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티의 지층들 - 현대사회론 강의
이진경 엮음 / 그린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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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더니티라는 개념은 언제까지 유효할 것인지 궁금했다. 21세기의 관점에서 우리가 말하는 모더니티는 한 시대를 통어하는 개념일 수 있을까? 지속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개념은 분명하게 달라질 것이고 미래의 관점에서 오늘은 또 어떤 이름으로 규정될 지 흥미롭다. 한 시대에 속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시대정신’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우리가 쉽게 선택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과거에서 그 의미와 해답을 찾는 것이다. 역사적 관점은 오늘의 현상들을 밝혀내고 미래를 예측하거나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중의 하나이다.

  이진경이 편저한 <모더니티의 지층들>은 ‘모더니티’라는 개념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책이다. 제목에 드러나듯이 모더니티는 하나의 방법과 관점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개별 학문들 간의 통섭이 불가능하다면 연구자들의 결과물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밖에 없다. 이진경은 모더니티를 일단 이렇게 정의한다.

모더니티, 혹은 근대성이란 근대적 형태의 합리성을 뜻하고, 그것은 계산가능성을 그리고 계산에 따른 통제 가능성을 그 원리로 한다. - P. 38

  사회적 현상으로 이 개념을 이해할 때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적 삶과 생활 방식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그 본질과 근원을 파악하는 일이 이 개념을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우리가 보통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문제 해결 방법을 찾는다는 것은 근대 이후의 사고방식이며 그것은 계산가능성과 통제 가능성을 염두에 둔 말이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겠지만 계량화하거나 수치화된 숫자를 통해서 이해하고 인과성을 바탕으로 인식하는 것이 통상적인 방법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은 물물교환의 대체 수단으로 인식되는 화폐가 등장한 이후의 삶의 양식을 돌아보게 한다. 중세적 삶의 양식에서 벗어나 인클로저 운동 이후의 근대적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지점을 근대의 출발로 보아야 한다. 편저자인 이진경은 근대성의 이론에서 이런 개념을 명확하게 설정하고 있다. 합리성이나 과학혁명 혹은 근대사회와 근대성의 개념을 공리주의와 연계시켜 ‘근대성’의 개념을 밝혀 놓았다.

  근대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의 공리계나 노동의 체계를 중심으로 화폐의 권력을 점검하고 계급이론을 설명한다. 이수영과 한경애, 조원광의 글들은 각각의 개념을 하나의 주제로 잡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책 전체가 열 네 개의 강좌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더니티라는 개념을 중심축으로 정교하게 조합되어 있다. 같은 연구 공간의 연구자들이기 때문에 중복과 접근 방식의 한계는 일정부분 감수해야 한다. 예를 들어 화폐나 노동의 체계, 계급이론이라는 작은 주제들이 근대성의 관점에서 다뤄지고 있지만 문화적 현상이나 역사적 관점들이 치밀하고 정교하지 못한 부분들이 보인다.

 하지만 일관성과 통일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여러 명의 연구자들에 의해 쓰여진 책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꼼꼼하고 폭넓은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문장이나 내용도 잘 다듬어져 있어 산만한 느낌은 없다. 한경애가 쓴 ‘화폐의 권력, 반화폐의 정치학’ 일부이다.

기억하자. 시간은 금이라는 말은 시간에 대한 찬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그것은 인간의 활동을 시간 단위로 구매해야 하는 자본의 조건이며, 그 시간을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기 위한 자본의 명령이고, 인간의 모든 활동을 노동으로 바꿔 가치를 생산하려는 자본의 욕망이다. 그러나 화폐가 삶의 목표가 될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활동을 노동으로 바꾸려 하고, 노동하지 않는 시간조차 스스로를 더 좋은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투자하며 시간은 금이라는 자본의 명령을 내면화한다. - P. 121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화페나 시간의 중요성에 대한 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생활에 침투해왔는지 그것들의 기능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자본의 속성과 문제들이 우리 삶에 미치는 절대적 영향력과 그 대안들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럽게 근대적 사회 체제와 현대 자본주의에 관한 문제로 이어진다. 특히 어린이와 주거공간에 관한 문제는 흥미롭다. 근대 도시의 기원과 건축에 관한 논의도 재미있고 이동과 정착의 사회학도, 폴리스의 정치학도 고개를 끄덕이며 읽힌다. 눈에 띄는 몇 개의 문장이다.

우리는 17세기 이래로 거리에서 아이들이 가정과 학교 안으로  쫓겨 들어가야 했던 역사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순수함을 만끽할 수 있다고 선전되는 놀이공간과 훈육만을 권장하는 학교공간의 분리, 그리고 이 양쪽을 동시에 손에 쥐고 아이들을 휘두르는 어머니의 가정. 이 안에서 움직이는 ‘어린이만을 위한 문화’란 과연 중세 유럽의 거리에서보다 더 많은 웃음과 행복을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것일까? - P. 200

노동자계급에게 ‘가족주의’란 19세기의 박애주의자들이 코뮨주의자들의 위협에 대항하면서 노동자들의 욕망을 포섭하고, 그들의 생활을 가족으로 영토화하기 위하여 고안한 계급적 전략의 이름이다. - P. 230

  제도화된 학교와 도시 소시민들의 기본적인 삶의 토대인 가족주의가 어떻게 자리 잡게 되었는지 혹은 그것들은 우리 삶을 어떤 형태로 바꿔 놓았는지 무수히 많은 반성과 대안의 모색에도 불구하고 견고하게 굳어졌다. 당연하게 믿어왔던 모든 것들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지금 우리들의 삶의 모습과 직결된다. 외부자의 시선과 내부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현대인들의 한계와 모순들을 고민해 볼 수 있는 화두를 제공한다.

  문제는 결국 현재의 자본주의와 미래의 자본주의로 옮겨지고 생명 윤리와 경제학의 관계 그리고 소수자와 제국, 다중의 문제를 종착역으로 삼는다. 결국 모든 논의들은 지금, 우리들의 모습으로 요약된다. 그것들의 발원지를 확인하고 주변에서 흔히 부딪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원인과 결과들을 파악하고 미래의 문제들을 고민하는 긴 과정이 지루하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고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고 그 과정에서 정치와 권력이 생겨나고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어 화폐가 등장하고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그밖의 모든 것들이 자본에 수렴되는 지난한 과정들이 인류의 역사에서 ‘근대’라고 명명되는 불과 몇 백년간의 과정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깊이 있고 폭넓은 사색이 없이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나와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어떤 형태로든 삶은 계속되고 자본주의는 영원할 것이라는 순진한 희망을 버리고 현실을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불편한 진실들을 계속해서 외면할 것인가? 끊임없이 분화되고 다양해지는 개인과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들은 계속되어야 한다. 근대를 넘어 탈근대 자본주의로 질주하는 우리들 모두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것이 설령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근대가 동일성으로 구축된 시공간이라면, 탈근대는 다양성을 지향한다. 탈근대 자본주의는 차이들을 부정하거나 약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차이들을 긍정하고 그것을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배열한다. 자본의 세계화는 차이를 인정하고, 차이를 찬양한다. - P. 399


070801-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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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8-01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보관함에 담아두어야겠군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