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 대전환, 학벌 없는 시대가 온다 - 7인의 전문가가 들려주는 채용과 교육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
손주은 외 지음, 교육의봄 기획 / 우리학교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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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어찌어찌 그래도 앞으로 나아간다. 견고한 벽처럼 생각되었던 일들도 시간이 지나고 뒤돌아보면 허물어지고 무너져 있음을 발견한다. 역사는 진보한다. 다만 속도가 다를 뿐. 변화의 중심에는 혁신가들이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을 걸어가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따라 우직하게 걸어가는 이들을 통해 사회는 조금씩 변화된다.

 

19세기의 교실에서 20세기 교사들이 21세기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뼈아픈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었다. 교육이 바뀌지 않는 것은 대학 입시 때문이라고 말하고 대학 입시가 바뀌지 않는 것은 기업의 채용 문화가 여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끈질긴 변화를 추구하기보다 높다란 벽 앞에 주춤거리고 포기해 왔다. 이런 와중에 혁신가들이 보이지 않는 분야에서 지속성을 가지고 견고한 벽을 두들기고 미세한 금을 내기 시작했다. 튼튼한 댐도 금기 가는 순감부터 위태해지는 것처럼 기업의 채용 문화가 학벌 중심에서 역량 중심으로 전화하기 시작했다. 대전환이다. 

 

학벌이 취업을 보장하던 시기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학벌을 쌓기 위해 명문대 입학을 위한 치열한 입시가 있어왔다. 일자리가 보장되던 시기였고 대학 정원보다 입시생이 많았던 시기에 좀 더 뛰어난 인재를 채용하기 위한 방법으로 줄 세우기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인재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과학적 검증 도구가 도입되고 실제로 학벌보다는 역량이 뛰어난 인재가 기업에 필요함을 인지한 사회적 분위기의 대전환으로 학벌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가고 있다. 

 

교육도 변화되고 있다. 지식 중심의 점수 내기 평가 방법에서 역량 중심의 과정 중심 평가 방법으로 전환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교육을 통해 미래 인재상을 키우는 것이 목적인데 그 미래 인재상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어떤 성과를 냈는지,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하고 어떻게 협력하고 소통했는지를 겸비한 사람이다. 몇 점을 얻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문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지, 다른 사람과 협업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하는지, 문제의식이나 공감 능력에 대한 소양을 가지고 있는지를 체크하는 것이 미래 인재 선발의 키워드다.

 

기업의 채용 문화와 교육의 변화는 함께 가야 한다. 현실을 바꾸는 것은 주장이 아니라 데이터다. 사람을 설득하는데 필요한 것도 데이터다. 현재까지의 데이터로는 과거의 교육으로는 미래의 인재를 키울 수 없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의 성공에 기여하는 사람, 다른 이들의 꿈에 기여하는 사람, 성장 마인드 셋으로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이 기업에 필요한 사람이며 결국 교육을 통해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상이다. 이미 기업은 대학 서열이나 성적이 일하는 능력과 상관이 없다는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 학벌과 자격증이 업무 능력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히려 지적 겸손과 수용성이 부족한 일류대 졸업생보다 실패를 딛고 일어나며 협업할 능력을 소유한 고등학교 졸업생을 선호한다고 한다. 

 

2024년이 바야흐로 문을 열었다. 과거의 교육 방식, 일하는 방식으로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 교육의 봄을 이뤄내는 원년이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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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교육, 광장에 서다 - 검은 점들이 한목소리로 외치는 교육 개혁
실천교육교사모임 지음 / (주)학교도서관저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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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교육은 갈수록 교육보다 행정에 치중하고 있다. 교원의 증가율보다 교육청 일반직의 증가율이 높다는 통계만 보더라도 교육 당국은 교실보다는 교육청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학생수의 감소로 교원의 수를 늘릴 수 어렵다는 논리라면 당연히 일반직의 수도 줄여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말이다. 급격한 시대의 변화로 학생과 학부모의 기대 수준도 높아지고 있다. 수십 명의 아이들을 한 교실에 몰아 놓고 가르치던 시대는 과거의 산물이다. 학생 수에 따라 교원 수급, 교육 재정을 끼워 맞추기보다 다양화된 사회에 걸맞게 새로운 시각으로 교육을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열악한 교육 환경 속에서도 교육이 지탱해 왔던 것은 최소한의 교육에 대한 존중과 예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일선의 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학교에 대한 존경심이 남아 있었던 때에는 콩나물시루와 같은 교실에서도 분명히 교육은 진행되어 왔었다. 학생을 맡아 수업과 생활지도를 하고 있는 교사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열정과 소신을 가지고 교육을 실천해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신뢰는 땅에 추락했고 교사를 상대로 고소와 고발이 난무하고 있다. 이유는 딱 하나다. 자신의 자녀가 손해를 보고 상처를 입었다는 극히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서 말이다. 부끄러운 사실은 우리나라 현재의 법도 교사의 손을 들어주기보다 터무니없이 주장만 내뱉은 소수의 몰지각한 학부모님이 악용하기 쉽게 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교사에게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라는 무언의 압박이 있다. 교사는 지금까지 학교의 현장의 소리를 부르짖지도 못했다. 사명감이라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윤리적 책임으로 교단을 지켜왔다. 사회는 학교를 자신의 욕구를 대리 만족시켜 주는 장소로 생각한다. 교사는 언제라도 부르면 달려와주는 배달원 취급을 하고 있다. 수면 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수많은 교사들이 보호받지 못한 환경 속에서 교육을 해 오고 있다. 교사들이 검은 점들이 되어 광장에 모인 이유는 딱 하나다. 제대로 교육하고 싶다는 의지다. 소신껏 교육할 테니 최소한 법적 보호 장치를 마련해 달라는 얘기다.  

 

권리를 누림에 있어 반드시 병행해야 하는 일이 책임이다. 권리와 의무는 공존해야 빛을 발한다. 교사의 권리도 마찬가지다. 교육을 할 수 있는 권리와 함께 교사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교육의 한 주체라 불리는 학부모도 마찬가지다. 학교 구성원들은 각자 맡은 역할을 법적인 보호를 받으면서 권리와 의무를 함께 해 나가야 한다. 특히 나와 같은 학교 관리자는 시대적 변화에 발맞추어 리더십의 방향을 수정해 가야 한다. 지시와 통제는 형식적이며 일회적인 효과만 나타날 뿐이다. 자발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학교 내 분위기를 조성해 가야 하며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소통의 자리에 나서야 한다. 상명하달식 시스템에 의한 학교 운영이 아니라 교직원들과 논의와 소통을 통해 함께 운영해 가는 학교 시스템을 구축해 가야 한다.  

 

갈 길이 멀수록 한 발자국을 발을 떼는 것이 중요하다. 보이지 않는 길이라고 해서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다. 실패를 통해 방법을 찾는다. 모두가 똑같을 수 없다. 생각이 다르다고 경멸해서도 안 된다. 학생, 학부모, 교직원이 함께 할 때 교육이 변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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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부모의 탄생 - 공동체를 해치는 독이 든 사랑
김현수 지음 / 우리학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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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한민국 교육이 흔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교육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교사가 존중받고 자존심이 짓밟히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모습은 정반대다. 학부모의 갑질은 도를 넘고 있다. 자기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고야 말겠다는 돌격대원이 된다. 자기 자식이 조금이라도 상처를 받으면 물불이 가리지 않고 학교로 쫓아오고 성질을 부린다. 그 학부모에게는 학교는 화풀이 대상이 되고 교사는 분풀이 대상이 된다. 사과를 받아야 직성이 풀린다. 자녀를 볼모 삼고 학교 위에 교사 위에 군림을 한다. 나는 현직 교감이다. 25년 이상 학교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최근 몇 년 동안 괴물과 같은 학부모를 자주 접한다. 아쉽게도 괴물 같은 학부모를 제지할 수단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우리 법의 현실이다.  

 

교사들이 마음껏 교육을 할 수 있도록 괴물 부모의 습관적 이상 행동을 막는 법이 절실하다. 학교는 늘 죄인이다. 정당한 교육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아이가 다치면 가슴을 쓸어내린다. 심지어 아이의 말만 듣고 교사가 잘못인양 다짜고짜 따지는 학부모들을 많이 본다. 교감이 죄송하다는 말을 연거푸해도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해야 그제야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전화를 끊는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되면 다시는 가만두지 않는다는 엄포와 함께 말이다.  

 

이게 우리 학교의 모습이다.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괴물 부모의 탄생은 오래전부터 예견되어 왔던 일이다. 일본과 홍콩에서는 이미 몇 해 전부터 학교 위에 군림하는 학부모들의 이상 행동들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고 하니 새로운 일도 아니다. 우리도 이런 불행한 전철을 밟고 있다고 하니 가슴이 아프다. 괴물 부모를 막아내는 일은 학교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학교가 무슨 권한이 있길래 괴물 부모의 출현을 제지할 수 있을까. 온 국민이 함께 교육을 지켜내야 국가의 미래가 온전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학교를 지켜내고 교사를 수호해 주어야 한다.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괴물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학교에서 금방 드러난다. 혼자 무언가를 결정하지 못한다. 늘 어두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부모의 강압된 양육으로 조용한 듯하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과도 같다. 괴물 부모가 만들어낸 불행한 결과다. 자녀는 부모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도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괴물 부모에게 있어 자녀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대리 만족 수단이다. 불행히도 괴물 부모의 출현 빈도는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경쟁 사회일수록 더더욱 그렇다고 한다. 학벌 사회는 부모의 괴물화를 가속화한다.  

 

나는 괴물 부모가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다면 정직하게 진단을 받아 볼 것을 권한다. 자녀의 문제 앞에 통제 불능해지는 것이 부모이기 때문이다. 괴물 부모는 누구든지 될 수 있다. 괴물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방법에 달리 뾰족한 방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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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을 위한 애도 수업
김현수 외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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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한다는 것은 함께 걸으면서 거울을 들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교사는 상실의 아픔을 겪은 학생들을 교실 속에서 만난다. 애도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학생들은 연령에 따라 슬픔을 받아들이는 강도가 다르다. 교사는 학생들이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스스로 치유하게끔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괜찮거니 하고 넘어가거나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것은 평생의 상처로 남을 수 있다. 요즘 생각지도 못한 사회 참사들이 일어나고 있다. 누구도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간다. 교사들은 나와 함께 학생들 중에서도 분명히 참사의 대상자가 있을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애도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 이유다.  

 

섣불리 애도하는 것은 하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 애도하는 방법에 대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애도자는 고통을 억지로 없애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애도자의 역할을 충분히 한 것이다. 머리로 분석하려 하지 말고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애도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애도자는 동반자로 서로 배운다는 마음으로 나란히 함께 있는 것이 최고의 태도라고 한다. 아주 쉬운 것 같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당황하게 된다. 미리미리 익혀두면 좋을 것 같다. 

 

위로하는 마음으로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문학 작품으로 책에서 리타 모란의 '부탁입니다'를 소개하고 있다. 궁금하시면 직접 찾아서 읽어보시라. 이 책에서는 141쪽~412쪽에 옮겨 놓고 있다.  

 

애도는 곧 위로하는 것이다. 긴 말보다는 짧더라도 마음이 전달되는 말 한마디가 진심으로 위로가 된다.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라는 말속에는 애도하려는 마음이 녹아있다. 이처럼 학교에서도 이제는 선생님을 통하여 애도 수업이 필요한 때라고 본다. 상처에 대해 진심 어린 위로를 가르쳐야 할 때다. 남의 일이라고 강 건너 불 보듯 할 것이 아니라 내일이 될 수 있기에 서로 아픔을 보듬을 수 있는 위로와 애도가 공적인 장소에서부터 실천되어야 한다.

 

학교 안에서도 위기대응팀의 애도에 대한 매뉴얼이 수립되어 혹시나 있을 수 있는 상황에서 우왕좌왕할 것이 아니라 교직원 모두 각자 맡은 역할을 책임감 있게 감당할 수 있도록 학교 관리자들은 인지하고 있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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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아이들에게 배웁니다 - 여전히 교실에서 희망을 찾는 15년 차 초등교사의 교단 일지
손지은 지음 / (주)학교도서관저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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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무엇일까? 

 

학교 안에서 관계를 힘들어한다.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학생과의 관계도 힘들어한다. 교사라는 직업은 학생과의 관계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학생과의 관계를 무척 어려워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학생과의 관계는 학부모와의 관계와 자동적으로 연결된다. 특히 학생의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학생과의 관계는 백발백중 학부모와의 관계다.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일수록 관계의 문제가 직업 만족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 같다. 힘들게 교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직을 주저하지 않고 결심하는 이유도 관계 때문이다. 아니 학부모와의 관계 때문이다. 왜 학부모와의 관계를 어려워할까? 

 

학부모와의 연락은 좋은 일 때문에는 거의 하지 않는다. 대부분 다치거나 싸우거나 상처가 났거나 피해를 입었거나 등등의 안 좋은 일 때문에 하게 된다. 불편한 감정의 대립이 이루어진다. 상식이 통하는 대화가 된다면 크게 상처를 받지 않지만 일방적인 요구와 다를 바 없는 대화는 선생님들의 마음을 닫히게 하고 트라우마로 연결된다. 학생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각양각색의 특성이 있는 학생들을 만나게 된다. 특성의 스펙트럼도 광범위해졌다.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난처하다. 웬만히 노련하지 않으면 대처하기 힘든 상황도 교실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학부모의 개입이 없다면 좋건만 자칫 잘못하면 신고의 대상이 되고 말기에 선생님들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다. 

 

"오늘도 아이들에게 배웁니다"  

 

도발적인 문장이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 자체가 힘든 선생님들에게는 아니 어떻게 아이들에게 배운다는 말이지?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라고 반문할 수 있겠다 싶다. 선생님의 시각 자체가 아이들 중심으로 바뀌지 않으면 도저히 흉내 낼 수조차 없는 문장이다. 교사인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 문제는 아이들 탓이다, 그리고 학부모의 지나친 개입 탓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아이들은 단지 어른인 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대상이지 내가 배워야 할 대상이 결코 될 수 없다.  

 

저자의 교직관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이 있다. 157쪽에 나와 있는 문장이다.  

 

"선생님이라는 이름에는 아이들의 삶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도 좋다는 허락이 담긴 것 같아서 참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사람의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응원을 보낼 수도,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아 줄 수도 있는 귀한 자리이니까요"  

 

아이들의 삶에 집중하는 교사에게는 같은 문젯거리라도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 골칫거리가 아니라 관심거리이며 부담거리가 아니라 사랑거리가 된다. 문제 학생이 아니라 관심 학생이 되며 민원 학부모가 아니라 상담 학부모가 된다. 떠나야 할 교직이 아니라 해볼 만한 교직이 되며 일찍 퇴근하고 싶은 학교가 아니라 머무르고 싶은 학교가 된다. 교사는 실력보다 사랑이 먼저다. 똑똑한 교사보다 우직한 교사가 필요한 시대다. 영리한 교사보다 가슴이 뜨거운 교사가 소중한 시대다. 아이들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교사라면 학부모와의 관계도 진솔하게 대할 것이며 진솔한 마음과 생각을 엿본 학부모라면 무례하게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교감을 바라보는 교사의 생각도 이와 같지 않을까. 진정성 있는 말과 행동을 보이는 교감이라면 교사들은 함부로 하지 않는다.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보인다. 학부모도 마찬가지다. 교감의 태도를 보고 학부모는 행동을 한다.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정확한 답은 내밀지 못하지만 공감하는 진솔한 마음을 보면 한 발자국을 자신의 요구와 생각을 내려놓는다.  

 

학생도 학부모도 교사도 모두 상처 입은 사람들이다. 상처는 피해의 흔적이다. 피해를 입은 사람을 앞에 두고 잔뜩 옳은 소리를 한다고 들을쏘냐. 그저 어루만지고 보듬어 주는 것이 먼저다. 관심을 먼저 가져주는 것이다. 말하기 보다 듣기가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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