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뜬한 잠 창비시선 274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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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시절의 기억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인간의 영혼을 풍성하게 한다. 지나간 모든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은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에 대한 동경이다. 자연과 가장 유사한 모습으로 살아가던 시간들을 객관화하면 순수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삶의 여유와 긍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짤막한 한 편의 시가 만들어 준 미소와 긴 여운이 봄날의 오후를 평화롭게 한다. 영혼의 안정과 휴식은 이렇게 타인의 경험과 기억만으로도 가능하다. 때때로 주어지는 맑은 웃음이 그대서 소중하다.

삼학년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어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어머니가 안 계실 때 누나를 졸라서 마당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국자에 설탕을 넣어 달고나를 시도한 적이 있다. 다 탄 국자는 몰래 땅에 묻어 버리고 탄 내가 집안에 진동해서 결국 들통나고 말았다. 달콤함에 대한 기억과 두근거림이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았다. 수많은 장난을 하면서 좌절과 실패를 겪고 성장통을 앓으면서 어른이 된다. 세월의 이쪽과 저쪽을 건너는 일은 어른과 아이의 세계를 구별하는 일이면서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들여다보는 거울이 된다.

  박상우의 <가뜬한 잠>은 이렇게 과거의 기억들을 끌어낸다. 그 기억들을 우리들 삶의 원형인 농촌 공동체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 다른 시편들에서도 금방 찾아진다. 멈춰버린 공동체의 삶이 오롯이 살아 있는 시집을 읽어가다가 30년대로 돌아간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시집 책날개에 소개된 시인의 나이를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란다. 살아온 시간과 직접적인 경험이 없으면 절대 불가능한 시들이 내는 목소리는 생경하지 않고 멀리 있는 익숙함이다.

버릇

눈깔사탕 빨아먹다 흘릴 때면 주위부터 두리번거렸습니다 물론, 지켜보는 사람 없으면 혀끝으로 대충 닦아 입속에 다시 넣었구요

그 촌뜨기인 제가 출세하여 호텔 커피숍에서 첨으로 선을 봤더랬습니다 제목도 야릇한 첼로 음악을 신청할 줄 아는 우아한 숙녀와 말이예요 그런데 제가 그만 손등에 커피를 흘리고 말았습니다 손이 무지하게 떨렸거든요

그녀가 얼른 내민 냅킨이 코앞까지 왔지만 그보다 빠른 것은 제가 혓바닥이었습니다

  그 순박함과 직설적인 화법은 어른이 되어서도 바뀌지 않는다. 꾸밈없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생활 속의 솔직함이 다른 몇 명의 시인을 떠오르게 했다. 특별한 내용과 낯선 표현은 독자의 기준이 아니다. 시인의 입장에서 가장 편안하고 담백한 이야기들이 쉽게 공감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 옥타브 낮은 목소리로 주변의 사람들과 살아가는 모습을 조근조근 이야기해주는 시인의 이야기가 맛깔스럽다. 건조하고 메마른 언어의 모래성을 쌓아놓은 것이 아니라 흥성스럽고 풍성한 농촌의 모습이 감각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한 숨 가득한 농부의 삶과 사실적인 농촌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곳곳에 숨어 있는 막막함과 답답한 현실이 낭만적인 농촌과는 거리가 멀다. 모르는 바 아니지만, 시에서 아름답게 작위적으로 꾸며낸 것은 아니다. 살아가는 모든 과정에서 우리가 만나는 순간들과 삶의 모습들이 선택적으로 미화되지 않았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박상우의 시가 백석을 떠오르게 하는 이유는 시집 곳곳에 숨어 있다. 안타까운 현실을 드러내기 위한 역설로서 목가적인 농촌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문학과 현실의 관계가 팽팽한 긴장으로만 떨린다면 오히려 역기능으로 보일 수 있다. 부작용을 감내한 참여문학이 아니라면 철저하게 도시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비춰보기 위한 거울의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 박상우의 시다. 그 대척점에 자리잡은 시를 한 편 살펴보면 박상우의 시를 앞으로도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같다.

한로(寒露)

머구실 할머니는 참깨를 널고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놀았다

끝물 고추 따는 날이어서
새참거리를 고추밭으로 실어다주었다
돼지고기에 호박 넣고 지진 찌개와
수수 넣어 지은 뜨끈한 밥을
감나무 밑으로 내고 홍시를 따먹었다

면소재지 농협으로 돈 찾으러 갔다 오니
그새, 고추포대는 밭두렁에 쌓여 있고
아주머니들은 다른 밭으로 가고 없다

나는 산골마을을 지키는 형과 함께
겨우내 땔 땔감을 경운기로 날라 쌓았다

해는 서둘러 먼 산을 넘어가고
경운기 소리 딸딸딸 딸딸딸딸
어둑해지는 길을 요란하게 넘었다
짐칸 가득 고추포대 싣고 오는 길에
하마 갈릴 뻔한 늙은 호박을 따서
고추포대자루 위에 앉혀 마을로 들어왔다

감장아찌 담으려고
따다놓은 먹감은 달게 떫었다

끝물인 줄 알았던 산골마을에 단맛이 들고 있었다


070507-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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