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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2 - 침략에 맞서 들불처럼 타오르다 ㅣ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2
이이화 지음 / 교유서가 / 2020년 7월
평점 :
<동학농민혁명사2>는 전주화약 이후 일본의 경복궁 점령, 청일전쟁, 전봉준 장군의 사형까지 담고 있다.
1. 2차 봉기 - 삼례와 공주
청일전쟁의 과정을 상세히 담고 있다. 일본의 월등한 화력, 또 이때부터 조선의 땅을 자신의 노예처럼 부리고 군수물품을 대게 했다. 조선은 일본에게 토지, 건물, 도로, 전신 등 공공시설과 군부, 마소, 머을거리, 밀꼴 따위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병력을 강제 징용을 통해 조선 청년들을 채웠다. 조일양국맹약을 맺어 조선은 일본군의 온갖 편의를 제공하고 동학농민군이 재봉기를 할 시 일본군이 협력해 토벌작전에 나선다고 했다. 이미 1894년부터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 없었다.
이를 몰라보고 동학농민군을 죽이려 나선 민보군과 관군. 정말 한심하다.
민씨 정권이 몰락했다고는 하지만 나중에 민씨는 친일파로 다시 돌아온다. 김홍집은 군중에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
청나라도 일본을 얕본 건 마찬가지다. 청나라도 당시 서태후의 부정부패로 나라가 망해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청나라는 해군력을 키우려고 국민 모금을 벌여 막대한 군비를 거두었으나 서태후는 이 돈을 빼돌려 생일 기념으로 이화원을 지었다. 해군은 부패했고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6개월 만에 청나라는 항복했고, 일본과 영국 사이에는 이미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것을 청나라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시모노세키 조약(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에서 청나라는 조선과 류큐 왕국에 대한 종주권을 완전히 잃고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줘야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동아시아의 강좌로 부상했다.
공주 전투에서 처참하게 농민군이 실패했지만, 그것은 모두 일본군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이미 황토현과 황룡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승리했기 때문에 관군만 대적했으면 농민군이 서울까지 진군을 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군대는 정예부대였고 신식무기와 유럽식 군사 훈련을 받은 군관들이 지휘를 했다.
"우금치 언저리에 쌓인 시체가 산을 가드가 메웠다. 효포의 개울에는 피가 가득 고여 흘렀다."
모든 조건에서 불리했던 농민군이지만, 반외세 척왜를 내걸고 무능한 왕의 신하가 아닌 나라의 주인으로 죽어갔다.
2. 남조선대토벌작전
일본군은 농민군을 싹 쓸어 바다에 처넣거나 섬으로 몰아내는 소탕전을 벌임. 소남 서해안과 남해안 섬들은 유사 이래 많은 군대와 육지 사람들로 짓밟혔으며 자갈밭은 피로 얼룩졌다. 농민군은 일본군, 관군, 또는 수성군의 반격을 받아 대량 학살되었고 재산을 약탈당했다. 살아남은 농민군은 살던 고장을 떠나 산속이나 섬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정토군 사령관인 미나미 고시로를 비롯해 양호도순무영의 좌선봉장 이규태, 우선봉장 이두황, 호남초토사 민종렬.
3. 전국에서 일어난 2차 농민 봉기
강원도, 충청도, 황해도 등 구체적인 활동들을 나열하고 있다.
4. 전봉준 장군의 체포와 왜 3.30 기습적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는지 알려주고 있다. 갑오개혁 개정법에 따라 모든 재판과 소송은 2심으로 한다는 조항이 음력 4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공포했다. 그래서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성두한을 새벽 2시 3월 30일에 어두운 토굴에서 교수형을 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