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아늑해보이는 아이보리색 커버로 씌야진 자동차 안의
운전석에 앉아 런던 어딘가의 다리 위를 미끄러지듯 운전해가며 그녀가 말했다.
"나는 냄새로 추억을 떠올려요. 후각이 발달했어요. 그래서 어떤 냄새를 맡으면...
그 때의 물건, 사람 등이 생각나요.."
"보통은.. 음악을 들으면 그렇지 않나요?"
"그렇죠. 음악을 들어도 그렇긴 하지만... 저는 냄새로 기억해요. 네... 모든 것을..."
"옛날이 그리우세요?"
"네, 그립죠~ 특히 무대요. 네.. 전 무대가 그리워요."
10월 24일, 일요일 오후, 샤워하고 난 뒤, 맥주와 치킨을 먹으며 감기 기운에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무심코 돌려본 어떤 채널에서 뭔가에 끌리듯 난 리모콘
누르기를 멈추고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한국에서 가수 생활을 하다가 영국 남자와 결혼했는지 '올리비아'라는 혼혈
이쁜 딸까지 있는 그녀는 특별히 이쁘지도 그렇다고 못 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여자.
그녀는 음악이 자신의 전부라고 했고, 그립다고 했으며, 다시 음악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VJ인지 PD인지, 카메라 저편의 어떤 여성의 질문에 그녀는 대답했다.
"네..좀 씁쓸하죠..."
분명 원해서, 더 큰 행복을 위해서 결혼을 했을 것이고 먼 타국에 가서 단란한
가정을 꾸렸을 그녀.
여유로운 경제 생활과 좋은 차를 타고 피부 미용실에 다니며 남들 보기에 부러운
삶을 살아도 채워지지 않는 그것이 마음에 가득한 걸까.
누구나의 마음에 하나씩 있는 꿈에 대한 집착,
과거의 자신에 대한 그리움과 애증.
작년이었던가.
N의 집에 가서 하얀색 긴 소파에 앉았는데, 어떤 피아노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딱히 클래식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어중간한 나는 처음으로, 눈 뜬 채로
영혼이 유체이탈을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온 몸의 근육에 힘이 빠지고 내 안의 모든 세포는 공중에서 춤을 추고 있는 그
선율에 진동하고 있었다.
몸은 녹아내려 소파에 딱 붙어버리고 말았다.
플롯, 바이얼린, 섹소폰, 피아노 등 여러 종류의 연주곡 CD를 사서 제법 다양한
클래식을 들어봤던 나인데, 그렇게까지 편안해지면서 슬프면서 기쁜 복잡한 기분을
느껴보긴 처음이었다. 나는 물었다.
곡명이 무엇이냐고. 그러자 대답했다.
상처,라고.
아,
아,
피아노 연주자는 무명인이었지만 사람들의 영혼을 치료하는 음악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모든 곡들은 보석같이 아름다웠으며 서정적이었고 때로는 격렬한 불꽃 같았다.
아는 사람들만 알고 있었던 그 연주가의 음악은 나중에 H자동차 CF의 배경에 깔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사람마다 감동을 하거나 느낌을 받는 곡이 다 다르다고 했다.
왜냐하면, 가슴 안에 품어져 있는 그것 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음악은 언제나 사람을 치료해준다.
그리고 추억을 떠올려 만들어낸다.
음악만큼, 냄새도 기분이 흔들리게 한다.
계절이 바뀔 때 바람이 가지고 오는 그 냄새는 작년 혹은 수 년 전의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다.
아주 찰나의 시간이라 미처 정확히 기억해내기도 전에 바람은 무정하게 지나가 버린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말, '모든 것을 냄새로 기억한다'는 것에서 생각했다.
나는 냄새로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과연 몇 개나 될까,하고.
냄새로만 기억하고 때로는 기분좋게 때로는 씁쓸하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소중한 무언가가
과연 있었는가,하고.
나는 누군가의 추억속에 자리잡을 수 있는 냄새가 있었던 적이 있나,하고.
나는 냄새가 없다.
그래서 매일 껴안고 자는 개한테도 냄새가 나지 않는다.
집에서도 냄새가 베어있지 않다.
나의 옷이나 수건에는 약간씩 담배 냄새가 잠시 머물러 있다가 사라질 뿐이다.
며칠 전부터 선물받은 향수를 뿌리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없이 -
그리고 요즘에야 깨달았다.
내가 늘 안아주었던 아기 고양이에게서 나의 냄새가 베어 있었고
고양이는 그 냄새로 나를 찾는다는 것을.
아, 나는 이제 겨우 -
누군가의 기억속에 자리잡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
체취,
그것은 누군가에게 기억되어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