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31
김윤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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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과 거리가 멀어지는 시들을 대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이유는 두 가지다. 그리움과 동경의 세계에 대한 희망이며 아쉬움이 그 첫 번째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이라는 현실 저편의 다른 세상에 대한 생경함 때문이다. <강 깊은 당신 편지>를 통해 만났던 김윤배의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는 치열한 현실과 거리를 둔 시편들을 묶었다. 삶과 유리된 문학의 효용성이라는 관점으로 시를 평가하는 것은 때로 온당치 못하다. 동전의 양면처럼 어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들이든 나름의 목적과 의미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는 당위성만 확보된다면.

  이 시집의 여행과 관련된 시편들은 가슴을 졸인다.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풍경들과 그 곳에서 마주하는 생경한 감정들은 독자의 가슴에 버겁게 안기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과는 다르다. 내가 느끼고 감당해야하는 안타까움에 공감할 수 있는 여유는 현실 속의 여유와는 다른 것일까?

백령도

제 가슴이 저렇지요 장산곶 앞바다로
휘돌아나가는 물목은 늘 해무에 갇혀
안타까웠지요 이곳 백령도 사곶리에서
냉면 사리를 뽑으며 사리원 생각 불 밝히면
빤히 건너다보이는 장산곶, 붉은 피 새로이 돌지요
검푸른 물목 웅웅 우는 인당 물길 위에
아련한 낮달, 청이를 맞고 보내며 늙은 가슴
설레서 날마다 저 붉은 바위 끝에 서서
해무 지켜보지요 지켜보다 해무되지요

  지켜보다 스스로 바다의 안개가 되어버리는 순간을 경험해 보면 사람은 생의 허무에 시달리거나 현실의 버거움에 지친 사람이다. 바다를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느낌을 길어 올리든 상관없이 특정한 장소에서 품었던 감정을 풀어내는 방식은 시인의 개성이 된다. 그 개성이 독자와 공감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특별한 감정의 일반화 과정에서 범하게 되는 밋밋함이나 특수성 자체가 가지는 거부감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나와의 관계와 상호 소통의 가능성이 열린 것인지가 문제이다.

  공감은 기억과 경험에서 비롯된다. 사람마다 몸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몸이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도 확인되지 않는 범주이다. 공감하지 못한다면 이 시는 읽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기억들은 공통점이 있다. 사소하지만 몸의 기억력은 특별하다. 잊고 있던 순간들을 떠올리는 건 뇌가 아니라 몸이라는 말이 낯설지만 어렵지 않게 긍정한다. ‘몸의 기억은 생각을 앞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인간의 삶이 이성과 감정의 상호 작용 속에서 좌뇌와 우뇌의 결합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기억은 그대로 현실로 재현되거나 현실은 기억으로 치환된다. 그 기억은 아름다움과 결합되어 선택적인 추억이 된다. 그 몸은 절망의 기억이 될 수도 있지만 욕망과 몸의 결합은 살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온도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재능이 없다면 흐르는 물에 제 몸을 맡겨보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몸의 기억

몸의 기억은 생각을 앞선다
나는 생각보다 먼저 자판 두드려
말을 만들고 말을 구부려 생각을
들여다본다 말이 탱탱해지고 말이
벌어지고 말이 말속을 파고들어
비명을 지른다 말의 변형으로 시작되는
몸의 기억은 욕망으로 얼룩진다
말들이 서로를 강간하며
길들여지는 몸의 기억으로
나의 욕망은 평생 피 흘린다
쉽게 길들여지는 슬픈 내 몸
광활한 어둠이어서 새들 깃들이고
진흙 소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다
나를 길들인 것들, 쉽게 나를 걸어나갈 때
생각은 언제나 자판 너머 저만치 오고
몸이 먼저 부르는 몸은
절망의 노래로 온다

  살아가는 모든 과정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것이 혹독하든 행복하든 기다림은 만남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기다림 자체가 행복이고 사랑이고 전체인 경우도 많다. 얼마나 커다란 기다림과 그리움었기에 메마른 시간위로 소금의 결정 알갱이들이 눈에 띌까. 산다는 것에 대한 한숨과 아쉬움 속에서도 우리를 견뎌내게 하는 힘은 여전히 기다림과 그리움에 있다. 살아가가는 모든 것들은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그 끝 모를 시간들을 견뎌내는 것도 삶의 과정일 것이다. 소금처럼 짜디짠 눈물 같은 기다림과 그리움 뒤에 네게로 가는 길이 있다고 해서 너를 포기할 수는 없다. 너로 해서 기다림은 계속된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소금밭으로 변한 호수 위에 내가 섰다
수심 깊이 숨어 있던 그리움들의
부활, 너와 나를 종단하던 시간이
순장의 수수만년을 기다려
수정의 모습으로 솟아오르는 현장
흰 소금의 결정으로 부활한 시간 속에
네가 없다 소멸 위에 꽃 핀
참혹한 시간이 있을 뿐
대지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스며들기를 기다려
네게로 가는 길을 냈을 거다
시간이 작은 수정의 모습으로 부활하기를
기다렸던 거다 기다림이란 저런 거다
죽은 시간 위에 소금의 결정으로 부활하는 사랑
나는 지금 그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07051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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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5-10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전히 그 혹독한 기다림 위를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항상 좋은 글 잘 읽는다는 말씀을 문득 드려봅니다.

sceptic 2007-05-11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의 기다림은 혹독함이 아니라 행복한 기다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31
김윤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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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과 거리가 멀어지는 시들을 대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이유는 두 가지다. 그리움과 동경의 세계에 대한 희망이며 아쉬움이 그 첫 번째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이라는 현실 저편의 다른 세상에 대한 생경함 때문이다. <강 깊은 당신 편지>를 통해 만났던 김윤배의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는 치열한 현실과 거리를 둔 시편들을 묶었다. 삶과 유리된 문학의 효용성이라는 관점으로 시를 평가하는 것은 때로 온당치 못하다. 동전의 양면처럼 어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들이든 나름의 목적과 의미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는 당위성만 확보된다면.

  이 시집의 여행과 관련된 시편들은 가슴을 졸인다.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풍경들과 그 곳에서 마주하는 생경한 감정들은 독자의 가슴에 버겁게 안기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과는 다르다. 내가 느끼고 감당해야하는 안타까움에 공감할 수 있는 여유는 현실 속의 여유와는 다른 것일까?

백령도

제 가슴이 저렇지요 장산곶 앞바다로
휘돌아나가는 물목은 늘 해무에 갇혀
안타까웠지요 이곳 백령도 사곶리에서
냉면 사리를 뽑으며 사리원 생각 불 밝히면
빤히 건너다보이는 장산곶, 붉은 피 새로이 돌지요
검푸른 물목 웅웅 우는 인당 물길 위에
아련한 낮달, 청이를 맞고 보내며 늙은 가슴
설레서 날마다 저 붉은 바위 끝에 서서
해무 지켜보지요 지켜보다 해무되지요

  지켜보다 스스로 바다의 안개가 되어버리는 순간을 경험해 보면 사람은 생의 허무에 시달리거나 현실의 버거움에 지친 사람이다. 바다를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느낌을 길어 올리든 상관없이 특정한 장소에서 품었던 감정을 풀어내는 방식은 시인의 개성이 된다. 그 개성이 독자와 공감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특별한 감정의 일반화 과정에서 범하게 되는 밋밋함이나 특수성 자체가 가지는 거부감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나와의 관계와 상호 소통의 가능성이 열린 것인지가 문제이다.

  공감은 기억과 경험에서 비롯된다. 사람마다 몸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몸이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도 확인되지 않는 범주이다. 공감하지 못한다면 이 시는 읽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기억들은 공통점이 있다. 사소하지만 몸의 기억력은 특별하다. 잊고 있던 순간들을 떠올리는 건 뇌가 아니라 몸이라는 말이 낯설지만 어렵지 않게 긍정한다. ‘몸의 기억은 생각을 앞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인간의 삶이 이성과 감정의 상호 작용 속에서 좌뇌와 우뇌의 결합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기억은 그대로 현실로 재현되거나 현실은 기억으로 치환된다. 그 기억은 아름다움과 결합되어 선택적인 추억이 된다. 그 몸은 절망의 기억이 될 수도 있지만 욕망과 몸의 결합은 살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온도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재능이 없다면 흐르는 물에 제 몸을 맡겨보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몸의 기억

몸의 기억은 생각을 앞선다
나는 생각보다 먼저 자판 두드려
말을 만들고 말을 구부려 생각을
들여다본다 말이 탱탱해지고 말이
벌어지고 말이 말속을 파고들어
비명을 지른다 말의 변형으로 시작되는
몸의 기억은 욕망으로 얼룩진다
말들이 서로를 강간하며
길들여지는 몸의 기억으로
나의 욕망은 평생 피 흘린다
쉽게 길들여지는 슬픈 내 몸
광활한 어둠이어서 새들 깃들이고
진흙 소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다
나를 길들인 것들, 쉽게 나를 걸어나갈 때
생각은 언제나 자판 너머 저만치 오고
몸이 먼저 부르는 몸은
절망의 노래로 온다

  살아가는 모든 과정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것이 혹독하든 행복하든 기다림은 만남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기다림 자체가 행복이고 사랑이고 전체인 경우도 많다. 얼마나 커다란 기다림과 그리움었기에 메마른 시간위로 소금의 결정 알갱이들이 눈에 띌까. 산다는 것에 대한 한숨과 아쉬움 속에서도 우리를 견뎌내게 하는 힘은 여전히 기다림과 그리움에 있다. 살아가가는 모든 것들은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그 끝 모를 시간들을 견뎌내는 것도 삶의 과정일 것이다. 소금처럼 짜디짠 눈물 같은 기다림과 그리움 뒤에 네게로 가는 길이 있다고 해서 너를 포기할 수는 없다. 너로 해서 기다림은 계속된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소금밭으로 변한 호수 위에 내가 섰다
수심 깊이 숨어 있던 그리움들의
부활, 너와 나를 종단하던 시간이
순장의 수수만년을 기다려
수정의 모습으로 솟아오르는 현장
흰 소금의 결정으로 부활한 시간 속에
네가 없다 소멸 위에 꽃 핀
참혹한 시간이 있을 뿐
대지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스며들기를 기다려
네게로 가는 길을 냈을 거다
시간이 작은 수정의 모습으로 부활하기를
기다렸던 거다 기다림이란 저런 거다
죽은 시간 위에 소금의 결정으로 부활하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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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뜬한 잠 창비시선 274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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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시절의 기억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인간의 영혼을 풍성하게 한다. 지나간 모든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은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에 대한 동경이다. 자연과 가장 유사한 모습으로 살아가던 시간들을 객관화하면 순수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삶의 여유와 긍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짤막한 한 편의 시가 만들어 준 미소와 긴 여운이 봄날의 오후를 평화롭게 한다. 영혼의 안정과 휴식은 이렇게 타인의 경험과 기억만으로도 가능하다. 때때로 주어지는 맑은 웃음이 그대서 소중하다.

삼학년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어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어머니가 안 계실 때 누나를 졸라서 마당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국자에 설탕을 넣어 달고나를 시도한 적이 있다. 다 탄 국자는 몰래 땅에 묻어 버리고 탄 내가 집안에 진동해서 결국 들통나고 말았다. 달콤함에 대한 기억과 두근거림이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았다. 수많은 장난을 하면서 좌절과 실패를 겪고 성장통을 앓으면서 어른이 된다. 세월의 이쪽과 저쪽을 건너는 일은 어른과 아이의 세계를 구별하는 일이면서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들여다보는 거울이 된다.

  박상우의 <가뜬한 잠>은 이렇게 과거의 기억들을 끌어낸다. 그 기억들을 우리들 삶의 원형인 농촌 공동체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 다른 시편들에서도 금방 찾아진다. 멈춰버린 공동체의 삶이 오롯이 살아 있는 시집을 읽어가다가 30년대로 돌아간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시집 책날개에 소개된 시인의 나이를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란다. 살아온 시간과 직접적인 경험이 없으면 절대 불가능한 시들이 내는 목소리는 생경하지 않고 멀리 있는 익숙함이다.

버릇

눈깔사탕 빨아먹다 흘릴 때면 주위부터 두리번거렸습니다 물론, 지켜보는 사람 없으면 혀끝으로 대충 닦아 입속에 다시 넣었구요

그 촌뜨기인 제가 출세하여 호텔 커피숍에서 첨으로 선을 봤더랬습니다 제목도 야릇한 첼로 음악을 신청할 줄 아는 우아한 숙녀와 말이예요 그런데 제가 그만 손등에 커피를 흘리고 말았습니다 손이 무지하게 떨렸거든요

그녀가 얼른 내민 냅킨이 코앞까지 왔지만 그보다 빠른 것은 제가 혓바닥이었습니다

  그 순박함과 직설적인 화법은 어른이 되어서도 바뀌지 않는다. 꾸밈없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생활 속의 솔직함이 다른 몇 명의 시인을 떠오르게 했다. 특별한 내용과 낯선 표현은 독자의 기준이 아니다. 시인의 입장에서 가장 편안하고 담백한 이야기들이 쉽게 공감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 옥타브 낮은 목소리로 주변의 사람들과 살아가는 모습을 조근조근 이야기해주는 시인의 이야기가 맛깔스럽다. 건조하고 메마른 언어의 모래성을 쌓아놓은 것이 아니라 흥성스럽고 풍성한 농촌의 모습이 감각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한 숨 가득한 농부의 삶과 사실적인 농촌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곳곳에 숨어 있는 막막함과 답답한 현실이 낭만적인 농촌과는 거리가 멀다. 모르는 바 아니지만, 시에서 아름답게 작위적으로 꾸며낸 것은 아니다. 살아가는 모든 과정에서 우리가 만나는 순간들과 삶의 모습들이 선택적으로 미화되지 않았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박상우의 시가 백석을 떠오르게 하는 이유는 시집 곳곳에 숨어 있다. 안타까운 현실을 드러내기 위한 역설로서 목가적인 농촌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문학과 현실의 관계가 팽팽한 긴장으로만 떨린다면 오히려 역기능으로 보일 수 있다. 부작용을 감내한 참여문학이 아니라면 철저하게 도시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비춰보기 위한 거울의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 박상우의 시다. 그 대척점에 자리잡은 시를 한 편 살펴보면 박상우의 시를 앞으로도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같다.

한로(寒露)

머구실 할머니는 참깨를 널고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놀았다

끝물 고추 따는 날이어서
새참거리를 고추밭으로 실어다주었다
돼지고기에 호박 넣고 지진 찌개와
수수 넣어 지은 뜨끈한 밥을
감나무 밑으로 내고 홍시를 따먹었다

면소재지 농협으로 돈 찾으러 갔다 오니
그새, 고추포대는 밭두렁에 쌓여 있고
아주머니들은 다른 밭으로 가고 없다

나는 산골마을을 지키는 형과 함께
겨우내 땔 땔감을 경운기로 날라 쌓았다

해는 서둘러 먼 산을 넘어가고
경운기 소리 딸딸딸 딸딸딸딸
어둑해지는 길을 요란하게 넘었다
짐칸 가득 고추포대 싣고 오는 길에
하마 갈릴 뻔한 늙은 호박을 따서
고추포대자루 위에 앉혀 마을로 들어왔다

감장아찌 담으려고
따다놓은 먹감은 달게 떫었다

끝물인 줄 알았던 산골마을에 단맛이 들고 있었다


070507-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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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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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표정한 커피색으로 산 전체가 헐벗은 채 미동도 없이 겨울을 견디는 모습을 창밖으로 바라본다. 어떤 형태로든 봄은 바람을 앞세우고 땅 밑으로 온다. 발 딛고 선 이 땅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색의 향연이 아니라 다만 생명의 꿈틀거림을 볼 수 있다면 인간의 오만함을 버리고 자연 앞에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햇볕을 품에 안고 따뜻한 바람을 온몸에 감싼 채 파란 싹을 피워 올리기 시작하는 산은 축제처럼 진달래와 개나리를 준비한다. 진분홍 진달래 빛가루처럼 아름답게 혹은 슬프게 김훈의 <남한산성>이 내게로 왔다.

 이 소설은 꽃이 피고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하는 계절에 읽어야 할 소설이다. 겨울을 참고 견뎌낸 4월의 잔인함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소설이다. 내용의 완결성과 구성의 완고함을 넘어선 자리에 흔들리며 피는 꽃처럼 연민과 안타까움으로 김훈의 소설을 읽었다.

  소설을 시작하면서 작가는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라고 말했지만 내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과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공간에 대한 괴리감으로 고통은 너무 먼 안타까움으로만 읽혔다. 임금과 신하를 나누고 다시 백성을 나누어 작가가 누구의 입장에서 어떻게 역사를 해석하고 이야기하는 것인지 분석하고 싶지 않은 듯하다. 할 일 없이 자전거를 타고 남한산성을 누비는 작가의 모습과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여행하는 작가는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이 소설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 전 작품인 <현의 노래>에서 보여주었던, 우리들 피 속에 흐르는 유전자의 과거를 돌아보는 연작으로 볼 수 있다. 무심한 듯 스쳐지나가는 억겁의 세월 속에서 작은 단서를 발견하고 상상력을 증폭시키고 역사적 사실들을 떠올리는 방식은 소설과 역사의 적절한 만남이나 역사의 소설적 해설이나 여타 화려한 수식을 넘어 켜켜이 먼지 묻은 살아온 시간에 대한 내력을 쓰다듬는 애정 어린 손길이다.

  1636년 병자년 겨울, 12월 14일부터 이듬해 1637년 을축년 봄, 2월 2일까지의 인조를 비롯한 조선의 비참한 일상들을 마치 일기를 적어나가듯 보여주고 있는 이 소설은 김훈의 유려한 문장과 더불어 사실이나 스토리의 흐름보다 먼저 가슴에 와 닿는다. 남한산성의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는 시간은 신산스런 민중의 삶을 닮아내지 못한다는 비판도 어렵고 임금을 중심으로 지배 권력의 모순을 그려낸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것은 이 소설이 지닌 아름다움이자 유일한 단점이다. 늘 반복하는 말이지만 하나의 소설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원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잘 쓴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가자, 나는 인간이므로, 나는 살아 있으므로, 나는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성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삶 안에 죽음이 있듯, 죽음 안에도 삶은 있다. - P. 40

사물은 몸에 깃들고 마음은 일에 깃든다. 마음은 몸의 터전이고 몸은 마음의 집이니, 일과 몸과 마음은 더불어 사귀며 다투지 않는다…… - P. 121


  소설 속에는 항상 인간의 삶이 있다. 당연한 이 진술 속에는 항상 죽음도 깃들어 있다. 성 안에서 청군을 맞아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과 운명들이 아프게 새겨져 있다.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삶을 견뎌내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바라보며 위정자들의 잘잘못이나 백성들의 민심을 들먹이거나 중세의 봉건적 사회제도나 정치를 논할 게재가 아니다. 이 소설은 그냥 남한산성에 관한 아름다운 산문일 뿐이다.

  일과 몸과 마음이 하나인 사람들이 있고 하늘과 중국의 명을 받드는 사람들의 괴리감을 논하는 소설이 아니다. 모두 각자의 상황과 입장에서 삶을 꾸려 나간다. 성안에 갇혀 안에서 열 것인가 밖으로부터 열릴 것인가를 가늠하는 일촉즉발의 상황보다 중요하게 이야기되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길’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임금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그 길을 만드는 방법도 그 길을 걷는 방법도 각자 다르다.

  하지만 결국 그 길은 삶의 길로 모아지고 모진 추위와 치욕을 견뎌내고 새로운 삶의 길을 택한다. 어떤 형태로든 열릴 길을 결국 가장 비참하고 모욕적인 방법으로 열어버린 인조와 조선의 신하들에게 백성들은 참 많은 것을 묻고 싶었을 것이다. 당신들이 말하는 그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고.

밝음과 어둠이 꿰맨 자리 없이 포개지고 갈라져서 날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 P. 179

  김훈의 문장은 여전히 아름답다. 시간의 흐름을 이렇게 표현하는 소설가를 만난다는 것은 축복이다. 문장의 유려함이나 잔재주가 사뜩함으로 비춰질 정도다. 화장이 지나쳐 본 바탕의 얼굴이나 옷 매무시까지 가려버릴 정도다. 차고 넘치는 문장과 내용의 산뜻함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것 같지는 않다. 아름다움이 지나쳐 그 쪽으로 읽어야 한다. 뻔한 상황과 맥락을 읽을 바에야 삼전도의 치욕을 되새겨 무엇을 할 것인가. 진달래 산 벚꽃이 피어나는 계절에 꼭 읽을 만하다.


07050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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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훈이 "남한산성"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05 02:35 
    남한산성 - 김훈 지음/학고재 2007년 10월 31일 읽은 책이다. 올해 내가 읽을 책목록으로 11월에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재미가 있어서 빨리 읽게 되어 11월이 아닌 10월에 다 보게 되었다. 총평 김훈이라는 작가의 기존 저서에서 흐르는 공통적인 면을 생각한다면 다분히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매우 냉정한 어조로 상황을 그려나가고 있다. 소설이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읽었음에도 주전파..
 
 
프레이야 2007-05-02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식의힘님, 이 책을 읽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김훈이 쓰는 역사 소재의 소설을
어떻게 보아야할지... 뻔한 상황과 맥락을 읽을 바에야 삼전도의 치욕을 되새겨
무엇을 할 것인지, 라는 님의 글이 해답을 조금은 주는 것 같습니다.
저보다 완곡하게 쓰셨고 훨씬 마음에 듭니다.^^

드팀전 2007-05-03 0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까 말까 고민중인데..^^ 제가 역사드라마를 진짜 열심히 본게 초등학교 6학년때 본 한국방송의 '병자호란'..관련드라마였어요.제목은 생각이 안나고...삼전도,임경업,효종 등등 쭈욱 이어지는 이야기였죠.그 드라마를 보고 얼마지나지 않아 여주에 가게되었습니다.여주에는 세종대왕의 영릉도 있고 바로 그옆에 효종의 무덤도 있습니다.당시 안내인이 '이 분이 죽지 않고 북벌을 했다면..꿈을 이루지 못한 비운의 왕입니다' (당시 저도 드라마를 보고 그런 마음이 간절했기에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한겨레21에 실린 <남한산성>의 리뷰를 보았지요.항복문서를 누가 쓸 것인가를 가지고 서로 미룬다고 하더군요.결국 최명길이 쓰기로 한다지요.한겨레 기자는 그 상황을 김훈이 자신의 군부정권때의 상황과 오버랩시킨다고 말합니다.김훈은 스스로도 군부정권의 용비어천가를 자기가 다썻다고 말했습니다.대신 보안사에 끌려가는 후배기자들은 때리지말라고..내가 니들이 쓰라는대로 다 써줄테니...(전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불의에 맞서다 모든 걸 잃은 언론인 분들도 계시는데..설령 어쩔수 없었다면 그저 부끄러워하면 될 일을...)
이 책은 슬퍼 보여서 못보고 있습니다.현시점과도 그대로 이입이 됩니다.남한 산성 밖에서 진을 치고 문을 열라고 하는것이 '야만적 자본주의 체제'라고 본다면 말입니다.그 안에서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겠지요....님은 " 이 소설은 그냥 남한산성에 관한 아름다운 산문일 뿐이다"라고 말하셨지만,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 책 들기가 겁납니다.김훈은 모든 것이 소용없다고- 탈정치화해서- 중요한 것은 '민중의 삶'이고 '고통받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그런데 전 여기서 잘 감싼 '모순'이 읽힙니다. 이 책에서 처럼 '청나라'가 들어오든 '일제'가 들어오든 '야만적 자본주의'가 들어오든 '민중'의 삶은 그것들로 부터 독립된 것일까요? 그런 외부적 요인으로부터 자유로운게 '민중의 삶'일까요? 이 둘을 분리시켜 버리는게 과연 옳을까요? 일제시대때도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민중들이 전부 독립투쟁하거나 친일한 것은 아니지요.밥을 먹고 논을 갈고 애를 낳고 (도시에서는) 연애를 하고 근대문화를 즐기고...이런 민중의 생활과 일상사의 영역을 인정하는 것과 이것을 규정하고 있는 틀과 그 안의 삶을 분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 아닐까요?
어찌되었든 돌아가고 돌아가여만하는 민중의 삶이란 것이 김훈의 '허무'와 만나면 모순의 칵테일이되는듯 합니다.
그래서 이 책에 선뜻 손에 가질 않습니다...읽지도 않고 쓴다고 웃으시겠네요^^
제생각이 모나서 그런거겠거니 해주시길....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잉크냄새 2007-05-03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식님의 리뷰와 드팀전님의 댓글을 보니 앞으로도 김훈의 이 소설은 다각도로 읽혀질것 같네요.

sceptic 2007-05-03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잉크냄새님도 읽어보시고 나름의 느낌으로 정리하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드팀전님 댓글을 보고 한참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부분 공감하고 동의하고 또 다른 생각의 여지를 남겨주셔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님이 모나서가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생각들이고 그 오만가지 생각중에 저는 대체로 그저 문학이라는 관점과 테두리 안에 소설을 한정지으려는 의도된 오류라고 변명하고 싶습니다. 김훈이 걸어온 길이나 정치적 성향, 자본주의와 민중에 대한 생각들에 고개를 끄덕였고 저는 보다 왼쪽에 있지 않나 스스로 점검도 해 보았습니다. 리뷰보다 더 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니 오해 마세요. 댓글에 익숙치 않아 조용히 들러 보고 가는 무례도 용서하시고요. 행복한 봄날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라디오 데이즈 문학과지성 시인선 327
하재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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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불며 부는대로 세상에 거스리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은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선악의 가치 판단을 삶의 방식이나 태도에 적용시킬 수는 없지만 대체로 선망하거나 부러워 하는 삶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인위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는 말이다. 문학에 있어서도 같은 방법을 적용해 볼 수 있겠다. 시를 쓰는데 있어 인위적이거나 작위적인 언어는 생경한 풍경을 만들고 목에 걸린다. 모호한 에너지를 사소한 말장난에 쏟아붇는다는 무식한 비난에 상처 입을 수도 있겠지만 그 언어들이 울려주는 깊은 말맛이나 감동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비판에서 시인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시인의 약력을 들여다 보는데 나보다 나이가 어려지기 시작했다. 새로 등장하는 시인들의 경우 처음이라서 혹은 젊으니까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지는 부분과 완고하 저항감으로 심하게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 시들이 있다. 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굳은 마음이 있거나 다양성과 새로움에 적응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휘파람

그림자들이 여러 개의 색깔로 물든다
자전거의 은빛 바퀴들이 어둠 속으로 굴러간다

엄마가 아이의 이름을 길게 부른다
누가 벤치 옆에
작은 인형을 두고 갔다

시계탑 위로 후드득 날아오르는 비둘기,
공기가
짧게 흔들린다

벤치, 공원, 저녁과는 상관없이

  쓰다만 시처럼 허무하게 혹은 ‘상관없이’ 떠도는 언어처럼 하재연의 <라디오 데이즈>는 무심하게 다가온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과 언어로 표상되는 것들 사이의 간극을 찾아 읽는 재미를 선사하기에는 아직 서툴고 시어들 사이의 긴장감이나 긴밀한 알레고리를 찾아내기에도 버겁다. 하지만 ‘휘파람’과 같은 시로 시집을 여는 젊은 시인의 시집에는 겉멋이나 감정의 질퍽함은 묻어나지 않아 다행스럽다.

  세대와 연륜과 무관하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동시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동시에’도 마찬가지다. 한 권의 시집을 통해 하재연이 말하고 싶었던 것들보다는 말하고자 하는 방식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무심함 속에서 일상에 던져진 것들과의 거리감. 혹은 일상속에 틈입된 시간과 공간의 기억들을 떠올리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동시에

그녀는 책장을 넘기고 있었고
남자가 문 열린 차를 타고 벼랑으로 내달았고
고양이가 식탁 위의 커피잔을 건드렸고
양탄자가 약간 들썩거렸고
고장난 시계 초침이 열두 번을 돌았고
소년은 마라톤 결승 테이프를 끊었고
그녀는 행운을 빌었으나
양손이 쪼글쪼글해지고
머리칼이 가늘어지고
커피는 쏟아졌고 양탄자는 젖지 않았고
남자가 녹색 지붕 아래 비행하는 순간

그러다가 문득, 봄날의 당신은 안녕하냐고 묻다가 만다. 그 안녕이 ‘안녕?’인지 ‘안녕……’인지 알 수 없다. 쉼표를 찍고 있지만 마침표보다 완고해 보인다. 안부를 묻는다기보다 작별을 고하는 안녕은 봄날의 인사치고는 서늘하다.

봄날의 인사

당신은 경비행기를 타고

젖소들은 앉았다 섰다
자동차들은 클랙슨을
로즈마리는 바람에 나부끼고

나의 눈동자는 눈동자의 마음대로 굿바이
헬로, 당신의 프로펠러가
내 뒤뜰의 나무를 망가뜨렸답니다

당신은 대기 속에 있지 않고
나는 땅 위에 있지 않고
우리 모두는 우리의 마음대로

당신의 머플러가 나의 구름을
흩어버렸답니다

봄날의 당신은 안녕,

  이별한 모든 것들에 대해, 이별할 모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시인의 자유이다. 고속도로 위에서 우리는 안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지 않고 이별 선언은 가능하다. 다만 그 무모한 가능에 도전하지 않을 뿐이다. 안녕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말을 하는 우리의 자세와 그 말을 듣는 당신의 태도가 문제일 뿐이다. 시인에게 안녕이라는 선언이 시작인지 끝인지 알 수 없으나 나에게는 희망없는 메아리처럼 메마르다.

  때때로 시를 읽다가 답답하거나 허무할 때가 있거든 시인이 아니라 내 잘못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내가 시를 버릴 수 없는 이유다. 하늘이 높고 바람이 푸른 하루다.

고속도로 위에서

우리는 안녕, 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일은 가운데서 만나자,
껌처럼 늘어지는 불빛들을 눈으로 가리며
너는 입술이 삐뚤어지게 웃는다
네 머리칼을 날리며 지나가는 차들의 광속 너머로
붉은 머리를 치켜든 라이트 사이로
너는 뛰어간다
네게는 무대도 코러스도 없다
등을 구부렸다 곧게 펴고서 너는 곧잘
평균대 위에서 선 아이처럼 팔을 벌린다
바람은 너의 냄새를 흩어버린다
네 맥박이 뛸 때만 너는 움직인다
우리는 안녕, 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네 발목은 금방 잡힐 것만 같다
아무 데로도 가지 않는

07042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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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4-23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흩날리는 꽃잎들이 떠오릅니다.

sceptic 2007-04-26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흩날리는 꽃잎보다 노을진 나무가 제 정서에는 와 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