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10만 년 전에 인류가 등장하고 겨우 1만 년 전에 정착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 잠재된 욕망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현대인의 일상은 과거에 비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정보의 대중화로 인해 언제든 거침없이 달릴 수 있고,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교통수단이 발달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여행은 누구에게나 보편화되었고 대중화되었다.

  여행의 목적지는 출발지이다. 돌아오지 않기 위해 떠나는 것을 우리는 여행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과정들을 여행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돌아오기 위해서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원점으로 회귀하는 방식의 좀 더 먼 거리로의 여행은 반복되는 일상에서의 일탈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아니거나 특정 공간을 순환하면서 생활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여행의 욕구를 느끼지 않을지도 모른다. 유목민이나 집시처럼 떠도는 사람들에게는 삶이 곧 길고 지루한 여행일 뿐이다.

  보통의 <여행의 기술>은 여행에 필요한 기술을 설명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면 면에서 제목이 부적절하다. 여행지를 소개하거나 미리 알아두어야 할 여행 정보지와는 물론 거리가 멀다. ‘알랭 드 보통’식의 여행에 관한 에세이이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는 여행은 작은 제목들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처음 접하는 독자가 아니라면 저자에 대한 정보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를 이해하는 것이 책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책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보통 신드롬’을 만들어 낼 정도로 고정적이고 폭발적인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이 작가의 매력은 예민한 감수성과 철학자로서의 깊이 있는 사색에서 기인한다. 폭넓은 독서와 사유를 알기 쉽게 풀어내면서 감성적인 부분들과 결합시켜 나가는 방식이 서툴지 않고 고백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은 후에 밀란 쿤데라의 책들을 기다린 기억이 난다. 최근의 <행복의 건축>에 이르기까지 기다리면서까지 마음 졸일 필요는 없지만 새 책이 나오면 별로 고민하지 않고 읽어보게 되는 작가가 되었다. 문학이 아니면서도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책을 꾸준히 써낼 수 있는 것은 보편적인 공감대를 이끌어 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단순한 호기심이나 대중적인 인기만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출발, 동기, 풍경, 예술, 귀환’이라는 다섯 개의 주제는 여행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과정이다. 여행지에서 만나게 되는 풍경들과 예술가들과 연관된 장소 그리고 독서를 통해 저장된 풍부한 상상력과 여행하면서 손에 들고간 파스칼의 <팡세>가 어우러진 책이다. 한 개인의 여행 과정을 따라가는 일은 사실 지루하고 재미없다. 내가 가본 장소들에 대한 추억을 더듬거나 여행 정보 수집 차원이 아니라면 말이다. 보통의 여행지도 런던에서부터 암스테르담, 마드리드, 프로방스 등 유럽에 국한되어 있고 유럽의 문학과 예술을 중심으로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나 감상들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다만 여행을 위한 출발과 귀한 그리고 여정에서 보여준 생각의 흐름이나 감상들은 누구나 어디나 공통 분모가 되어 찾아 볼 수 있는 내용들이기 때문에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인생을 여행에 많이 비유한다. 죽음을 최종 목적지로 한 멀고도 긴 여행. 행선지는 바꿀 수 있지만 되돌아 갈 수 없는 시간 여행. 살아가면서 최소한의 비상구나 탈출구가 필요하다. 인간은 누구나 떠나고 싶어한다. 모태 회귀 본능처럼 바다를 동경하고 반복적인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의 본능에 따라 올 여름도 기형적인 휴가와 떠남과 돌아옴이 이어질 예정이다. 동시에 떠나는 여름 휴가! 그렇게라도 위안이 되고 정리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사치스런 투정일 수도 있겠지만.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할 수도 있다. 다양한 방법과 요소들이 결합되어 평생 잊혀지지 않는 여행이 되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부딪히는 모든 풍경과 창 밖에 부는 바람소리가 여행지의 그것일 수 있다는 새로운 발견들로 이 책은 마무리 된다. 삶이 여행의 한 과정이든, 공간의 직접적인 이동 과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풍경들과 낯선 사람들, 새로운 음식들이 생의 활력이 되고 목적과 방향을 수정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070627-0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기
윤성희 지음 / 창비 / 200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독한 감기에 걸려 본 사람들은 안다. 그 열병을 털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을 때, 뺨과 귓불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의 신선함을. 살아있다는 것은 그저 신열을 앓고 난 후에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는 공기의 시원함에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윤성희의 세 번째 소설집 <감기>는 구석구석 발라먹어야 하는 생선처럼 가시를 숨기고 있지만 예측할 수 있는 함정과 장치들이기 때문에 당혹스럽거나 불편하지는 않다. 소설을 읽으면서 낯설고 재미있는 스토리가 주는 감동은 사실 오래가지 않는다. 적어도 내 경우의 이야기지만 소설가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문체가 우선이다. 한 데 뒤섞여 있어도 분명하게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윤성희가 가진 특징이고 매력이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좋아지는가 하면 별 생각없이 빨려든다.

  적당한 거리두기와 냉소적인 시선이 아니라 무덤덤한 목소리는 마른 모래 바람처럼 서걱인다. 좀체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의 숨소리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읽어내야 한다. 그 섬세한 숨결들을 놓쳐버리면 윤성희는 지루한 작가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내게 윤성희는 아주 매력적인 작가로 기억되었다. 그녀의 전작 소설집 <거기, 당신?>를 읽으면서 느꼈던 독특한 면들이 고스란히 살아 움직인다. 나는 계속 그녀의 소설을 읽을 것이다.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수다스럽지 않다. 말이 많은 캐릭터가 필요해도 작가는 중간에서 차단하고 몇 마디 말만을 골라 던져주거나 대화와 대화 사이의 간격을 쭉쭉 넓혀버린다. 상징이 아니라 비약은 가독성을 떨어뜨리지만 상상력을 배가시킨다. 절제된 언어는 시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요설스럽지 않지만 할 말은 다하고 있다. 툭툭 내뱉는 어법과 어휘와 문장들 사이의 생략은 윤성희가 지닌 문체의 가장 큰 매력이다. 나는 그래서 그녀가 마음에 든다. 어차피 작품이든 작가든 개인적인 취향일 수밖에 없다면, 마음에 든다고 말할 수 있다.

  한결같이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사람들의 내면을 답답하게 끌고 나가는 방식이 때론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들 사이에 뚫린 ‘구멍’을 읽어나가는 일은 현실 속에 모든 존재들을 읽어내는 방법이 될 수 있겠다. 감기에 걸려 재채기를 하든 죽은 사람에 대한 부채감으로 인생을 허비하든 상관없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가슴에 큰 구멍 하나씩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구멍을 숨기기 위해 크게 웃고 위선 혹은 위악을 부리거나 눈물을 흘린다. 옷으로 가려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슬쩍슬쩍 보이기도 하지만 서로 모른 채 하거나 알아도 눈을 감아버린다. 그 구멍들을 소설에서 직접 보여준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없는 소설이 될까? 윤성희는 끝없이 빨려드는 블랙홀처럼 그 구멍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 구멍을 향해 질주하는 사람들에게 보물지도의 상징처럼 암호를 숨겨놓기도 하고 어휘나 문장들 사이에 숨어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재미있다.

  단편 ‘구멍’이나 ‘하다 만 말’ 그리고 ‘저 너머’나 ‘무릎’에서는 가장 자주 부딪히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가장 큰 행복과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가족들이 때로는 생의 가장 큰 불행이 되기도 하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런 가족들 사이에서 확인되는 개인은 서로 각각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확인된다. 과거의 기억들과 현재의 삶은 끈끈하게 이어져 있지만 쉽게 분리되기도 한다. 같은 시공간에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거나 말하지 않고 교감하거나 삶의 이유를 타인에게서 찾거나 어떤 타인도 내 생의 이유를 확인해 줄 수 없거나.

  부채감이나 열등감 혹은 몸과 마음의 이상 증세는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감기와 같다. 없다고 행복하지도 않고 있는 것을 자랑할 수도 없다.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인간 삶의 보편성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윤성희가 보여주는 인물들은 그것들을 과장하고 확대하거나 지나치게 무시해 버린다.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으나 현실 밖의 세상과 이야기를 넘나든다. 그 경계가 현실과 소설의 경계가 아닐까 싶다.

“사람은 순간을 무서워해야 해. 자네가 비겁해진 순간이 있었다면 그 한순간이 평생을 따라다닐 거야.” - ‘등 뒤에’중에서(P. 70)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순간을 무서워해야 하는 것일까? 그 한 순간이 평생을 따라 다닐 것이라는 말은 무심한 순간들이 어쩌면 결정적 순간이라고 믿었던 모든 순간들을 밀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불확정성 때문에 사는게 두렵고 때때로 허탈하고 외로워진다. 그 ‘순간’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능력이나 힘이 될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외부의 힘이나 타인이 될 수도 있다.

“고백을 해본 사람들은 고백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다는 것을 알게 되지.” - ‘재채기’중에서(P. 117)


  아무도 쉽게 고백하지 않는다. 고백을 하는 순간 승리하거나 패배하거나! 쉽게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노름판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패배의 낭패감을 견뎌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윤성희의 소설을 읽어가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단편들 사이사이, 소설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내면,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격, 툭툭 내뱉는 간단한 대화, 쉽게 읽어낼 수 없는 웃음과 엉뚱한 결말. 이 모든 것들이 작가의 다음과 그 다음까지를 기다리게 한다. 변하지 않는 개성과 다양성을 함께 기대하는 이기적인 독자가 그녀를 기다린다.


070625-0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 - 박영근 유고시집 창비시선 276
박영근 지음 / 창비 / 200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늦은 작별

그 언제부턴가
가을도 다 지나고

가슴속에
식은 채 묻혀 있던
불덩어리 하나

다 피어나지도
저를 떨구지도 못한
꽃덩어리 하나

오늘은
허연 잿더미를 헤치고
말갛게 불티로 살아난다

이제 그만
저를 놓아주세요

찬 바람 속
몸시 앓다가
한 여드레쯤 지나면
문밖 골목에도
고즈넉이 흰 눈 내리겠다

  하나 둘씩 존재했던 모든 것들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혹은 사랑이든 미움이든 말이다. 고정희도 그랬고 윤중호나 오규원 그리고 박영근도 사라졌다. 시인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과 특별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들은 죽어서도 많은 말들을 한다는 사실이 조금 다를 뿐이다. 그들이 토해낸 언어들은 죽지 않고 활자로 살아 남는다. 책으로 남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롯이 등불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맞아야 하는 사람들이 조금 덜 쓸쓸할 것이다.

  박영근의 유고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는 시집 앞에 실린 몽골 초원 위에 누워 있는 사진을 떠올리게 한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는게 아니라 어둠속 저 하늘 위 별자리에 누워있을 시인의 모습이 되어버렸다. 소멸하는 모든 것들은 아쉬움과 여운을 남긴다. 시인 박영근도 그렇다. 그가 남긴 시들이 읽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표정으로 다가온다.

  ‘늦은 작별’이 아니라 너무 이른 작별이었다. 가슴 속에 묻혀 있던 불덩이 하나가 꽃덩어리로 피어나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건 아닌지 모르겠다. 생에 있어서 순간성과 일회성의 엄밀한 규칙은 단 한사람에게도 예외가 적용된 적이 없다. 어느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듯이.  지금 현재 살아가는 방법과 자세를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문득 부딪히게 되는 죽음은 말할 수 없는 침묵이 되어 버린다. 예상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알고 있어도 속수무책이다. 받아들이되 이해할 수도 없고 외면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기억하느냐’고 묻고 있는지 모르겠다. 실제 생물학적인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의 사라짐이다. 인간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때 비로소 진짜 죽음을 맞이한다. ‘그 종소리’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때 우리는 떠난다. 하지만 박영근의 목소리는 오래도록 전해질 것이다. 시인이 끝임없이 되묻고 있으니까, 기억하느냐고.

기억하느냐, 그 종소리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천녀의 꿈이라 한들
제자리에 있겠느냐

우리가 사는 일이 온통 고통이라 해도
오늘 바람 속에 흔들리는
저 풀잎 하나보다 못하구나

기억하느냐
겨울 빈 들에서 듣던 그 종소리

  44편의 시들 중에서 유일하게 발표되지 않았던 시가 마지막에 실려있다. 뭉크의 ‘절규’를 주제로 한 시가 그것이다.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이 ‘절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시인의 죽음을 앞에 두고 절규한다고 해서 살아나지는 않는다. 모든 죽음은 안타까움을 남긴다. 세상을 향해 절규하던 목소리들, 노동 운동의 현장에서 치열했던 삶의 자세, 사람과 사물들을 향해 보여줬던 뜨거운 사랑이 담긴 시들을 남기고 떠난 박영근 시인을 기억한다. 그렇게 또 한 명의 시인은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절규

저렇게 떨어지는 노을이 시뻘건 피라면 너는 믿을 수 있을까

네가 늘 걷던 길이
어느 날 검은 폭풍 속에
소용돌이쳐
네 집과 누이들과 어머니를
휘감아버린다면
너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네가 내지르는 비명을
어둠속에 혼자서
네가 듣는다면

아, 푸른 하늘은 어디에 있을까
작은 새의 둥지도


070623-0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갈색책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진중권 옮김 / 그린비 / 200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면 그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이가 아프다.”라고 말했을 때, 타인은 나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까?

  관념론과 실재론의 두 축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근대 철학의 기본 토대를 뒤흔들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는 철저하게 ‘언어’에 근거하고 있다. 언어가 지시하는 의미와 역할은 늘 그 한계를 보이고 엄밀하고 명징한 분석과 구분으로부터 모든 사유는 출발한다. 하나의 사물에 대해 우리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이름을 불러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을 우리가 얼마나 확실한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명칭 자체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해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통한 사유의 방식을 두 권의 책을 통해 탐구하기 시작한다.

  <청갈색책>은 제목이 없는 강의 노트이다. 제자에게 자신의 강의를 기록시켜서 청색 표지와 갈색 표지로 복사본 몇 부만 남기고 그 중 하나를 스승인 버트란드 러셀에게 보낸다. 그것이 출판되어 ‘청색책’과 ‘갈색책’이 되었고, 한 권으로 묶여 <청갈색책>이 되었다. 이 책은 <철학적 탐구>가 나오기 전에 비트겐슈타인의 사유의 단초를 읽어낼 수 있는 책으로 의미를 지닌다고 하는데, <철학적 탐구>를 읽어보려다 미루고 있어 내용은 알 수 없다.

  개인적인 지식과 이해력의 한계 때문에 자괴감이 들었다. 한 권의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단순히 글자와 어휘를 아는 정도의 문식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 책이다. 그의 주저인 <논리-철학 논고>는 오히려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었다.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겠지만 철학적 사유의 단초들을 읽어낼 수 있었고,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의 구조와 분량과 상관없이 치밀하고 조직적인 구성이 읽는 사람을 압도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황에 따라 되새겨 볼만한 내용으로 기억하고 있다. 반복해서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강의 형식의 노트라고 그런지 몰라도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자유분방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쏟아내며 자신의 생각의 흐름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체계가 잡혀있지 않아 강의를 듣는 입장이 아니라 기록된 활자로 번역되어 읽어야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 비트겐슈타인이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어렵고 난해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와 사유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끊임없는 질문과 탐구 과정을 따라가기 어렵다.

  언어의 인간을 다른 종과 구별하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라면 철학적 사유는 당연히 언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언어철학적 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에 끼친 영향력이 무엇이든 이 철학자가 말하고 싶었던 사유의 방식이나 과정들이 몹시 궁금하다. 혼자 책을 보고 이해하고 사유하는 것의 한계가 분명하고 절실하게 느껴지게 한 책이다.

  기회가 된다면 세미나든 강연회든 체계적으로 알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 연구 공간 ‘수유+너머’ 같은 곳이든, 철학아카데미든 찾아가야 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남겨진다. 책이 지니는 한계는 소통의 문제로 남는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과 행간의 의미들을 찾으려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절실하지 않으면 끝까지 버틴다. 호기심이 생기고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다른 분야의 학문이나 다른 책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욕심이 생기지만 언제가 될 지는 알 수가 없다. 누구든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인문학이나 철학 강좌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해 본다.


070622-0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성의 정체성, 어떤 여성이 될 것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17
이현재 지음 / 책세상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지구위의 반은 여성이다. 남성에 반대되는 개념의 성에 대한 구별이 아니라 예외적인 종족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 여성이다. 보통 인간이라는 개념 속에 여성이 포함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시대의 이야기다. 여성들이 투표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서구 유럽의 경우도 20세기 초, 중반 이후의 일이다. 인류가 문화를 발전시켜 오면서 성숙한 사회의 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 중의 하나가 여성의 문제일 것이다.

  학문으로서 ‘여성학’이 붐을 이루고 남녀 차별 철폐가 사회적 이슈가 되어 여성들의 권익이 신장되고 있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여성들의 위상은 달라졌다. 가시적인 변화들은 인식의 변화가 가져온 결과들이다. 그러나 과연 여성의 문제는 제대로 파악되었는가? 어디서부터 어떤 방법으로 접근할 것인가? 숱한 논의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답보 상태이거나 인식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 부분들에 대한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여성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아니, 여성으로서의 나는 누구인가?

  이런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결국 철학에게 부탁한다. <여성의 정체성>은 여성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여성’의 문제이다. 저자 이현재는 ‘인정이론’을 통해 여성의 문제에 접근한다. 지금까지 여성의 문제를 논의했던 기준과 방향을 점검하고 철학이 어떻게 여성의 정체성을 확립해 줄 것인가에 대한 접근 방식이 논리적이고 차분하게 이루어진다.

  주체로서의 여성은 다른 여성과의 동일성과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결국 ‘여성의 정체성은 타자를 배제하는 논리에서 타자를 인정하는 논리로 나아갈 때 실현될 수 있다.’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지금까지 여성주의가 오해를 받았던 부분을 점검하고 어떤 여성이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보부아르는 여성의 인간화를 첫 번째 목적으로 삼았다. 여성도 남성과 같은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조차 힘들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며 1세대의 출발로 본다. 이후 세 명의 걸출한 이론가를 차례차례 거론한다. 길리건의 ‘보살피는 여성’, 이리가레이의 ‘하나가 아닌 여성’, 버틀러의 ‘성적 이분법 허물기’가 그것이다. 세 사람은 조금씩 다른 방향에서 여성의 문제를 바라본다. 남성의 타자로서만 존재했던 여성의 문제가 철학 안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그 차이를 인정하는 장면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이 해결되기 위한 필요 조건은 여성들 간의 연대 가능성이다.

  백인 중산층 여성과 흑빈 빈곤층 여성은 과연 연대가 가능할까? 감성적이고 관습적인 연대는 이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낯선 자들과 반성적으로 연대할 때 여성들의 진정한 연대가 가능하며 현실은 분명한 모습으로 바뀔 것이라는 전언들에 공감한다. 여성이 여성 스스로를 배제하고 연대 가능성이 희박한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공동체적 연대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내게는 일종의 코뮌으로 읽혔다. 국가와 계층을 초월한 전지구적 여성들의 연대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 다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조직과 실천의 문제는 그리 만만치 않아 보인다.

  타자를 협동적 행위자로 인정하고 여성들 스스로 그 가능성을 열어갈 때 사회적 인식과 또 다른 타자인 남성들의 인식도 변화할 것이다. 다만 여성으로서 역할과 사회적 주체로서 당당히 서야 하는 여성들의 혼란과 갈등은 몇몇 이론가들의 주장으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삶은 연습이 없고 정답을 알 수가 없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스스로 결정해야 하지만 잔다르크나 클로델의 경우처럼 분열된 여성의 모습은 과거를 대표하는 여성으로만 볼 수는 없다. 현재 진행형으로 지속되는 수없이 많은 문제들을 생각해보면 여성의 문제가 남성들의 문제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이렇게 여성주의는 철학과 만났다. 나는 이 만남을 통해 타자 배제의 논리, 희생 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여성의 모습을 꿈꾸었다. 이것은 단순히 여성주의에 새로운 이념적 장치를 마련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철학의 탄생을 의미한다. 인정 이론을 통해 재구성된 여성철학은 다가올 여성의 세기에 새로운 사고방식을 제공할 것이다. - P. 165

070618-0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