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사회의 가치나 사람들의 성향을 바꾸는 일은 무엇보다 힘들다. 오랜 시간동안 몸에 배어버린 관습적 사고와 행동은 타성이 되어 버린다. 변화가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습관의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종교와 각종 단체 등 수없이 많은 가치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꼭 필요한 것은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고 우리와 다른 그들을 인정하는 일이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것은 심각한 민족내의 이념적 갈등에서 비롯된 전쟁을 겪었고 그로 인한 분단과 고통이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거대 담론으로 통일과 북핵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해법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다. 개인의 가치관과 성향,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교육을 통해 일방적으로 굳어져버린다.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이 개인에게 내면화되고 그것은 계급을 재생산하고 재생산된 계급은 그들만의 리그를 결성한다. 각종 불법과 유착 관계가 만연하고 부정이 판을 치며 집단 이기주의를 드러내고 사회의 갈등을 증폭시킨다. 그렇게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좌와 우의 대립보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대립을 사회 통합과 사회 복지의 측면에서 접근하기 보다 레드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한 채 빨갱이로 몰아붙이며 억압과 폭력으로 억눌러 왔다.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의 저자 하승우가 머리말에서 밝힌 대로 하나의 개념이 겉돌고 한 사회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접목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홍세화가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에서 처음 ‘똘레랑스’라는 개념을 들고 우리 사회에 진입했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까? 집단간의 이익과 갈등이 봉합되고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형성되고 있을까? ‘中庸’, ‘和而不同’의 개념조차 우리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우리에겐 익숙한 좋은 전통과 개념이 있다. ‘똘레랑스’라는 낯설고 어색한 개념을 이해하고 적용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사실 용어가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승우는 이 개념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적절하게 수용하고 설명하며 우리 사회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그 한계까지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탈러런스와 달리 똘레랑스는 사회를 적극적으로 바꾸려 한다. 똘레랑스는 대립하는 주장과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주장을 위해 서로 격렬하게 논쟁한 후 도저히 상대의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지면 별수없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논쟁으로 풀리지 않는 상대방의 확고한 의견이나 생각을 굳이 바꾸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똘레랑스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관용이다. (39페이지)


  미국에서 사용되는 탈러런스(tolerance)라는 개념은 차이를 드러내고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종교의 갈등과 전쟁을 통해 유럽 사회의 체제와 틀을 유지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 ‘똘레랑스’였는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는 1789년 대혁명 이후에도 왕정복고가 이루어졌고 그들은 또다시 공화정으로 복귀하기도 한다. 이 처절하고 자생적인 과정에서 사회 체제와 개인의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똘레랑스’라는 개념은 공동선의 개념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틀림없다.


  유행처럼 번지고 지나가버린 쉽게 잊혀져 버리는 특성상 그것을 부단히 실천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겨레 신문의 ‘왜냐면’을 통해 끊임없이 토론과 대화를 시도하고 공론의 장으로 갈들을 끌어내기 위한 홍세화의 노력은 조금씩이지만 우리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몇 몇 사람의 노력만으로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거나 한 사회의 윤리나 가치가 달라진다고 믿지는 않는다. 다만 그 작은 노력과 개인적 실천이 중요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똘레랑스는 완전무결함을 부정하지만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의 자발성을 존중한다.(54페이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똘레랑스는 평등을 전제로 한다. 평등하지 않은 개인간의 혹은 집단간의 똘레랑스는 의미가 없다. “현대 사회에서 차이는 평등이라는 중요한 전제를 잃어버리고 단순한 취향으로 변했다. 사회를 바꾸는 참여보다 자기의 취향을 만족시킬 취미가 더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어놓은 경계를 침범당하면 간섭이라 여기고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다.(96페이지)”는 저자의 지적은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개인이든 집단이든 변화는 참여와 실천으로 촉발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재삼 확인하게 된다. 어떤 개념이든 용어이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여전히 자발성의 문제로 남는다. “똘레랑스는 완전무결함을 부정하지만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의 자발성을 존중한다.(54페이지)” 개념위에 서게 되는 전제 조건으로 아프게 와 닿는다.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의 자발성……. 이것이 왜 똘레랑스라는 개념에서 중요한가는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똘레랑스는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공익에 참여하지 않는 개인주의는 똘레랑스가 아니라 이기주의와 통한다. 똘레랑스에는 자신의 자유만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까지 지키려하고 이를 위해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개인주의, 공화주의가 깔려 있다. (72페이지)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개인주의와 공화주의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실천 덕목이 아닐까 싶다. 문제는 늘 자발적 개인의 참여와 실천, 그리고 연대의 문제로 귀착된다. 내가 읽은 ‘똘레랑스’라는 개념은 그렇게 소화되버렸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저자는 그 한계까지 정확하게 짚어낸다. “똘레랑스의 가장 큰 한계로, 체제가 만든 규칙을 깨지 못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83페이지)” 한계라는 표현은 관점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체제가 만든 규칙은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큰 틀의 체제까지도 변화가 가능하다. 물론 여기에서 논의하는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의 개념적 한계를 드러내기 위한 표현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개념을 넘어 현실과 적용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손에 잡히지 않고 머리에서 맴돌며 이론의 문제로 남겨지는 껍데기 개념은 가라! 학문적 개념보다 논의의 초점과 과정들이 현실에 맞춰지고 그것들이 현실속에 녹아드는 방법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나를 열고 이기주의를 넘어 타인의 자유까지 지키려 노력하는 사회적 연대만이 살 길이다. 작은 곳으로부터의 실천의 문제로 나에게 이 개념은 남겨진다.



2005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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