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덩이 창비청소년문학 2
루이스 새커 지음, 김영선 옮김 / 창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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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모두는 하나씩의 구덩이를 파고 있다. 그 구덩이에 무엇인 들어있는지도 모르면서 구덩이에서 뭔가 나올 거라는 희망에 기대어 삽질을 한다. 흔히 우리가 ‘삽질하네’라는 속어는 쓸데없는 짓을 하거나 필요없는 짓을 일컫는 말이다. 생각해 보자. 삽질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우리는 모두 삽질을 하고 있다.

  구덩이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파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은 불안감이 목을 조른다. 그 불안감은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것인지 타인과 비교해서 내 삶을 바라보는 기준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누구나 구덩이를 파고 있다는 사실이다.

  ‘창비청소년문학’ 시리즈의 두 번째 소설로 나온 루이스 쌔커의 <구덩이>는 이현의 <우리들의 스캔들>에서 보여주었던 재미와 감동을 이어가고 있다. 아동출판시장은 많은 출판사들의 관심과 경쟁으로 뜨겁게 달구어져 있지만 청소년을 위한 책들을 살펴보면 사정이 다르다. ‘논술’을 축으로 한국 문학 시리즈나 외국의 고전을 소개하는 시리즈들이 기획되고 있다. 청소년을 위한 창작 소설이나 순수문학은 성장 소설을 중심으로 몇몇 작가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을 뿐이다. 나라말 출판사의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시리즈나 ‘서해 클래식’시리즈 등 출판사들의 기획과 노력 여하에 따라 좋은 책들이 꾸준히 나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같은 맥락에서 ‘창비청소년문학’ 시리즈는 청소년을 위한 문학 작품의 꾸준한 발굴과 작가의 양성에까지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루이스 쌔커의 <구덩이>는 참 재미있는 소설이다. 소설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즐거움이라면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초록 호수 캠프에서 벌어지는 단순한 사건을 중심축으로 과거와 현재가 퍼즐처럼 들어맞는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까지 추리 소설 기법을 사용해서 독자들에게 흥미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도록 하고 있다. 한 눈을 팔거나 다른 생각의 여지를 주지 않는 소설은 일단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다.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무엇엔가 몰두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소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성장소설이면서 사회소설, 추리 소설이면서 모험소설의 형식까지 갖추고 있는 이 소설은 하나의 유형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 청소년을 위한 소설이라고 해서 단순하고 교훈적인 내용으로 채워질 거라는 편견은 여지없이 깨진다. 사회적 관점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태도도 점검해 보아야 하고 법의 잣대와 판단으로 청소년 문제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청소년 시기에 겪어야 하는 정신적인 고통과 열악한 현실을 극복하는 과정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누구나 어려움은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청소년이든 어른이든 고통스런 현실에 묶여있다. 그것을 극복하는 다양한 방식을 안다는 것은 뚜렷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현실 밖에서 얻는 위로와 공감의 시간이 된다. 적극적인 상상력과 그칠 줄 모르는 도전 정신으로 현실을 이겨내려는 주인공 스탠리와 제로의 모험 정신은 나이와 상관없이 즐거운 대리만족의 경험을 선사한다.

  헐리웃 영화에 나옴직한 스펙터클이나 엄청난 상상력은 아니지만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고 현실 상황들이 인과 관계에 의해 정교하게 움직이는 소설은 청소년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지적 호기심을 이끌어 낸다. 어떤 잘못을 했기 때문에 어떤 벌을 받아야하는가에 대한 법과 제도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그들을 이해하는 어른들의 방식과 소외된 아이들에 대한 관심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생각해보고 고민해 볼 수 있는 문제들이 이 소설에는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다.

  현실은 때때로 사막을 건너는 일과 같다. 신기루 속에 희미하게 보이지도 않는 엄지손가락 모양의 산을 찾아 떠나는 제로와 스탠리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좌절하고 방황하는 청소년들의 자화상은 아닐까 싶다. 잃어버린 꿈을 찾아 현실의 일탈을 꿈꾸는 어른들에게도 유년시절의 꿈과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구덩이>를 읽고 나니 갑자기 삽을 들고 나가 내 마음의 크기만한 구덩이를 하나 파고 싶어졌다. 나는 얼마나 큰 구덩이에 갇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지.


07091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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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
수잔 손택 지음, 김전유경 옮김 / 이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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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위한 여러 가지 제안과 방법들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기적인 목적으로 주변 상황을 변화시키고 개인의 안락만을 도모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인간의 이타성은 그 유전적 요소에만 기대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인류 사회에 수없이 명멸했던 사람들 중에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생애와 사상은 치열한 현재가 되기도 하고 아련한 추억으로 남기도 한다. 어렵고 고통스럽게 걸었던 길들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고 즐겁게 거닐 수 있는 산책로나 대로가 되어 버린 경우도 많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그를 떠올리고 책을 통해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된다.

  혁명을 위한 전사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생각과 행동은 편안하지 않은 길을 걸었다. 그 길이 때로 힘겹게 때로 편안하게 보였을지라도 그녀의 생각과 삶의 흔적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준다. 사람은 모두 다원적이다. 일면만이 소개되거나 한 가지로 규정지을 수 없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 사람의 가장 큰 특지이겠지만 또 다른 모습과 상반된 행동과 생각들이 고루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의외의 모습에 놀라기도 하도 흥미롭게 바라보기도 한다.

  <해석에 반대한다>, <타인의 고통>, <은유로서의 질병> 등에서 보여주었던 수잔 손택은 <나, 그리고 그밖의 것들>이라는 소설집에서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1963년부터 1978년까지 발표되었던 단편들을 모은 책으로 작가로서의 그녀를 만나보게 한다. 학자로서가 아니라 작가로서 살고 싶었던 그녀의 희망대로 훌륭한 문학 세계를 구축했지만 작품 외적인 저작들이 불러일으킨 논란과 사회적 관심과 행보 때문에 그녀의 작품을 읽은 사람은 많지 않다. 수잔 손택은 항상 비판적 관점에서 기존의 질서와 틀을 거부했다. 그것이 삶의 질서이든 기득권층이 가진 권력이든 폭력적인 세계 질서든 상관없이 말이다.

  일곱 편의 단편을 통해 작가는 현대 사회를 비판하고 일상의 문제를 다루며 개인적 경험을 고백하고 있다. 맨 앞에 등장하는 단편 ‘인형’은 인상적이다. 자기 복제를 통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그려내지만 일상에서 벗어난 사람의 삶이 결국 행복하다고 말하기 힘들어 보인다. ‘지킬 박사’와 ‘사후 보고’도 마찬가지로 현대인의 일상을 통해 출구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곳으로부터의 탈출과 일탈을 꿈꾸지만 결국 그 한계를 지닌 채 각성의 시간만을 제공할 뿐이다. 뿌리 뽑힌 자아의 모습은 어느 곳에도 쉽게 놓여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미국의 영혼들’과 ‘베이비’는 미국적인 소설이다.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 정신이 은유와 풍자를 통해 드러난다. 우회적인 비판과 적절한 지적은 소설이 아니어도 좋겠지만 또 하나의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재미있는 것은 소설 속에 드러난 작가의 고백들이다. 픽션을 전제로 한 소설에서 작가의 경험을 추론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중국 여행 프로젝트’, ‘안내없는 여행’, ‘오랜 불만을 다시 생각함’과 같은 단편들을 통해 작가의 영혼의 일부를 훔쳐 보았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감성적이고 지적인 태도로 당대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이 발딛고 서 있는 현실을 돌아보는 작가의 태도는 쓸쓸하다. 외로움을 보았다면 작가의 소설을 통한 독자의 지나친 추측일지도 모르겠지만 작가의 눈은 표지 사진보다 깊어 보인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수잔 손택의 소설집을 읽는 것은 그녀가 다른 책들에서 보여주었던 시선과 생각과 또 모습을 보여준다. 누구나 다양한 시선과 감성과 생각을 벼리며 산다. 그것을 표출하지 못하더라도 말로써 때로는 행동으로 보여주기도 하도 꿈을 꾸며 살아가기도 한다. 작가의 진짜 꿈은 이렇게 현실보다 작품 속에서 실현되는 현실은 아니었을까?

  제목처럼 ‘나’와 ‘그밖의 것들’ 사이에 벌어진 간극만큼 현실은 부조리하다. 하지만 작가는 결국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현실을 감싸고 꼼꼼이 살펴보고 애증을 간직한채 그것과 함께 하는 것이 작가가 선택한 길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인 경험과 그 속에서 부딪히는 현실 사이에서 작가는 오랫동안 전해오던 외로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비논리적이고 부조리한 현실과 맞서 싸울 힘과 용기도 결국 삶이라고 하는 굳건한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고 믿는다. 내가 발딛고 선 땅 위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휘두를 수 있는 날선 비판의 칼날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를 위해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소설이 소설로 읽히지 않는 그녀의 작품은 그녀의 영혼을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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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05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잔 손택이군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

프레이야 2007-09-05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었던 책입니다. ^^

sceptic 2007-09-07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택 좋아하시면 한 번 읽어볼만 합니다...^^

 
조대리의 트렁크
백가흠 지음 / 창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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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집을 읽으면 제목과 내용이 뒤섞이고 차례를 다시 훑어보지 않으면 나중에 누구의 단편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백가흠의 소설집 <조대리의 트렁크>는 9편의 단편이 모두 기억나고 다른 소설가의 단편과 헷갈릴 것 같지도 않다. 이 책은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인상적이라는 말은 다르다는 건데 소재나 내용 면에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것들을 선택했다는 말이고 문체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다는 말이다.

  아침마다 조간을 펼치며 심각한 수준으로 무섬증을 느낄 때가 있었다. 사회면을 들여다보는 일이 곤혹스럽고 마치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애써 눈을 돌리고 싶고 외면하고 모른 척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다. 분명, 내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며 우리들의 자화상임에도 불구하고 피하고 싶을 때가 많다. 백가흠은 그것들을 들춰낸다. 덤덤하고 무심하게 들춰낸다.

영화를 보다가 눈을 질끈 감거나 귀를 막고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있다. 그것을 굳이 보여주는 감독이나 돈 내고 보지 않으려 노력하는 관객을 떠올려본다. 비슷한 상황은 아니지만 ‘웰컴, 마이!’를 보면서 나는 책장을 넘기기가 두려웠다. 끔찍한 현실은 소설 속에서 재현되고 실날하게 이면의 감추어진 진실들을 드러낸다. 뉴스에 스쳐지나가는 장면이나 사건의 제목 속에 숨어있던 불편한 현실과 적나라한 진실들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는 성공적이다.

  백가흠과의 첫 만남은 흥미로 이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다. 소설이 보여주는 현실은 아름답고 과장된 꿈을 표현하려는 공간이 아니다. 가볍고 유쾌할 수도 있고 무겁고 진지할 수도 있지만 삶의 진정성이 배어나는 시린 느낌이 드는 소설이 나는 좋다. 손등이 갈라져 피가 나거고 역거운 장면과 상황들이 이어져도 현실과 소설의 공간은 중첩되고 갈라지며 혼란스런 감동과 충격으로 독자들을 몰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마다 다른 진실을 쏟아내며 아파하고 비명을 지르는 소설이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다. 소설을 통해 원하는 것은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현실을 잊을 만큼 매력적인 이야기와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확인하거나 전혀 다른 측면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해 주기도 한다. 철저하게 거짓과 환상의 세계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하더라도 그것이 진실하다면 두 눈 부릅뜨고 한 번쯤 확인할 필요도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상성에서 벗어나 있다. 기준에 따라 ‘정상’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소수자들의 이야기라고 하면 더 적절하겠다. 버려진 아이와 적응하지 못하는 어른, 장애와 동성애으로 이어지는 소설의 면면은 때로 공포영화보다도 그로테스크하다. 장면 자체보다도 상황이 보여주는 비극성과 구조적인 비명이 더 끔찍하게 들린다. ‘웰컴, 베이비!’에 등장하는 엿보는 아이, ‘웰컴, 마미!’의 반지하방에 갇힌 아이, ‘루시의 연인’의 주인공, ‘조대리의 트렁크’에 갇힌 할머니, ‘굿바이 투 로맨스’의 두 여자는 모두 갇힌 사람들이다. 공간적
인 폐쇄성은 단순한 두려움보다 단절의 다른 표현이다. 인간의 존재 가능성은 소통에 있는 것이 아닐까? 서로 공존하며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도전이 백가흠이 도달하고 싶은 세상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믿고 싶다.

  ‘사랑의 후방낙법’이나 ‘웰컴, 베이비!’에서 작가는 ‘사랑’에 대해 유리창에 비친 흐릿한 빗물 수채화처럼 이야기한다. 투명하고 맑은 사랑이 아니라 애매하고 모호한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남의 일일 때만 허용될 수 있다면 그것은 무관심과 다름없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복잡한 삶의 모습들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지만 뒤안길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단순히 좋은 소재로 그치지 말아야 한다. 소설을 통해 현실을 뒤바꿀만한 혁명을 하자는 게 아니라 또다른 시선과 간접 체험을 통한 세상에 대한 통찰력은 키워나가야 하는 것인 아닌가 싶다.

  백가흠의 소설은 열린 세상 속의 닫힌 사람들에 대한 답답한 보고서일지도 모른다. 외부적 시선으로 그들을 들여다보는 관찰자의 시선이 아니라 ‘매일 기다려’의 노인처럼 내부의 순수하고 견딜 수 없는 생의 욕망들이 밖으로 분출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기다려 볼 참이다. 작가의 방향과 다음 책들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든 또 하나의 기다림이 아니겠는가. 구린내 나는 현실과 불편한 진실을 찾아 떠나는 작가의 뒷모습을 바라볼 준비는 되어 있다.


07082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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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능력 문학과지성 시인선 336
김행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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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규원이 보여주었던 언어의 명징성은 서정시가 도달할 수 없는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다. 맑고 투명하며 일상적이고 진부한 의미를 벗어난 시어들 간의 긴장과 비약은 상상력의 한계와 절정을 보여주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명제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든 언어가 보여주는 세계는 유한하며 그 인식의 한계는 개인의 앎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데 공감할 수 밖에 없다.

  김행숙의 시집 <이별의 능력>은 <사춘기>에서 보여주었던 발랄함과 형식들을 조금 더 밀고 나아갔다. 언어는 손에 잡히는 대상과 사물 그리고 세계에 대한 명명법이다. 존재의 형식보다 내용이 앞선다. 그러고 나면 눈에 보이는 구체적 대상들이 아닌 세계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해진다. 영화 <메트릭스>에서 보여주었던 가상 현실의 세계는 인간의 상상이 빚어낸 극한의 세계다. 장자의 ‘호접몽’이든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든 상관없이 명칭과 해설이 아니라 만져지지 않는 혹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부단한 낚시질.



  발이 미운 남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나의 무용수들. 나의 자랑.

  발끝에 에너지를 모으고 있었다. 나는 기도할 때 그들의 힘줄을 떠올린다.

  그들은 길다. 쓰러질 때 손은 발에서 가장 멀리 있다.


  표제시로 제시된 ‘발’은 이 시집에서 보여주는 세계의 단면이다. 구상과 추상의 간극과 대립은 그림에서 보여지는 부분과 애써 설명하고 싶은 부분들에 대한 연민이다. 발을 보며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보여주거나 만들어가는 상상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시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독자와의 공감 여부를 떠나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시의 한 단면이라면 김행숙의 시는 존중되어야 한다. 언어가 펼쳐 보여주는 찬란한 프리즘의 세계처럼 화려하게 혹은 날카롭게 사물과 세상의 이면들을 속속들이 집어내는 감각은 시인 고유의 영역이다. 좋다거나 싫다는 감상 이전의 문제이다. 다만 소통의 문제가 남는다.

  단일한 사물과 사건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 양상과 감정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지만 언어 실험이나 이미지의 극한을 보여주는 시를 독자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독자, 즉 문학 소비자를 염두 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달라지겠지만 우리가 들여다보고 상상할 수 있는 세상은 그리 넓고 크지 않다. 독자와의 공감이 시의 미덕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김행숙의 시들은 나름의 빛깔과 향기로 빛날 수 있다.

비에 대한 감정

그날 비는 감정적으로 내렸다

젊은 코끼리가 온 힘을 모아 코를 휘두르듯이
초목이 출렁이듯이

마침내 낙타가 해진 무릎을 꺾고 아무것도 담지 않은 눈빛을 던지듯이
낙타의 등에서 기절초풍할 비단이 펼쳐지듯이
중국 도자기가 굴러 떨어지듯이

그날 자동차들은 비단에 휘감겨서 아름다웠다
커브 길에서
상욕이 튀어나왔다

그날 나는 감정적으로 비와 대립했다
함께 하늘을 올려다본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을 쳤다
아, 입을 벌렸다

코끼리의 위대한 코에 감겨 공중 부양된 저 아이들이 꺄르르 꺄르르 웃고
마침내 앙, 울음을 터뜨리듯이

그날 비는 감정적으로 내렸다
마지막까지 내렸다


  장마 기간에 내린 수많은 빗방울 속에 나는 무엇을 보았으며, 어떤 장면들 보아왔는지 생각해 보았다. 시인의 시선과 비교하자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문제이며 전달의 문제로 접근해 보자는 것이다. 비에 이입된 화자의 감정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경험을 공유할 수도 없다. 객관화 된 표현이나 매끈한 표현들을 원하는 독자들의 입맛을 달래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관된 세상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손과 발의 거리처럼 닿을 수 있으나 가장 먼 거리에 놓인 신체의 부분들처럼 그것들의 연장선에 놓인 세계는 닿을 수 없는 거리만큼 생경하고 이물스럽다. 시에 대한 평가와 영역에 한계는 없다. 그것들이 놓인 자리와 앞으로 놓일 자리만큼 다양하고 풍요로움을 기대해야 한다. 그래도 여전히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더 휘저어라. 나는 충분히 섞이지 않았다. 나는 생각 못한 알갱이처럼 남아 있어서 목에 걸리고

  길고 외로운 팔을 욕조 밖으로 늘어뜨리는 것이다. 당신의 목욕시간은 너무 길어, 당신은 소리치는 것이다.

  아주 길어져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나는 소리치는 것이다. 식사시간보다 목욕시간보다 더 길어지면 긴 것, 연약한 것, 갈 곳 없는 것, 사라지는 것,

  그리고 극단적인 기침이 어디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 사람 많은 곳에서 사람 아닌 것처럼 구부리고

  구부렸다, 폈다, 구부리는 운동 속에서 나는 계속 되지 않는다. 나는 불연속적으로 사람들 속으로 사람들을 떠난다.


0708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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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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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위기는 ‘요즘 애들 큰일이다’처럼 식상한 우려와 시대마다 반복되는 장난일 뿐일까?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작가들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대중성을 확보했다고 해서 소위 말하는 훌륭한 작가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대중매체를 통해 엄청난 광고와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책을 파는데 열중하는 출판사를 믿을 수는 없다. 2010년쯤 되면 또다시 지난 10년간의 문학적 성과와 문학계를 정리하는 특집들이 계간지에서 마련될 것이고 그 흐름을 주도했던 순간들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더듬거리는 작품들이 될 것이다.

  세태를 반영했던 수많은 소설들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가 어떠했든 정이현의 <오늘의 거짓말>은 <낭만적 사랑과 사회>만큼 별 볼일 없다. 80년대에서 90년대 등장한 여성 소설가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다. 저마다 날선 칼날과 비판적 시각이 있었으며 부드러운 감수성과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여류’라는 수식어 자체가 주는 차별적 시각을 불식시켰고 문학적 성과는 그저 작가의 입장에서 정리되기에 이르렀다.

  소설이 단순히 독자 개인의 취향에서 오호를 논하고 내용이나 형식을 지껄이는 것으로 치부된다면 독자의 반응은 물론 다양하게 살필 필요도 없다. 하지만 가볍고 무거움을 떠나 소설이 주는 진정성은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독자에게 오해될 소지가 충분하다. 정이현의 소설들은 동시대인의 초상들을 전면에 배치한다. 하지만 전형성은 상실되고 오히혀 밋밋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가득하다.

  작가의 장점이라면 세태를 읽어내는 감각과 현재성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범한 모습들 속에서 잊혀 질 수 있거나 스치기 쉬운 부분들을 단면을 적절하게 제시한다. 그것에 대한 쓸데없는 진지함과 지나친 감상을 걷어낸다. 때때로 가볍고 경쾌한 발걸음은 독자들을 편안하게 하고 냉소와 허무에 가까운 시선들은 인물이나 사건들을 뒤집고 비튼다. 하지만, ‘어금니’의 화자나 ‘위험한 독신녀’의 채린 같은 인물들은 굳이 이 시대를 대표하지도 특별한 감동도 가질 수 없는 평범한 소품처럼 보인다.

  전면에 배치된 ‘타인의 고독’, ‘오늘의 거짓말’, ‘비밀과외’ 등은 전작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두 번째 소설집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채 제 자리를 맴돌고 있으며 다음에 대한 기대와 흥분을 일으키지 못한다. ‘삼풍백화점’이나 ‘익명의 당신에게’ 그리고 ‘어두워지기 전에’는 소재의 특별함이나 접근 방식이 독특해서 눈에 띠긴 하지만 긴장감도 없고 여운도 남지 않는다. 단막극 드라마나 방송 작가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충분히 갖춘 작가의 단편들은 소설이 주는 특별함을 찾을 수 없어 난감했다.

  가벼움과 무거움, 냉정함과 강렬함이 부족하고 전복적이지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지도 않는 소설이 이제 재미없어지는 것은 개인적인 성향의 변화인지 소설 장르의 위기인지 알 수 없으나 좀 더 자극적이고 재밌는 소설을 기다리는 독자들의 이기적 욕망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설령 나 만의 욕망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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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03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핫!
달콤한 나의 도시를 읽고는 이거 정말 아니구나 싶어서
읽기를 보류하고 있었습니다.
정이현 작가에 대해 뭔가 과대평가가 있는 걸까요? :)
잘 읽었습니다 ^^

프레이야 2007-08-03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작가의 작품을 읽지 않았지만 대개의 리뷰들은 호평이더군요.
님의 날카로운 비평이 좋은 채찍질이 될 것 같아요. 추천합니다.

sceptic 2007-08-07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고양이님, 혜경님 주관적인 평가와 해석이니 다른 사람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겠지만...저는 많이 아쉬웠습니다...

오월의시 2007-08-12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난 느낌이 저와 다르지만, 그래도 이 리뷰, 정말 잘 봤습니다.^^ 추천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