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앗아간 땅 사할린을 가다] 사할린 하늘 울린 ‘백발의 통곡’ “아버지~”

강제동원 행불자 후손들 60년만에 현지 위령제
영정 속 20대 청년 안고 “조금만 일찍 왔어도”
‘혹시 살아계실지도…’ 사진 돌리며 수소문도

» 러시아 사할린주 유즈노사할린스크시의 사할린 희생사망동포 위령탑 앞에서 지난 15일 일본에 의해 강제동원된 뒤 행방불명된 이들을 위한 위령제가 열렸다. 제삿상 앞에 선 정태랑(67·오른쪽에서 두번째)씨는 “1940년 강제동원된 부친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부친의 사진을 목에 걸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돌을 맞는 사할린 동포들의 심정은 착잡하다. 일제에 의해 청춘의 나이에 강제동원된 1세대들은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에 묻은 채 하나 둘 세상을 등지고 있다. 살아남은 이들은 ‘환갑을 맞은 고국’을 바라보며 이국 땅에서의 쓸쓸한 죽음을 예감할 뿐이다. 지금도 4만여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는 사할린에서 만난 동포들은 “이제 너무 늦은 것 같다”고 말했다.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 빳빳한 상복을 입은 채 침묵을 지키던 노인들 사이에선 가는 흐느낌만 새어나왔다.

“우리, 아버지를 세 번만 불러봅시다.” 태랑(67)씨의 제안에 백발이 된 자식들은 “아버지!”를 목놓아 외쳤다. 하지만 세 번을 다 채우진 못했다. 노인들은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땅만 바라봤다. 흑백 영정 속 20대 청년으로 남은 ‘아버지’의 얼굴은 멀쑥했다.

지난 15일 러시아 사할린주 유즈노사할린스크시의 사할린 희생사망동포 위령탑 에서 특별한 위령제가 열렸다. 1938∼1945년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됐다 해방 뒤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행방불명된 이들을 위해 고국의 자식들이 직접 제사상을 차린 것이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에서 2006년부터 벌이고 있는 ‘해외 추도 순례’ 사업이 사할린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위원회는 부모가 사할린에 강제동원된 것이 증명된 이들의 신청을 받아 18명을 선발했다. 같은 마을에 살던 이들의 증언, 사할린에서 온 편지 한 통이 ‘사할린에 있었다’는 증거가 됐다.

“굴 안에 들어가 작업을 하다가 현기증이 났습니다. …환약 십원어치 사서 먹었으니 그리 아십시오. …일전 편지에 현시에 태중이어서 창월이 임산이라 하였으나 나는 자세히 몰라서 궁금하오니 차후 편지하실 적에 분명히 적어 보내 주기를 바랍니다.”

부친이 1942년 강제동원된 이재순(64)씨는 80살 모친이 간직해 온 편지 한 통을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편지 속 ‘태아’였던 이씨는 “어렸을 때 어른들이 ‘아버지 언제 오나 머리를 긁어보라’고 할 때 난 항상 앞머리를 긁었다고 한다”면서 “곧 오실 거라 믿었는데 얼굴 한 번 못 보고 60년이 지났다”며 눈물을 쏟았다.

“골목길 들어올 때부터 생글생글 웃던 아버지의 모습이 나랑 꼭 닮았다고 한다”며 웃던 김수웅(63)씨도 제삿상에 술을 놓을 땐 “아버지, 너무 원통합니다. 아버지 …”하며 가슴을 쳤다. 눈물을 훔치며 지켜보던 현지 동포 이명희(55)씨는 “한국에서 오신 분들을 생각하니 다 형제처럼 느껴진다. 사할린에 사는 1세대 부모들은 ‘언제 조국에서 배를 보낼지 모른다’며 항상 대문을 열고 기다렸다”고 말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부친이 올해로 90살이 된다는 정태랑씨는 부친의 젊었을 때 사진 70여장을 인쇄해 왔다. 그는 “혹시라도 소식을 들은 분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며, 위령제에 참석한 현지 주민들에게 사진을 나눠줬다. 사진은 금새 동이 났지만, 귀국행 비행기를 탈 때까지 부친의 소식을 전해온 이는 없었다. 동정남(64)씨는 1988년부터 러시아와 일본을 8차례나 오간 끝에 부친이 숨진 장소를 알아냈다. 그는 “제사 날짜라도 알고 싶어 혼자 찾아다녔는데 국가 기관엔 어디 한 군데 물어볼 데도 없었다”며 “나처럼 돌아다니지 않는 한 사망 사실도 모른 채 하늘만 바라보고 사는 가족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현지에 살고 있는 안해준(70)씨는 “1세대 동포들의 소식을 알만한 이들은 최근 10년 새 거의 다 돌아가셨다”면서 “이제 와서 진상을 규명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말했다. 현지 주민들은 “10년만 일찍 왔어도, 10년만 일찍 왔어도 …”라고 되뇌었다.

유즈노사할린스크/글·사진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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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7-07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컥했어요. 집이었다면 울었을 거예요.ㅠㅠ

dalpan 2008-07-08 09:06   좋아요 0 | URL
그날의 싸움이 역사 속에서, 결국 시간이 흘러, 진실과 정의는 우리 것이라는 가슴 떨리는 사실을 늘 확인합니다.

서경식 선생님 뵐 때 잠깐 뵈었지요?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시죠?
 
산중일기 - 최인호 선답 에세이
최인호 지음, 백종하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4월
품절


세상과 청산은 어느 쪽이 옳은가.
봄볕이 없는 곳에 꽃이 피지 않는다.

이 문구의 의미를 정확히 새길 수는 없겠지만 세속이니 청산이니, 선이니 악이니, 나니 너니 구분하고 차별할 것이 아니라 봄볕을 찾아가거라. 봄볕은 저잣거리에건 청산에건 가리지 않고 내리쪼이며, 그러기 때문에 봄꽃은 저잣거리에도 피어나고 청산에도 피어난다. 그러므로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상량해서는 아니 된다. 네 마음속에서 봄볕을 찾아라. 그리하면 어느 곳에서든 꽃이 필 것이다. 꽃을 피우려면 봄볕을 찾아갈 일이지 더럽고 깨끗함, 속되고 거룸함, 악하고 선함을 구별하여 찾으려 하지 말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45쪽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소위 친구라는 미명하에 저희들끼리 떼 지어서 술을 마시고, 서로의 인연으로 사교를 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우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부처의 다음과 같은 경구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벗을 사귀고 또한 남에게 봉사한다.
오늘 당장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그런 벗은 만나기 어렵다.
자신의 이익만을 아는 사람은 추하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은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88쪽

남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은 받은 사람으로부터 되갚음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복덕을 지은 것이다. 남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은 결국 자신에게 자비를 베푼 셈이다. 따라서 남에게 베푼 자비는 베푼 순간 잊어버려야 한다. 심지어 부모들도 자기 아이를 키운 은혜를 잊어야 한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는 집착은 가족 모두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남에게 베푼 보시에 집착하기보다 더 어려운 것은 남에게 입은 은혜를 기억하는 일이다.-119쪽

이상한 일이었다. 서울 거리의 우리들은 모두 각자 다른 빛깔의 옷을 입고, 각자 다른 형태의 옷을 입고 형형색색의 화장을 하고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새 구두를 신고 액세서리를 치렁치렁 달아도 그 얼굴이 그 얼굴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저 방장 스님의 법회에 모인 스님들은 모두 같은 빛깔의 법의를 걸치고 같은 흰 고무신에 똑같이 삭발한 민머리인데도 자세히 보면 모두 한사람씩 자기 생각에 족한 독특한 얼굴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법회 시간이 되어 법당 안을 가득 메운 남녀노소 스님들의 얼굴들을 조심스럽게 훑어보니 모두 자기들만의 얼굴들뿐이었다.
그렇다. 개성을 만드는 것은 화장이 아니다. 옷이 아니다. 색이 아니다. 쌍꺼풀 수술이 아니고 헤어스타일이 아니다. 유행이 아니다. 지워지지 않는, 변하지 않는 개성을 만드는 일은 자신의 마음의 텃밭을 가꾸는 일이다.-208쪽

절에 가면 마음이 맑게 씻어진다. 어느 절에고 행락 인파가 몰리고 술 취해 노래 부르는 주정꾼이 없으리요만 그래도 절은 대범하게 이들을 용서한다. 그 어려운 먼 길 뒤에 찾아간 절에서도 스님은 보려야 볼 수도 없다. 무엇이 부끄러운지 숨바꼭질하듯 꼬옥꼬옥 숨어서 기침 소리 하나 내지 않는다. '마음대로 보려면 보시오'하고 절 문도 활짝 열어 놓고 대웅전도 활짝 열려져 있고 마당 뜨락엔 피 토하듯 붉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건만, 정작 스님들은 그 넓은 절 어디엔가 꼬옥꼬옥 숨어들어 앉아 있다. (중략) 그저 어다서나 부처님의 환하디환한 미소만 보일 뿐, 법당도 열려있고 연못 위로 시든 매화 꽃잎만 땅벌의 침처럼 내리꽂히어 떨어지고 있을 뿐.-261쪽

옛날 중국의 선사 동산에게 한 스님이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추위와 더위가 찾아오면 이를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이에 동산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겠느냐."
그러자 그 스님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가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입니까?"
이에 동산은 대답한다.
"추울 땐 그대를 철저히 춥게 하고, 더울 땐 그대를 철저히 덥게 하는 곳이다."

슬픔이 없는 곳이 바로 슬픔이 있는 곳이며, 기쁨이 없는 곳 또한 바로 기쁨이 있는 곳이다. 고통과 슬픔을 피해 다니는 동안 세월은 물끄러미 사라져 간다. 고통과 슬픔을 피할 수 없는 자리가 바로 고통과 슬픔을 피할 수 있는 곳이다.-264쪽

침묵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침묵보다 말을 하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문을 걸어 잠그고 깊은 산속에 숨어 있는 것보다 사람들 속에서 함께 어울리되 물들지 않음이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깊은 산속에 있으면서도 그의 마음이 번잡하다면 그는 비록 산속에 있으나 실은 장터에 앉아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침묵 수행이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가득 찬 말을 비우는 일이다. 아무런 욕망의 말도 남겨 두지 않는 것이다.

침묵은 마음의 무엇인가를 무작정 비우는 일이 아니라 침묵을 채워서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267쪽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렇듯 진리는 우리의 삶 속에 있습니다. (고 성철스님께서 내리신 법어)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은 진리가 아니라 진실 속에서 살다가는 것이라는 겁니다. 크나큰 진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진실을 살다가는 것이 진리를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의미입니다.-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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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1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7년 6월
구판절판


이란은 앞으로 걸었지만, 사진을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은 쉼 없이 떨려왔다. 그녀는 봉투 안에서 가족사진을 꺼내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억눌렀다. 그렇게 애써 자신의 격한 감정을 억누르며 걸었지만, 송범평이 일찍이 위풍당당하게 붉은 깃발을 흔들었던 다리에 다다랐을 즈음 시위 대열이 그녀의 갈 길을 막아서는 바람에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봉투 속의 사진을 꺼내보고 말았다. 첫눈에 송범평이 행복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지만 나머지 세 식구의 웃는 얼굴이 들어오기도 전에 그녀는 그만 무너져내렸다. 지난 사흘 동안 힘겹게 견뎌온 슬픔과 고통이 사진 속 생생한 송범평의 웃는 얼굴로 인해 한순간에 그녀를 무너뜨려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뜨린 것이다.-245(1권)쪽

송강은 확실히 바보처럼 그 자리에 선 채로 임홍이 지나칠 때 "저..."라는 한 마디조차 내뱉지 못했고, 임홍이 멀리 사라진 후, 다른 여공들도 모두 멀리 떠나간 후에야 임홍이 자신을 보고도 못 본 척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송강은 그때 별안간 이광두가 임홍이 절대 자신을 좋아할 리가 없다고 한 말이 사실이었음을 깨달았다. 방금 임홍이 지나칠 때 보인 냉랭한 표정이 그 점을 증명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송강은 갑자기 마음이 홀가분해졌고, 나무 곁을 떠나 큰길을 따라 돌아올 때는 몸이 제비처럼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어제 일은 한 편의 달콤한 꿈에 불과한 거라고 생각하며 꿈에서 깨어난 듯 송강은 입을 비튼 채 웃었고, 꿈속의 장면을 다시 음미하며 꿈이 현실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비록 상상 속에서의 행복이었지만 얼마나 편안했는가 말이다.-108(2권)쪽

송강은 씁쓸히 웃으며 하역 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친 일 하며 시멘트 공장에서 일하다 폐를 다친 이야기를 했고, 이야기를 들은 이광두는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하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너. 이 개후레자식. 일자리 구하러 동네방네 다 돌아다녔으면서 나 이광두한테는 안 오구. 너 이 개후레자식. 너 지금 니 꼬라지를 봐라. 허리도 작살나고 폐도 작살나구. 너 이 개후레자식아. 왜 날 안 찾아온거야?"
이광두의 욕설에 송강은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들은 여전히 형제였던 것이다. 송강은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찾아왔잖아."
(중략)
이광두의 입에서 다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런 쪼다 같은 새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뭔데?"
송강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청소나 편지나 신문 보내는 것 정도고, 다른 일은 못해. 능력이 없어서..."
"이 칠칠치 못한 쪼다새끼야. 임홍이 진짜 눈이 멀었지. 너한테 시집을 가다니."
이광두는 분을 삭이지 못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소리를 질렀다.-67(3권)쪽

그때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송강이 안경을 벗어서 닦은 후 다시 쓰고 보니 태양이 반쯤 저물었고, 열차는 반쯤 지고 있는 태양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일어나 사람의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는 기차에 뭉개질 안경이 아까워 벗어서 방금까지 앉아 있던 돌 위에 얹어두었지만 잘 보이지 않아 웃옷을 벗어 돌 위에 깔고 그 위에 다시 안경을 얹어놓았다. 그러고 나서 깊숙이 사람세상의 공기를 들이마셨고, 다시 마스크를 썼다. 그 순간 그는 죽은 자는 호흡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시체 수습을 하러 오는 사람에게 전염될까 봐 걱정했으니 말이다. 그는 앞으로 네 걸음을 걸어 두 팔을 벌린 채 철로 위에 누웠다. 철로 양측에 걸린 겨드랑이가 너무 아파 앞으로 조금 기어가 철로 위에 배를 올려놓았다. 휠씬 편안했다. 다가오는 기차에 철로가 요동을 치기 시작했고, 그의 몸도 따라 요동쳤다. 그는 또다시 하늘빛이 그리웠다. 그래서 고개를 들어 멀리 하늘을 바라보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눈앞에 펼쳐진 붉은 장미꽃밭 같은 논을 보았다. 정말 아름다웠다. 바로 그때 갑자기 놀랍게도 갈매기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갈매기는 울고 있었는데, 날갯짓을 하며 멀리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열차의 덜컹대는 소리가 그의 허리를 지나쳤을 때 임종의 눈길에 남은 마지막 정경은 고독한 한 마리 갈매기가 광활한 꽃밭을 날고 있는 모습이었다.-259(3권)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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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 서경식 김상봉 대담
서경식, 김상봉 지음 / 돌베개 / 2007년 12월
품절


서경식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한때의 관념적 질문이 아니라 평생을 지고 가야 할 실존의 문제였다. 그는 일본에 산다. 하지만 일본인에게 그는 '불편한' 이방인이다. '빼어난 일본어 표현'으로 일본에세이스트 클럽상까지 수상한 이 작가의 혀와 펜은 곧잘 일본이라는 국가, 국민의 벽을 난타하는 망치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밖에서 살아왔고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에서도 낯선 자이다. 또 국가, 국민에 대한 그의 비판이 '5,000년 역사를 가진 단일민족'의 '성공신화'에 매달리는 한국인을 겨냥할 때 이 나라 역시 그를 외면할지도 모른다. 요컨데 그는 '재일조선인'이다.-7쪽

그는 '조선인'이라 차별받으면 또 '조선은 나쁜 게 아니라'며 위로하는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 정체성을 물어왔다. (중략)
그 고통스러운 물음의 과정에서 위안부 할머니들과 프리모 레비를 비롯한 역사의 증언자들은 그런 처지가 그만의 것이 아님을 알려준 존재들이다. 조선인이라는,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억압받았고, 그 때문에 정체성에 대해 끊질기게 물을 수밖에 없었고, 동시에 그 모호성과 작위성, 역사성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깨달은 그들은 그들의 고통이 인류가 20세기를 지나오면서 겪은 보편적인 고통임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침략전쟁과 식민지배의 역사, 인간성에 대한 폭력의 역사를 기억하고 증언하는 보편적인 물음으로 바꿔 물으며, 또 그것을 우리에게도 들려주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물음의 과정에서 예술을 만났다. 그저 눈앞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그 바깥이 있음을 느끼게 해준 예술은 그가 형들을 가둔 남한 군부독재의 감옥, 일본이라는 감옥, 국가라는 감옥, 국민이라는 감옥, 현실이라는 감옥을 버텨낼 수 있는 한 움큼의 공기였다.-8쪽

오늘 여기에 조선말을 쓰는 김상봉하고 조선어를 잘 몰라서 일본어를 쓰는 서경식이 만나 소통하고 있다는 겁니다. 단지 소통이 잘되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소통해야 하면 어려워도 소통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순서는, '공통의 언어가 있고 그 바탕에서 소통하게 된다'가 아니라 '소통의 필요가 있고 그로부터 공통의 언어가 만들어져간다'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조선말에 영향받은 일본말이 되고 일본말에 영향받은 조선말이 되어가는 거죠. 그런 피진화의 과정은 긍정적으로 봐야 합니다. (서경식)-76쪽

저는 학자는 '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함석헌 선생의 말입니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씨알들을 위해 대신 울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고 학자라고 함석헌 선생은 말해요. 이광수와 최남선을 두고 한 말인데, 함석헌 선생은 그네들이 끝까지 울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김상봉)-101쪽

광주에 오니 '5.18 정신을 계승하자'는 구호를 자주 보게 됩니다. 사실 정신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5.18 정신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잘못된 것이고 그런 물음에 '5.18 정신은 이러이러한 것'이라는 규정을 답으로 내놓는 것 역시 옳은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어떤 정신을 계승하자는 것은 결국 그런 정신을 가졌던 사람들의 삶의 방식, 타인에 대한 태도 등을 이어나가고 살려나가고 펼쳐나가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5.18 정신의 살림과 펼침을 생각할 때, 저는 광주항쟁이라는 역사뿐만 아니라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이라는 현재를 떠올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처럼 소외되고 고립된 외부와 연대를 실천하려는 상상력이야말로 정신의 실체화, 물신화를 피해 5.18을 올바로 기억하고 계승하는 길이 아닐까요? (서경식)-114쪽

국가가 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조작도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흔히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고 과거에 매달리는 것을 두고 누군가 '그것은 향수일 뿐이다. 퇴행적인 노스탤지어다'라는 식으로 공격을 해요. 제가 미셸 클레이피라는 팔레스타인 난민 영화감독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노스탤지어야말로 우리의 무기다"라는 말을 장 주네가 했다고 해요. 국가가 우리 기억에 가한 폭력, 교육이나 문화를 모두 동원해 저지르는 폭력에 저항하는 우리 기억의 투쟁이 있지 않습니까? 그때 노스탤지어야 말로 마지막 무기가 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중략) 하지만 저는 역사에, 과거에 매달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저더러 '과거의 망령이 되살아 온 듯한 느낌'이라고 했을 때도 수긍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무기다. 국가에 저항하기 위한 무기다'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서경식)-232쪽

요약하자면 이렇군요. 시민적 주체성이야말로 민주주의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핵심인데 일본에서는 (국민이 되기 위해) 예속되어야 할 초자아로서의 천황이 있기 때문에 그런 자유로운 주체, 자유롭기 때문에 성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주체의 출현을 가로막고 있는 거로군요. 말씀을 듣다 보니, 일본에서 천황제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시민들이 국가에 대해 자율적, 주체적으로 자기를 정립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김상봉)-312쪽

도식화의 함정에 빠지면 안 되니까, 좀더 이야기를 보태보겠습니다. 물론 일본에서도 나름대로 천황제에 대한 저항이 있어왔습니다. 또 지금 일본 사람들에게 천황제에 관해 묻는다면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그냥 일상에서 문제가 안 되닌 별 문제가 없다는 거죠. 오히려 천황제를 문제 삼는 것을 지나치다고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1990년대 들어 공산당조차 계급 정당이 아니라 국민의 정당으로 강령을 바꾸었고, 이제까지 줄곧 공공연히 반대해왔던 천황제에 대한 공격을 포기했습니다. 천황제는 그렇게 눈에 띄지도 않고 열광적이지도 않은 조용한 전체주의가 된 거지요.
무엇보다 '우리가 살기 좋아졌다'는 실감을 다수가 공유하는 게 문제일겁니다. 뭐랄까, 공범의 공동체가 되어버린 거지요. 그리고 타자와의 만남에 실패한 것도 큰 이유입니다. 20세기에는 주변 이웃들과 침략이라는 잘못된 방식을 통해서만 만났고, 1990년대에 '증언의 시대'가 시작됐지만 그 때도 피해자들, 증언자들과 제대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20세기 역사는 그렇게 (타자와의) 만남에 있어서 총체적으로 실패해온 역사였습니다. (서경식)-312쪽

인간이 똑같은 고통을 겪더라도 그것이 남에 대한 격분에 머무를 때는 고통이 타인과의 만남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에 대한 슬픔으로 전환될 때 그것이 비로소 우리를 참된 만남으로 인도하는 다리가 되는 것이죠. (서경식)-354쪽

헤겔이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고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이건 사실은 아무리 좋게 봐도 오도된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경우에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다른 의미에서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정말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이성적이 되어야 하고 '이상적'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저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력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지 못할 때는 유토피아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겁니다. (김상봉)-4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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