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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 정운영의 마지막 칼럼집
정운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1991년 11월. 강바람까지 더해져 그 날은 무척이나 추웠다. 다만 난생 처음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개최되었던 "전국노동자대회"를 참가하기 위해 여의도 "금성무대"(지금은 낯선 이름이 되어버렸다. 아마 위치가 LG 트윈타워 앞인데다가 그 야외무대를 금성(LG)에서 제작을 했는지 다들 "금성무대"라 불렀다.)에 모인 사람들의 열기만은 차가운 강바람도 비켜갈만큼 뜨거웠다. 입가에 번지는 허연 입김과 펄럭이는 수 많은 깃발들. 행진 대열의 맨 앞을 나섰던 현대중공업 노조원의 우람한 팔뚝은 그 큰 깃발을 한 손으로 불끈쥐고 행진할 수 있다는 것도 그 날 처음 경이롭게 본 것 중의 하나다. 그러나 따뜻한 남쪽동네에서 갖 대학에 들어온 나에게는 그 날 서울은 무척 추웠다는 기억만 생생하다. 그리고 며칠 뒤면 우리 동아리에서 개최하는 초청강연회 준비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준비할 것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것도 그 날 집회 내내 기억나던 것 중의 하나였다.
정운영 교수와는 그렇게 처음 만나게 되었다. 우리 동아리의 첫 행사이자, 나름대로 야심차게 준비했던 것이라 손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녔는데, 역시 그 분의 이름덕이었는지 대성황이었다. 그러고보니 그를 처음 대한 건 그해 여름 선배들의 권유로 샀던 "광대의 경제학(까치)"에서 이미 책 속에서 만나기는 했었다. 어린 시절 도대체 이해하기 힘들었던 그의 칼럼들.
추위에 결정적으로 약한 나는, 강연 내내 그가 입고 온 목까지 올라오는 폴라티셔츠가 인상에 많이 남는다. 지금 막 읽기를 끝낸 이 책의 표지도 역시 그 종류의 티셔츠다. 수수한 점버와 함께. 그렇게 그는 내게 호감덩어리 그 자체였고, 그의 글이 이해되기 시작할 때쯤은 읽자마자 당장이라도 그의 글을 통째로 외워 삼켜버리고 싶을 정도의 경이로움에 내내 젖었었다. 그의 생각과 말과 글들. 그 모든 것이 부족한 나에게는 존경스러움의 상징이었기에 나는 그 강연회를 위해 버린, 아니 투자한 나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으며, 내가 준비한 사소한 것들이 내게는 당당하고도 자랑스럽게 다가왔다.
"무엇이 무너지는가?"
1991년은 소련연방의 해체가 시작된 해로 기억한다. 그 분은 강연에는 응하되 전혀 원고를 주지 않으셨는데, 강연 역시도 원고 없이 그저 온 몸으로 강연을 했을 뿐이다. 다만 A4용지에 대략의 주제만 정해주었고 그 첫번째가 "무엇이 무너지는가?"였다. 그 시절 나름대로 운동하던 사람들에게는 구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급속한 해체는, 이게 현실이다...라고 하면서도 차마 두 눈 부릅뜨고 쳐다보며 인정하기는 어려웠던...뜨거운 감자덩어리였는지 모른다. 그 날 강연내용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한다. 뒷풀이조차 함께 할 시간없이 한신대로 가신다면 훌쩍 떠나버리셨으니까.
오히려 그렇게 그가 남긴 여운은 현재까지 내내 남아, 그의 글이라면 신문쪼가리를 찢어서라도 읽고 보관했다. 나의 나이 든 스크랩북에는 10년이 넘은 그의 칼럼들이 즐비하다. 직장생활 초기에는 그의 글 때문에 한겨레신문을 구독했는데, 우리 회사 우리 사업장에 한겨레는 딱 1부, 나의 신문만이 배달되었을 뿐이다. 이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참으로 그 분에 의해 얽힌 많은 것들이 되살아나 나 역시도 놀라울 지경이다. 아무 조건없는 존경이랄까?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이 칼럼집은 유고집이라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작년 9월 돌아가신 이후, 그간 중앙일보에 게재한 칼럼을 모아 "마지막 칼럼집"으로 출판이 된 책이라 한다. 그의 글쓰기는 언제 읽어도 여전하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있는 정치, 경제, 사회적 현상들을 수 많은 인용과 비유를 통해 아주 손쉽고도 적절하게 나타냄으로써 그의 다독(多讀)과 다식(多植)함에 기가 질리고, 결코 현학적이지 않은 명쾌한 해법 또한 읽는 이로 하여금 한결 화통하게 만든다. 적절한 분량에 적절한 비유에 적절한 해법에 적절한 눈높이. 내가 그를 고분고분 기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 역시도 그가 평소에 써 오던 칼럼의 글쓰기가 크게 틀리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듯 한겨레에서 중앙일보로 자리를 옮기면서 글쓰기가 틀려졌다는 단호한 비판들이 나오는 단초들을 나 역시도 이 칼럼집을 통해 여러 번 발견하게 되었다. "부자들의 전대를 풀게하라"는 칼럼에서 "부자를 달래라! 그들이 이뻐서가 아니라 그들이 전대를 풀어야 담배보다 급한 점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등과 같은 류의 해법은 예전에 비해 다분히 중도적이고 타협적인 대안, 어찌보면 예전의 모습에서 한참 오른쪽으로 옮겨간 모습으로 비춰지고, 이는 특히나 한겨레가 아닌 조중동 중의 하나인 중앙일보에 실리는 점이 본질적 의미의 해석에서 더 크게 확대되어 비춰지는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국내 정치경제, 특히 노무현 참여정부의 정책이나 실체적 정책구현 양식에서의 비평은 대기업(재벌)의 입장이나 보수적 견지에서 많은 부분 지면을 할애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그렇게 각박하게 몰아세우고 싶지는 않다. 어느 글에선가 중앙일보로 옮긴 뒷얘기도 본 적이 있고, 그 역시도 사람들의 그런 비판적 목소리를 못 들었을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겪고있는 이 '삶'이라는 것으로 변명을 삼아주는 것이 어떨까 싶다. 내가 안타까운 것은 더 이상 책을 지극히도 사랑하던 그를 뵐 수 없고, 그의 감칠맛나는 예리한 글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친구의 말대로 나는 그를 이해함으로써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함으로써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