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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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이 주는 힘이 삶의 다양성에 대한 탐구라기보다 힘겨움일 때가 많다. 어렵고 힘든 사람이 많다.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행복하다고 외치며 사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보라. 정말 드물다. 누구나 한가지쯤 정신적 상처를 가지고 살며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생채기를 핥으며 오늘을 넘기고 있다고 보면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상처의 깊이와 상태가 다를 뿐. 그 많은 아픔과 고통들을 단편소설은 헤집어 보여준다. 아프지? 라고 물으며. 혹은 이렇게 훨씬 더 슬프거나 지독한 고독을 가직한 사람도 있으니 엄살떨지 말라고 말한다. 그게 단편의 힘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어차피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스펙트럼을 펼쳐준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화려함보다 그 속에 담겨지는 진실이 가장 근접한 정답이 될 것이다. 삶의 진정성은 삶의 진실의 다른 표현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삶의 진실일까? 그걸 아는 사람이 소설을 쓰겠는가? 그걸 아는 사람이 소설을 읽겠는가?

  성석제도 그 많은 소설가 중의 한 사람이다. 물론 나름의 독특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낸 몇 안되는 이야기꾼임에 틀림없다. <홀림>,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서 보여주었던 웃음은 여전히 그의 특별한 무기가 된다. 고전문학의 전통에서 ‘골계미’라 이름 붙혀진 이 웃음은 새로운 방식은 아니지만 제대로 활용하며 작품과 어울리도록 요리한 작가가 많지 않다. 성석제는 분명 그 웃음의 계보를 잇는 작가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절대 희극이 아니다.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성석제 소설의 재미다. 한번 웃음을 터뜨리면 참지 못하고 계속 킬킬거려야 한다. 나는 특히 그렇다. 단편 ‘만고강산’을 읽는 동안 눈물이 날 정도로 혼자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 남겨지는 기분은 유쾌하지 않다. 그것이 목적인지도 모르지만. 고전문학의 ‘풍자’나 ‘해학’을 버무려 적당히 재미있게 읽고 적당히 뼈가 있는 소설이라고 평가한다면 무엇인가 분명 아쉬운 점은 남는다.

  가상의 지방도시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 형식의 소설들 - ‘만고강산’, ‘저녁의 눈이신’, ‘내 고운 벗님’, ‘소풍’에서는 주로 상황을 보여준다. 우리가 굳게 믿었던 일상에 대한 아이러니와 반전 속에서 안타까움을 읽어낸다. 말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구수한 입말이다. 지방의 사투리가 친근함을 더해주고 마음의 긴장을 풀어준다.

  한 인간에 대한 고찰들 - ‘잃어버린 인간’, ‘인지상정’, ‘너는 어디에 있느냐’, ‘본래면목’에서는 특별한 생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을 맛본다. 그러나 이 소설들의 인물들이 특별한 이유는 주변 인물들에 의해, 그리고 사회 역사적 상황에 의해 특별함이 생겨난다. 현실속에서 하나하나의 사람들을 들여다보면 특별한 인생을 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인간들은 모두 객관적인 상황이나 삶의 형태가 평범에서 벗어나 있다. 평범한 개인을 대표하지 않는 이런 인물 유형은 당연히 우리에게 친근함보다는 거리감과 경계심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특별한 이유에 따라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마련해 준다. 어디 완벽한 인간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다시 더 한번 나를 돌아보고 우리를 생각하는 시간을 찾아봐야 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는 고전소설 ‘채봉감별곡’을 차용하고 있다. 씨줄과 날줄처럼 소설속 이야기와 ‘채봉감별곡’이 뒤섞여 장면과 내용을 이루고 있다. 소설속의 소설과 이 소설은 겉돌지 않고 묘한 조화를 이루며 한 편의 풍경화처럼 수려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을 다듬어내고 있다. 잃어버린 우리들 유년의 윗목을 더듬고 있는듯 하다.

  성석제 소설의 힘이 여기에 또다시 드러난다. 단순한 이야기꾼으로서 재밌는 스토리를 끝없이 쏟아내는 요설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소설가에게 다양성은 분명 큰 힘이 된다. 구수한 입말의 성찬 속에서도 인물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드러나고 있으며 때로는 서정성 넘치는 문장으로 독자들을 달빛아래 고요함으로 이끌어 준다. 대화와 산책을 적당히 뒤섞어 상대를 매료시키는 소설가로 볼 수 있다.

  얼마전, 고민끝에 동국대 교수 자리를 포기한 현실적 용기?, 만용?이 신문 칼럼에 난 적이 있다. 한겨레 북섹션으로 기억되는데 소설에 전념할 수 없을것 같아 안정적이고 사회적 신분이 보장된 교수 자리를 최종 임용단계에서 포기했다는 기자의 말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에서 이야기하듯 어차피 단 한번 뿐인 인생길에서 걸어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남는 법이다. 성석제도 포기한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아니라 지금 걷고 있는 길에 대한 자신??행복으로 가득할 것이라 믿는다. 멀리서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낼 수 밖에 없으나 그의 소설은 또 기다려진다.


2005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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