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의 제국 산책자 에쎄 시리즈 1
롤랑 바르트 지음, 김주환.한은경 옮김, 정화열 해설 / 산책자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텍스트는 이미지를 ‘주해’하지 않으면, 이미지가 텍스트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나에게는 각각이 일종의 시각적 불확실성의 시초이며, 선에서 깨달음이라 일컫는 의미의 상실과도 비슷하다. 텍스트와 이미지는 서로 엇갈리면서 몸, 얼굴, 글쓰기라는 기표를 확실하게 순환시키고 교환하며 그 안에서 기호의 퇴각을 읽으려 한다.

  구조주의자가 쓴 일본 여행기. 롤랑 바르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다면 이 책은 지루하고 따분한 텍스트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롤랑 바르트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책을 읽을 필요도 없다. <기호의 제국>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간극을 보여주는 훌륭한 교과서로 보인다. 위에 인용한 글에서 보여주듯 텍스트는 이미지를 주해하지 않고 이미지가 텍스트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1970년에 쓴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은 프랑스식 에쎄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편 한 편의 글이 모여 전체를 구성하고 한 권의 책으로 일본에 대한 저자의 이미지를 완성한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교차되어 있어 이 책은 입체적인 감각으로 독자들에게 호소한다. 낯선 언어가 주는 기표와 기의는 우리에게 어떻게 전달되는가. 번역을 통해 전달된 그 의미는 왜곡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며 생성되기도 한다. 저자의 이야기가 얼마나 전달되었는지 나도 알 수가 없다. 내 안에서 생성된 의미와 전달된 이미지가 다를 수 있겠지만 소통의 문제가 아니므로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은 여행에서 담아낸 생소함과 일본의 이미지들이 저자에 의해 다시 재구성된다. 일본이라는 낯선 공간의 문화를 읽어내는 여행자에게 모든 이미지는 텍스트가 되었다. 그것을 하나 하나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대상 자체를 선택하고 그 특징을 드러내는 체계 자체가 이 책을 구성하고 있다. 선별되는 것은 저자의 몫이다. 무엇을 볼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대상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

  당연하게도 프랑스 사람에게 일본을 전달할 목적으로 쓰여졌겠지만 당시의 독자들은 좀 어리둥절 했을 법하다. 전혀 낯설고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소개서로는 너무 불친절하다.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며 번역된 글이지만 훨씬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만한 내용도 많이 있다.

  일본은 동양이다. 그 안에 서구지향이 있을지 몰라도 서양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이쿠를 인용하여 간결함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여주려는 이미지를 통해 긴 여운을 만든다. 그들의 음식, 언어, 얼굴, 파친코, 젓가락 등 눈에 보이는 대상에 대한 이미지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눈에 보이는 것 자체가 바로 글쓰기의 대상이 된다. 보는 것이 쓰는 것이다.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둘은 하나가 되어버린다.

  하나의 개념은 상대적인 구조 속에서만 그 의미를 드러내고 전제 구조의 틀에서 벗어나면 모든 언어와 표상들은 기호에 불과하다. 그것이 의미를 지니려면 전체적인 맥락안에서 대상의 위치와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것이 언어학적이든 철학적이든 문화인류학적이든 구조주의든 탈구조주의든 개념과 대상에 대한 인식 틀로서 완벽한 것은 없다. 롤랑 바르트가 일본을 어떤 방식으로 혹은 어떤 의미로 ‘기호의 제국’이라고 불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비교 문화적 관점에서 일본을 서구와 비교하지 못했고 타인의 시선으로 혹은 낯선 이방인의 관점으로 그것을 신비화, 기호화했을 뿐 그 심층적 의미를 읽어내지는 못한 듯하다. 대중적 관점에서 저자의 글쓰기와 일본에 대한 시선은 신선한 의미 이외에 다른 의미로 읽히지 않는다.

  텍스트는 풍부한 상상력과 환상의 세계로 독자들을 이끌어 낸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교차되면서 저자의 시선과 독자의 의미는 상충되고 저자의 말은 독자가 받아들인 이미지와 뒤섞인다. 그것을 하나의 기호로 해석하든 문화로 읽어내든 의미를 어떤 식으로 풀어내든 불확실성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의미가 면제되고 개념이 모호해진다면 기호나 구조가 또 다시 무의미해진다. 일본을 텍스트로 표현하려던 저자의 시도는 독자에게 무의미해지고 하나로 규정하려는 구조와 틀은 이후에 또다시 탈구조주의를 배태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 혼란의 틈에서 어리둥절할 뿐이다.

  대상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놓여 있고 이미지는 다르게 인식되더라도 그것을 보는 눈은 달라진다.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될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눈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아니 나의 눈으로 말이다.

  선명한 이미지와 명료한 의미는 여전히 메트릭스 세계 너머의 이야기라고 할 지도 모르는누군가에게 의미가 없어 보인다. 소통과 전달의 문제에서 벗어나 기호는 여전히 모호함과 신비함으로 가득한 인생과 유사하다. 그것이 거기에 놓여 있거나 그렇게 표현된 것은 어떤 의미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다른 해석과 의미부여가 왜곡된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는 비극적 인식만이 머리 속에 가득하다.


081130-1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