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 - 한국인이 알아야 할
함규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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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오.


이 책에서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학창 시절, 19세기 말 20세기 초, 너무 많은 이름과 사건과 일자들이 있어 제대로 공부를 못한 것 같다.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물론 기억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사건과 사건 사이의 맥락, 인물들의 관계, 거시적 그림 등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참 엇갈린 평가가 많은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 하지만 그 시대, 중화세계관에서 제국주의로 전환하는 블랙홀 속에서 '아는 만큼' 대응한 불운의 왕. 개인적으로 '소시오패스' 흥성대원군 밑에서 통치하다가, 명성황후 시해, 아들 독살 등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인생을 산 왕.


그 시대에서 '시민혁명'이라던지 민주주의를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광무 개혁 등 현명하지 못한 정책들을 펼치기도 했다. 동학교도와 독립협회를 수용했으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청과 러시아에 기대 보기도 하고, 중립국화도 추진해 보기도 했다. 국제법적 외교적으로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을 선언하고 미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의 힘을 보조수단으로 균형을 유지한다는 계획, 하지만 러시아는 1900년 이후 극동에서의 입지가 튼튼해지면서, 한반도에서 전보다 적극적으로 이익을 확보하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왜 영국은 일본과 손잡았을까? 만약 러일전쟁 때 영국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일본이 이기지 못했을 텐데. 영국이 수에즈 운하 통과를 불허했기 때문에 발틱 함대는 멀리 희망봉을 돌아오는 항로를 택해 동해로 진입하느라 몹시 지친 데다 중요한 시간을 소비해버렸다. 그리하여 1904년 5월에 도고 헤이하치로 연합함대에 격파되고 말자, 이제 러시아의 패전은 유력해 보였다. 승기를 잡은 일본은 고종에게 더욱 고압적인 자세로 나왔고 한일협정서가 체결되었다. 


고종은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활동이 의병을 몰래 후원하고 외국으로 밀사를 파견하는 일이었다. 최익현 밀조에서 의병 활동을 지원했다. 최익현은 하루 40전을 병정들에게 꼬박 지급했다. 무기 구입 비용 등은  황실 금고에서 나왔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도 을사조약 무효 선언서를 1905년 보냈지만 친일파인 루스벨트(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에 매료되었다고 함)는 이를 무시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를 파견하고 이준과 이상설은 이위종의 통역을 통해 한국인의 울분을 여러 나라 대표들 앞에서 토로했다. 이위종은 유창한 프랑스어로 3시간 넘게 연설했다. 하지만 이준은 화병으로 헤이그 땅에서 숨졌고, 이상설과 이위종은 해외로 망명했다. 

이로 고종은 강제로 양위조서를 가필한 것으로 되어 순종 즉위식에 고종도 순종도 참석하지 않아 일제가 대리인을 내세우는 해프닝이 일어난다.


1919년 1월 20일, 고종의 죽음으로써 31운동이 촉발되었다. 마지막 저항이었을 것이다. 대한 독립 만세! 



광무개혁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기에는 꺼려지는 부분이 여럿 있다. 첫째, 그것은 국가가 정상적인 계획과 실행 과정을 거쳐 진행한 개혁이라기보다, 황재의 개인 사업과 마찬가지로 추진된 개혁이다. 모든 개혁은 국왕 직속 황실업무 담당기관인 궁내부에서 관장했다. 철도를 놓고 학교를 세우고 군함을 매입하는 등 국가의 중추 기능을 담당한 것이다. 광무개혁이 진정으로 근대 국가로 탈바꿈시키기위한 개혁이 되려 했다면 당시 경제구조인 토지 제도를 근대식으로 바꾸고, 공업과 무역발달을 위해 공장 건설, 무역회사 설립과 재정 지원 등에 대규모 투자가 이뤄졌어야 했다. - P266

1900년 의화단 사건. 무술을 내세운 정치집단 의화단과 그들에 동조하는 청왕조가 북경에서 외국 공관원들을 포위 압박하자, 그들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일본 8개국이 연합군을 구성해 북경을 공격, 점령하고 의화단원들과 일반 중국인들을 살육했다. 이 사건은 청왕조가 결정적인 몰락의 길로 접어드는 계기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러시아가 만주를 군사 점령하고 사건이 끝난 후에도 철수하지 않는 계기를 제공했다. 결정적으로 일진회가 매국노 집단으로 낙인찍히고 손병희도 천도교를 따로 만들고 일진회에서 이탈하여 독립운동 대열에 동참하게 되는 분기점이 1905년 11월 17일 2차 한일협약 즉 을사늑약. - P271

일진회의 뿌리는 강제 해산된 독립협회에 있었으며, 1904년 12월에 일진회와 합병한 ‘진보회‘의 경우는 동학교도들이 주축이었다. 특히 진보회의 가담으로 일진회는 서울의 소수 개화론자 단체를 벗어나 지방에서 상당한 세력과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손병희도 적극 참여. 봉건적 신분제의 모순과 세도 정치 타파, 서양 세력의 침투에 저항하는 것. 그래서 친일을 하게 됨. 동학교도들은 삼남 출신이 많지 않았고 평안도를 비롯한 북한 출신들이 두드러졌다. 송병준도 함경도 출신. 이들이 과거 농민전쟁에 거의 참여하지 않음. 조선왕조 수립 후 지역적 차별을 받음. - P279

영국인 베델 Bethell 1904년 대한매일신보 창간, 고종이 운영 자금 댐. 순우리말과 영문 두 가지 버전이 나옴.
고종은 과거 황국협회 내세워 독립협회 견제, 일진회의 도전에 국민회와 보안회 조직.
을사오적 : 박제순, 이완용, 권중현, 이지용, 이근택 -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느낌. 이지용과 이완용 집이 불탔고, 이근택과 박제순은 피습당했다. 박제순은 암살을 간신히 면한 다음 하야시 공사에게 달려가 자살하려다 경찰들이 붙잡는 바람에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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