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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이후 - 역사를 시사로, 시사를 역사로 읽는 깁기협의 남북관계사
김기협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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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남북미 만남으로 한반도 평화 분위기가 물오르고 있다.

<냉전 이후>는 21세기 복잡 미묘한 남북 관계사를 상세히 그리고 재미있게 서술하고 있다. 남한의 북한을 대하는 태도가 정권마다 어떻게 달랐고, 그 방식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가령 1968년 북한과 비밀접촉을 유지하면서도 남한의 북한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사건이 바로 '금강산댐 소동'이었다. 금강산댐은북한에서는 임남댐이라고 부른다. 1980년대 초반부터 공사를 시작한 이 댐의 목적은 수력발전이었고, 농 공업용수, 생활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안기부의 초기 분석도 이 점을 주목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는 북한의 '수공' 가능성을 부각했다. 당시 안기부가 어떻게 정보를 왜곡하고 과장했는지는 1993년 김영삼 정부의 '5공 청산' 과정에서 속속들이 드러났다. 1993년 감사원의 감사 결과에 따르면 안기부는 저수량을 최소 70억 톤에서 최대 200억 톤으로 과장했다 (미국은 37억 톤으로 계산). (45-46쪽)


1970년에서 1975년 사이에 남한의 수교국이 81개국에서 93개국으로 늘어나는 동안 북한의 수교국은 35개국에서 88개국으로 늘어났다. 외교 경쟁의 승리자는 북한. 1970년대 초의 남북 대화는 피차 전략적 동기에 따라 접근한 것이었고, 상대방과의 절충에 따라 길을 나가겠다는 진정한 대화의 의미는 갖지 못했다. 남한에서는 1972년 10월 유신 쿠데타가 일어나고 북한에서는 1972년 12월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했다. 남쪽의 유신이나 북쪽의 사회주의 헌법이나 모두 체제 강화를 노린 것이었지만 억지스러운 면은 유신이 더했다. 공산권 국가들이 어느 정도 사회중의 정착 단계에 들어설 때 건국 초기의 인민 민주주의 헌법을 사회주의 헌법으로 바꾸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북한의 경우 김일성 개인 숭배와 주체사상의 강화 현상이 덧붙여지기는 했지만, 기본 축은 사회주의 체제의 안정에 있었다. (81쪽)


북한은 1992년 4월 헌법을 개정에서 남북관계와 대외관계 유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과거에는 '평화공세'라는 것이 있었다. 내심 평화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위에서 마음에 없는 화해 제안을 남발하는 선전공세를 말한다. 북방정책을 일종의 평화 공세로 여긴 세력이 남한에 있었다. 반북 세력. 북한과의 대화를 반대하거나 대화를 승인하더라도 극히 엄격한 태도를 주장하는 입장. 

박철언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임동원 피스메이커
홉스봄 극단의 시대
김계동 북한의 외교 정책과 대외 관계
황장엽 회고록
김성보 북한의 역사
이종석 북한의 역사2
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
김해원 북한의 남북정치협상 연구
자오팅양 천하체계
세종연구소 묵한의 당, 국가기구, 군대
한완상 한반도는 아프다
이종길 두 개의 한국

목적과 비전이 다르면 통일 업무를 추진하는 데 지장이 올 수 있으니 더 신중히 고려했어야 했다. 한완상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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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 - 한국인이 알아야 할
함규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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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오.


이 책에서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학창 시절, 19세기 말 20세기 초, 너무 많은 이름과 사건과 일자들이 있어 제대로 공부를 못한 것 같다.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물론 기억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사건과 사건 사이의 맥락, 인물들의 관계, 거시적 그림 등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참 엇갈린 평가가 많은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 하지만 그 시대, 중화세계관에서 제국주의로 전환하는 블랙홀 속에서 '아는 만큼' 대응한 불운의 왕. 개인적으로 '소시오패스' 흥성대원군 밑에서 통치하다가, 명성황후 시해, 아들 독살 등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인생을 산 왕.


그 시대에서 '시민혁명'이라던지 민주주의를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광무 개혁 등 현명하지 못한 정책들을 펼치기도 했다. 동학교도와 독립협회를 수용했으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청과 러시아에 기대 보기도 하고, 중립국화도 추진해 보기도 했다. 국제법적 외교적으로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을 선언하고 미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의 힘을 보조수단으로 균형을 유지한다는 계획, 하지만 러시아는 1900년 이후 극동에서의 입지가 튼튼해지면서, 한반도에서 전보다 적극적으로 이익을 확보하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왜 영국은 일본과 손잡았을까? 만약 러일전쟁 때 영국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일본이 이기지 못했을 텐데. 영국이 수에즈 운하 통과를 불허했기 때문에 발틱 함대는 멀리 희망봉을 돌아오는 항로를 택해 동해로 진입하느라 몹시 지친 데다 중요한 시간을 소비해버렸다. 그리하여 1904년 5월에 도고 헤이하치로 연합함대에 격파되고 말자, 이제 러시아의 패전은 유력해 보였다. 승기를 잡은 일본은 고종에게 더욱 고압적인 자세로 나왔고 한일협정서가 체결되었다. 


고종은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활동이 의병을 몰래 후원하고 외국으로 밀사를 파견하는 일이었다. 최익현 밀조에서 의병 활동을 지원했다. 최익현은 하루 40전을 병정들에게 꼬박 지급했다. 무기 구입 비용 등은  황실 금고에서 나왔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도 을사조약 무효 선언서를 1905년 보냈지만 친일파인 루스벨트(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에 매료되었다고 함)는 이를 무시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를 파견하고 이준과 이상설은 이위종의 통역을 통해 한국인의 울분을 여러 나라 대표들 앞에서 토로했다. 이위종은 유창한 프랑스어로 3시간 넘게 연설했다. 하지만 이준은 화병으로 헤이그 땅에서 숨졌고, 이상설과 이위종은 해외로 망명했다. 

이로 고종은 강제로 양위조서를 가필한 것으로 되어 순종 즉위식에 고종도 순종도 참석하지 않아 일제가 대리인을 내세우는 해프닝이 일어난다.


1919년 1월 20일, 고종의 죽음으로써 31운동이 촉발되었다. 마지막 저항이었을 것이다. 대한 독립 만세! 



광무개혁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기에는 꺼려지는 부분이 여럿 있다. 첫째, 그것은 국가가 정상적인 계획과 실행 과정을 거쳐 진행한 개혁이라기보다, 황재의 개인 사업과 마찬가지로 추진된 개혁이다. 모든 개혁은 국왕 직속 황실업무 담당기관인 궁내부에서 관장했다. 철도를 놓고 학교를 세우고 군함을 매입하는 등 국가의 중추 기능을 담당한 것이다. 광무개혁이 진정으로 근대 국가로 탈바꿈시키기위한 개혁이 되려 했다면 당시 경제구조인 토지 제도를 근대식으로 바꾸고, 공업과 무역발달을 위해 공장 건설, 무역회사 설립과 재정 지원 등에 대규모 투자가 이뤄졌어야 했다. - P266

1900년 의화단 사건. 무술을 내세운 정치집단 의화단과 그들에 동조하는 청왕조가 북경에서 외국 공관원들을 포위 압박하자, 그들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일본 8개국이 연합군을 구성해 북경을 공격, 점령하고 의화단원들과 일반 중국인들을 살육했다. 이 사건은 청왕조가 결정적인 몰락의 길로 접어드는 계기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러시아가 만주를 군사 점령하고 사건이 끝난 후에도 철수하지 않는 계기를 제공했다. 결정적으로 일진회가 매국노 집단으로 낙인찍히고 손병희도 천도교를 따로 만들고 일진회에서 이탈하여 독립운동 대열에 동참하게 되는 분기점이 1905년 11월 17일 2차 한일협약 즉 을사늑약. - P271

일진회의 뿌리는 강제 해산된 독립협회에 있었으며, 1904년 12월에 일진회와 합병한 ‘진보회‘의 경우는 동학교도들이 주축이었다. 특히 진보회의 가담으로 일진회는 서울의 소수 개화론자 단체를 벗어나 지방에서 상당한 세력과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손병희도 적극 참여. 봉건적 신분제의 모순과 세도 정치 타파, 서양 세력의 침투에 저항하는 것. 그래서 친일을 하게 됨. 동학교도들은 삼남 출신이 많지 않았고 평안도를 비롯한 북한 출신들이 두드러졌다. 송병준도 함경도 출신. 이들이 과거 농민전쟁에 거의 참여하지 않음. 조선왕조 수립 후 지역적 차별을 받음. - P279

영국인 베델 Bethell 1904년 대한매일신보 창간, 고종이 운영 자금 댐. 순우리말과 영문 두 가지 버전이 나옴.
고종은 과거 황국협회 내세워 독립협회 견제, 일진회의 도전에 국민회와 보안회 조직.
을사오적 : 박제순, 이완용, 권중현, 이지용, 이근택 -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느낌. 이지용과 이완용 집이 불탔고, 이근택과 박제순은 피습당했다. 박제순은 암살을 간신히 면한 다음 하야시 공사에게 달려가 자살하려다 경찰들이 붙잡는 바람에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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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테러범, 김현희
신성국 외 지음 / 공감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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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건. 당연히 '폭파'라고 생각했는데 '실종'이라니. 이 사실부터 충격이다. 승객 95명, 승무원 20명.


책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신성국 신부와 문답 형식으로 사건 알아가기, 2부는 석박사 논문을 KAL858기로 쓰면서 운명처럼 이 사건과 함께한 박강성주 박사, 3부는 김현희 재판기록에 대한 검토와 유사한 '조작사건' 에 대한 검토를 하는 재희준 변호사, 4부는 홍강철 북한 전문가의 김현희 진술에 대한 일대일 반박(엄청 자세하다)


새로 알게 된 사실:

 1. 바레인 경찰은 김현희가 나리타 공항을 출국했다는 사실 밝힘

 2. 보험 문제: 영국 로이드 보험사가 보험 자료 공개하지 않음

 3. 유엔 안보리 대북규탄결의안 부결 : 미국만 한국 편. (북한을 테러지원국 리스트에 올림) 

이승복 반공 영웅 25쪽
무지개 공작이 알려진 것은 2006년 8월 1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사건 재조사 과정에서 처음 공개. 목적: 11월 29일 버마 상공에서 폭파 실종된 대한항공 여객기 사건이 북괴의 테러 공작임을 폭로, 북괴 만행을 전 세계에 규탄하여 북괴를 위축시키고 국민들의 대북 경각심과 안보의식을 고취함으로써 가능한 대선 사업 환경을 유리하게 조성. 실행시기 1987년 12월 2일부터 1988년 5월 13일까지 (47쪽)

보험금과 보상금 문제
2005년경에 대한항공사에 보험금을 청구한 사실이 있는지, 보험회사의 사고 실사 내용 요구함. 하지만 답변 없음.7천 9백만원 상당. - P79

전두환, 노태우, 정형근, 최병렬, 김기춘(검찰총장) 107쪽
탈북간첩 조작 사건들: 중앙합동신문센터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로 개칭)
대성공사 : 영등포구 신길동, 군 정보사령부 중앙신문단, 2008년 10월 국정원장이 설치, 운영 중앙합동신문센터(합신센터, 양지공사), 탈북자를 최장 180일까지 수용가능. 136쪽

- P107

김현희는 김승일은 자기는 이미 다 산 몸이며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몸을 지탱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번 임무가 마지막으로 이번만 성공하면 된다고 말했다고 진술함. 당시 김승일의 건강상태는 겨우 몸을 지탱할 정도로 나빴다. 밥 한두 숟가락을 먹고도 휴식을 취해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건강상태가 나빴단 것이다.
-> 김승일은 당시 70세 허약한 노인. 북한 공작원 선발원칙에도 어긋난다. 북한이 건강이 나쁜 70세의 노인을 공작원으로 활용해야 할 정도로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다. 북한 정년이 60세인데 정년도 훨씬 넘기고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앓고 있는 노인에게 임무를 줘야 할 특별한 사정도 있었을 것 같지 않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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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평화통일과 통일독일 20년 발전상 통일대계연구 남북합의통일 마스터플랜 3
황병덕 외 지음 / 늘품(늘품플러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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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독일이 통일했다.

너무 유명해서 다 안다고 착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제대로 알고 싶으면 이 책을 읽어라.

우선 서독도 법에 근거해서 흡수통일을 이루었다고 한다. 기본법 23조에 따라 흡수통일을 했다. 하지만 사회민주당은 기본법 146조에 의거해 새로운 통일 헌법을 제정하여 통일을 이루는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 당시 상황은 동독이 무너졌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통일헌법은 어려웠다고 한다.

서독이 신동방정책을 실시하자 동독은 소련의 압력, 소련의 영향력이 지속되고 주변국가들이 통일을 반대하는 분위기, 이웃 다른 사회주의 국가보다 생활 수준이 월등하다는 자만 등 때문에 서독과의 교류협력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동독지도부는 소련군 주둔과 브레즈네프 독트린이 존재하는 한 절대 붕괴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면서 국제법적 인정을 간접적으로 확보함으로써 체제 안정을 도모하였다. (13쪽)


무엇보다 동서독의 인적 교류도 동서독 관계 정상화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어쩜 이런 조치들을 보고 북한이 인적 교류를 안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독일의 흡수통일 사례를 봤고, 그 당시는 동독이 오히려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는 잘 살았는데, 북한은 세계 최빈국이니 두려움이 클 것이다. 그래서 현재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목 메는지도 모르겠다. 빨리 정상국가라는 이미지를 획득하고 경제 제재도 풀고 무역도 해야하니...

1986년 동서독 문화협정이 체결되면서 서독의 티비와 라디오가 동독으로 전파가 되었고 이러한 수단이 독일통일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현재 북한은 어떤 식으로 인터넷 등을 통제하는 지는 모르겠지만...타 구소련권 국가들에 대한 다큐를 봐도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불법 복사된 영화들)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엄혹한 시대에도 새로운 문화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한지, 인간은 예술, 문화의 자유 없이는 못 사는구나 다시 느끼게 된다.


서독정부의 조기통일정책도 큰 몫을 했다. '유럽 속의 독일'이 될 것이라고 주변국을 설득하고, 고르바초프(1985년 집권, 소련 공산당 서기장, 페레스트로이카 개혁 정치)가 제창한 '유럽 공동의 집' 구상을 수용하는 등 주변국의 의심을 해소했다. 


"통일의 기회는 항상 오는 것이 아니고 시간은 통일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 헬무트 콜



<전개 과정>

1987 미소 간 중거리 핵전력 폐기협정(Intermediate Nuclear Force)

1989.10 바르샤바 조약 기구 회의에서 브레즈네프 독트린 폐기 - 체제개혁 열림


<통일 과정>

1단계 : 호네커 퇴진 등,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

1989.7 헝가리, 오스트리아 국경 개방

1989.10 고르바초프의 동구개혁 요구


2단계 : 장벽 개방 후 '전환의 전환' 시기

1990.3 민주적 선거


3단계 : 독일통일

화폐 경제 사회조약의 체결, 선거협약, 통일조약의 체결 등

1990.10.3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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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과외 제1교시 - 한국 남성 30-50대가 제일 재미있어하는 몇 가지 비공식 역사
이동형 지음 / 왕의서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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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제이에서 다뤘던 내용들이 많이 반복되어있지만 한번쯤 환기시켜준다는 측면에서는 유익한 책이다.

대한민국 30-50대 남자들이 제일 재밌어하는 비공식 역사라서 그런지 개인적으로 연예편은 재밌지 않았다.



제일 흥미로웠던 부분은 역시 재벌과 코리아게이트편.

1. 박근혜의 남자

50년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사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고 또 그때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지금에서야 수면으로 들어난다는 생각(최태민 등)도 들었다.


2. 박동선 사건

박동선 사건의 경우 60년대에도 로비스트로 활동한 한국사람(미륭상사 회장, 배재학당 이사장)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미국이 청와대를 도청하는 사건이나 쌀 수입 독점권으로 미국 국회의원 32명에게 약 85만 달러의 선거 자금을 제공했고 2006년까지 이라크로부터 250만 달러를 받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3. 여당 국회의원 성추문 사건

성추문 사건은 끊이질 않는다. 미투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고 이를 계기로 조금 나아지길 희망할 뿐....

1978년 공화당 성낙현의 의원직 사퇴는 여의도에 다니는 여자고등학생과 성관계를 가졌다. 이로 국회의원 사퇴하고 구속되고 3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역시 한 달도 안 돼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났다.


4. 기시 노부스케

대동아 전쟁 중 도조 히데끼의 내각에서 승승장구한 인물로 만주국을 건설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A급 전범으로 재판에 서게 되지만 사형자 명단에서 그는 없었다. 미국과의 관계로 1955년 자민당을 만들고 57년 수상이 딘다. 훗날 수상에 동생이 이어서 수상이 된다. 박정희와 그의 커넥션. 74년 지하철 공사, 쌀무역 등등 이어진다.


5. 세지마 류조

박정희 일본 육군사관학교 선배. 이토추 상사에 평사원으로 입사, 초고속 승진을 해 입사 20년 만에 회장자리에 오른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세지마의 머리에서 나왔고 전두환,노태우와 정치적 스승으로 통했다. 

김종필은 한일협정을 바탕으로 일본기업들이 한국에서 독점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준다. 이토추 상사가 중심이 되었다. (건설, 기계, 자재 등)

독점 사업권을 딴 일본기업들은 공화당에 정치 자금을 제공한다. 61-65년 사이 공화당 예산 중 3분의 2가 일본에서 받은 자금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근현대사를 꿰뚫고 있는 이동형 작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고 학연 지연 혈연으로 연결된 한국사회 1%의 실태는 상상이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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