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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천재 - 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고명섭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스스로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해 본 사람들은 모른다. 박제가 된 천재가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을. 생물학적 기준으로 높은 IQ와 수학과 과학에 관한 문제 해결 능력이 천재의 조건은 아니다. 삶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광기에 가까운 집념으로 거탑을 쌓은 사람들은 모두 천재라고 불러도 좋겠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사람이나 노력하지 않는데도 높은 성과를 거두는 사람이 천재는 아니다. 주변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모든 수재와 영재와 천재들은 유전적인 요소에 의해 태어난 머리 좋은 바보인 경우도 많다.
고명섭의 <광기와 천재>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전기 작품 <천재와 광기>에서 제목을 빌려왔다. 하지만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생물학적으로 뛰어난 지능이나 능력의 소유자에 대한 감탄과 경외와는 거리가 멀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회적 관점에서 주목받았던 인물 탐구에 불과하다. 혹여 그들이 가지고 있었을지 모를 천재성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각 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전기와 생의 절정에서 벌어진 상황들을 그들의 성장배경이나 내면의 풍경들을 되짚어 보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 세르게이 네자예프, 조제프 푸셰는 정치인으로 장-자크 루소, 나쓰메 소세키, 프란츠 카프카는 작가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마르틴 하이데거, 미셸 푸코는 철학자로 묶었다. 전체 9명의 천재 아닌 천재들에 대한 이야기는 담박하다. 기자인 저자가 직업의식에 투철하게 객관성과 공공성을 담보로 쓴 책은 아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감상적이지도 않고 해석의 과잉이 없다. 비교적 객관적인 사실들을 나열하고 해석하며 감각적인 문장으로 그들을 평가한다. 어떤 책도 객관적일 수 없다. 다만 저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풍경일 뿐이고 그의 설득력과 목소리를 독자가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느냐에 문제만 남는다고 본다면 고명섭의 이야기는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지식의 발견>을 통해 나는 고명섭을 발견했다. 녹녹치 않은 독서와 꼼꼼한 내공은 이 책을 통해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은 단순하게 천재성을 발휘한 사람들에 대한 특징을 나열하거나 보통 사람들과 다른 부분들에 대해 찬사를 보내거나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이 아니다. 9명 모두 그들이 살아내야 했던 시대와 상황을 예견할 줄 알았던 혜안과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세르게이 네차예프의 이야기가 특히 흥미로웠으며 동성애자였던 푸코의 삶이 그의 사상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할 수 있었으며 나치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던 하이데거의 행적들은 씁쓸했다. 히틀러나 카프카, 비트겐슈타인의 경우는 다른 책이나 밝혀진 사실들에 대한 정리와 해석일 뿐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이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일 수 있었던 것은 ‘광기’일 것이다. 태생적인 성격이 아니라 생의 어떤 순간, 선택의 시점에서 보여준 무모한 혹은 냉정한 판단과 추친력은 이 책의 성격을 보여준다. 극한 상황까지 자신을 밀어 올리며 내면의 욕망과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그대로 한 편의 영화처럼 역동적이다. 유럽 역사의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히틀러나 신경쇠약에 가까울 정도의 감수성과 내면의 풍경을 보여주었던 소세키는 그 영향력 면에서 비교될 수 없다. 하지만 상반된 인물들이 가진 성장 과정과 갈등 상황을 풀어 나가는 방식들은 우리가 단순히 천재 혹은 천재성을 지닌 인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광기는 천재성의 발현이며 천재는 광기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에 소개된 9명이 인류의 역사에서 주목받아 마땅한 천재들이 아닐 수도 있다. 물론 그 밖에 더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나 훨씬 더 중요한 학문적 성과를 이룩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책 제목에서 밝히고 있듯이 ‘광기’는 불행한 의식이다. 끊임없는 모험과 투쟁을 통해 자신을 이겨냈거나 그 능력의 한계치를 확인한 사람들의 내면은 외롭고 쓸쓸했다.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욕망의 극한을 확인하거나 절망의 바닥을 보여주거나 때로는 작은 희망을 보여주었던 우울한 천재들의 모습은 우리 인류가 걸어온 길에서 만난 특별함으로 기억될 것이다.
시대가 요구하는 천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그 천재성을 길어 올리고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광기에 가까운 치열함으로 즐길 수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나에게 혹은 우리 모두에게 그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일은 지루하고 고통스러울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확인하고도 외면했기 때문에 버려진 천재성이 훨씬 더 많은 곳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070807-0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