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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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인간에 탐구와 진지한 관심이 문학의 출발이다. 그 개인이 사회와 인류로 확장된다. 문학의 중심에는 항상 사람이 놓여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 수많은 소설들 중에서 유독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이 우리에게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것은 다양한 이유들 때문이다. 작품의 배경이 된 시대와 상황, 작가의 특별한 죽음, 극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 등등.

<금각사>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1970년 11월 25일, <천인오쇠>의 마지막 원고를 신조사에 넘겨 준 후, ‘다테노카이’ 대원들과 육상 자위대 이치가야 주둔지에 난입, 자위대의 궐기를 외치고는, 동부 방면 총감실에서 할복자살하였다.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과 우경화에 대한 우려가 심각해지는 상황이 지금 현재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길고 긴 세월속에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일본 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을 넘어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의 죽음이 주는 의미와 일본 문학에 끼친 영향들에 대해 다른 책을 통해 읽다가 문득 그의 <금각사>를 읽었다. 1956년에 완성된 일본 소설을 평가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의미가 없다. 소설의 완성도에 대한 의견이나 우리 문학과의 비교도 의미 있겠지만 호기심은 이 소설을 쓴 작가에 집중되어 버렸다.

소설의 주인공 미조구치와 그의 친구 가시와기는 작가에게 분명히 자신의 정체성을 투영한 분신처럼 보인다. 미시마 유키오의 성장배경과 성격이 반영되어 나타난 부분이 많다. 우리 소설에서 김동인 보여주였던 유미주의 계열의 소설로 볼 수 있는 이 소설의 미의식은 다양한 방식으로 평론가들에게 변주되었다. 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은 ‘인식가’인 가시와기와 ‘행동가’인 미조구치 사이의 관계다. 애증 관계에 있는 두 주인공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관계와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인다. 서로 갖지 못한 부분에 대한 열등감은 정신병적 이상 증상으로 나타나 결국 ‘금각사’를 불태우는 극단적인 행위로 나타난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먼 옛날의 사건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둔감한 사람들은 피가 흐르지 않으면 허둥대지 않는다. 하지만, 피가 흘렀을 때에는 비극은 끝나 버린 다음인 것이다. - P. 22

잊혀진 ‘기억’은 일종의 역설이다.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먼 옛날의 사건들이 존재한다. 그 트라우마는 우리의 기억을 지배하고 삶을 결정하며 현실을 조종하기도 한다. 주인공에게 있어 우이코의 죽음은 그의 생애 전반을 지배한다. 소설 초반부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버린 우이코는 ‘금각’에 투영되어 환영처럼 나타난다. 주인공에게 있어 우이코가 금각이고 금각이 곧 우이코가 된다.

이 소설은 그렇게 한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악마적인 모습들을 드러내기도 하고 자신이 가진 콤플렉스에 반응하는 방식들에 대해 되볼아보게 하기도 한다. 엉뚱한 방식의 소설읽기는 자유롭게 상상될 수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종종걸음으로 가는 꾀죄죄한 허리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유달리 추악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를 추악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은 희망이었다. 습기 찬 담홍색의, 끊임없이 가려움을 느끼게 하는, 이 세상의 그 무엇에도 뒤지지 않는, 더러운 피부에 번진 완고한 옴과도 같은 희망, 불치의 희망이었다. - P. 210

희망을 추악하다고 말하는 미시마 유키오는 한 인간에게 있어 부질없는 희망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것이 작가의식이든 주인공의 성격에 대한 반영이든 나는 이 소설에서 손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풀처럼 끈끈한 희망의 지겨움을 읽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의미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얼마나 큰 욕망 속에 존재하는지 확인하게 된다.

현실이 서글프다면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더욱 명료해진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희망이 용도 폐기되는 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에게 무의미한 단어를 이 소설에서는 애써 외면한다.

“삶을 견디는 다른 방법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니?”
“아니. 나머지는 광기나 죽음이지.”
“세계를 변모시키는 건 절대로 인식이 아니야.”라고 얼떨결에 나는, 고백에 가까운 위험을 무릅쓰고 반박하였다. “세계를 변모시키는 건 행위야. 그것밖에 없어.” - P. 226


세계를 변모시키는 것은 ‘인식’이 아니라 ‘행위’라는 사실을 왜 모르겠는가. 행위 이전에 용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인식을 통해 용기가 생기가 그것은 현실에서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나 실천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미조구치는 금각사에 대한 ‘방화’를 행동으로 옮겼다. 어떤 행동이든 그것은 우리를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는 없다. 다만 현실을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니면 영원히 현실에서 격리된다. 전후 일본 소설의 정점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는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는 재미없는 소설이지만 의미있다.


061124-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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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물리학
로버트 어데어 지음, 장석봉 옮김 / 한승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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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간의 몸은 아름답다. 그 몸의 우아한 동작도 아름답고 격렬한 움직임도 아름답다. 미적 성취를 이루어내는 무용은 예술이 되었고 생존을 위한 동작들은 승부를 겨루는 스포츠로 발전했다. 축제와 즐거움의 무대였던 고대 체육은 이제 자본과 결합되어 산업이 되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인기있는 축구와 더불어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스포츠가 야구일 것이다. 축구는 축구공과 선수 사이에 축구화 이외의 매개물이 없고 인간의 움직임이 주된 스포츠지만 야구는 수많은 장비의 발달과 공과 인간 사이의 배트라고 하는 또 다른 도구가 개입된다는 점에서 축구와 다르다.

모든 종목이 그렇겠지만 발달된 과학기술이 개입된 후 급격한 발전이 이루어진다. 개별 종목들은 전문적인 분야로 발전하고 특별한 장비와 기술을 보유한 ‘선수’가 나타난다. 국가의 명예를 건 순수 아마추어 스포츠 제전이었던 올림픽은 옛말이 되었다. 프로화되 스포츠는 자본과 결합되어 총체적인 산업으로 발전했다. 미국에서 발달한 프로야구는 승부를 위한 각 개인과 팀들간의 무한 경쟁이 이루어졌고 팬들의 입장에서는 즐거운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그리고 보다 멀리 힘차게 공을 보내기 위한 노력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물리학이 과학에 개입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로버트 어데어의 <야구의 물리학>은 물리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야구’이다. 공중을 날아오르는 야구공의 비행은 야구가 지닌 특별한 의미이다. 투수가 공을 던지가 타자가 배트를 이용해서 공을 친다. 투수가 던지는 공은 회전방향과 공기 마찰에 따라 휘어지기도 하고 궤도를 수정하기도 한다. 배트의 반발계수와 바람의 세기에 따라 공의 비행거리는 달라진다. 수비는 낙하지점을 예상하고 달리고 받고 던진다. 단순해 보이는 이 과정들 속에 숨어 있는 물리학의 신비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만큼 복잡할 것이다. 그래서 물리학자가 야구에 손을 댔다.

수많은 데이타와 야구의 실제 상황을 결합해서 독자들에게 야구에서 벌어지는 물리적 상황들을 설명한다. 물론 이 책은 야구를 ‘보다 더 재미있게’ 보기 위한 노력 이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책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현실에 적용되는 모든 응용물리학은 그 분야에 대한 관심과 열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야구를 좋아하는 저자와 메이저리그에서 일하는 지인의 관계가 아니었다면 누가 이런 힘든 짓을 하겠는가. 좋아하면 알게된다. 보다 더 잘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쓴 저자의 정성만은 감탄할 만하다.

우리나라도 프로야구가 출범한지 20년이 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역 연고를 중심으로 생활속에서 야구를 즐기고 있다. 복잡한 규칙과 다양한 전술을 알고 즐기는 것은 야구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관심 없는 대상에 대한 앎은 무의미하다. 이 책은 야구팬을 위한 ‘야구 백배 즐기기’ 쯤으로 보면 될 것 같다.

각 장에서 ‘야구공의 비행, 배트의 스윙, 투구, 타격, 배트의 성질, 달리기, 수비, 던지기’를 다루고 있다. 단순히 개인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야구를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과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계산된 훈련과 다양한 작전들이 결합될 때 승리를 위한 각 팀들의 열정은 빛이 날 것이다. 각 장에서 저자는 야구의 원리를 물리학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다소 지루하고 딱딱한 문장들은 어쩔 수가 없다. 야구의 역사 속에서 발전과정을 살펴보고 실제 자료들을 바탕으로 야구의 원리들을 이해하는 재미는 특별하다. 게다가 앞으로 우리가 즐길 야구라는 스포츠의 이면과 원리를 들여다보는 것은 야구팬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메이저리그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국 사람이 쓴 책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상황에 적용되지 않는 부분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미국 프로야구에서나 가능한 책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보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관점에서 야구를 설명하는 책도 가능할 것 같다. 승리를 위한 각 팀들 간의 스토브 리그가 시작된 지금 봄과 함께 찾아올 프로야구를 기다리는 즐거움을 이 책을 통해 배가 시켜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0611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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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1-22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읽고 갑니다. 야구에도 지체 없이 물리라는 놈이 관여를 하고 있네요. 좋은 하루되세요.

sceptic 2006-11-22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마르크스 평전 -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의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인간은 모든 사색과 정치적 활동의 중심에 있어야 하며, 그 어떤 혁명도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므로 인간의 목숨만큼 가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P. 142


 카알 마르크스(Karl Marx).


 그의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화 되었다. 그가 함유하는 의미는 상황과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된다. 인류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신이 아닌 사람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주저없이 그의 이름을 외칠 것이다. 그것이 긍정의 의미든 부정의 의미이든 말이다. 21세기에 불러보는 그의 이름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세계적인 석학으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손꼽히는 자크 아탈리의 <마르크스 평전>은 마르크스에 대한 선명하고 분석적인 평가를 제공한다. 이 책에서 아탈리는 마르크스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독일의 철학자, 유럽의 혁명가, 영국의 경제학자, 인터내셔널의 스승, 자본의 사상가’로 구분된 그의 생애를 따라가며 방대한 자료와 분명한 목소리로 말한다. 냉정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마르크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저자의 이야기는 수많은 인용들과 자료들을 통해 객관성을 확보하고 그것에 대한 논리적인 분석과 평가는 독자들의 동의를 이끌어 낸다.


 평전이 가지는 미덕이 설득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인간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리고 있다는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선입견은 독자들마다 다를 것이다. 단편적인 이야기들과 다른 책들에서 만난 마르크스의 왜곡된 모습들이 하나의 완전한 그림으로 드러나는 느낌이다. 750여페이지에 달하는 긴 여행을 통해 우리는 마르크스의 참 모습을 만나게 된다.


 19세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상을 뒤흔들었던 ‘공산당선언(1848)’이후 마르크스는 어떤 형태로든 거의 모든 인류에게 깊은 인상과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인간이 되었다. 그 영향의 파장은 물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유효하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쓴 것이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나 기억할 만한 한 인간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여전히 유요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조심스럽기만 했을 것이다. 꼼꼼한 자료 분석과 객관적인 데이터를 통해 한 인물을 이야기하는 것도 결국에는 주관의 범주를 벗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마르크스를 영웅시하거나 비하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19세기를 살았던 한 개인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조국을 등지고 살아가면서 가난과 불행을 온몸으로 껴안았던 그의 생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세 명의 자녀를 앞세웠고 두 명의 자녀는 자살한 마르크스의 개인적 고뇌와 세상에 대한 고민은 책을 읽는 내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의 지적 기반을 살펴보고 사상적 추이를 더듬는 일은 현재성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그의 예언적 사상과 현재와의 접점을 찾아내는 노력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마르크스의 망령을 되살려 어쩌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좌우의 대립을 넘어 그가 보여준 혁명적 사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레닌과 스탈린은 마르크스를 오독했고 이용했지만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던 마르크스를 올바로 이해하는 일은 그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지구상에 첫 번째 세워졌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붕괴되었고 중국은 자본주의의 물결을 받아들이고 있다. 북한과 쿠바 등 여전힌 진행중인 혁명에 대한 실험과 평가는 마르크스의 이론과는 다른 점이 많다.


 수학공식처럼 들어맞는 현실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세상은 인류의 영원한 지향점의 의미만 지닌 것은 아닐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어쨌든 그가 떠난 빈 자리를 채웠던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를 반박하고 비난하고 오해하지만 그 모든 것이 마르크스로부터 비롯된다.


 마르크스의 생애를 반추하며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그의 아내 예니가 아니라 친구 엥겔스다. 친구 혹은 사상적 동지 이상의 특별한 관계였던 그들을 표현하기조차 힘들다. 엥겔스가 아니었다면 마르크스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엥겔스가 마르크스를 길러낸 것은 아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관계인 두 사람, 특히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가졌던 마음이 더 많이 궁금해졌다.


 우리는 지금 이기적 자본주의와 왜곡된 자유주의가 팽배한 현실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여전히 필요하다. 그가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는 말도 아니고 19세기 식으로 혁명을 꿈꾸자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그가 미처 상상도 못한 자본의 소유 형태나 노동의 가치가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가졌던 ‘인간’에 대한 생각은 ‘마르크스’라는 상품에 대한 현재적 유용성에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것이 자크 아탈리가 마르크스를 통해 읽어낸 것이다.


 어떤 자유의지도 소멸될 것이 확실하고,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어떤 생각이든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 말고, 상반되는 관점들을 받아들이며, 원인과 책임 요소들, 메커니즘과 행위자들, 계층들과 사람들을 혼동하지 말며,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하는 이유들을 말이다.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아야 하는 이유 말이다.


 이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세대들이 추방된 카를 마르크스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런던의 빈궁 속에서 죽은 자식들을 놓고 슬퍼하면서 최선의 인류를 꿈꾸었던 그를. 그러면 미래의 세대들은 세계의 정신에게로 되돌아가게 되고, 그의 주된 메시지를 다시 듣게 될 것이다. '인간은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 P.741



061119-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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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1-20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읽으려고 2주 전부터 벼르고 있었는데 읽지를 못하고 있었네요. 근데 여기에서 님의 리뷰를 먼저 읽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sceptic 2006-11-20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말씀을요...부끄럽습니다...꼭 읽어보실만한 책으로 추천합니다...님의 취향을 알 수 없으나 천천히 음미할 만합니다.
 
마르크스 평전 -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의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절판


인간은 모든 사색과 정치적 활동의 중심에 있어야 하며, 그 어떤 혁명도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므로 인간의 목숨만큼 가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142쪽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168쪽

그는 정신의 힘을 믿는 유물론자였으며, 경제는 역사의 기반이며 행동이 이론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철학자였다. 그리고 인간을 신뢰하는 비관론자였다.-628쪽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학술적 저서들 속에서 사회주의는 망상이 아니며 현 사회의 생산관계들의 발전의 궁극적 목표이자 필연적 결과라고 처음으로 설명한 사람들이다." -683쪽

"정부를 따르는 자들을 위한 자유, 한 당의 당원들만을 위한 자유는 그들의 수가 아무리 많을지라도 자유가 아니다. 자유, 그것은 언제나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의 자유를 말한다. 일단 권력을 쥐게 된 프롤레타이랑에게 부과되는 역사적 과제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자리에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창설하는 것이지, 모든 민주주의를 제거해버리는 것이 아니다."-693쪽

베트남에서부터 가나까지, 기니에서 알제리까지 대부분의 해방 운동들은 마르크스주의 또는 호치민에서부터 체 게바라에 이르는 마르크스주의의 현대적 화신들을 내세웠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상대적으로 덜 내세웠다. 이어지던 거짓과 변형의 추우이들 아래에 매장된 마르크스의 원문들은 더 이상 그 누구도 원용하지 않았다. -732쪽

어떤 자유의지도 소멸될 것이 확실하고,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어떤 생각이든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 말고, 상반되는 관점들을 받아들이며, 원인과 책임 요소들, 메커니즘과 행위자들, 계층들과 사람들을 혼동하지 말며, 언제나 열여 있어야 하는 이유들을 말이다.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아야 하는 이유 말이다.

이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세대들이 추방된 카를 마르크스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런던의 빈궁 속에서 죽은 자식들을 놓고 슬퍼하면서 최선의 인류를 꿈꾸었던 그를. 그러면 미래의 세대들은 세계의 정신에게로 되돌아 가게 되고, 그의 주된 메시지를 다시 듣게 될 것이다. '인간은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7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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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21세기 - 3 - 완결편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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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전을 읽는다고 해서 현실의 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자괴감. 하루 이틀 노력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는 낭패감. 어쩔 수 없이 현실에 발딛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과연 고전이 주는 지혜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善行無轍迹,                         잘 가는 자는 자취를 남기지 아니하고,
善言無瑕謫,                         잘 하는 말은 흠을 남기지 아니한다.
善數不用籌策,                     잘 헤아리는 자는 주산을 쓰지 아니하고,
善閉無關楗而不可開,         잘 닫는 자는 빗장을 쓰지 않는데도 열 수가 없다.
善結無繩約而不可解.         잘 맺는 자는 끈으로 매지 않는데도 풀 수가 없다.
- 27장

고수의 세계는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다는 공통점에 대해 공감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동작과 입으로 하는 말과 사유의 흐름에 막힘이 없고 자연스럽다. 하수는 고달프다. 시간과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더욱 힘들어진다. 부단한 극기의 과정과 대상에 대한 열정만이 그러한 경지를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나 완벽주의에 대한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 잘 하는 말은 흠을 남기지 않는다고 했는데 흠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은 논쟁적인 장면에서는 불가능하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모두에게 나쁜 사람이다.

樸散則爲器,                       통나무에 끌질을 하면 온갖 그릇이 생겨난다.
聖人用之, 則爲官長.         성인은 이러한 이치를 터득하여 세속적 다스림의 우두머리 노릇을 한다.
故大制不割.                       그러므로 위대한 다스림은 자름이 없는 것이다.
- 28장

그릇의 효용은 비어있는 공간에서 비롯된다. 깍고 다듬고 파내어 비어진 공간만큼 그 그릇의 가치는 인정받는다. 비워야 얻을 수 있는 지극히 자명한 이치 앞에 고개가 숙여진다. 온전한 모습 그대로 끊임없이 이기적 욕망을 드러내는 자화상을 보는 것같아 부끄럽다. 정현종 시인의 시 <잃어야 얻는다>를 읽다가 두고 두고 인용했던 기억이 새롭다. 양손에 떡을 쥐고 떡이 무겁다고 불평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道常無名.                                       도는 늘 이름이 없다.
樸雖小, 天下莫能臣也.                 나무는 비록 작지만 하늘 아래 아무도 그를 신하로 삼을 수 없다.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제후 제왕이 이 통나무를 잘 지킨다면 만물이 스스로 질서지워질 것이다.
-32장


이름을 부르는 순간 모든 것들은 규정된다. 관계가 형성되는 것도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노자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통나무와 이름은 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세상과 인생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과연 삶의 태도와 가치를 바꿀 수 있을까? 스스로 그러하다고 생각했으나 아직도 멀었다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고미숙의 선언대로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知人者智, 自知者明.                        타인을 아는 자를 지혜롭다 할지 모르지만, 자기를 아는 자야말로 밝은 것이다.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타인을 이기는 자를 힘세다 할지 모르지만, 자기를 이기는 자야말로 강한 것이다.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족함을 아는 자래야 부한 것이요, 행함을 관철하는 자래야 뜻이 있는 것이다.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바른 자리를 잃지 않는 자래야 오래 가는 것이요,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자래야 수하다 할 것이다.
-33장

이 세상에 가장 두려운 존재는 자신이다. 가학적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지나쳐도 좋지 않다. 과연 나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한다는 것의 한계는 무엇인가. 알 수 없다. 숭산 스님의 말처럼 ‘오직 모를 뿐!’

道常無爲, 而無不爲.                    도는 늘상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아니함이 없다.
-37장

노자의 ‘道經’ 37장은 이렇게 끝이 난다. 38장부터 81장까지의 ‘㥁經’은 도경의 깊은 이해만으로도 충분히 그 경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도올의 말을 믿어야 할 것이다. ‘道’라는 것이 대체 뭐길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느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가. 그 깊고 깊은 사유의 흐름을 꼼꼼히 따라가며 도올의 도움을 받았지만 암흑 속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불빛도 없다. 현실에서 찾아지지 않는 ‘길’에 대한 아쉬움과 스스로에 대한 미련스러움에 화가 나기 때문이다. 이성과 감성으로 해결되지 않는 삶의 이치와 ‘道’의 경지는 내 몫이 아닐 수도 있고 우리들 모두의 곁에 함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렴풋한 느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성적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렇게 어둠이 창 밖에 당도해 버리고 나면 반드시 빛이 있기 마련이다.


06111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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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13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때 선(善)이 '착하다'도 되지만 '잘'이라는 말도 된다는 걸 배웠어요.친구들끼리 농담으로 공부를 잘해야 착한 어린이가 되는거라 이야기했던것이 생각납니다.

sceptic 2006-11-13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담이 진담되는 현실이 좀 황당하기도 하죠...공부와 거리가 멀었던 어린 시절이라 쫌 많이 찔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