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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인의 만찬 ㅣ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2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 / 해문출판사 / 1990년 3월
평점 :
해문에서 나온 80권짜리 애거서 크리스티 문고판 전집 보유고가 65권에서 멈춘 지 한참 된다. 나머지 15권도 사야 할 텐데, 다른 책들에 밀려서. 올해 안에 맘먹고 살까? 틈틈이 곶감 빼먹듯 한 권씩 빼다가 읽었는데, 한동안 안 읽었더니 내가 어떤 걸 읽고 어떤 건 안 읽었는지 헷갈린다. =.= 그래서 전집 1권부터 짚어 나가서, 분명히 읽은 건 건너뛰고,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아리송하면 그냥 읽기로 했다. 아리송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보니까 분명 전에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결말과 결말에 이르는 과정은 까맣게 생각이 안 난다. 그런 건 그냥 끝까지 읽는다.
그래서 이제 전집 22권인 “13인의 만찬”까지 왔다. 추리소설 분야에서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것을 주로 읽다 보니 이제 크리스티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에 익숙해졌는지, 3분의 1쯤 읽다 보면 범인이 누군지 짐작된다. 중간에 혹시 내 예상이 뒤집히나 싶은 상황이 나오지만, 역시나 결론에 이르면 내 짐작이 맞다.
그런데 이 책 151쪽에서 탐정 포와로가 헤이스팅스 대위에게 이렇게 말하지 뭔가.
“아니, 아니야. 결코 그런 의문이 아니란 말일세. 그게 문제라고 할 수 있는가, 응? 자네는 마치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줄거리나 근거도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등장인물들을 모조리 의심하려고 덤비는 사람들과 같구먼. 언젠가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서도. 그것은 아주 특이한 사건이었지. 내 조만간 그 이야기를 들려줌세. 그것은 내 자랑거리의 하나였다네. (후략)”
하하, “줄거리나 근거도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등장인물들을 모조리 의심하려고 덤비는 사람”이라니. 바로 나로구먼. 머쓱해졌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독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범인이 누구인가, 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 범인인가, 가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포와로가 등장인물들을 모조리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적이 있다며 “아주 특이한 사건이었지. 내 조만간 그 이야기를 들려줌세. 그것은 내 자랑거리의 하나였다네”라고 하는데, 이건 바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말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발표 연도를 확인해 보았다. 작가는 이 책, “13인의 만찬”을 1933년에 발표하고 바로 이듬해 1934년에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발표한다. 하하, 애거서 크리스티는 가끔 자기 작품에 다른 작품에 대한 암시를 집어넣는다.)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포와로나 미스 마플은 항상 알리바이나 어떤 물증보다 바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하다고 강변한다. 범죄는 이른바 심리학의 문제라면서. 그런데 가만 보면 작가는 탐정을 통해 그 점을 강조하는 한편, 두뇌가 평범한 화자를 내세워 읽는이로 하여금 등장인물의 성격을 자꾸 오해하게 만든다. 그게 바로 작가와 독자 간의 게임이겠지.
그리고 포와로와 미스 마플은 상식적인 통찰력도 강조하는데, 사실 오래 전 외국에서 쓰인 소설 속의 상식은 오늘날 우리의 상식과 많이 다르다. 외국 독자는 이 점에서 손해를 본다. 이를테면 “13인의 만찬”에서 포와로는, 금니를 박는 건 “치과계에서조차 희망 없는 구식 처방으로 취급”한다고 했는데, 지금 나도 금니가 있단 말이다. ㅠ.ㅜ 영국에서는 1930년대에 이미 구식으로 취급했던 금니를 1990년대에 한국에서는 처방했단 말이다.
번역은, 대체로 읽기에 괜찮지만, 썩 매끄럽지는 않다. 그리고 영국국교회(성공회)를 “영국 카톨릭”이라고 얼토당토않게 표현하기도.
미국판 제목은 13 at Dinner, 영국판 원제는 Lord Edgware D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