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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 시대를 반역하다 - 일본 근현대 정신의 뿌리, 요시다 쇼인과 쇼카손주쿠의 학생들
김세진 지음 / 호밀밭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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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시다 쇼인(1830-1859)은 서른에 죽었다. 조슈번 하기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똑똑했다. 젊은 시절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지식인들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허가증 없이 부단으로 동북지방을 탐방했고, 사무라이 신분을 박탕당하고도 조슈번 주에게 다양한 건의사항을 올렸고, 미국 페리함대(1853년)에 접근해 밀항을 시도했다. 그 죄로 감옥에 갇혔다. 


쇼인은 존왕양이 운동과 에도막부 타도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다. 천황은 종교제사를 수행하는 존재였으나 메이지유신을 기점으로 신격화되어 절대권력을 갖게 됐다. 천황의 존재근거는 8세기경 만들어진 일본의 서적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담겨있다.

1192년 권력을 쥔 사무라이 집단은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천황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이를 활용했다. 사무라이 집단의 논리는  '일본은 신이 만들고, 신이 다스리는 나라다. 그 신(천황)을 대신해 사무라이 집단이 정치를 담당한다.'

사무라이 집단인 에도막부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양 세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국체를 지키자는 내용의 미토학은, 젊은 지사들의 목소리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나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에도막부를 없애야한다고 주장했다.

쇼인은 250년 넘게 안정적으로 이어져 온 사무라이 체제를 완전히 부정했다. 

쇼인의 한반도 정벌론, 소위 말하는 정한론은 고사기를 근거로 한다. 고사기는 정한론의 원형이다. 일본 역사학자 대다수는 고사기는 사실적인 근거가 없는 '신화'에 불과하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일본의 우익정치세력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상적 기반이 되는 문헌이다. 

일본은 신의 나라다라는 선민의식을 기반으로 한다.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며, 시마네 현으로 편입시키고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시마네 현의 초대 현령인 사이토 에조는 쇼인의 제자, 쇼카손주쿠 학생이었다. 그는 퇴직 이후의 여생을 요시다 쇼인의 유산과 쇼카손주쿠를 보존하는 주요 인물이었다.


쇼인의 침략론, 정한론, 그리고 다케시마 개척론은 쇼카손주쿠의 학생으로 총리까지 오른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일본 군국주의의 이론이 되는 탈아론과 대동아공영론에도 영향을 주며, 일본의 지도자들이 제국주의적 통치를 발전시키는데 밑거름이 됐다. 그가 조선, 만주, 훗카이도, 캄차카(러시아),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 호주에 걸쳐 그렸떤 일본의 '큰 그림'이 1940년대 태평양전쟁에서 잠시나마 완성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쇼인은 가는 곳 어디든 학교로 만들어버릴 만큼 재능과 열정이 있었다. 현대 일본은 도쿄와 하기에 있는 두 개의 쇼인신사에서 쇼인을 숭배한다. 감옥의 죄수와 간수들까지도 감화시키고 교육했던 쇼인을 학문의 신으로 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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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여관 - 나혜석.김일엽.이응노를 품은 수덕여관의 기억
임수진 지음 / 이야기나무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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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나헤석(1896-1948) - 수원 엘리트 명문가에서 태어남. 아버지 나기정은 시흥 군수, 용인 군수. 첩 여럿.

경성 진명여고 졸업

둘째 오빠 나경석 권유로 도쿄 미술학교 서양화부 유화과 입학

최승구와 연애. 이미 조혼. 여주공립보통학교 미술교사로 1년 근무. 최승구 병문안. 25세 죽음 이후 신경쇠약 걸림

<여자계>

 단편소설 '경희' 발표

나경석은 교토제구갣학교 법학과 김우영 소개 10살 많음. 

31운동 주동으로 감옥. 김우영 만세변호사

1920년 4월 10일 결혼

1921년 유화 70점 개인전

김우영 외교관. 세계일주 1년 8개월

파리에서 최린과 불륜 후 이혼

1935년 10월 소품전 실패

아들 김선 폐렴으로 사망. 수덕사 찾아감. (김일엽 만남. 만공스님은 제자로 삼지 않음)

수덕사 근처 유화와 조각 가르침. 이응노 가르침. 

파킨슨병. 중풍 악화. 

1948년 공주 마곡사 머물다가 나감. 무연고자 병동 서울시립자제원


2. 김일엽(김원주) 1896-

아버지 목사 김용겸, 개화한 어머니 5남매 중 장녀로 태어남. 

구세학교 삼숭보통학교 입학. 

어린 동생 12세 사망. 1907년 썻다고 전해지는 <동생의 죽음>은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보다 1년 더 빠르다는 겨 ㄴ해가 있어 신체시 또는 신시의 효시로 <동생의 죽음> 꼽음.

1909년 어머니 사망. 1915년 아버지 사망. 다른 동생들도 사망. 20세 고아


22세 유학파 교수 이노익과 결혼. 미국 네브래스카 웨슬리언 대학 졸업. 연희전문학교 화학 교수. 의족인 장애인. 일본 도쿄 영화학교 유학.

허영숙 나혜숙 만남 

이광수는 일엽이라는 필명 지어줌., 

나혜석과 <신여자> 창간. 4호만에 폐간.

남편과 이혼. 무종교 상태. 

노월 임장화와 자유연애론 정립, 개인주의 설파 <나의 정조관>

<인형의 가> 출간.  

백성욱 서양철학 공부 불교계 인사 만남. 출가

하윤실과 재혼. 1933년 출가 결심. 만공스님 문하로 들어감. 

1960년 회상록 '어느 수도인의 회상'

불교의 사회화와 대중화에 적극적으로 나섬

'이차돈의 사'

충남 예산군 수덕사 견성암 별실에서 열반. 



3. 이응노 1904-1989

흥성군 흥북면 중계리 중틀마을 출생. 가난한 양반가의 5남 1녀 중 넷째

그림그리기 좋아했지만 가족 인정 못 받음. 

16세 결혼. 사군자와 산수화 대가인 해강 김규진 문하에 등록하게 됨. 

3개월만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 아버지 시상식에 참가. 고려미술원에서 연구원으로 수학. 정규익, 나헤석, 김은호 등

전주로 내려가 개척사라는 간판집 열었음. 상업적으로 대성공. 페인트공 40명. 

효산 이광렬과 설송 최규상에게 사군자 배움., 

<청죽>이전의 그림은 죽은 그림. 창조성. 

그림이란 다른 사람의 작품이나 전통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애써서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고암으로 호 변경. 문인 정병조 하사. 

일본 유학 결심 1935년 

마츠바야시 게이게츠 제자로 들어감. 도쿄 덴코화숙 가와바타미술학교에서 동야화, 혼고연구소에서 서양화 배움

이응노는 요미우리 신문 보급소를 사들여 운영. 

수덕여관을 인수해 수리. 현판도 직접 씀. 

수덕여관은 원래 비구니들이 거처하던 절간. 

고암화숙을 열고 전통회화의 방향 모색하는 단구미술원 조직. 

수업료 받지 않음. 창의적 교육 시도. 

배정례, 금동원 원석연 이기우

1948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에서 초창기 주임교수. 후학양성에 열성적. 장학금. 

미술동맹에 이름 올림. 공산주의자 색출 조사에 시달림. 무죄 인정

한국전쟁 대 망함. 공산주의자라는 낙인. 아들 행방불명. 500여 권의 스케치북 사라짐. 

<출범><산> 록펠러재단이 구입. 현대미술관에서 소장.

해외로 눈을 돌림.

프랑스 초청장 받음. 최초 프랑스 개인전 

독일 주한서독 공사관 리하르트 헤르츠 만남. 독일 전시 추진. 독일 경유해 프랑스로 건너가기.  독일에서 승승장구. 1960년 파리 입성.


파케티 화랑으로부터 전속 계약 약속. 유학생들에게 돈 빌려줌. 송금 금지되자 생활고에 시달림. 

시장에서 종이 모음. 추상화 완성. 

미국 콜라주 작품 전시.

1964년 파리 세르누쉬 미술관의 협력으로 파리동양미술학교 개설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초대. 명에대상 받음. 

동백림 사건 - 북괴의 간첩으로 둔갑. 징역 3년. 1969년 3월 석방운동. 암각화. 

간장을 잉크 대신으로 화장지에 데생. 밥알을 매일 조금씩 아꼈다가 헌 신문지에 개어서 조각품도 만들기 시작. 


1977년 백건우와 윤정희 납치사건에 연루. 아들 이융세 화백 병역기피자로 낙인. 체포 영장 발부. 

1983년 10월 망명. 프랑스 국적. 

사군자와 서예롤 출발해 가장 한국적인 것을 세계적인 추상 미술로 만든 그의 작업은 한국화의 지평을 새로 열었다. 




1945년 이화여대 미대 1946년 서울대 미대 1949년 홍익대 미대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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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 교사 윌리엄 길모어, 서울을 걷다 1894 - 14개의 주제로 보는 1894년의 조선 그들이 본 우리 12
윌리엄 길모어 지음, 이복기 옮김 / 살림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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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에게 고용된 요리사는 세금을 안 내도 된다. 관료들이 현금 3만이나 4만 냥을 거둔다(5파운드). 조약 규정에 따라 외국 영사 외에는 구속을 집행할 수 없는 대상이다. 하급 관리의 강제 징수에 안전하다. 세금을 거절하면 날조된 죄목으로 감옥에 갇히기 된다. 돈을 줄 때까지 매일 매를 맞는다. 또한 고위 관직자들의 자녀는 예외 없이 성인이 되기 전에 높은 관직에 도달한다. 뇌물을 받은 시험관들은 뇌물 공여자의 답안지를 쉽게 찾아서 자랑스럽게 왕에게 보임으로써 높은 점수를 받게 만든다. (10만 냥)

당시 삼정문란, 매관매직, 잡세 등의 명목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백성들이 노동을 하고 싶게 만드는 유인책이 없다. 저자의 눈에도 한국인들의 게으름은 본성이 아니라 부패한 관리들의 탓이라고 한다. 


첫째 날에는 여섯 번, 둘째 날에는 일곱 번 식사 나왔다.
서울에서 하루 저녁을 보낸 첫인상은 중세 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어둠이 내리면 성문이 닫히기 때문에 도시를 둘러친 성벽을 넘기 전에는 도시 밖으로 빠져나갈 방법이 전혀 없다. 손에 등불을 거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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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2 - 침략에 맞서 들불처럼 타오르다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2
이이화 지음 / 교유서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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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사2>는 전주화약 이후 일본의 경복궁 점령, 청일전쟁, 전봉준 장군의 사형까지 담고 있다. 


1. 2차 봉기 - 삼례와 공주

청일전쟁의 과정을 상세히 담고 있다. 일본의 월등한 화력, 또 이때부터 조선의 땅을 자신의 노예처럼 부리고 군수물품을 대게 했다. 조선은 일본에게 토지, 건물, 도로, 전신 등 공공시설과 군부, 마소, 머을거리, 밀꼴 따위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병력을 강제 징용을 통해 조선 청년들을 채웠다. 조일양국맹약을 맺어 조선은 일본군의 온갖 편의를 제공하고 동학농민군이 재봉기를 할 시 일본군이 협력해 토벌작전에 나선다고 했다. 이미 1894년부터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 없었다. 

이를 몰라보고 동학농민군을 죽이려 나선 민보군과 관군. 정말 한심하다. 

민씨 정권이 몰락했다고는 하지만 나중에 민씨는 친일파로 다시 돌아온다. 김홍집은 군중에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 


청나라도 일본을 얕본 건 마찬가지다. 청나라도 당시 서태후의 부정부패로 나라가 망해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청나라는 해군력을 키우려고 국민 모금을 벌여 막대한 군비를 거두었으나 서태후는 이 돈을 빼돌려 생일 기념으로 이화원을 지었다. 해군은 부패했고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6개월 만에 청나라는 항복했고, 일본과 영국 사이에는 이미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것을 청나라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시모노세키 조약(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에서 청나라는 조선과 류큐 왕국에 대한 종주권을 완전히 잃고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줘야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동아시아의 강좌로 부상했다.


공주  전투에서 처참하게 농민군이 실패했지만, 그것은 모두 일본군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이미 황토현과 황룡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승리했기 때문에 관군만 대적했으면 농민군이 서울까지 진군을 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군대는 정예부대였고 신식무기와 유럽식 군사 훈련을 받은 군관들이 지휘를 했다.

"우금치 언저리에 쌓인 시체가 산을 가드가 메웠다. 효포의 개울에는 피가 가득 고여 흘렀다." 


모든 조건에서 불리했던 농민군이지만, 반외세 척왜를 내걸고 무능한 왕의 신하가 아닌 나라의 주인으로 죽어갔다.


2. 남조선대토벌작전

일본군은 농민군을 싹 쓸어 바다에 처넣거나 섬으로 몰아내는 소탕전을 벌임. 소남 서해안과 남해안 섬들은 유사 이래 많은 군대와 육지 사람들로 짓밟혔으며 자갈밭은 피로 얼룩졌다. 농민군은 일본군, 관군, 또는 수성군의 반격을 받아 대량 학살되었고 재산을 약탈당했다. 살아남은 농민군은 살던 고장을 떠나 산속이나 섬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정토군 사령관인 미나미 고시로를 비롯해 양호도순무영의 좌선봉장 이규태, 우선봉장 이두황, 호남초토사 민종렬. 


3. 전국에서 일어난 2차 농민 봉기

강원도, 충청도, 황해도 등 구체적인 활동들을 나열하고 있다. 


4. 전봉준 장군의 체포와 왜 3.30 기습적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는지 알려주고 있다. 갑오개혁 개정법에 따라 모든 재판과 소송은 2심으로 한다는 조항이 음력 4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공포했다. 그래서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성두한을 새벽 2시 3월 30일에 어두운 토굴에서 교수형을 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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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동학농민혁명사
신순철,이진영 지음 / 서경문화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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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사를 가장 이해하기 쉽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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