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에서 4개월 남짓 살겠다고 왔을 때는, 정말 아무 것도 몰랐던 것 같다. 그냥, 단기간이니 출퇴근만 할 거고 주말엔 서울로 돌아올테니 어떻게 지내지겠지 라는 안이한 생각이 있었던 듯. 이제 두 달 정도 되었는데 사실 이제야 아, 안착이라는 느낌이 든다.

 

여전히 조금 더 피곤하고 살림이라는 것에 치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치인다고 표현하는 저를 용서하소서 ㅜ) 처음에 왔을 땐 이것저것 마련하느라, 송도라는 분위기를 기웃거리느라 분주했었고 이상하게 먹어도 소화가 잘 안되고 몸이 계속 안 좋았다. 회사 일이 일단 바빴기 때문에 오히려 처음 한 달은 어떻게 넘어가는 것 같더니만, 그 다음 한 달은 영 쉽지 않았다. 결국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많은 물건들을 사게 되었고 (으헝) 그 덕분에 조금 더 집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어 한결 편해졌다고나 할까.

 

일상도 이전과는 다른 것에 적응을 못했었나 보다. 그냥 출퇴근하고 차려주는 밥 먹고 퇴근하면 그대로 씻고 내 시간을 즐기다가 느지막히 자는 생활이었는데, 여기서는 뭐 치우고 씻고 닦고 빨고 하다보면 9시쯤 기진맥진하기 일쑤라 책도 못 읽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속에 불만감이 쌓였던 게 아닌가 싶다. 이제는 대충 라이프 사이클의 흐름을 타게 되어서 요일을 정해 빨래를 하고 밥을 할 때는 반찬을 어떻게 조화롭게 놓아야 하는 지 감을 가지게 되었고 청소는 이틀에 한 번 정도 슥삭슥삭 하자 하게 되었고 욕실이나 이런 곳은 2주에 한 번 정도 슥삭슥삭 닦게 되었다.

 

오늘 아침, 왠지 내가 이제야 적응이라는 걸 했구나 라는 느낌을 가졌다. 나름, 뿌듯하다.

 

 

 

송도에 와서 작년 11월부터 읽은 책들은 여러권이었지만 올해는 이 책이 처음인 것 같다. 오히려 주말에 서울 가서 읽은 책들은 있어도 송도에서는 당최 글이 읽혀지지 않아서 힘들었다. 누우면 자기 바쁘고 이런저런... 이 얇은 책 한 권 읽어내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다니... 허걱. 이다.

 

파트릭 모디아노를 좋아해서 소설들을 예전부터 읽은 것도 있지만 이 책은 제목이 마음에 들었었다.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참으로 낭만적인 제목이 아닌가. 표지도 맘에 들고. 흔히 가지는 프랑스소설에 대한 이미지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책이다 했다.

 

내가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 중에거 가장 감명깊게,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좋아하는 책은 역시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이다. 이 책이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 세계를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탔을 때 이 작품이 가장 주요한 게 아니었을까 했었고.

 

 

이 책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라는 작품도 그런 맥락의 작품이다. 가장 최근 것이고.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보다 좀더 몽환적이고 해답을 주지 않는 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느닷없이 찾아든 남녀. 60대 작가의 과거 속 어느 사람을 찾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그 남녀로 인해 작가는 자신의 어릴 적 과거를 기억하게 되고 그 속에 어떤 이들을 떠올리게 된다. 젊은 날에 한번씩 스치기도 했었지만 이젠 어디 있는 지 알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그 중 가장 찾고 싶고 기억하는 사람은 자신을 데리고 국경을 넘겠다 했던 여자.

 

그 미스터리한 분위기 속에서 마치 추리소설처럼 과거의 의문점을 찾아가는 것이, 과거와 현재, 더 먼 과거와 좀더 가까운 과거가 겹쳐지면서 작가의 기억을 대변한다. 그리고, 왜 그 여자가 자신을 데리고 가지 않았는 지, 기타 등등의 많은 의문점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불쑥 작품은 끝난다. 추리소설처럼 미주알고주알 파고 들어가서 원인을 찾고 범인을 물색하는 게 아니라, 그 상태에서 안개처럼 뿌연 상태에서 그렇게 끝. 괜한 허탈감이 밀려오는 마무리였다.

 

 

 

 

 

 

내가 읽었던 그의 책들이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대부분의 작품 주제가 '기억'에 있다. 알 수 없고 잊었던 기억들의, 갑작스러운 출몰.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되는 나의 모습. 과거와 현재와... 그 주변을 에워싼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서서히 존재감을 나타내면서 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 지가 드러나는. 이번에 역자의 해설을 읽으니 어릴 적 부모와 떨어져서 지내야 했던 성장과정이 그의 작품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이지만...

 

 

 

어제는 이 책을 다 읽고 그 전부터 읽고 있던 프리모 레비의 책을 이어 집었다.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책인데, 좀 두서가 없는 글들도 눈에 띄지만, 조금씩 재미있게 읽고 있다. 프리모 레비에게서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어제 이 책 잡고 누웠다가 머리에 떨어져서 아 더 볼까... 라는 마음을 과감히 접고 11시 반부터 취침하기 시작했다. 서울 집에서는 새벽까지도 책을 읽고 잤었는데 여기서는 도대체 그것이 불가능하니 원.

 

 

표지가 마음에 든다는 말도 하고 싶다. 케테 콜비츠의 작품.

 

진심으로 마음 아릿하게 읽었던 케테 콜비츠의 인생에 대한 책이 떠오른다. 책이 좋은 이유 중의 하나는, 내용이든 표지든 뭐든 이어지고 이어져서 끝없는 세계가 완성된다는 것에 있는 것 같다. 프리모 레비를 읽다가 케테 콜비츠를 기억하고... 오늘은 집에 가서 살림 하지 말고 이 책을 쭈욱 읽어나가는 행복한 시간을 누려봐야겠다, 아침부터 결심하게 되네. 허허.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17-01-18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도, 바람 많이 불어서 춥지 않나요.
신도시라서 좋은 점도 있지만, 아직 대중교통 이용은 조금 불편한 것 같더라구요. 4개월 예정이시면, 앞으로 두 달 더 송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네요.
비연님 좋은하루되세요.^^

비연 2017-01-18 13:26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 흑흑. 맞아요, 송도 바닷가라 엄청 바람이 불어요.
게다가 사실 아직 셋업이 다 안되어서 대중교통도 좀 불편하구요.
아무래도 서울을 벗어나면 어디나 좀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 재미난 얘기들 만들어서 들려드릴게요~^^

다락방 2017-01-1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비연님 이 글 되게 좋으네요. 좋은 글이에요. 송도에서 차츰 정착하시는 걸 읽는 것도 좋은데, 책과 책이 이어진다는 얘기를 하는 것도 참 좋고. 가만가만 읽었어요.

저는 어젯밤부터 ‘최윤필‘의 [가만한 당신]을 시작했어요. 이 책도 참 좋으네요, 비연님. 덩달아 가만해지고 싶어져요.

비연 2017-01-18 13:27   좋아요 0 | URL
락방님이 좋은 글이라 하시니 막 으쓱으쓱 이에요...우힛.
최윤필의 [가만한 당신] 작년에 읽었는데 넘 좋았어요. 글을 이렇게도 쓰는구나 싶었구요~

무해한모리군 2017-01-18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도에 온 것 환영합니다... 전 출퇴근이 너무 힘겨워서 얼른 탈출하고 싶어요.

비연 2017-01-18 13:28   좋아요 0 | URL
앗. 송도에 계세요? 정말 서울에서 출퇴근하기는 넘 힘든 곳이에요...
정시 출퇴근이라도 그런데 야근이라도 한다거나 하면... 작년에 저 그러다가 병났었거든요ㅜㅜ
건강 조심하며 다니시구요. 탈출... 탈출... 홧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