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몸들 창비시선 246
조정권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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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살고 싶은 길

1

일년 중 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혼자 단풍 드는 길
더디더디 들지만 찬비 떨어지면 붉은 빛 지워지는 길
아니 지워버리는 길
그런 길 하나 저녁나절 데리고 살고 싶다

늦가을 청평쯤에서 가평으로 차 몰고 가다 바람 세워 놓고
물어본 길
목적지 없이 들어가본 외길
땅에 흘러다니는 단풍잎들만 길 쓸고 있는 길

일년 내내 숨어 있다가 한 열흘쯤 사람들한테 들키는 길
그런 길 하나 늙그막에 데리고 갈이 살아주고 싶다

2


이 겨울 흰 붓을 쥐고 청평으로 가서 마을도 지우고 길들도 지우고
북한강의 나무들도 지우고
김나는 연통 서너 개만 남겨놓고
온종일
마을과
언 강과
낙엽 쌓인 숲을 지운다.
그러나 내가 지우지 못하는 길이 있다.
약간은 구형인 승용차 바큇자국과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이 늙어버린
남자와 여자가 걷다가 걷다가 더 가지 않고 온 길이다.


10년 만에 <떠도는 몸들>이라는 시집으로 돌아온 조정권의 시는 여전히 세상 밖에 시선을 두고 있다. 철저하게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와 우리 주변을 돌아보며 언어의 구석구석을 갈고 다듬지만 시선은 언제나 세상 밖을 주유하고 있는 듯하다.

<산정묘지> 이후 오랜만에 그의 시를 대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감지한다. 시간은 머물러 있는 듯 내면세계의 관심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대로인 채 세월의 깊이만 더해 간다. 현실과 동떨어진 맑고 깨끗한 눈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이 시인의 눈이라고 한다면 조정권은 거리가 멀다. 차라리 인간의 내면을 보지 못해 장자의 눈을 빌어 일상사의 모습들을 무심하게 흘려 보낸다. 그것은 죽음과도 닿아 있지만 결국 존재론적 관점에서 ‘無’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한 발자국만 떨어져 세상을 바라보라.

여행의 경험에서 비롯된 시들은 정갈하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 시들은 슬프다. 생의 본질이 슬픔이라면 조정권은 우울한 정서와 비관적 분위기를 눈물나지 않게 깔아준다. 발에 밟히는, 피부에 묻어나는 비애는 습관처럼 무덤덤해질 수 있는지 반문하고 있는 것같다. 때때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우러르지 말고 발밑에 썩어가는 낙엽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 보는 낮은 시선이 필요하다. 조정권의 시는 그렇게 읽혔다.


200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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