한 사법살인이 있었고, 장준하 선생 등의 의문사가 있었지만, 학생들이 죽음을 피부로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나 1980년대는 달랐다. 1981년이 되자 광주에서 친구를 잃은 사람들이 대학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4·19 때 많은 피살자가 발생했지만, 그래도 독재자 이승만은 권좌에서 쫓겨났다. 그렇지만 1980년대 광주 학살의 책임자 전두환은 권좌에 앉아 있었다. 그런 전두환 정권을 향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체험한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 저항은 유시민이 ‘항소이유서’에 쓴 것처럼 “열여섯 꽃 같은 처녀가 매 주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달치 월급보다 더 많은 우리들의 하숙비”를 부끄러워하던, 또는 <모래시계>에서 혜린이가 술에 취해 노동자들은 단식농성 하는데 자기는 밥해먹으려고 쌀 사왔다고 괴로워하던 그런 여린 마음에서 시작된 1970년대의 저항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비장한 저항이었다. 80년대 학번들은 박정희 권력이 완전히 공고화된 뒤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다. 70년대 학번들은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 식으로 시작되는 국어교과서로 배운 세대였다면 1980년대 세대들은 “나, 우리, 대한민국” 하는 식으로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독재정권이 주입한 ‘국가관’이 꽉 박힌 교육을 받아야 했다.


△ 3김이라는 화훼업자들은 채 피지도 못한 꽃을 꺾어 꽃병에 꽂았다. 1989년 당시 세 야당 총재들의 회동. (사진/ 한겨레)

‘어수룩함’에서 과학적 세계관으로

이런 분위기는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외견상 학생회를 구성할 수 있고, 대동제도 할 수 있는 1980년대 대학이 더 자유로워 보일지 모른다. 교정 곳곳에 닭장차가 서 있고, 중세의 기사를 연상케 하는 갑옷을 입은 우리 또래의 전경들이 공터에서 팩차기를 하고, 벤치는 리시버를 꽂은 ‘짭새’들에게 점령당해 있는 1970년대 대학, 외견상 그건 대학도 아니었다. 그러나 저항을 꿈꾸던 사람들의 정신세계는 달랐다. 80년대 학번들이 보기에 70년대 학번들의 세미나 커리큘럼은 어수룩하다 못해 황당했을 것이다. 70년대 학번들은 라인홀트 니이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나 이규호(1970년대 의식화 도서의 저자에서 1980년대 전두환의 비서실장이 되어버린 그 이규호)의 <사람됨의 철학> 같은 책을 의식화 입문서로 읽었다. 1980년대의 수많은 사회과학 서적을 찍어낸 진보적 출판사들은 아직 문을 열기 전이었다. 저자가 암에 걸려 유명을 달리하는 바람에 원고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하게 출간돼 부분부분 암호 해독 같은 작업을 거쳐야 했던 최종식 선생의 <서양경제사요론> 같은 책도 1970년대 후반에 가서야 출간됐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런 ‘어수룩한’ 책을 읽으며 해답 없는 길을 찾아야 했던 젊은 날의 방황이나 “쌀나무도 알고 있는 슬기로운 머리”로 부대꼈던 모색의 시간은 절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이른바 386 세대들은 세미나 커리큘럼부터 달랐다. 철저한 과학적 세계관의 확립을 목표로 잘 짜인 커리큘럼을 따라 일로매진할 수 있었다. 수천 동포의 학살자가 대통령이랍시고 권좌에 앉아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서야 할 자리는 김남주의 시를 빌리지 않더라도 전선이었고, 감옥이었다. 거칠게 표현한다면 1970년대는 역사가 젊은이들에게 사람이 되라고 했다면, 1980년대는 젊은이들에게 전사가 되라고 했던 시기다. 혁명의 전사도 그렇고 군인도 그렇고, 신병 훈련의 목표는 딴 생각을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군사독재 정권은 학생들을 병영국가의 예비 군인으로 키워내고 있었다.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가장 군사주의적·반공적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와, 선배들이 ‘주적’만 북괴에서 군사 정권과 자본가와 미국의 동맹체로 바꿔주면 역시 충실한 전사가 되었다. 군사독재에 목숨을 걸고 싸우고 감옥에 간 민주투사를 수천·수만명 배출한 나라에서, 그 시절 민주청년학생 중에서 단 한명의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도 나오지 않은 역설도 그 시절에는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늘 그랬듯이 후생(後生)이 가외(可畏)였고,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치는 법이었다. 70년대 학번들이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노래하게 된 4·19 세대나 6·3 세대를 우습게 봤듯이, 사회과학적 인식으로 무장한 386들도 낭만적 70년대 학번들을 우습게 보았다.

아무튼 “야, 이놈들아 공부 좀 해라”라고 폼잡고 후배들을 훈계하던 70년대 선배들은 이제 386들로부터 “아니, 형님은 아직 그것도 안 읽었소?” 하는 구박을 받으며 ‘원전’을 읽기 시작했다. 한국의 저항적 지식인들이 막 마르크스를 읽고, 레닌을 읽고, 스탈린을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동구에서는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렵게 비싼 입장권을 사고 오페라 구경 갔더니 입장하자마자 막이 내리고 있었다. 누구는 잔치가 끝났다고 했고, 누구는 난파선에서 쥐떼가 빠져나가는 것 같다고 악담을 했다.

피지도 못한 꽃, 3김이 따다


△ 광주학살로 시작된 1980년대는 특별한 시대였다. 사람들은 광주의 기억마저 학살하지는 않았다. (사진/ 연합)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이 시절 한국에 없었다. 이때 상처를 덜 받은 것이 내가 철들지 않은 이유인지도 모른다. 386은 불행한 세대였다. 민주화운동의 독수리 오형제 가문에서 386은 4·19 세대, 3선개헌까지 포함한 6·3 세대, 긴급조치 세대에 이은 넷째일 것이고, 막내가 아마 ‘경대 친구’라 불리는 91학번 이후 세대라 할 수 있다. 386 세대는 집안이 가장 요동칠 때 예민한 사춘기를 보냈고, 형들이 변변치 못한 탓에 민주화의 큰 짐을 누구보다 많이 짊어져야 했다. 이 글을 준비하는 중에 최장집 선생께서 현재 한국 사회의 중추가 된 386들의 무능과 준비 없음을 질타하신 것을 보게 되었다. 너무 옳으신 말씀이고 당연히 그런 방향에서 준비돼야 할 것이지만, 참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씀이셨다.

1987년 6월항쟁이 끝나고 이한렬군 장례식 날이었다. 군사정권이 주검을 탈취해갈지 몰랐기 때문에 청년학생들은 며칠 밤을 새우며 장례식장을 지켰다. 노제를 지내러 시청앞에 다다랐을 때 인파는 월드컵 때보다 더 많았다. 시청앞 광장이 꽉 찼는데 아직도 후미는 신촌 언저리에 있었으니까. 관제동원을 제하고는 단군 이래 최대의 인파가 모인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인파였고, 누구도 책임지지 못한 현장이었다. 그 당시 민청련 기관지 <민중신문> 기자로 일하던 나는 왔다갔다 하다가 전대협 의장이던 이인영(현재 열린우리당 의원)을 보게 되었다. 재야인사 누구도 방향을 제시하지 못할 때 그래도 그는 백만 인파를 향해 앰프 시설도 제대로 없는 마이크를 잡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배운 게 역사라고 3·1운동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33인은 태화관에서 청요리 시켜놓고 갑론을박 하다가 총독부에 연락해서 모시러 온 차를 타고 가버리고, 탑골공원 현장에서는 나이 어린 청년학생들이 오지 않는 ‘민족지도자’들을 발 동동 구르며 기다리다 자신들이 나서 시위를 주도했다. 1920년대가 민족지도자 33인의 시대가 되지 않고 청년학생들의 시대가 됨은 당연했다.

그런데 한국의 386은,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386 정치인들은 너무 빨리 시들고 있다. 세대로서의 386이 같이 진출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뿌리가 뻗어나가고 줄기가 굵어지고 가지가 실하고 그 끝에 제철에 꽃이 피어야 하는데, 3김이라는 화훼업자들이 젊은 피를 찾아 채 피지도 못한 꽃을 따다가 꽃병에 꽂은 격이다. 한 송이 꽃이 피려면 뿌리와 줄기와 가지가 다 같이 잘 자라야 하는데, 채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만 따버리니 꽃도 줄기도 빨리 시들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386 세대가 다들 자연스러운 분화 과정을 밟고 있지만, 자의인지 타의인지 386이란 딱지를 떼지 못하는 이들은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이다. 훈장일까 아니면 흉터일까, 나이 40이 넘어서도 학생운동의 경력은 그를 대표하는 이력으로 남아 있다. 3김의 발탁과 학생회장이라는 간판이 아니었더라면 그들은 지금 국회의원이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역사는 안 변하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그리고 많이 변하고 있다. 1875년에 태어난 이승만이 장기 집권을 하다가 최고 권력은 40년을 뛰어넘어 1917년생 육군소장 박정희에게 갔다. 박정희가 18년 장기 집권을 하더니 권력은 다시 1931년, 1932년생 육군소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러고는 거꾸로 1927년생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더니 1926년생 김대중이 그 자리를 이었다. 그리고 20년을 뛰어 1946년생인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다. 군사독재 30년이 지속되고 거기에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와 맞선 양김씨의 시대가 그만큼 오래가더니, 20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뒤엎었던 4·19 세대를 건너뛴 것이다.

양김씨의 시대에서 노무현으로의 이행에서 결정적 변수는 인터넷의 힘이었다. 인터넷의 힘은 갈수록 커진다. 이 힘 앞에서 사라진 말이 이른바 ‘킹메이커’다. 킹메이커를 꿈꾸던 중진들은 다 날아갔다. 예비 후보는 정치인들 속에서 나오게 되겠지만, 후보를 정하는 힘은 이미 네티즌들에게로 넘어갔다. 탄핵 사태를 보니 한국 정치의 양대 변수가 군사독재 시절의 ‘공작정치와 돈’에서 ‘인터넷과 자살골’로 넘어간 것 같다. 너무나 변수가 많은 한국 정치에서 앞날을 예상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터넷을 상대로 자살골 넣는 사람은 그야말로 “즐쳐드셈”이 된다. 역사가 무서운 것은 역사를 이끌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뒤에 처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즐겁게 힘을 보태 뒤에서 수레를 밀고 가면 원로가 될 수 있고, 계속 자기가 끌겠다고 앞에서 막아서면 수레에 깔릴 뿐이다.

이제 킹메이커는 네티즌

<님을 위한 행진곡>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386 시대의 ‘애국가’였다. 지금 386 국회의원이나 아니면 그들을 비판하는 글을 <한겨레21> 같은 잡지에 내 이름을 붙인 고정난에 쓸 수 있는 나는 이미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다 갖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나가고 있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가? 정치를 하다 보면 험한 얘기도 할 수 있다. 386들이 나나 유시민에게 험한 얘기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들은 책임이 있다. 그때 당신들 무등 태워 학생회장 뽑아준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 광경이 당신들의 영광인데 그 사람들의 악몽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광경을 우리 모두의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게 만들 책임, 그것을 우리는 당신들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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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한 유시민의 직무 유기

한홍구 교수의 ‘유시민 옹호론’을 반박한다… 대통령 무조건 감싸는 ‘도덕적 해이’는 어떻게 볼 것인가

▣ 함돈균/ 고려대 국문과 박사과정


꽤 오랫동안 망설이던 글을 이제야 투고하면서도 마음이 썩 편치 않은 까닭은 이 글이 내가 ‘한때’ 기대를 걸었고, 지금도 여전히 애증을 버릴 수 없는 한 사람에 관한 ‘비판적’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글은 <한겨레21> 10년 고정 독자로서 이 잡지에서 내가 가장 신뢰하는 한 필자의 글에 대한 반박문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한홍구의 당파성은 편협하다

‘유시민처럼 철들지 맙시다’라는 제목의 <한겨레21> 554호(2005년 4월12일)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는 몇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한홍구 교수는 이 글에서 과거사를 자기 일처럼 다루는 예의 탁월한 솜씨로 자신의 동기였던 ‘유시민’에 대한 과거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회고하면서, 현재 한국 정당정치의 핵심적 논란이 되고 있는 그를 따뜻하게 감싸안고 있다. 한 교수 글의 논지는 ‘유시민에 대한 현재 386 의원들의 악의에 찬 비난은 마치 소수파로서 민주당 경선을 전투적으로 치르며 겪었던 노무현의 수난’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현실정치에서 다 늙어버린 당내 인사- 그러나 ‘실세’- 중에는 지지세력이 없고, 인터넷 같은 ‘실체 없는’ 공간 속에서나 열렬히 지지를 받으며, 기존의 관례를 깨는 파격적 ‘가벼움’으로 좌충우돌하는 그의 언행이 너무 빨리 ‘철이 들어버린’ 386 의원들에게 아니꼬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이는 과거 노무현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고서 그는 386 의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유시민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수구에게 날을 세워 싸워봤느냐고.”

한 교수의 이런 지적은 그 자체로는 틀린 게 없다. 그러나 한국 정치 지형의 전체적 맥락에서 보면 그가 이런 방식으로 유시민을 ‘인간적으로 옹호’만 하고 글을 끝맺는 것은 옳지 못한 당파성을 보여준다. 그 당파성이 포괄하는 범위와 지향성이 너무 편협하다는 뜻이다.

한 교수는 이 글에서 유시민이라는 한 ‘개인’이 겪은 과거 독재 시절의 수난사를 장황하게 이야기하면서, 그가 현재 당내에서 겪고 있는 ‘싸움’의 모습을 은연중에 독재와 맞서 싸우던 과거 순교자의 이미지와 겹치게 하는 논법을 구사한다. 그러나 그는 ‘개인’ 유시민의 과거만 이야기할 뿐, 정작 ‘국회의원’이 된 뒤 유시민의 구체적 ‘실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유시민의 싸움이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향한 것인가라는 근본 질문은 생략되어 있다.

노무현 정부 출범 2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다양한 우려들이 있다. 우리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같은 수구언론의 입장과는 반대편에서 제기된 시민사회와 진보진영의 충분히 ‘이유 있는’ 지적들에 대해 노무현 정부가 그동안 어떤 방식으로 대응했으며, 이 때문에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이 정부가 어떠한 상처를 입혔는지, 결국 이 정부가 그들을 어떻게 자신의 비토 세력으로 만드는 우를 범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최장집 교수는 최근에 나온 일련의 책과 수차례의 신문 기고문 등을 통해서 노무현 정부 출범 당시 그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던 사람들이 사회적 공공성의 좌초와 노동의 위기, 정치의 시장 지배력 상실이라는 현재 상황 속에서 어떠한 좌절감과 배신감을 겪고 있는지를 지적하며, 한국 민주주의가 현재 근본적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역설한 바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필자는 ‘국회의원’ 유시민이 그동안 보여온 실천 방식들에 상당한 책임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이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현재 한국 시민사회가 겪고 있는 ‘배신감’과 일맥상통한다.


△ 2003년 11월 <한겨레>에서 주최한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총장과의 1대1 논쟁에서 유시민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너무 과도한 기대를 하지 마세요" 라고 말한 바 있다. (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개혁당 창당 뒤 보인 실망스런 행보

‘노무현당’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며 2002년 개혁당을 만들고, 2003년 개혁당 후보로 나서 일산에서 당선되던 당시 유시민의 행보는, 노무현이 2002년 민주당 경선 과정을 거쳐 대권 후보가 되고, 마침내 2003년 대통령에 취임하던 흐름과 거의 같이 진행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국회의원 유시민의 탄생은 대통령 노무현의 탄생과 쌍둥이다. 노무현에 대한 당시 유시민의 지지는 노무현이 소수파로서 한국 사회의 보수적 주류들에게 ‘이유 없는’ 흔들기를 당하고 있었으며, 그에게 개혁을 열망하는 한국 시민사회가 많은 기대를 보내고 있었다는 점에서 시대사적 정당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출범 1년이 지나는 과정에서 상황은 달라졌다. 이라크 파병, 새만금 간척사업, 부안 핵폐기물 처리장,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사업 등의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 이슈들은 각각 평화와 자주외교, 환경, 인권, 절차적 민주주의 등 매우 근본적인 문제들을 함의하고 있고, 따라서 정권의 시금석이 될 만한 사안들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이 사안들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의 지지자들이 어떤 배신감을 느꼈는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이 과정에서 유시민에게 우리가 바랐던 것, 곧 그의 역할은 이제와는 어쩌면 정반대의 자리에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는 앞서 언급한 일련의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대응에서 노무현 정부가 지지자들과 시민사회의 열망을 배반할 때, 쓰디쓴 소금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처럼 ‘노무현 사수’를 외치며 노무현 정부의 이데올로그를 자처했고, 그 결과로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노사모와 기존의 개혁당 조직을 흡수해 자신의 ‘계보’를 형성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사회적 사안들에 대해 그는 단 한번도 현 정부에 대해 정직한 비판과 고뇌 어린 충고를 해본 적이 없으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식의 교묘한 현실론만을 반복했다. 2003년 11월에 <한겨레>에서 주최한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총장과의 1대1 논쟁을 보며, 나는 어떠한 자기 반성도 없고, 자신과 현 정부를 지지해준 사람들에게 일말의 미안함도 없이 철저한 현실론으로 노무현 대통령만을 감싸고 도는 유시민의 어법에 기가 막혔다.

불교에는 ‘방편’이라는 말이 있다. 삶의 모든 것은 구도를 향해 가는 ‘방편’이자 건너가는 돌다리일 뿐, 그 자체의 실체는 없다는 말이다. ‘노무현’은 우리 모두가 더 나은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선택한 돌다리일 뿐,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 명민한 유시민은 왜 이런 방식으로 노무현의 이데올로그를 자처하는 길을 걷고 있는가. 이때의 논쟁에서 유시민은 매우 중요한 사안들에 대한 현 정부의 대응 방식을 비판하는 김기식 사무총장에게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타이르기까지 했다. 그가 경제학을 전공했으니 잘 알겠지만, 이런 식의 어법은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다. 경제학에서 ‘도덕적 해이’는 대행자(agency)가 의뢰인의 요구를 묵살하고, 자기 멋대로 돈을 유용하고 사업을 벌여나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런 식의 ‘영악한’ 이데올로그가 되라고 그를 국회에 보내지 않았다. 그의 선거 때 난 정치에 문외한인 이웃들에게까지 성금을 모아 돈을 보냈는데, 그의 이런 식의 언행은 우리들에게 너무 염치없는 일이 아닌가.

한홍구 교수는 그가 ‘철이 안 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에 대한 왜곡이다. 내가 보기에 유시민은 너무 영리하고 그래서 너무 노회하다. 아직 사십대인 그의 정치 행보는 어정쩡하게 늙어버린 386보다 ‘정치 9단급’에 가 있기 때문에 ‘철이 덜 든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프로이트식으로 말한다면 이미 ‘쾌락원칙’이 아니라 철저한 ‘현실원칙’에 입각해 있으며, 상상력이 발동하는 자유로운 율동성이 아니라, 마키아벨리적 기술공학의 논리에 침윤되어 있다.

정치9단, 유시민은 답하라

소설가 최인훈은 <서유기>에서 “어떠한 현실정파에도 가입하지 않기. 가장 진보적인 정파의 가장 진보적인 순간만을 가장 짧게만 지지하기”라고 말한 바 있다. 정치를 예술화하려는 최인훈의 이러한 꿈은 정치의 장에서 어차피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 같은 이야기지만, 순간순간의 중요한 계기 속에서 삶과 정치를 예술화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오지도 않을 미래로 삶을 기만하며 현재의 삶을 수단화하려는 기술공학적 논리가 정치의 장을 뒤덮을 때, 인간의 현실은 지옥이 될 것이다.

과연 유시민의 행보는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언변의 달인’ 유시민은 이 글의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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