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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31
김윤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3월
평점 :
현실과 거리가 멀어지는 시들을 대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이유는 두 가지다. 그리움과 동경의 세계에 대한 희망이며 아쉬움이 그 첫 번째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이라는 현실 저편의 다른 세상에 대한 생경함 때문이다. <강 깊은 당신 편지>를 통해 만났던 김윤배의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는 치열한 현실과 거리를 둔 시편들을 묶었다. 삶과 유리된 문학의 효용성이라는 관점으로 시를 평가하는 것은 때로 온당치 못하다. 동전의 양면처럼 어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들이든 나름의 목적과 의미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는 당위성만 확보된다면.
이 시집의 여행과 관련된 시편들은 가슴을 졸인다.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풍경들과 그 곳에서 마주하는 생경한 감정들은 독자의 가슴에 버겁게 안기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과는 다르다. 내가 느끼고 감당해야하는 안타까움에 공감할 수 있는 여유는 현실 속의 여유와는 다른 것일까?
백령도
제 가슴이 저렇지요 장산곶 앞바다로
휘돌아나가는 물목은 늘 해무에 갇혀
안타까웠지요 이곳 백령도 사곶리에서
냉면 사리를 뽑으며 사리원 생각 불 밝히면
빤히 건너다보이는 장산곶, 붉은 피 새로이 돌지요
검푸른 물목 웅웅 우는 인당 물길 위에
아련한 낮달, 청이를 맞고 보내며 늙은 가슴
설레서 날마다 저 붉은 바위 끝에 서서
해무 지켜보지요 지켜보다 해무되지요
지켜보다 스스로 바다의 안개가 되어버리는 순간을 경험해 보면 사람은 생의 허무에 시달리거나 현실의 버거움에 지친 사람이다. 바다를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느낌을 길어 올리든 상관없이 특정한 장소에서 품었던 감정을 풀어내는 방식은 시인의 개성이 된다. 그 개성이 독자와 공감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특별한 감정의 일반화 과정에서 범하게 되는 밋밋함이나 특수성 자체가 가지는 거부감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나와의 관계와 상호 소통의 가능성이 열린 것인지가 문제이다.
공감은 기억과 경험에서 비롯된다. 사람마다 몸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몸이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도 확인되지 않는 범주이다. 공감하지 못한다면 이 시는 읽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기억들은 공통점이 있다. 사소하지만 몸의 기억력은 특별하다. 잊고 있던 순간들을 떠올리는 건 뇌가 아니라 몸이라는 말이 낯설지만 어렵지 않게 긍정한다. ‘몸의 기억은 생각을 앞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인간의 삶이 이성과 감정의 상호 작용 속에서 좌뇌와 우뇌의 결합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기억은 그대로 현실로 재현되거나 현실은 기억으로 치환된다. 그 기억은 아름다움과 결합되어 선택적인 추억이 된다. 그 몸은 절망의 기억이 될 수도 있지만 욕망과 몸의 결합은 살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온도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재능이 없다면 흐르는 물에 제 몸을 맡겨보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몸의 기억
몸의 기억은 생각을 앞선다
나는 생각보다 먼저 자판 두드려
말을 만들고 말을 구부려 생각을
들여다본다 말이 탱탱해지고 말이
벌어지고 말이 말속을 파고들어
비명을 지른다 말의 변형으로 시작되는
몸의 기억은 욕망으로 얼룩진다
말들이 서로를 강간하며
길들여지는 몸의 기억으로
나의 욕망은 평생 피 흘린다
쉽게 길들여지는 슬픈 내 몸
광활한 어둠이어서 새들 깃들이고
진흙 소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다
나를 길들인 것들, 쉽게 나를 걸어나갈 때
생각은 언제나 자판 너머 저만치 오고
몸이 먼저 부르는 몸은
절망의 노래로 온다
살아가는 모든 과정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것이 혹독하든 행복하든 기다림은 만남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기다림 자체가 행복이고 사랑이고 전체인 경우도 많다. 얼마나 커다란 기다림과 그리움었기에 메마른 시간위로 소금의 결정 알갱이들이 눈에 띌까. 산다는 것에 대한 한숨과 아쉬움 속에서도 우리를 견뎌내게 하는 힘은 여전히 기다림과 그리움에 있다. 살아가가는 모든 것들은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그 끝 모를 시간들을 견뎌내는 것도 삶의 과정일 것이다. 소금처럼 짜디짠 눈물 같은 기다림과 그리움 뒤에 네게로 가는 길이 있다고 해서 너를 포기할 수는 없다. 너로 해서 기다림은 계속된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소금밭으로 변한 호수 위에 내가 섰다
수심 깊이 숨어 있던 그리움들의
부활, 너와 나를 종단하던 시간이
순장의 수수만년을 기다려
수정의 모습으로 솟아오르는 현장
흰 소금의 결정으로 부활한 시간 속에
네가 없다 소멸 위에 꽃 핀
참혹한 시간이 있을 뿐
대지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스며들기를 기다려
네게로 가는 길을 냈을 거다
시간이 작은 수정의 모습으로 부활하기를
기다렸던 거다 기다림이란 저런 거다
죽은 시간 위에 소금의 결정으로 부활하는 사랑
나는 지금 그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070510-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