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은 그날의 영광에 침뱉지 말라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전사’의 시대를 살다 일찍 시들어버린 세대…아직도 험한 길 가는 사람들에게 험한 얘기 하지 말자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지난 몇년간 <한겨레21>에 고정난을 갖고서 근 80회에 걸쳐 글을 쓰면서 개혁 또는 반수구 진영 내부의 논쟁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거리를 두어왔다. 아마 문부식씨의 이른바 ‘치열한 자기성찰’이 하필 <조선일보>에 실렸을 때 요란한 반성의 계보에 대해 한마디 한 게 유일한 예외였을 것이다(‘자기성찰, 하려면 조용히 하자’ 2002년 8월21일치, 423호).
운동 진영 내의 논쟁에 참견할 시간과 정력이 있으면 과거 청산 작업이나 평화운동에 힘을 쏟던지, 아니면 책 한권라도 더 보거나 잠 한숨 더 자는 게 남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지난번 역사이야기에 ‘386’ 의원들의 유시민 집단 비판에 대해 철들지 않고 사는 즐거움을 이야기하며 386 의원들을 비판했더니 역사이야기를 연재한 이래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1980년대, 죽음을 기억하는 시대


△ 이한열군 노제에 모인 인파는 2002년 월드컵 때보다 더 많았다. 그때의 영광은 어디로 갔을까. (사진/ 한겨레)

지난번 글은 유시민이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것이 계기가 돼 나온 것이지만, 내가 유시민의 친구라서 쓴 것이라기보다는 386 의원들에게 큰 기대를 갖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쓴 것이다. 그러나 책이 나오고 난 뒤에 읽어보니 분량 면에서 유시민에 대한 옛날 이야기가 너무 많이 들어가 균형이 깨진 것은 둘째치고라도, 유시민에 대해서는 ‘옛날’ 이야기만 하고 386 의원들에 대해서는 ‘현재’를 들어가며 비판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독자 중의 꽤 많은 분들이 386 의원 비판이라는 내 원래 의도와 상관없이 유시민 옹호로 읽으실 수 있었겠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이나 평화 문제에 대한 ‘현재’의 유시민이 갖는 한계에 대한 내용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 애독자들도 계셨다.

지난호에 실린 함돈균씨의 내 글에 대한 반론은 내용으로도 그렇고, 필자도 나보다는 유시민에게 답하라고 하고 있기에 꼭 내가 답글을 써야 할 것은 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열린우리당 경선이 끝난 뒤 386 의원 중 한 사람이 인터넷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쏟아부은 말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며 “OOO을 반동으로 몰면 도대체 누구와 함께 개혁을 하겠다는 겁니까”라고 푸념했다. 말이란 것이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기 때문에 글로 옮겨놓은 짧은 말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정말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는 것일까?

1990년대에 30대에 접어든 1960년대 출생의 80년대 학번들을 가리키는 386이란 말은 이들의 상당수가 40대에 접어들었음에도 여전히 언론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386이란 말은 그 시절 대학에 가지 못한 숱한 동년배들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80년대의 민중 지향성에서 한참 벗어난 용어이지만, 한번 붙은 딱지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 이전에도 4·19 세대, 6·3 세대, 3선개헌 세대, 교련반대 세대, 긴급조치 세대 등이 있었지만, 4∼5년 단위로 끊어서 그룹을 지어주었지 10년을 통째로 한데 묶은 것은 386 세대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질풍노도의 80년대란 하나의 경험으로 묶어버리기에는 광주와 6월항쟁과 냉전 체제의 붕괴와 1990년 벽두의 3당 합당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버린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386도 가지가지다. 386이란 말이 쓰이기 전이었던 1980년대, 그때는 ‘백만학도의 대동단결’이란 말이 가능했다. 그러나 20년 세월이 훌쩍 흐른 지금, 누구는 국회의원으로, 누구는 청와대나 정부의 고위직으로, 누구는 벤처기업 사장으로, 누구는 변호사로, 누구는 교수로 잘 풀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학교를 다니는 사람도 있고, 아직도 철이 안 들어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386은 위장 취업할 필요 없이, 그 시절 노래마냥 ‘진짜 노동자’가 되어 있고, 그 상당수는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그래도 같은 것이라곤 눈가에 자리잡아가는 주름일 뿐. 무슨 동창회를 하려는 것도 아닐 터인데, 이제 와 386을 커다란 하나의 세대로 묶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과 광주 학살로 시작된 1980년대는 특별한 시대였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100만명의 학살은 그 기억마저 학살당해야 했지만, 우리는 광주를 그렇게 보내지 않았다. 그 여름 학살은 계엄합동수사단에서의 임기윤 목사 의문사와 청주보안감호소에서 변형만·김용성 두분 비전향 장기수의 의문사로 이어졌다. 밖에서는 서강대생 김의기가 진압 작전 직후인 5월30일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몸을 던진 것을 시작으로 학살 정권과의 투쟁에서 숱한 청년들이 목숨을 내놓았다. 1970년대에도 전태일·김상진 열사가 있었고, 인혁당 사건 관련자 여덟분에 대한 사법살인이 있었고, 장준하 선생 등의 의문사가 있었지만, 학생들이 죽음을 피부로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나 1980년대는 달랐다. 1981년이 되자 광주에서 친구를 잃은 사람들이 대학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4·19 때 많은 피살자가 발생했지만, 그래도 독재자 이승만은 권좌에서 쫓겨났다. 그렇지만 1980년대 광주 학살의 책임자 전두환은 권좌에 앉아 있었다. 그런 전두환 정권을 향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체험한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 저항은 유시민이 ‘항소이유서’에 쓴 것처럼 “열여섯 꽃 같은 처녀가 매 주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달치 월급보다 더 많은 우리들의 하숙비”를 부끄러워하던, 또는 <모래시계>에서 혜린이가 술에 취해 노동자들은 단식농성 하는데 자기는 밥해먹으려고 쌀 사왔다고 괴로워하던 그런 여린 마음에서 시작된 1970년대의 저항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비장한 저항이었다. 80년대 학번들은 박정희 권력이 완전히 공고화된 뒤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다. 70년대 학번들은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 식으로 시작되는 국어교과서로 배운 세대였다면 1980년대 세대들은 “나, 우리, 대한민국” 하는 식으로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독재정권이 주입한 ‘국가관’이 꽉 박힌 교육을 받아야 했다.


△ 3김이라는 화훼업자들은 채 피지도 못한 꽃을 꺾어 꽃병에 꽂았다. 1989년 당시 세 야당 총재들의 회동. (사진/ 한겨레)

‘어수룩함’에서 과학적 세계관으로

이런 분위기는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외견상 학생회를 구성할 수 있고, 대동제도 할 수 있는 1980년대 대학이 더 자유로워 보일지 모른다. 교정 곳곳에 닭장차가 서 있고, 중세의 기사를 연상케 하는 갑옷을 입은 우리 또래의 전경들이 공터에서 팩차기를 하고, 벤치는 리시버를 꽂은 ‘짭새’들에게 점령당해 있는 1970년대 대학, 외견상 그건 대학도 아니었다. 그러나 저항을 꿈꾸던 사람들의 정신세계는 달랐다. 80년대 학번들이 보기에 70년대 학번들의 세미나 커리큘럼은 어수룩하다 못해 황당했을 것이다. 70년대 학번들은 라인홀트 니이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나 이규호(1970년대 의식화 도서의 저자에서 1980년대 전두환의 비서실장이 되어버린 그 이규호)의 <사람됨의 철학> 같은 책을 의식화 입문서로 읽었다. 1980년대의 수많은 사회과학 서적을 찍어낸 진보적 출판사들은 아직 문을 열기 전이었다. 저자가 암에 걸려 유명을 달리하는 바람에 원고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하게 출간돼 부분부분 암호 해독 같은 작업을 거쳐야 했던 최종식 선생의 <서양경제사요론> 같은 책도 1970년대 후반에 가서야 출간됐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런 ‘어수룩한’ 책을 읽으며 해답 없는 길을 찾아야 했던 젊은 날의 방황이나 “쌀나무도 알고 있는 슬기로운 머리”로 부대꼈던 모색의 시간은 절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이른바 386 세대들은 세미나 커리큘럼부터 달랐다. 철저한 과학적 세계관의 확립을 목표로 잘 짜인 커리큘럼을 따라 일로매진할 수 있었다. 수천 동포의 학살자가 대통령이랍시고 권좌에 앉아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서야 할 자리는 김남주의 시를 빌리지 않더라도 전선이었고, 감옥이었다. 거칠게 표현한다면 1970년대는 역사가 젊은이들에게 사람이 되라고 했다면, 1980년대는 젊은이들에게 전사가 되라고 했던 시기다. 혁명의 전사도 그렇고 군인도 그렇고, 신병 훈련의 목표는 딴 생각을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군사독재 정권은 학생들을 병영국가의 예비 군인으로 키워내고 있었다.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가장 군사주의적·반공적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와, 선배들이 ‘주적’만 북괴에서 군사 정권과 자본가와 미국의 동맹체로 바꿔주면 역시 충실한 전사가 되었다. 군사독재에 목숨을 걸고 싸우고 감옥에 간 민주투사를 수천·수만명 배출한 나라에서, 그 시절 민주청년학생 중에서 단 한명의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도 나오지 않은 역설도 그 시절에는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늘 그랬듯이 후생(後生)이 가외(可畏)였고,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치는 법이었다. 70년대 학번들이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노래하게 된 4·19 세대나 6·3 세대를 우습게 봤듯이, 사회과학적 인식으로 무장한 386들도 낭만적 70년대 학번들을 우습게 보았다.

아무튼 “야, 이놈들아 공부 좀 해라”라고 폼잡고 후배들을 훈계하던 70년대 선배들은 이제 386들로부터 “아니, 형님은 아직 그것도 안 읽었소?” 하는 구박을 받으며 ‘원전’을 읽기 시작했다. 한국의 저항적 지식인들이 막 마르크스를 읽고, 레닌을 읽고, 스탈린을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동구에서는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렵게 비싼 입장권을 사고 오페라 구경 갔더니 입장하자마자 막이 내리고 있었다. 누구는 잔치가 끝났다고 했고, 누구는 난파선에서 쥐떼가 빠져나가는 것 같다고 악담을 했다.

피지도 못한 꽃, 3김이 따다


△ 광주학살로 시작된 1980년대는 특별한 시대였다. 사람들은 광주의 기억마저 학살하지는 않았다. (사진/ 연합)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이 시절 한국에 없었다. 이때 상처를 덜 받은 것이 내가 철들지 않은 이유인지도 모른다. 386은 불행한 세대였다. 민주화운동의 독수리 오형제 가문에서 386은 4·19 세대, 3선개헌까지 포함한 6·3 세대, 긴급조치 세대에 이은 넷째일 것이고, 막내가 아마 ‘경대 친구’라 불리는 91학번 이후 세대라 할 수 있다. 386 세대는 집안이 가장 요동칠 때 예민한 사춘기를 보냈고, 형들이 변변치 못한 탓에 민주화의 큰 짐을 누구보다 많이 짊어져야 했다. 이 글을 준비하는 중에 최장집 선생께서 현재 한국 사회의 중추가 된 386들의 무능과 준비 없음을 질타하신 것을 보게 되었다. 너무 옳으신 말씀이고 당연히 그런 방향에서 준비돼야 할 것이지만, 참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씀이셨다.

1987년 6월항쟁이 끝나고 이한렬군 장례식 날이었다. 군사정권이 주검을 탈취해갈지 몰랐기 때문에 청년학생들은 며칠 밤을 새우며 장례식장을 지켰다. 노제를 지내러 시청앞에 다다랐을 때 인파는 월드컵 때보다 더 많았다. 시청앞 광장이 꽉 찼는데 아직도 후미는 신촌 언저리에 있었으니까. 관제동원을 제하고는 단군 이래 최대의 인파가 모인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인파였고, 누구도 책임지지 못한 현장이었다. 그 당시 민청련 기관지 <민중신문> 기자로 일하던 나는 왔다갔다 하다가 전대협 의장이던 이인영(현재 열린우리당 의원)을 보게 되었다. 재야인사 누구도 방향을 제시하지 못할 때 그래도 그는 백만 인파를 향해 앰프 시설도 제대로 없는 마이크를 잡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배운 게 역사라고 3·1운동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33인은 태화관에서 청요리 시켜놓고 갑론을박 하다가 총독부에 연락해서 모시러 온 차를 타고 가버리고, 탑골공원 현장에서는 나이 어린 청년학생들이 오지 않는 ‘민족지도자’들을 발 동동 구르며 기다리다 자신들이 나서 시위를 주도했다. 1920년대가 민족지도자 33인의 시대가 되지 않고 청년학생들의 시대가 됨은 당연했다.

그런데 한국의 386은,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386 정치인들은 너무 빨리 시들고 있다. 세대로서의 386이 같이 진출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뿌리가 뻗어나가고 줄기가 굵어지고 가지가 실하고 그 끝에 제철에 꽃이 피어야 하는데, 3김이라는 화훼업자들이 젊은 피를 찾아 채 피지도 못한 꽃을 따다가 꽃병에 꽂은 격이다. 한 송이 꽃이 피려면 뿌리와 줄기와 가지가 다 같이 잘 자라야 하는데, 채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만 따버리니 꽃도 줄기도 빨리 시들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386 세대가 다들 자연스러운 분화 과정을 밟고 있지만, 자의인지 타의인지 386이란 딱지를 떼지 못하는 이들은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이다. 훈장일까 아니면 흉터일까, 나이 40이 넘어서도 학생운동의 경력은 그를 대표하는 이력으로 남아 있다. 3김의 발탁과 학생회장이라는 간판이 아니었더라면 그들은 지금 국회의원이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역사는 안 변하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그리고 많이 변하고 있다. 1875년에 태어난 이승만이 장기 집권을 하다가 최고 권력은 40년을 뛰어넘어 1917년생 육군소장 박정희에게 갔다. 박정희가 18년 장기 집권을 하더니 권력은 다시 1931년, 1932년생 육군소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러고는 거꾸로 1927년생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더니 1926년생 김대중이 그 자리를 이었다. 그리고 20년을 뛰어 1946년생인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다. 군사독재 30년이 지속되고 거기에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와 맞선 양김씨의 시대가 그만큼 오래가더니, 20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뒤엎었던 4·19 세대를 건너뛴 것이다.

양김씨의 시대에서 노무현으로의 이행에서 결정적 변수는 인터넷의 힘이었다. 인터넷의 힘은 갈수록 커진다. 이 힘 앞에서 사라진 말이 이른바 ‘킹메이커’다. 킹메이커를 꿈꾸던 중진들은 다 날아갔다. 예비 후보는 정치인들 속에서 나오게 되겠지만, 후보를 정하는 힘은 이미 네티즌들에게로 넘어갔다. 탄핵 사태를 보니 한국 정치의 양대 변수가 군사독재 시절의 ‘공작정치와 돈’에서 ‘인터넷과 자살골’로 넘어간 것 같다. 너무나 변수가 많은 한국 정치에서 앞날을 예상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터넷을 상대로 자살골 넣는 사람은 그야말로 “즐쳐드셈”이 된다. 역사가 무서운 것은 역사를 이끌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뒤에 처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즐겁게 힘을 보태 뒤에서 수레를 밀고 가면 원로가 될 수 있고, 계속 자기가 끌겠다고 앞에서 막아서면 수레에 깔릴 뿐이다.

이제 킹메이커는 네티즌

<님을 위한 행진곡>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386 시대의 ‘애국가’였다. 지금 386 국회의원이나 아니면 그들을 비판하는 글을 <한겨레21> 같은 잡지에 내 이름을 붙인 고정난에 쓸 수 있는 나는 이미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다 갖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나가고 있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가? 정치를 하다 보면 험한 얘기도 할 수 있다. 386들이 나나 유시민에게 험한 얘기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들은 책임이 있다. 그때 당신들 무등 태워 학생회장 뽑아준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 광경이 당신들의 영광인데 그 사람들의 악몽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광경을 우리 모두의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게 만들 책임, 그것을 우리는 당신들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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