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평전 - 한때의 애국자, 만고의 매국노, 개정판
윤덕한 지음 / 길(도서출판)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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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 공사관 참찬관 임명

박정양(47세) 내무부 차관격 내무협판. 1881년 일본에 신사유람단 기기국의 초대 총판. 개화파


초대 주미 공사관원: 10명 전권공사 박정양, 참찬관 이완용, 서기관 이하영, 잉상재, 번역관 이채연 및 수행원 2명. 무관 1명, 하인 2명

최초 개신교 선교사 미국 알렌이 외국인 서기관. 공사관원 안내. 1884년 9월 서울에 조랑말을 타고 들어옴. 미국 공사관 소속의 의소로 숨기고 있던 의료 선교사. 갑신정변 묄렌도르프(목인덕) 외아문 협판직. 

민영익이 칼에 맞음. 아이러니컬하게도 민영익은 자신이 반대하던 일본인과 서양 선교사에 의해 목숨을 건지게 됨. 민태호의 아들. 민태호 갑신정변 당일 밤 개화파에게 살해당함. 민영익의 여동생은 민비 세자의 빈으로 책봉. 

민영익은 민비의 오빠 민승호의 양자로 입양. 민승호는 대원군의 둘째 처남. 무남독녀이던 민비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민치록의 양자로 들어감. 민승호는 대원군이 집권한 후 한 때 그의 각별한 총애. 배은망덕하게도 민비오 ㅏ한페가 되어 대원군을 몰아내고 병조판서로 세도를 부리다가 의문의 폭사를 당함. 

대원군이 민승호 폭탄 보냄. 대원군과 민비의 22년 전쟁. 1974년 11월.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경쟁적으로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외세에 업혀 권력 투쟁 벌임.

민승호 사망하자 민영익을 양자로 들임. 알렌이 우연히 척족세도의 거물 민영익의 목숨을 구해주게 됨으로써 이름 없는 선교사의 처지에서 조선 정계를 요리하는 큰 도박판에 끼어들게 됨. 고종과 민비의 시의로 임명받아 대궐을 무상으로 출입. 민영익과는 형제의 의를 맺음. 

알렌은 이완용과 같은 1858년생. 민영익보다 두 살 위. 미국공사르 ㄹ능가하는 영향력. 

홍영식의 집을 병원으로 만듦. 1885년 4월 개원 우리 나라 최초 근대식 의료기관인 제중원.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대원군 집권 초기 3년 - 천주교도 8천 명 살해

개신교는 알렌 덕분에 왕실이ㅡ 묵인 아래 안전하게 전도활동. 호러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배재학당 설립

정치 고문 역할. 연봉 3천 달러 받는 외국인 서기관으로 임명. 선교사 급료의 2배.

서울 주재 미국공사 윌리엄 파커 - 미국 장로교 외국 선교부는 조선 실정 잘 파악. 

제물포

미국공사 휴 딘스모어는 원세개에게 제3국의 외교문제 간섭하는 행위는 월권. 알렌은 일본으로 떠남. 이완용도 대구를 거쳐 부산에서 공사관원들과 합류해서 일본으로.

이완용 양아버지 이호준 - 경상도 관찰사

이홍장은 영약 3단 세지 - 세 가지 조건을 붙여서 주미공사 파견 승인. 먼저 청ㅇ국 공사관에 가서 보고. 청국공사 경유 주재국 외무부에 감. 공식행사나 연회석상에서 조선 공사는 청국공사 다음에 앉기. 중요 문제가 있을 때 청국공사에게 미리 상의. 

방정양 공사 일행은 9월 28일 제물포에서 미국 군함 오마하 호 탑승. 

나가사키에서 박정양, 이완용, 이채연 - 홍콩 민영익 만남. 이중간첩 노릇. 왕실의 내탕금을 홍콩의 은행에 예치해두고 최고급 호텔에서 묵으면서 호화생활 중. 2만 달러수표 받음 공사관 개설 자금. 

민영익: 민비의 친정 조카.


이상재: 1년간 박정양의 집에서 겸인 생활. 개인비서. 

이하영: 일본인 상점 점원 출신 . 알렌을 배에서 만남. 여성 노블의 사환과 조리사로 일하면서 영어 익힘. 노블의 추천으로 외아문 주사 자리 얻음. 

이채연: 주미 공사관원 번역관에 임명. 외아문 주사로 근무. 조선왕조 관료 임용제도 무너짐. 

원세개는 조선이 서방 국가에 외교사절을 파견하는 것은 청국의 '속방'으로서 도리에 어긋남. 사절단 출발 중지

이홍장: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세력이 조선에 급속도로 침투하는 것을 보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 자진해서 이들 나라와 수교 주선.

도승지 민영준을 일본에 ㅂㄴ리공사로 파견. 

조선정부는 미국에 정치고문과 군사교관을 파견해달라고 요청. 미국은 영토적 야심이 전혀 없는 나라이며 조선과 멀리 떨어져 있어 조선을 침략할 위험도 없다고 생각. 조선이 제3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을 경우 도와줄 의무가 있다는 것을 조약으로 명문화. 

미국에 대한 환상. 한 때 미국에 보호를 의탁하려고 한 적까지 있다. 미국에 대한 고종의 일방적 짝사랑. 

미국의 대 조선 정책: 불간섭과 불개입. 고종은 미국에 공사관을 설치해야겠다고 다짐. 2배만 달러 차관을 얻는 일을 알렌에게 직접 부탁. 

하와이를 지나 태평양을 횡단하는 19일


민영익 홍영식 우리 역사 최초 서양 견문. 기록이 없음.

서양의 실상과 풍속에 대해 주변 동료에게도 알리지 않음. 

로웰 3개월 조선 체류 '고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 책 출간


1895년 유길준의 서유견문ㅇ. 최초 서양 견문기록

보빙사절 수행원으로 민영익을 따라 미국 12년만에 나옴. 

박정양의 미국 견문기 '미속습유' 1888년. 비공개


1888년 미국 상륙. 샌프란시스코 팔레스 호텔. 엘리베이터 첫 탑승. 지진으로 착각. 계단만 이용.

5일 만에 워싱턴 역 도착. 태극기. 에비트 호텔. 미국 정부는 부임하는 외국공사를 영접하는 관례 없었음.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 

초대 주미 공사관원들 - 알렌의 기록. 박정양은 청국 공사관 방문하려고 함. 알렌 만류.  사임 협박. '

박정양 능력 혹평. 무능. 온순하고 공손. 무색무취한 인물. 재능있는 서기관 이완용이라 평가.

명예영사 에버렛 프레이저 Everett Frazar 사업가. 에딛슨으로부터 조선에 전기 가설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 경복궁 안의 견청궁에 전등시설 해줌. 상당한 이득. 

이채연 일 년 영어 공부. 알렌 3년 조선 거주 하지만 한국어 서툼. 

사모관대 - 조선 전통 관복. 갓 두루마기. 군복 차림. 마차. 

신임장 받고 워성틴 시내 3층짜리 양옥집 세 내어 태극기 게양. 정식 공사관 개설. 

미국 부임한 지 5개월 만에 이완용 병에 걸려 이채연과 함께 귀국 1885년 5월 8일


이완용 정3품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  초고속 승진 정보국 회판. 이조참의 겸직. 교섭통상사무 참의. 

10월 다시 미국 공사관으로 부임. 1890년 10월. 2년

박정양은 청국의 종주권 무시했다는 이유로 소환 당함. 영약 3단 위반 시비.  

청국의 요구로 더이상 미국에 정ㅇ식 공사 파견 못함. 

미국에는 중국인 30만 명 거주. 


2백만 달러 차관교섭. 알렌. 금과 은이 많음. 보물의 나라. 평안북도 운산금광 채굴권 담보. 

박정양 밀수사건. 담배. 

이계필을 통해 담배를 필라델피아에 몰래 팔았음. 

백인들이 조선 아이들의 눈을 도려내 사진기의 렌즈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끓여 약으로 먹고 있다는 소문. 

금융업자들은 조선이 미개국으로 인식하도록 함. 

이완용 2년 대리공사로 근무. 할일 없었음. '일당기사' 1888년 12월~1890년 10월 친미파로 굳힘. 

미국 3권 분립제도 선거제도 목격

의무교육제도,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줄 수 있는 나라는 미국 뿐

윤치호, 유길준, 이완용 - 영어 구사. 

이완용 - 불교. 보수주의.  동도서기. 

서재필, 서광범, 윤치호 - 기독교로 개종. 


1890년 10월 승정원 우부승지 임명. 내무참의. 첩 순창 기생 출신. 승정원 좌부승지 - 성균관 대사성 - 종2품 가선대부 - 시강원 검교사서 

이호준: 경상도 관찰사 - 남한강 변 여주 읍내 여락헌 정자 거처. 70세

1893년 생모 신씨 사망. 벼슬에서 일시 물러남. 

친일개화파 - 안경수, 김가진, 조희연, 유길준, 권형진, 김학우

친청 사대수구파 - 영의정 김병시, 좌의정 조병세, 우의정 정범조 

대원군 이용. 척족과 수구파 제거. 

군국기무처 개혁 주도 회의체 입법기구 출범. 김홍집 영의정 갑오병장 시작. 

이완용의 이복 형 이윤용은 경무사를 맡고 있었음. 17명 회의원. 경무청의 책임자(경찰청장)

이완용 8월 16일 일본 주재 전권공사로 부임 명령. 이완용 상중이라며 거절.  

박정양 일본에 보빙대사. 전권공사. 이상재는 수행원.

외무아문 20일 '


일본군은 경복궁 점령과 동시에 청일 양군은 전쟁상태 돌입. 양력 8월 1일. 선전포고 정식.

이완용은 영어를 했지만 일본말은 줄을 때까지도 조금밖에 하지 못함. 

이노우에 가오루 - 20대 초 이토오 함께 영국 유학. 메이지 유신으 일급 공로자. 내각 총리대신 대리까지 역임. 백작. 내무대신. 1876년 운양호 사건 문제. 특명부 전권대신 참석.

강화도 조약에 서명. . 조슈 번의 무사 출신. 얼굴 칼자국 10군데.  알렌에게 민비 알현 조언. 고종과 민비 동시 알현. 

대원군 장손자 이준용 역모사건.  이준용은 대원군의 장자인 이재면의 장남. 고종의 조카. 24세 내무협판. 박준양 등 대원군 계열 세력과 함께 동학군을 서울로 끌어들여 고종 폐위시키기.

이노우에는 대원군 제거하기로 작정. 

부모 사망 3년 상. 

운현궁에 들이닥쳐 대원군이 보는 앞에서 이준용 구타. 경무청으로 끌고 감. 특별재판소 즉각 석방 요구. 농성. 박영효.  

강화도 교동에 10년 유배. 대원군의 민비에 대한 원한 골수에 사무치게 됨. 

대원군은 운현궁에서 한강변 마포 공덕리 별장 아소정으로 이사. 

시모노세키 조약. 1주일 후 3월 29일 러시아, 프랑스, 독일 3국이 반대.

일본이 조선에서 철도와 광산 등 이권 독점하는 것에 대해 러시아, 프랑스, 영국, 미국 반대. 


이완용 중심 정동파, 영어파. 친미. 3국간섭 이후 외세 판도 변화 반영

1895년 손탁 호텔. 알렌 서기관. 미국 고문 윌리엄 다이. 찰스 리젠드르. 혼탁 양저, 손탁 빈관, 한성빈관 등으로 불림. 독일 지방 출신 독신녀 손탁. 1885년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로 부임하는 베베르를 따라 서울에 옴.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

손탁 호텔 - 구미 외교사절. 청일전쟁의 추이에 관해 정보와 의견 나눔. 

이하영, 이채연, 이상재, 윤치호, 박정양, 초대 주미 공사관원 출신

친러파 - 이범진, 민영환

이범진 - 이경하 서자(천주교도 학살 진두지휘 훈려대장), 대원군의 수족. 문과 급제. 미남. 가무에 뛰어난 재주.  무식. 지독하게 수구적 인물. 

단골 점쟁이 신령군: 민비에게 무조건적 충성. 서자로서 민비의 눈에 들어 비정상적으로 급격히 출세. 

민영환: 청국 간섭에서 벗어나 러시아를 끌어들여야 함. 베베르와 접촉. 친러파

정동파(영어파): 일본 배격. 러시아와 미국 기대. 민비와 왕실에 절대적으로 충성. 왕비파.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1895년 12월 귀국)  


박영효와 김홍집 갈등. 김홍집이 스스로 총리대신에서 물러남. 후임으로 박정양. 알렌의 추천.  이권획득 사업, 운산금광 채굴권 획득하기 위함. 5월 8일 임명. 

이완용 학부대신으로 임명. 38세. 왕실과 척족에 무조건적 충성. 개혁에 점진적이고 현실주의적. 학부대신은 갑오경장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정부의 관제에 없었다. 예조에서 외교 문화 교육사업을 함께 맡아봄. 갑오경장 때 교육사업의 중요성을 감안해 예종에서 교육행정사업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학부를 별도로 분리해 설립.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학교 교육과 의무교육제도 법률적으로 제도화. 4개월 재직.  성균관 개편. 1895년 7월 2일 칙령 제136호 관제 개편. 유교 경전 이외 역사와 지리, 산술을 교과목에 포함. 고급관료 양성. 제145호 소학교령 (8세부터 15세까지) 8월 서울에서 4개 소학교 오픈(장동 정동 계동 묘동) 학부령 제1호 한성사범학교 규칙과 부속소학교 규칙 공포. 

교사 충원 필수. 부속소학교는 육영ㅇ공원 개편. 매년 일본 유학생 게이오의숙에 파견. 300명. 

협판: 윤치호


이채연 농상공부협판으로 추천. 

언더우드, 아펜젤러

요코하마 본사 미국무역상사 american Trading company 사장 제임스 모스

알란에 받는 연봉은 1500달러에 불과. 생활하기 빠듯. 

민비가 알렌에게 조섡 왕실에 조언하고 봉사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금광 채굴권을 하사. 7월 15일 계약. 개발 경비를 미국인이 부담. 조선 왕실에 이익금의 25퍼센트 지불. 기간은 25년. 

박영효: 갑신정변의 주역. 철종의 사위. 친일파. 내각의 힘 강화. 왕실 권한 제한. 개혁에 이상주의적. 일본으로 다시 망명. 역모 혐의. 이준용 역모사건. 

훈련대: 청일전쟁 기간 중 일본군이 훈련시킨 부대. 고정은 훈련대보다 시위대 더 신임. 

척족: 성이 다른 일가(친척)


제3차 김흥집 내각


이노우에 11개월 부임.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전쟁 배상금 3억 엔 가운데 3백만 엔 조선 정부에 기증. 하지만 공수표

갑오경장 때처럼 적극적인 간섭을 하게 되면 적극적인 간섭을 하게 되면 러시아의 개입을 불러올 것을 보듯 뻔했다. 

조선정부는 갑오경장 이후 개혁을 상당 부분 부정. 개혁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조치 취하고 있었음. 

후임 공사 미우라 고로. 육군 중장 출신의 외교 문외한. 독경공사. 일본 공사관은 임오군란 때 서대문 공사관이 불에 탄 후 남산 기슭으로 새로 건립. 

미우라와 대원군 밀사. 이토, 이노우에와 같은 조슈 번 출신. 무골, 참선승. 불도에 몰입. 1895년 7월 13일

민씨 친족 - 배일친러 정책. 친러파 대표 이범진을 농상공부댇신으로.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대원군이 만나 민비 제거에 관한 중요한 합의. 자필 확인. 

대원군은 사사건건 정사에 관여해 방해가 된 경험.  장자 이재면, 장손 이준용. 강화ㅗ 교동에 유배. 특별사면. 공덕리 별장. 

8월 19일 안경수를 시켜 일본 공사관 방문 훈련대 무장ㅇ해제. 민영준 궁내부대신에 임명.  원래 안경수는 친일파. 배일적 척족 편에 붙음. 

훈련대 무장해제 당하기 전에 대원군을 앞세우고 민비를 제거하기로 작정. 

건청궁 옥호루에서 안경수, 정병하 등 참석. 민영준의 재득세 축하 연회.


음력 8월 20일 10얼 8일 새벽 3시 일본 낭인, 훈련대 병사 '암여우를 죽여라' 대원군을 호위. 경복궁. 

임오군란 '여시를 죽여라' 아우성

대원군 - 국태공 명의 고유문. 서울 시내 게시. '근일 소인배들이 어진 사람을 배척하고 간사한 무리를 기용하여 유신의 대업을 중도에 폐지하고 5백 년 종사도 하루가 급하게 위기에 처해 있으니 나는 종친으로서 이를 좌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 입궐하여 대군주를 보익하고 사악한 무리들을 쫓아내 유신의 대업을 이루고 5백 년 종사를 지키려 하니 너희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을 지킬 것이며 섣불리 경거망동하지 말라. 만일 너희 백성이나 병사 가운데 나의 길을 막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큰 죄로써다스릴 것이요, 너희들은 후회막급할 것이다'

우범선, 이두황 지휘하는 훈련대. 건청궁 공격

미국 퇴역 육군 소장 출신 윌리엄 다이 장군. 지휘 500여 명 시위대 지키고 있었음. 구식총. 무장 절반. 군기와 사기는 엉망. 줄행랑. 

낭민 50여 명 훈련대 병사들. 

대원군은 강녕전에서 사태 진전 지켜보고 있었음. 궁낸부 고문관 오카모토. 민비 침전 옥호루 난입. 

칼에 맞음. 우범선이 마지막 숨으 ㄹ거두는 장면 목격. 45세.  1866년 16세 왕비로 간택. 양오라비 민승호 일가가 대원군에게 폭살. 임오군란 갑신정변 피바람. 1873년 11월 대원군 실각. 76세. 지팡이에 의지 대원군. 

민비시해. 청일전쟁의 승리를 물거품으로 돌리려는 민비에 대해 일본인들이 품은 증오심이 상상을 넘는다. <대한제국의 비극> 맥켄지, 탐구당

이준용이 하마터면 민비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이후 그녀에 대한 원한이 그 어느 때보다도 뼈에 사무쳤음. 


치욕적인 민족 자해 행위


대원군 쇄국정책. 안동 김씨 척족세도 척결. 서원 철폐. 과감한 개혁. 

민비 미신행위. 국고 탕진. 외세의 각축장. 무능하고 유약한 고종의 배후. 


1891년 5월 31일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철도. 

서시베리아 첼랴빈스크 - 연해주 남안 블라디보스토크 철도 연결.


아침 8시 미우라 건청궁 도착. 궁내부대신에 이재면 임명. 친일내각: 서광범, 조희연, 정병하, 유길준. 

알렌과 베베르 - 고종 알현. 대원군과 미우라에 둘러싸임. 

치외법권 지역인 미국 공사관으로 몸을 피함 - 이완용, 이윤용 형제, 이하영, 이채연, 민상호, 현흥택. 정동파. 

친러파 이범진, 이학균 -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이준용의 형 이윤용이 경무사로서 옥사를 처리. 

국내에서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권력층들이 외국인에게 의지해 목숨을구걸하는 행동은 관행처럼 굳어져갔다.  516 쿠데타 당시 장면이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로 감. 카르멜 수녀원에 몸을 숨김. 

1979 전두환 1212반란 국방장관 노재현 미8군 영내로 달아남. 

고종이 믿는 것은 구미 외교사절들과 서양인 선교사들뿐. 

언더우드, 헐버트, 아펜젤러 등 밤마다 교대로 고종의 옆을 지킴.

오직 자신의 한 목숨에 연연하는 겁 많고 나약한 평범한 인간의 모습. '조선의 겁쟁이왕'

알렌은 앞장서서 일본의 책임 추궁. 

윤웅렬 등 반일 파 30명 실탄 80여 발 무장하고 고종을 빼내기 위해 경복궁 춘생문으로 접근. 아들 윤치호와 정동파. 언더우드. 

안경수가 김윤식에게 밀고. 

이범진은 러시아 군함을 타고 상해로 망명. 이완용은 미국 공사관에서 피신. 민비시해 사건 관련자 48명 일본 히로시마 감옥에 구금하고 재판 진행 중. 

춘생문 사건 빌미로 미우라 등 민비시해 관련자들 석방하는 빌미로 사용.1895년 개혁 조치 - 양력 채택, 연호를 독자적으로 건향으로 정함. (그때까지도 조선은 청국의 연호 사용) 단발령 반포. 고종의 상투는 농상공부대신 정병하가 직접 잘랐다. 강제 삭발. 

강원도 춘천 시작으로 전국 도처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고 단발령에 결사반대한다는 기치 아래 의병이 들고 일어남. 

서울의 친위대를 지방으로 파견. 4000명 불과. 엄상궁 고종을 속이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관 1896년 2월 11일. 궁녀용 가마에 고종과 왕태자 타고 있었음. 

이완용, 이범진, 베베르

고종은 총리대신 김홍집, 내부대신 유길준,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군부대신 조희연, 법부대신 장박 등 다섯 대신을 역적으로 규정해 파살하라고 지시. 

순검들에게 체포되어 정병하와 함께 경무청으로 끌려가던 중 순검과 흥분한 군중들에게 처참하게 맞아 죽었다. 종각에 방치. 어윤중 용인에서 살해당함. 


고종은 김홍집 내각의 요인들을 처단하라고 명령한 데 이어 그 자리에서 이완용을 외부대신에 임명하고 학부대신 서리에 농상공부대신 서리까지 맡으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윤용도 군부대신 겸 경무사로 임명. 고종이 민씨 척족과 왕실에 변함없이 충성을 바쳐온 이완용 형제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인사. 


박정양 - 내부대신 겸 총리대신

아관파천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이범진이고 그 다음은 이완용이며 그 둘이 베베르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과 왕태자를 맞이함.


아관 파천은 한 나라의 주권의 상징인 국왕이 자기 나라에 주재하는 외국 공사관에 몸을 맡기는 일찍이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주권 포기 행위. 이로써 나라의 체면은 더욱 엉망으로 훼손되고 열강으로부터는 독립국으로서의 자격마저 의심받는 사태 자초. 


마침내 이 땅을 늑대와 승냥이의 싸움터로 만들고 나라와 민족을 송두리째 승냥이 밥이 되게 했던 것. 무능하고 부패한 왕실과 조정의 생존과 연명을 위한 방편. 만민족적 반국가적. 


엄상궁이 고종에게 밀착 시중을 들면서 임신하게 되고 다음해 왕자를 낳으면서 귀비로 봉해진다. 이 왕자가 영친왕 은. 


이완용 39세 나이로 막내딸 보게 된다. 23세 장남 승구, 차남 항구

영친왕 이은의 배필로 정해졌다는 소문. 

막내딸은 달성 서씨 서병항에게 출가.


이범진과 같은 친러파들은 친일파들의 자객이 두려워 공사관 밖으로 나갈 생각을 못하고 내각의 관리들을 공사관으로 불러들여 일을 처리. 

유생들은 고종의 환궁  상소. 이를 거부. 

이범진은 스스로 주미공사 자원해 미국으로 떠남. 미국과 러시아 공사를 전전하며 해외에서 머물었음. 

박정양 내각은 베베르의 조종을 받는 러시아 괴뢰 내각.

러시아어 통역 김홍륙. 물장수 노릇 함경도 지방 천인 출신. 정동 손탁 호텔 출입. 정동파. 고종의 유일한 러시아어 통역. 비서원승으로 출세. 벼슬이 모두 김홍륙의 입에서 나온다. 

전황과 위세 대단 통역정치의 시조


모스는 브로커. 경인 철도 부설권 획득. . 자금 부족으로 부설권을 일본에게 넘김. 경인철도는 일본인에 의해 1899년 9월 인천-노량진 간이 개통. 1900년 7월 한강철교 완공. 완전 개통. 

알렌의 운삼금광 채굴권 재인가. 25년간. 모스는 미국인 라이 헌트에게 3만 달러를 받고 채굴권 넘김. 헌트는 조선 국왕의 지분 25퍼센트마저 단돈 10만 달러에 사들임. 1939년 운산금광에서 손을 뗄때까지 40년간 순금 80억 톤을 채굴해 무려 1500만 달러 순익. 

1903년 금광 서양인 일본인 기술자 각각 70여명 중국인 노무자 700명 조선인 노무자 2000명. 광맥에 접근 금지 노터치 -> 노다지 유래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조선을 일본에 넘겨주었으며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날 일본인과 함께 축배를 들고 가장 먼저 조선에서 공사관을 출수하는 배신행위. 

러시아 - 울릉도와 압록강과 두만강의 삼림 20년 동안 벌채


이권을 노리는 외국인 모리배들의 즐거운 사냥터

프랑스 - 경의선 철도 부설권

독일 - 강원도 금성광산 채굴권

영국 - 평안남도 은산금광 

이완용은 이때 내중 이권 때문에 정부 안에서 다른 대신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끝내 독립협회 회장직에서 축출당함


민영환은 러시아의 이중외교에 걸림. 8월 19일 페테르 부르크를 떠나 시베리아를 거쳐 귀국. 횡단 철도 미완. 기차 마차 배를 번갈아 타며 이르쿠츠크와 바이칼 호,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군사교관 파견하기로 결정. . 궁궐을 수비할 경비병 훈련. 

일본은 고종 환궁이라는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러시아의 군사교관 파견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임.

푸챠타 대령을 단장. 장교 2명 하사관 10명 군의관 1명 등 14명 구성. 부산과 인천 경유 10월 21일 서울 도착. 

7개월 만. 조선군 1개 대대 병력 800명 선발해 훈련. 러시아식 훈련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 창립총회. 이완용 안경수 이윤용 김가진 등 14명

서재필 미국인 필립 제이슨

청일전쟁으로 조선이 자주독립 국가가 되었으니 이것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과거 청국 사신을 맞던 치욕적인 자리에 독립기념물을 세우자는 것.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청국 사신이 묵던 모화관을 개수해 독립관으로 만들며 그 일대를 독립공원으로 조성. 

영은문은 청일전쟁이 끝나가던 1895년 2월 이미 파괴된 상태.

독립협회 위원장으로 이완용 선축, 회장은 안경수.

정동파 중심으로 발기. 

사회단체 주도의 행사. 시민 모금. 배재학당 교사 아펜젤러. 독립문 정초식

독립문 현판 - 이완용의 글쓰. 명필. 

덕수궁 내 경소전, 숙목문의 현판 서사관으로 임명. 

덕수궁 중화문의 상량문, 창덕궁 함원전의 현판(1920년 경복궁에 있던 것을 창덕궁으로 옮김). 

고종 일대기 기록한 행장과 덕행을 칭ㅇ송하는 시책문

경상북도 김천군 직지사의 대웅전, 천왕문의 편액

이완용 고종 환국 운동 앞장섬. 베베르의 미움을 삼. 


아관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덕수궁으로 환궁. 덕수궁이 러시아, 미국, 영국 공사관과 가까운 거리. 

일본은 환궁이 이루어지자마자 의정서 등 공개. 조선정부는 이로써 그동안 러시아에 대해 품어왔던 기대가 환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됨. 이중외교에 대한 배신감. 고종은 이때부터 베베르를 제2의 미우라로 생각하기 시작. 

이완용은 평소에도 현기증과 두통으로 고생. 


러시아 군사교관 거부

러시아는 그 동안 청국 정부를 상대로 하얼빈-장춘-여순-대련으로 이어지는 동청절도의 남부지선 건설권을 획득하려고 교섭. 이홍장이 거부. 러시아는 더욱 조선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이완용이 외부대신에서 쫓겨남. 

독립협회 최초 민중 토론 형식 도입. 

1897년 

러시아가 베베르를 스페예르로 바꾼 것은 러시아가 더욱 노골적으로 조선을 지배하겠다는 의지 표시. 팽창주의자 제국주의자.


9월 1일 이완용은 평남 관찰사로 쫓겨 가게 됨. 20일 만에 사직 상소르 올려 관찰사직에서 물러난다. 양아버지 이호준의 건강이 좋지 않음. 중추원 1등 의관으로 임명. 77세 이호준을 중추원 의장으로 임명. 


10월 12일 황제 즉위식. 국호도 대한으로 바꿈. 민비를 명성황후로 추존. 민비 국장 . 대한제국. 

영국 브라운 해고. 알렉시에프 고용. 영국 함대 7척 인천 앞바다에 몰려와 브라운의 해고 철회 요구


브라운을 다시 해관 총세무사. 알렉시에프는 재정고문. 

재정고문 교체 과정에서 보인 정부의 무능과 러시아의 횡포에 독립협회 회원들은 분노.


1898년 3월 10일 오후2 시 종로. 만민공동회. 이승만 등 3명 총대 위원으로 뽑음. 민간 중심의 정치 운동 단체로 성격이 바뀜. 


1898년 3월 11일 이완용 전라북도 관찰사로 부임. 전주 감영에 부임. 2년 동안 독립협회 활동. 

12월 25일 망명중인 박영효와 서재필을 정부 요직에 등용하라고 건의했다가 황제와 정부의 격분을 사 해산 당함. 


윤치호는 이완용이 명문가 출신으로 동료와 아랫 사람에게 오만하고 완고하며 교활한 반면 권력자에게는 무조건 추종한다고 비난. 

김홍륙 서울시장 격인 한성부 판윤으로 임명.


러시아가 갑자기 썰물처럼 빠져나감. 3국 간섭으로 일본이 청국에 되돌려준 요동반도를 러시아가 차지하게 된 것. 요동반도에서 부동항 획득. .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한국에서 철수. 

러시아가 철수한 지 5개월 만에 김홍륙은 거간꾼에게 뇌물을 받아먹은 죄로 태형 1백 3ㅐ를 맞고 흑산도로귀양. 교수형. 궁중요리사를 통해 황제가 마시는 커피 잔에 아편을 넣어 독살 시도. 실제로 황태자는 커피를 마시고 정신을 잃었으며 고종은 맛이 이상해 몇 모금 마시지 않아 무사했다. 깅홍륙 독다사건. 

"전라북도관찰사 이완용 씨는 근일 정읍, 순창, 장성, 남원, 부안 등 5개 군에 유람하는데 따르는 기생이 4명이며 주사 6명에 나졸 수십 명을 합쳐 행차 인원이 1백여 명에 이른다. "황성신문 1898년 11월 17일자 7월 22일 공금 20여 만 냥을 유용했다는 어사 이승욱 보고에 따라 이완용 전북 관찰사에서 면직당한다.  재판 흐지부지. 1901년 2월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 하지만 사직 상소.  이호준 사망. 서울 교동. 노환. 충익공 시호.  3년 탈상 때까지 이완용은 벼슬에서 물러나 서울과 아산 선영을 오가며 선친 묘소를 돌봄.


1904년 11월 9일 벼슬길 돌아옴. 궁내부 특진관. 

이용익 고종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경. 함경북도 명천 출신. 무식하고 미천한 인물. 빠른 발걸음 덕분에 출세. 임오군란 때 서울과 충주를 오가는 편지 심부름을 이용익이 맡음.  1884년 알렌은 그를 처음 봤을 때 마루를 청소하고 있었음. 친러 배일적 인물. 그를 출세시켜준 민비를 시해한 일본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감. 

 1900년 마산항 조차 명목으로 점거. 1903년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가 이용익과 ㄱ ㅕㄹ탁해 압록강 상류 삼림 벌채권 획득. 용암포 불법 점령. 고려대학교 전신인 보성학교 세움. 외세에 대해 자주적 인물이 아니었음. 러시아에 굴종하며 러시아의 앞잡이 노릇. 


친러파 - 이범진, 이용익. 김홍륙 수구적. 부패분자. 


1900년 만주에 청국에서 의화단의 난. 러시아 철수하지 않고 계속 군대 주둔. 노골적으로 만주와 조선 침략 전쟁. 

1902년 1월 영일 동맹.

러시아의 용암포 점령. 

1904년 2월 9일 일본이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군함 2척을 격침. 러일전쟁 시작. 

러일 한일 의정서 조인. '일본이 전쟁 수행을 위해 군략상 필요한 한국 내의 지점을 언제든지 수용할 수 있다' 용산, 평양, 의주 땅 수용. 

이지용: 흥선대원군 친형인 이최응의 손자. 고종의 조카. 돈 1만원에 매수되어 나라를 파는 조약에 서명. 

황족 중에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지 않은 자가 단 한 명도 없었음. 


윤치호 사이 제1차 한일협약 '외국인용빙협정'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외국인 1명을 외교고문으로 각각 고빙.  사실상 자주성과 독립성 상실. 


이완용 철인전쟁과 갑오경장이 진행중이던 시기 생모 신씨의 상을 당해 일시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다. 묘하게도 한국을 둘러싼 청국과 일본, 러시아의 각축이 전쟁으로 발전하던 결정적 시기마다 정치 현장에서 한 발씩 떨어져 있었떤 것. 행운으로 작용. 자연스럽게 이긴 쪽에 붙을 수 있었음. 

1904년 재선된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친일적 인물. 


알렌: 1884년 9얼 최초의 의료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은 이래 20여 년간 지속된 알렌과 한국과의 인연은 막을 내리게 됨. 주한 공사로 7년 9개월 재임. 

(배일적 태도를 문제삼은 일본 측의 로비 작용) 고향 오하이오 주 토리도 시. 


1905년 9월  학부대신으로 재입각.  박제순 - 평안남도 관찰사에서 외부대신, 이지용 - 육군 부장에서 내부대신

매국의 길로 들어서는 첫 걸음. 


러시아는 여순과 봉천을 함락당하고 해전에서도 발틱 함대가 동해에서 전멸. 미국 포츠머스 강화조약.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 경제 군사상 탁월한 이익을 가질 것과 지도 보호 감독의 조치를 위하는 것' 승인 


러시아는 장춘-여순-대련 동청절도 남부지선 경영권도 일본에 빼앗김. 남만 철도로 개칭. 10년 만에 다시 일본이 차지. 


가츠라 태프트 비밀 협정 - 도쿄로 처청해 '일제의 한국 강점을 미국이 지지해주는 대가로 일제는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인정' 

고종은 알렌에게 한국을 도와달라는 편지와 함께 활동비 1만 달러 보냄. 하지만 알렌은 1만 달러를 되돌려 보냄. 이승만 - 구걸외교.

이완용과 이하영 등이 을사조약에 찬성하고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다는 소식에 오히려 알렌은 만족감을 표시.

제2차 영일 동맹 - 일제가 영국의 인도에 대한 식민통치를 지지해주는 대가로 영국은 일제의 조선 강점을 지지하는 묵계


이토 히로부미 '한국 황실을 위문하기 위한 천황의 특사'

이완용은 친일파로서는 상당히 뒤진 편. 그러나 을사조약에 찬성함으로써 재입각한 지 3개월도 안 되어 단번에 친일 내각의 실세로 자리를 잡았다.


조선과 국교를 맺고 있는 국가: 11개국. 공사 파견 나라 일본,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청국 (7개) 이완용은 외부대신 서리로서 한국정부의 마지막 외교업무 청산작업 맡고 나섬.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외국 공사관도 하나 둘 철수.  미국 가장 먼저 주재 공사관 폐쇄. 1882년 체결된 한미수호통상조약은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폐기. 

1906년 3월 2일 이토는 초대 통감으로 서울 부임. 66세. 

동학당과 나라의 자주독립을 외치던 독립협회의 잔존 세력들이 일진회를 만들어 이제는 침략 원흉의 통감 부임을 환영하고 나선 것. 

일진회는 러일전쟁이 발발하던 해 9월에 이용구가 만든 진보회와 송병준의 사주를 받아 윤시병, 홍긍섭 등이 조직한 유신회가 합쳐서 출범한 나라 최대 민간 조직. 이용구는 동학농민전쟁 때 논산에서 동학군 5만 명 지휘. 2인자. 

윤시병과 흥긍섭은 독립혀회가 민간주도의 정치 투쟁 단체로 활동할 때 협회를 이끌던 간부

손병희와 이용구는 동학의 생존을 위해 러일전쟁의 국면을 맞아 일본을 지원하기로 방침을 정함. 일본이 전쟁에서 이길 것으로 보고 이길 나라를 지원해 전쟁이 끝나면 그 힘을 빌려 포교권을 얻어 보자는 계산. 


진보회가 동학당의 후신. 동학당이 정부 개혁과 국정 혁신을 기치로 내걸고 다시 세력을 떨치고 일어넜으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한국 정보는 군대를 동원해 진보회 탄압. 

유신회가 이용구에게 합병 제의. 이본군의 통역으로 따라왔던 손병준이 독립협회의 잔존세력을 모아 조직한 단체. 일진회로 이름 바꿈. 


일진회는 송병준과 일본 군부 및 그들과 제휴한 일본 낭인들의 조종 아래 완전한 매국단체로 전락. 정부의 가혹한 탄압이 한때의 반외세 민중 운동세력을 오히려 외세의 주구로 몰고 간 비극. 


1906년 8얼부터 4년제 보통학교로 개편. 이완용이 일본어 교육을 실시키로 결정. 

이토의 추천으로 박제순이 물러나고 이완용이 참정대신 자리에 오르게 됨. 50세. 

이토가 조중웅을 법부대신, 송병준을 농상공부대신 추천. 

이완용을 제외하고 을사조약에 찬성했던 대신은 모두 물러났다. 

이완용은 스스로 '황태자로 하여금 황위를 대행케한다'는 기발한 아이디어 제시. 신하가 전제군주에게 양위를 말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고종은 '신하의 몸으로 어찌 감히 선위를 운운할 수 있는가'라고 크게 진노


고종은 박영효를 궁내부대신에 임명. 친일 개화파의 대표로 이토와도 가까운 사이. 이완용의 총리대신 자리를 가자 ㅇ위협할 가능성 있는 인물. 


이완용 역시 이토를 대신해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하면서도 가장 황실을 아끼고 나라를 걱정하는 것처럼 자신의 행동을 위장


양위 반대 운동

일본과 공모해 5백 년 사직을 팔아먹은 매국노를 처단하라.

황제 대리 의식 거행. 박영효가 반발해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음. 

이완용은 스스로 궁내부대신 임시 서리가 되어 다음날 황태자의 황제 대리 의식 강행. 순종의 즉위식이나 마찬가지 


반일단체 동우회 - 이완용 집 불살라버림. 10만 원 상당의 재산 피해. 

우봉 이씨 조상들의 위패가 수난 당함. 조상 신주 화재. 고종양위를 계기로 이완용은 완전히 매국노의 대명사로 민중들의 저주의 대상이 된다. 

'매국노의 일족들을 잡아 죽여라' 

 왜성구락부에서 두 달 머물었음. 이윤용의 집으로 들어가 살았음.  고종이 저동에 있는 남녕위궁을 하사. 

고종은 당초 "황태자로 하여금 정사를 대리토록 한다'는 조칙 내려 양위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일본 천황이 순종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전보를 보내옴으로써 일본은 고종의 양위를 기정사실화해 버림. 이어서 이틀 후인 7월 22일 이완용 이하 대신들이 순종을 '대리'라고 하는 대신 '황제'라고 높여 부르자는 상주를 함으로써 '황제 대리 조칙'은 없었던 일 이 되고 말았음.


정미7조약 - 신변의 위협

이토 한국의 내정권까지 완전 장악. 사실상 한국의 제왕. 

이후 일본인들이 정부 각부의 차관과 중요 국장 자리를 독차지 함으로써 종래 '고문정치'가 이른바 '차관정치'로 바뀌게 되었다. 

한국인 댇신은 형식적인 결재. 


이완용은 혈의 누 작가 이인직에게 천도교계 만세보를 인수해 이인직에게 발행을 맡겨 친일 내각 옹호. 

군대 해산. 한국인의 무력을 완전히 제거할 목적.  양위 당시 저항이 해산의 직접적 동기. 

맨손으로 훈련원에 모인 병사들은 중무장한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 속에 해산명령과 함께 은급이라는 이름으로 나누어주는 몇십 원의 돈을 받아들고 돌아섬. 

시위 1연대 1대대장 박성환이 군대 해산에 반발해 부대에서 권총으로 자살. 1대대 병사들이 무기고를 깨뜨리고 무장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제2연대 2대대 병사들도 여기에 합세. 남대문 중심으로 벌어짐. 한국군 200여 명 사상자. 두 시간 만에 종결. 일본군 100여 명 사상. 해산당한 병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의병에 가담. 

이완용이 한국인 헌병보조원을 모집해 토벌작전에 투입한다는 아이디어 내놓음. 동족으로 하여금 일제의 주구가 되어 동족을 토벌케 하는 악랄한 헌병보조원 제도가 실시. 

헌병 한 명당 한국인 보조원 3명씩 모집. 한국 주둔 일본 헌명은 군사경찰 임무만이 아니라 통감 지휘 아래 사법경찰의 역할 까지 수행. 헌병 정치의 막을 열었다. 아카이시 모토지로 육군 소장은 헌병정치의 원조. 

이완용 욱일동화장 훈장 받음. 이토는 후작에서 공작으로 올라감. 


이토는 순종의 스승이 되었음. 한국 황태자 태사. 한국 황실의 친왕 예우라는 온갖 권력과 영예를 한 몸에 걸치게 됨. 

순종은 이완용을 황태자 소사로 삼음.  황태자는 영친왕 이은. 

이완용은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제수 받아 신하로서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지위까지 올라감. 파격 승진. 품계 파괴. 

열한 살 이은 황태자는 인천에서 일본 군함을 타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음. 

항일의병전쟁. 


송병준: 함경남도 장진 출신. 민영환의 식개 노릇. 떠돌이. 무과. 궁중 수문장과 사헌부 감찰 등을 거쳐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을 암살하라는 밀명을 받고 일본에 건너감. 김옥균의 감화를 받아 도리어 그의 동지가 됨. 

일본 명먕 7년. 일본군 통역. 송병준은 대체로 행동이 거칠고 공격적

기발한 재주가 많기는 하지만 학식이 부족. 술에 취해 칼으 ㄹ빼어드는 망동을 부리다가 면직


이완용은 친일파 치고는 일본말 못했고 집에서는 한복을 입고 외출할 때는 양복을 입음. 


21세 때 영국 유학한 이토는 영어로 연설을 할 정도로 영어에 능통. 

"세상에서 제일 처신하기 힘든일이 세 가지가 있다. 쇠약한 나라의 재상과 파산한 회사의 청산인, 빈궁한 가정의 주부가 그것이다.'


이완용 소문: 죽은 큰 아들 승구의 처 임건구와 사통을 하고 있다는 내용. 

이재명의 칼을 맞고 대한의원에 입원. . 1905년 아들 사망. 병으로 죽음. 

이토 전임. 


1909년 7월 12일 이완용 사법권 위임 각서에 서명. 월권이면서 불법적 행동. 과반수 놀음 복사판. 하루 전 날짜로 소급해서 서명. 12일자로 서명을 맟야 된다고 소네가 요구. 

대한제국은 외교권과 내정에 관한 권한에 이어 사법권까지 일본에 빼앗기고 완전히 껍데기만 남게 되었음. 

탁지부대신 임선준과 학부대신 이재곤은 사직. 


독일의 비스마르크,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중국의 이홍자과 함께 세계적 대정치가라는 평을 들으며 30여 년 동안 동양 정치의 풍운을 주름잡던 이토는 69세를 일기로 북만주 하얼빈에서 생을 마감.  이완용은 대련에 가서 조문. 순종은 시종원경 윤덕영, 고종은 승녕부 총관 조민희 조문 칙사로 보냄. 

한성부민회장 유길준도 서울 시민 대표

 

황태자는 3개월 동안 상복 입음. 문충공이라는 시호. 

의친왕  이강을 도쿄에 보내 이토 장례식에 참석.  장충단에서 이토 추도식. 

조선 13도의 대표 자칭하는 자들이 이토 암살에 대해 일본에 죄를 청하는 사죄사를 파견.

 

일진회 궤변: 한국은 일본 천지가 되고 한국인은 일본인의 종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러니 보호받는 열등 국민으로 살기보다는 차라리 일본과 합쳐 세계 대제국을 만들어 세계의 일등 국민으로 똑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살아보자. 이것이 조선 민족이 사는 길이며 황실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 머리깎고 검은 옷 입은 회원들. 처단당하기 일쑤. 

일진회, 대한협회, 서북학회와 대표적인 민간사회단체. 


합방을 두고 일진회와 내각이 서로 공을 다투는 양상. 합방을 하면 총리대신 자리가 없어짐. 

이완용 이재명(23세 평양 출신 기독교인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 1907년 귀국. 명동성당 벨기에 황제 추도식)의 칼에 세번 맞음. 대한의원에 입원. 수술. 

왼쪽 어깨로 들어간 칼끝은 왼쪽 폐를 관통. 

이완용은 말년에 해소병으로 고생을 하고 끝내 서식과 폐렴으로 사망. 

허리 부분으 ㄹ찔린 두 번째와 세 번째 칼 상처도 신장 가까이. 

위로금 2만 원.  


이재명 동지 12명 체포. 재판 회부. '이완용은 죽일 만한 죄가 허다하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큰 죄목이 여덟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을사 5조약을 체결한 것이며..." 이재명은 5월 18일 경성 지방재판소에서 사형선고. 교수형. 


데라우치는 경찰권을 빼앗아버림. 합방을 위한 마지막 정지작업. 한국의 경찰권 이원화. 

이완용이 먼저 합방을 제의


외부대신 자리 없어진 징뢔되었구군부와 법부대신 자리도 이미 사라져버려 내각회의라고 해야 총리대신까지 합쳐도 5명에 불과. 이용직이 반대의사를 표시. '대세상 어쩔수 없다'는 논리로 합방 받아들임. 을사 5적에 이어 양오적의 오명 - 이완용 박제순

이완용이 합방조약에 서명. 합방조약을 성사시긴 공로로 포상. 통감부는 조선통독부로 변경.

데리우치 총독. 순종은 창덕궁 이왕, 황태자는 왕세자로, 고종은 이태왕으로 불림.

이완용은 은사금으로 15만원(32억 원), 백작 작위. (왕적과 척족이 아닌 가운데 유일) 

의친왕 이강, 대원군 장남 이재면 - 공작 은사금 83만 원. 

순종의 계비 윤비의 아버지 윤택영 - 후작. 은사금 50만 4천 원

은사금은 연리 5푼의 공채로 지불. 기명식. 원금은 5년 거치 50년 이내 전액상환.  36년 지배. 매년 이자 7천500원 34년동안 총 25만 5천 원 매국의 대가


김석진, 흥선대원군 둘째 사위 조정구는 작위 거부

한규설, 유길준, 홍순형, 민영달, 조경호, 윤용구 은사금 반납

김석진은 음독자살, 금산군수 홍범식, 선비 이희철

'조국을 위해 죽는 것보다 더 기꺼운 일은 없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항복 방송을 한 후 자살한 일본인이 500여 명


합방으로 총리대신 자리는 잃었지만 친일 세도가로서 새 인생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 


이왕가와 일본에 동시에 충성을 바치면서 활발하게 정치 사회활동 벌임. 

친일 세도가로 윗를 떨치면서 한가롭게 일본과 조선의 명승지와 고적을 유람하고 시와 붓글씨로 유유자적하며 인생 후반기를 즐김


1911년 10월 15일 최초 공식적인 일본 방문. 천황의 탄생일, 천장절 축하 행사에 조선 귀족대표로 참석

중ㅊ원 부의장 15년 보유. 

박영효가 이어 받음. 

장손 이병길 일본으로 유학. 손자 병희도 일본 유학. 

이완용과 조선 왕실은 서로 깊이 신뢰하고 충성을 바치는 군신관계 유지. 운명공동체적 입장. 


농사장려회장. (이완용 회장 송병준과 조중응 부회장)

조선귀족회. 이문회(글모임)

불교옹호회.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서예부문) 

1919년 1월 22일 고종 승하. 이은과 마사코 결혼식. 

고종의 장례 절차를 맡음. 3월 3일. 

손병희의 사위 천도교 주임인 정광조

 

이완용만이 전면에 나서서 경고문을 발표. 이완용이 스스로 자신을 매구적이라고 표현. 

이완용의 참정권 언급과 실력 양성론은 그 후 일제에 투항한 수많은 민족운동 변절자들에게 하나의 교과서적 변절논리. 이광수 민족개량주의자들이 부르짖은 실력양성론의 원조. 


1919년 9월 2일 이완용의 안내로 사이토가 서울역에 내렸을 때 그를 맞은 것은 강우규 의사의 폭탄. 사이토와 이완용은 화를 면했지만 서울역 앞은 순식간에 폭음과 부상자들의 신음으로 아수라장. 


"미국인들은 마음속으로 조선인을 개나 돼지처럼 생각하더라도 밖으로는 친절하게 대하는데 일본인은 조선인에 대한 멸시를 직접적으로 나타낸다."


일본천황은 1920년 이완용을 후작으로 올려줌. 1924년 아들 하구도 남작 지위 받음. 

이완용 학교비 거부. 민영휘와 똑같이 6등에서 5등으로 올림. 자신의 재산이 민영휘에 비해 월등히 적은데 같은 등급으로 책정된것은 납득할 수 엇다며 납부 거부. 


이완용 장례는 고종국장 이래최대의 인파가 운집한 일대 장관 연출.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 선인봉 장지. 전라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진주의 유명한 지관 이은정을 시켜 골라둔 명당.

강경역. 장례 치른 지 불과 4개월도 안 되어 이완용의 묘지 옆에 있는 묘지기 집에 강도가 들기도 하고 누군가 봉분을 훼손. 

친미파 원조인 이완용가 후손들이 친미파 세상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게 되었음. 

이병길은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재산 2분의 1 몰수.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피난 도중 평태 ㄱ부근에서 행방불명됨. 


이항구 부부의 묘는 1979년 증손자 이석형에 의해 파헤쳐져 유골은 화장. 집안은 멸문의 화를 입음. 폐묘.  채석장. 

경기도 고양시 향동동에 있는 이승구의 묘도 수난. 매국노의 아들. 파손 비석은 없어지고 값비싼 상석은 부서진 채 방치. 


'조선총독부중추원부의장정2위대훈위후작이공지구' 붉은색 비단 명정 그대로

 익산 원광대하굑 박물관에 보관.  이병도는 입수해 태워버림. 이항구의 셋째 아들 병주의 장남 이석형은 일본 국적을 취득. 

이완용 종손 이병길의 장남 이윤형 캐나다로 이민.  1992년 이완용의 땅으 ㄹ찾겠다고 소송.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30억 원대 대지 712평 여주 용인 

홍익대건축과 1970년대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 박정희 정권 실력자들과 가깝게 지냄. 

사격연맹 회장이 피스톨 박으로 유명한 처오아대 경호실장 박종규.  노무현 정부 때 제정된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2007년 이완용의 남은 재산은 모두 국고에 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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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마음 - 공감하고 관계 맺고 연결하는
이지은 지음 / 더라인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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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되고 싶은 후배들에게 전하는 선배의 말씀. 본인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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냠냠 소설의 첫 만남 32
백온유 지음, joggen 그림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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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살 김채원은 회장이다. 회장이니까 반 친구들을 잘 챙긴다. 특히 이서우를 챙기다 보니 좋아하게 되었다. 채원이 엄마는 떡볶이집을 한다. 원떡볶이라고 꽤 유명하다. 

동네 편의점에서 방학 때 우연히 이서우를 만났다. 서우가 떡볶이를 좋아하는 걸 알고 맛 평가단을 해달라며 매일 떡볶이를 사갔다. 그렇게 둘은 친해지고, 어느 날 서우가 떡볶이를 사주겠다며 원떡볶이를 간다. 서우는 급식카드를 쓰고 있다. 자기를 동정한다고 생각한 서우는 섭섭해한다. 

채원은 자신의 진짜 마음을 털어놓는다. 

"냠냠. 난 그 소리 들어려고 도시락 싼 거야.  네가 불쌍해서 싼 거 아니야. 너 밥 먹을 때 냠냠, 냠냠, 하면서 먹잖아. 그거 귀여워서 좀 보려고 우리집 냉장고 턴 것뿐이라고. 그게 다라고! 엄마가 떡볶이집 사장이라는 거 너한테 속인 건 미안해. 그냥 먹으라고 하면 넌 안 먹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랬어. 사과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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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먼저 경험했습니다 - 아프간 난민과 함께한 울산의 1년
김영화 지음 / 메멘토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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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아프간의 텔레반의 위협 속에서 한국 정부는 391명의 특별기여자를 한국으로 이송하는 '미라클 작전'을 수행했다. 이들은 인천으로 들어와 2개월, 진천이나 여수에서 4개월을 보낸 뒤 전국으로 이주되었다. 이 중 혀대 중공업에서 29명을 채용하면서 157명이 울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2022년 3월 아프간 특별기여자 자녀들이 첫 등교를 하게 된다. 초반에는 학부모들의 반대가 거셌다. 당시 노옥희 교육감이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울산 교육'을 내걸어 직접 아이들과 등교 했다. 교육감의 전폭적 지지와 학부모와 학교와의 대화를 통해 아이들이 성공적으로 학교에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한아름반을 만들고, 전문 상담 교사, 한국어 강사, 교육활동지원사, 또래 도우미 등을 지원했다. 초반에 난민 반대 여론이 높았지만 교육감의 노력으로 반대 여론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교육감은 2022년 12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가짜 뉴스 중 하나가 외국인이 오면 범죄율이 증가한다는 것이지만 이는 잘못된 사실이다. 국내 외국인 범죄율은 내국인 범죄율의 절반 수준이고 전체 범죄자 중 외국인 범죄자는 1-2퍼센트 밖에 안 된다. 

울산의 아프가니스탄 가족들의 정착은 한국 사회가 어떻게 이주민과 공존할 것인지 그 청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복지는 미래에 대한 투자이고 한국 정부의 다문화 정책의 변화가 필요하다. 다문가정이라는 말 보다는 이주 배경 가정이라고 용어를 바꾸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 

이주민 관련 정책을 총괄하는 컨트롤 타워가 없다. 이주민을 주민으로 포용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2015년 시리아 내전 이후 100만 명이 넘는 난민이 유럽으로 유입했고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독일의 메르텔 총리는 '증오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해 달라'고 말했다. 

두려움이 정치 활동을 위한 지침이 될 수는 없다. 아무 목표도 없이 겁만 주면서 우리의 결속력을 깨려는 이들이 우리 삶의 방식을 파괴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우리가 부른 것은 노동력인데, 온 것은 사람이었다.' 스위스 작가 막스 프리슈의 시구다. 

이주민을 노동력이 아닌, 사람으로 대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난민 정착과 적응을 위한 공적 매뉴얼이 없는 상태에서 울산 동구의 사례는 많은 시사점을 남겼다. 무슬림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알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 교육청, 학교, 현대중공업, 다문화센터, 통역사, 지역 주민 등 한국인 30여 명을 인터뷰한 이 책은 좋은 교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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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마음사전
이정 지음 / 메이트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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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가 읽기 좋다. 강아지는 후각이 예민하다는 것, 질투도 하고 거짓말도 한다는 것. 꿈도 꾼다. 강아지는 잘못하면 졌다고 생각한다. 계속 혼낼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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