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희뿌윰한 안개로 아파트 숲의 하늘이 모호하다. 논리를 넘어선 낯선 곳에 웅크리고 앉아 어둠의 저편을 응시하는 눈을 의식한다. 길을 걷다 문득 뒤를 돌아보다가 그 시선과 마주치기도 하고 창밖을 내다보다 그 눈빛과 만나기도 한다. 삶의 곳곳에 숨어 나를 응시하는 눈에 대한 경험은 착각이라고 하기엔 때때로 너무 선명하다.

  오랜만에 하루키를 만났다. <상실의 시대>와 <댄스 댄스 댄스>를 읽고 지나쳤던 그와 다시 만나는 일은 새롭다. 신작 <어둠의 저편>은 신선하다. 번역자 임홍빈의 화려한 수사와 거창한 찬사가 오히려 부담스럽지만 딱히 부정할 만한 사실도 아니다.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할만한 성과를 쌓아왔고 폭넓은 매니아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값싼 감수성이나 자극적인 재미로 독자들을 현혹하는 베스트 셀러 작가는 아니다.

  ‘천변풍경’과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대표되는 소설가 박태원은 30년대 우리 사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놓은 듯한 소설을 선보였다. 독특한 그의 ‘考現學’은 청계천변 이발사 소년의 눈이나 소설가 구보씨의 시선이 카메라가 되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루키의 소설 <어둠의 저편>의 형식은 이와 다르지 않다. 내용은 형식을 담보로 한다. 하루키는 독자들을 소설 속에 초대하여 동참하게 만든다. ‘우리’라는 말로 동질 의식을 끌어내 영화의 카메라 맨이 되도록 안내한다. 자연스럽게 독자들은 그가 이끄는대로 세상을 들여다본다. 때로는 클로즈업 된 에리의 얼굴을 밀착하여 들여다보고 때로는 항공 촬영하듯 하늘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곳을 내려다 본다. 이런 방식은 낯설고 신선하며 영상 매체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무리없이 소화된다. 소설은 한 편의 영화를 보듯 그렇게 교차 편집되어 장을 넘어간다. 18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듯 읽는 것이 이 책의 올바른 독법이다. 소설의 배경은 밤 11시 56분부터 아침 6시 52분까지.

  열아홉 마리와 언니의 동창생 다카하시는 레스토랑 ‘데니스’에서 우연히 만난다. 밤 11시 56분. 두 인물과 주변 인물의 모습을 다음날 아침까지 대략 7시간 동안 카메라에 담는다. 언니 에리가 잠든 방을 세세하고 면밀하게 관찰하는 ‘우리’는 마리가 부딪히는 낯선 밤의 세계와도 만난다. 고다르의 영화 제목인 ‘알파빌’이라는 호텔방은 에리가 잠든 방과 다름없이 어둡다. 중국인 소녀를 호텔방에서 폭행하고 돌아가 일을 계속하는 회사원의 사무실 또한 엷은 도시의 불빛이 새들어 올듯한 밝기로 느껴진다. 각각의 방에서 벌어지는 단절된 사람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모두가 잠들 시간에 깨어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피곤하고 느리며 무겁다. 물론 이런 느낌에서 서술자는 한발 물러서 있다. 모든 판단과 느낌은 동참하고 있는 ‘우리’들 독자의 몫이다. 철저한 ‘보여주기(showing)’기법에 의존하여 소설은 진행되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로 생각하는 언니와 동생의 관계, 자본의 힘으로 맺어지는 중국인 소녀와 그 배후와 회사원의 관계, 호텔 ‘알파빌’에서 일하는 카오루와 고무기와 고오로기의 관계 그리고 다카하시와 마리의 관계는 모두 메마르고 딱딱한 전형적인 도시의 건조한 인관관계를 보여준다. 대화는 겉돌고 귀가에 맴도는 이명현상처럼 어둠의 저편에서 들려오는 환청으로 치환된다. 의사소통의 부재는 대화의 단절과는 다른 문제다. 대부분의 경우 메마른 대화와 2차적인 관계가 빚어내는 도시의 삶은 어둠속에서 빛을 발한다.

  소설의 긍정형 인물로 제시된 다카하시와 마리는 그래서 독자들의 초점이 된다. 작가나 서술자의 의도적으로 설정한 주인공이 아니라 세상과 삶의 욕망에 대해 주체적으로 반응하는 유일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눈과 욕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두 사람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어설픈 몸짓으로 이해된다. 비록 평범하고 힘없는 노력과 몸짓이지만 독자들은 ‘관계의 회복’이라는 희망을 그들에게 투영하게 된다. 그것이 이 소설의 의미로 읽힌다.

  밤과 낮, 빛과 어둠은 단순한 시간의 2분법적 분절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삶의 양상을 드러낸다. 사실 2차적이고 간접적인 인간관계의 시간으로 볼 수 있는 낮의 밝음은 직접적이고 솔직한 관계의 형성이 가능한 밤의 어둠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어둠은 나와 우리를 들여다보는 내면의 거울이 되고 또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비쳐진다.

  이러한 시간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넘어 카메라 맨은 에리의 방을 들여다보던 오전 4시 25분에 이렇게 말한다.

세계는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진행되어 간다. 논리와 작용은 빈틈없이연동하고 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본문 214페이지)

  그렇다. ‘세계는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논리와 작용은 빈틈없이’ 우리를 가두고 있다. ‘적어도 지금’이 아니라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다만 그때, 아니 지금 이 순간 우리들 삶의 모습을, 카메라에 비친 나의 모습을 들여다 볼 뿐이다. 그것이 비록 현실속의 내가 아니라 본질적인 나의 모습이라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어둠의 저편에, 밝음과 희망 있으라!



2005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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