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 끝에 네가 서 있다면 좋을 텐데 - 최갑수 골목 산책
최갑수 글.사진 / 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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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지막 몇 개의 골목을 남겨두고, 바쁘다는 핑계로 잠시 책을 덮어두고 있다 오늘에야 마무리를 했다. 약 30분도 안되는 시간만에 마지막 책장을 넘기게 되는 분량이었는데도 다 읽지 않고 며칠을 끌고 온 것이다. 그냥 그 골목길들을 잠시 남겨두고 싶었다. 어디론가 여행을 좀 다녀야겠다는 생각, 먼지 쌓인 사진기를 다시 들어야겠다는 생각...그렇게 얄팍하게 남겨 놓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책을 덮고 드는 생각이지만, 어릴 적 살았던 내 삶의 골목길, 책에서 소개되는 수많은 골목길이 현대적인 중장비로 30분이면 밀어버리고 판판한 새 터로 언제든지 만들 수 있겠지만, 얽히고 섥힌 좁다란 골목길이 쉽게 사라지지 않은 것도 내가 책을 마무리하지 못한 이유가 같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좁은 골목에 펼쳐진 많은 사연과 함께 밀어버리지 못하고 남겨져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게하는 우리네 삶의 공간들이기에.

 

(p102) 골목에 나와 있는, 벽 앞의 세워진 오래된 그것들은 어쩌면 책갈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자신들이 한 시절 사랑했던 생의 한 부분을 기억하기 위해,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슬며시 끼워놓은 책갈피. 사람들이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 물건을 버리는 순간 자기 생의 한 부분이 휘발할 것이고 그러면 그 질량만큼 외로워질 것이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버리고 사는 것이, 늘 가볍고 비운만큼 채워지는 것도 쉽다는 것을 알지만,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이런 이유가 아니겠는가? 다 사그러져 가는 공간들에 예술인들이 갖가지 붓과 페인트로 채색을 하고, 간판들을 새로 내걸고, 동네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 그 공간이 존재하는 동안, 그 삶이 존재하는 동안은, 어둡고 침울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라 생각했을 것 같다. 몇 해 전부터 골목길 담벼락에 그려진 많은 그림들과 작품들 덕에 주민들 표정이 밝아졌다하고, 햇볕따라 덩그렇게 구조물의 그림자만 지던 그 골목들은 찾아오는 사람들 냄새로 생기가 돌았다하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p329) 사회학자 제인 제이콥스가 말한 대로, 골목은 '도시의 공공 공간'이기도 하다. 골목은 이웃을 마주하고 안부를 건네고 이야기를 나누는 광장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하다. 때로는 주민들의 작은 정원과 텃밭이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골목이 없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어느 한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깃든 우리 삶의 방식과 패턴, 우리가 지나왔던 시간이 한꺼번에 소멸한다는 것이다.

배다리를 걷다보면 알 수 있다. 골목은 자연스럽게 진화한다는 것을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을. 그리고 지킬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어떤 때는 가만히 내버려두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전국의 골목길 구석구석을 돌며 쓴 이 글과 사진들은 말 그대로 있는 그대로를 두고 산책하며 쓴 글이다. 골목길을 찾아가는 대중교통 편도 설명해 두고, 어디를 둘러보면 좋다는 여행가이드와 같은 책이기도 하다. 골목길마다의 역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도 않고, 골목길에 사회학적, 지리학적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으며, 그냥 담장 너머에 널린 빨래와 대문 앞에 놓인 화분 하나에 눈길을 보내는 담담한 글들이다. 그래서 내게는 조금 불만족스러운 책이기도 했다. 그래도 좋은 사진을 찍으려 구석구석을 누비고, 사람들을 만나려 하고, 원하는 것을 위해 많은 기다림이 녹아든 그의 발품팔이 글과 사진에 조용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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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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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글은 늘 메마르다. 관여하지 않고 냉정하게 관조하는 글이, 되려 번득거리는 칼날처럼 매섭다. 그러나 그의 글은 늘 피곤하고 찌든 사람을 향하고, 고통스럽고 슬픔에 찬 사람의 희망과 사랑을 바라본다. 그러기에 그의 글은 푸석거리는 메마름이 아니라 인간이 줄 수 있는 희망과 사랑이라는 약간의 물기만으로도 메워질 수 있는 메마름이다.

 

처음 흑산을 손에 잡았을 때 나는 끝까지 책을 읽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 뜨겁고도 고통스러워 글 하나하나가 가슴에 치받는 느낌이었다. 사학죄인 정약종의 추문과 참수, 정약현과 두물머리 풍경, 사위 황사영과 천주, 마부 마노리의 사행길 그리고 청나라 천주당, 사공 문풍세와 수탉, 창대와 귀향 온 정약전. 이 모두를 짧은 글에 다 품어 내기가 얼마나 괴롭고도 고통스러웠을까? 그러하기에 글은 방울 셋 달린 대비의 파발마처럼 급히도 내달린다. 내달린 글은 추스릴 틈이 없이 감시와 포위망을 좁혀오는 포도청 군사들의 위협처럼 심장 속으로 쏟아져든다.

 

나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만들면 만들수록 생각은 번져버리고 고통은 밀려 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고통이 썰물처럼 빠진 후에도 괴로움의 이랑들이 패였을 것이다. 아마도 하얀바다를 건너 현실과 육지의 시간과 단절된 정약전만이 그가 느낀 고통을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일까? 정약전은 흑산에서 죽기 전 자산어보를 남겼고, 절두산을 지날 때마다 힘겨워 한 그는 흑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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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선생은 당분간 고개를 뒤로 젖히지 말라했다. 엎드려 잠을 자야 했던 시기에 비하면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고통스럽다기보다 잠깐 불편하고 괴로웠던 시간이 지나면 만사가 편해질 것만 같았던 기대가 퇴색해버린 느낌이었다. 아...별을 보기는 글렀네. 의사선생의 말에서 나는 당분간 보지 못할 별과 하늘을 떠올렸다.

 

어릴때 언덕배기에 있던 집에 꾸역꾸역 오르다보면 시립게도 푸른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제 스스로 갖던 느낌을 좋아했던 것 같다. 오리온이다! 세 형제가 걸어 오를 때는 별을 보고 손가락을 펼치며 스스로만 갖던 내 느낌을 형제들과 공감할 수 있는 별이라 더욱 그 기억이 진해져버린 별이었나보다. 저 별은 내꺼! 넓다랂게 네모난 꼭지점을 이룬 네 개의 별 안에 조로록 박혀 있는 세 개의 별을 두고 니꺼 내꺼를 외치긴 했는데 난 어떤 하나를 정하고 내 별이라 얘기한 적이 없었다. 난 그 무리에 속해 있다는 것이, 빛을 내는 내 것이 무리 속에 막연히 존재한다는 것에 더 만족했었던 것 같다. 내 별은 있었으나 없었던 것이다.

 

 

눈이 좋아져 밤에 참 많은 별들이 보인다. 안경을 쓰고 보면 더 많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옥상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오리온이 눈에 들어왔다. 10년 전 지리산 연하천 길바닥 침랑 안에서 비박하며 보던 은하수만큼은 아니지만, 무심히 많은 시간을 조용히 제 갈 길을 운행하는 별이 오늘밤에는 더 반갑고도 서럽다.

 

길 잃은 가냘픈 별이 조용히 양치기 목동의 어깨에 내려앉아 잠들었노라며 별 속에서 먼동을 기다리던 양치기의 마음을 노래한 알퐁스 도데는 그저 그 순간이 아름다웠음을 말하고 싶었을 것 같다. 양치기도 스테파네트도 조용히 운행하는 별처럼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무리지어 우리라고 말하던 것들도 각자 제 길이 있는 것이다. 그런 뻔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만 내 것을 모르는 것일까? 오늘 밤도 오리온은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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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태의 세계 도서관 순례기 - 전2권 + 북하우스 노트 -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 <지상의 위대한 도서관>
최정태 글.사진 / 한길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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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도서관이란 무엇하는 곳일까? 책을 읽는 곳인가, 책을 보관하는 곳인가, 조용히 자기 공부하는 공간인가? 하긴 내 스스로도 그런 궁금증을 가져 본 지가 오래된 듯하다. 가끔 내가 들락거리는 시립도서관의 표정은, 아침 일찍부터 공인중개사 시험을 비롯한 각종 시험에 대비하는 많은 분들이 무리지어 일찍부터 열람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시험공부를 하러 온 것인지 마땅히 모여 놀 곳이 부족해서 온 것인지 혼동되는 중고생들이 북적대고, 개관시간이 조금 지나면 아기들 손 잡고 책을 빌리러 오는 부모님들의 모습이 보이고, 도서관에서 일하는 것이 생업인 사서분들이나 관계자들, 구내식당이나 매점에서 일하고 계신 분들의 무미건조한 표정들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다. 서초동의 국립도서관, 여의도의 국회도서관, 학교 다니던 시절의 대학도서관, 지금 살고있는 동네와 살았던 고향의 시립도서관도 별반 틀리지 않았던 기억이다. 딱 짤라서 구내식당의 밥값 싼 것 이외에는 아무 감동 없이 그냥 그랬고, 그냥 그랬던 것이 당연했던 것 같다. 우리 주변에 감동을 주는 도서관은 없을까?

 

이 책 '지상의 위대한 도서관'은 전작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에 이은 연작으로 두 편 모두 세상의 유명한 도서관을 둘러보고 쓴 기행문이다. 사라진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복원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기금을 마련해 세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비롯해 중세 유럽의 수도원 도서관들, 세상의 학문을 이끌어 가는데 주역이 되었던 옥스포드, 켐브리지, 하버드 등의 대학도서관들, 혁신적인 시스템을 갖춘 현재의 공공도서관과 각종 특수 도서관들이 생생한 사진과 함께 도서관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역사적 의미와 더불어 기능적 역할에 대해서도 저자의 전문가적인 견해가 도서관 하나하나마다 설명이 되어있고, 도서관이 운영되는 각종 시스템과 건물의 건축학적인 의미도 내게는 책을 읽는 동안 재미있는 요소이기도 했다. 그에 반해 글 자체에서 풍겨나는 재미는 별로 없는 책이었다. 아름답고도 위대한 도서관들을 펼쳐놓긴 했으나 한번에 훑어주기에는 너무 거대한 곳들이라 설명하느라 숨이 넘어가는 느낌이랄까. 도서관 자체만으로도 감동적이라 그 감동을 다 표현하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책에서는 내내 '영혼의 요양소'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도서관을 두고 일컫는 표현이고, 이는 아주 오래된 도서관들의 입구에 새겨져 있던 문구라고 한다. 비록 도서관이란 곳이 현대에 들어서야 공공의 개념이 생긴 것이고, 이전의 도서관들은 대부분 귀족들과 같은 특수한 계층만 이용한 곳이라 해도 책 앞에서 영혼이 맑아지고 치유된다는 것은, 돌에 새겨 세월을 머금은 빛바랜 문구라 해도 오늘 우리의 도서관도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도서관이 무엇하는 곳이어야 하는가를 명쾌하게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늙어서 도서관 하나 차렸으면 하는 꿈을 꾼다. 세상사람들이 위대하고 아름답다 하지 않더라도, 함께 책을 읽고 영혼이 즐거워지는 공간이라면 족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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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2-16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얼마만입니까!!

dalpan 2012-02-16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근데 이거 댓글 어찌 달아야 되는건가요? 그냥 이렇게 쓰면 다락방님 댓글 밑에 붙는건가요? 모든 게 다 새롭구만요.

dalpan 2012-02-16 16:27   좋아요 0 | URL
아...역시 이렇게 하면 안되는거였네. ㅋㅋㅋ 댓글달기로 들어가서 써야 하는거네...무식무식..
오랜만에 책상머리에 앉아 글한번 써봤는데, 이것 역시 생소하더구만요. 글도 잘 안나가고. 잘 지내시지요?

다락방 2012-02-16 18:0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댓글을 어떻게 다는지도 모르실 정도로 무심하셨다니..너무하세욧!!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지내야 할텐데 말이죠.
:)

라로 2012-02-17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ㅎㅎㅎㅎ
반가와요~~.^^

dalpan 2012-02-17 16:13   좋아요 0 | URL
나비님 반갑습니다~ 이리들 환대해 주시니 민망스럽습니다. 허허허
 
개미 3 (양장) - 제2부 개미의 날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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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려 20여년 전 친구들에게 그렇게 칭찬을 받던 그 유명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읽었다. 책에 대한 얘기보다도 이런 얘기가 먼저 나오는 것이 20여 년이라는 세월이 유수같아 놀랍기도 하거니와 그 시간이 흐른 이후도 여전히 현실 사회에서 유효한 상상력을 보여 준 책이라 한번 더 놀랍기 때문이다. 개미와 인간과의 관계형성이 결국 되돌이켜 인간군상들 사이의 소통과 연대, 사랑과 예술에 대한 반성과 고찰로 귀결되도록 한 작가의 통찰력과 상상력에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책 말미에 쓰여진 문장들을 옮겨 적으며, 다시 그 의미를 곱씹어 본다.

3권 587p

발신 <당신은 지금 우리를 벨로캉으로 안내할 준비가 되어있나?>
그녀가 103호에게 물었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동안에 레티샤의 가슴은 두근두근 거렸다. 그녀 곁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걱정스럽게 개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수신 <당신들은 나의 평가가 어떻게 나올까 궁금할 것이다. 좋다. 나는 당신들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보았다고 믿는다.>
개미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머리를 떼어 내고 뒷다리로 버티고 선다.

수신 <나는 당신들을 완전하고 명백하게 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당신들의 문명은 너무 복잡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 본질을 나름대로 파악했다.>
개미는 뜸을 들이면서 긴장을 고조시켰다. 역시 개미든 손가락이든 개체를 다루는 데 이골이 난 103호였다.

수신 <당신들의 문명은 매우 복잡하지만, 나는 많이 보았기 때문에 그것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신들은 비뚤어진 동물들이고, 당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존중할 줄 모르며, 유독 당신들이 돈이라고 이름 붙인 것을 긁어 모으는 데에만 관심을 쏟는 동물들이다. 당신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나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 그것은 크건 작건 간에 살인의 연속일 뿐이다. 당신들은 우선 죽여 놓고 그 다음에 토의를 한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당신들은 당신들끼리 서로 파괴하고, 자연을 훼손하고 있다.>
평가의 조짐이 좋지 않았다. 세 사람은 얘기가 이렇게 길거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수신 <하지만 당신들의 세계에도 나를 매혹시키는 것들이 있다. 아, 그건 바로 당신들의 그림이다! 특히 나는 그 손가락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무척 좋아한다. 세상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그림을 통해서 나타낸다는 생각, 순수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서 실용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물건을 만든다는 생각, 그것은 놀라운 발상이다! 우리 세계에 비유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의사 소통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냄새를 맡는 즐거움을 위해서 페르몬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당신들이 <예술>이라 부르는 그 무상(無償)과 무용(無用)의 아름다움. 그것은 당신들이 우리보다 우월한 점이다. 우리 사회엔 그러한 것이 없다. 당신들의 문명에는 예술과 무용의 열정이 풍부한 것 같다.>

발신 <그럼, 당신은 우리를 벨로캉에 데려가는 데 찬성하나?>
개미는 아직 답하려 하지 않는다.

수신 <당신들 집에 도착하기 전에 나는 바퀴를 만났다. 그 바퀴들이 나한테 가르쳐 준 게 있다. 서로서로를 사랑할 줄 아는 자들은 사랑을 받고, 서로서로를 도우려는 자들은 도움을 받는다고...>
개미는 자기의 주장에 대해 확신하면서 더듬이를 흔들어 댄다.

수신 <나는 그 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입장을 바꾸어서 물어보고 싶다. 당신들은 손가락들이라는 종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낭패스러운 일이었다. 레티샤도 아서 라미레도 그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만한 사람들이 명백히 아니었다! 개미는 담담하게 자기 논리를 펼쳐 나간다.

수신 <당신들은 내 페르몬을 이해하는가? 당신들은 다른 사람이 당신들을 사랑할 마음이 들도록 서로를 사랑하는가?>
발신 <그건...>
수신 <당신들 자신들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당신들이 우리처럼 다른 존재들을 사랑할 거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발신 <그건 말하자면...>
수신 <당신들은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 효과 좋은 페르몬을 찾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내가 당신들한테서 기대했던 설명들은 당신의 텔레비전이 죄다 나에게 제공했다. 나는 텔레비전에서 손가락들이 서로 돕고, 다른 손가락들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가며, 붉은 손가락들이 갈색 손가락들을 돌보는 내용의 기록 영화를 보았다. 당신들이 개미라고 부르는 우리는 결코 그렇게까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멀리 떨어진 둥지를 원조하러 달려가지 않으며, 다른 종의 개미들을 구하러 가지 않는다. 나는 플러시 천으로 만든 곰 인형 선전도 봤다. 그것은 하나의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손가락들은 그것들을 껴안고 애무했다. 손가락들의 내면에는 남에게 베풀 넘치는 사랑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개미의 결론을 요모조모로 예상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런 평가는 전혀 뜻밖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이나, 의사들, 플러시 천으로 만든 곰 인형 덕분에 인간이란 종족이 개미의 눈길을 끌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었다!

수신 <그게 전부는 아니다. 당신들은 2세들을 잘 보살필 줄도 안다. 당신들은 미래의 손가락들이 오늘날보다 더 우수하기를 희망하고, 발전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마치 동료들을 개울 저편으로 건네줄 다리를 만들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병정개미들 같다고나 할까. 젊은 손가락들의 전진을 위해서라면, 늙은 손가락들은 언제든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래. 내가 본 모든 것, 영화, 뉴스, 광고들은 현재의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에 대한 아쉬움과 미래에는 그것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 희망으로부터 당신들의 <유머>가 분출하고, 당신들의 <예술>이 생겨나고 있다.>

레티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에게는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설명해 줄 저 개미와 같은 존재가 필요했었다. 103호의 얘기를 듣고 난 그녀는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느낌이었다.그녀의 대인 공포증이 한 마리의 개미에 의해서 치료될 수 있다니! 그녀는 갑자기 동시대인들을 더 잘 이해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사실 이 세상에는 훌륭한 동시대인이 많이 있다. 그녀가 평생 깨닫지 못한 것을 이 개미는 불과 며칠 동안 텔레비전을 보고서 깨달은 것이다.
레티샤는 마이크 쪽으로 몸을 숙여 또박또박 말을 했다.

발신 <그러면, 당신은 우리를 도와줄 생각이 있는가?>
유리 덮개 아래에서 103호가 더듬이를 세워서 정중하게 페르몬을 발한다.

수신 <우리는 당신들에게 대항할 수 없고, 당신은 우리들에게 대항할 수 없다. 우리들 가운데 어떤 것도 다른 종을 제거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는 않다. 파멸을 자초할 수는 없는 일이니, 우리는 당연히 서로 도와야 한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당신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당신네 세계로부터 배울 게 많다. 그것들을 배우기 전에는 당신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
발신 <그러면, 우리를 벨로캉으로 안내해 주겠는가?>
수신 <나는 우리 도시 아래에 갇혀 있는 당신 친구들을 구하는 일을 돕는 데 찬성한다. 왜냐하면 우리 두 문명이 서로 협력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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