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늦잠을 잤다. 연휴 전날이라 일어나기 싫었던 모양이다. 늦잠도 잔 주제에 머리 드라이가 잘 안 되어 시간을 배는 썼다. 회사 가겠다고 대충 차려입고 나오니 시간이 꽤 지났고 그 시간은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등교를 하는 시간이었다. 아. 버스 붐비겠네. 라는 마음에 좀 싫은 마음이 들었지만, 늦게 일어나서 그런 걸 어쩌나. 암튼 지각을 면하려면 얼른 타야한다.

 

회사 가는 버스는 두 대가 있다. 회사 바로 앞에 서는 행운을 누리고 있는 나로서는 그 중에도 또 가리는 버스가 있다. 하나(파랑)는 바로 가는데 다른 하나(초록)는 꽤 돈다. 안 막힌다는 것을 전제로... 15분 정도는 차이가 나는 것 같다. 파랑 버스를 타고 싶었는데 아뿔싸. 11분이나 남았단다. 이 버스는 도대체 맨날 배차시간 간격이 넘 크다고 투덜. 4분 뒤에 온 초록 버스를 탈 수 밖에 없었다. 초록 버스는,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로 가득이었다. 열심히 비집고 겨우 카드를 찍은 후 매달려 탔다. 어차피 중학교가 바로 코 앞이라 몇 정거장만 참으면 되는 것이다.

 

한 정거장 뒤에 안 쪽에 여유 공간이 생기길래, 쓰윽 들어갔다. 마침 자리가 났는데 어떤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앉았다. 그 앞에는 두 남자아이가 포개듯이 앉아서는 장난치는 중이었고. 셋은 친구인 듯. 자리에 앉은 게 좋아서 키득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혼자 앉아 있는 남자아이가 날 보더니 엉덩이를 들썩.. 하면서 불안해하는 거다. 흠? 쟤가 설마 나를 보고 자리를 양보하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 순간 당황. 그러더니 그냥 앉았다. 괜한 안심.

 

근데 곧, 앞에 앉아 있던 두 남자아이가 벌떡 일어났다.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줌마가 안으로 들어온 거다. 요즘 애들이 되바라졌다고 해도 어른에게 자리도 양보하고 기특한 애들이 더 많아... 라고 생각했다. 아줌마는 사양않고 털썩. 그랬더니 그랬더니....

 

그 뒤에 앉아 있던 남자아이가 결국 날 보면서 일어나는 거다!!!

 

헉. 어쩌지? 머릿 속에서 순간적으로 수만가지 생각이 왔다갔다...

 

내가 그렇게 늙어보이는 거야? ... 라고 잠시 생각했다가

말할까? 얘야. 난 괜찮다. 너 앉으렴.

아니면 이렇게 말할까? 너 내가 그렇게 나이가 들어보이니? 그냥 앉아.

라는 생각들로 망설임... 주저.... 그러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털썩 앉아 버렸다. 아까 그 아줌마처럼.

 

그러니까, 내가 오늘 태어나서 최초로 '자리를 양보 받은 어른' 이 되어 버렸다. 자리 양보는 적어도 65세 이상 경로 우대증을 받는 분들에게나 해당된다고 생각해온 나로서는 충격. 앉아버린 내가 더 충격... (피곤했다고 조용히 변명해본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쟤네는 나를 '상당히' 나이많은 어른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엄마나 이모뻘? 중학생이래봐야 10대 중반이니 말이다. 아. 사람 이렇게 되는 거 한순간이구나.. 라는 마음에 괜히 씁쓸해졌더랬다.

 

세월이 가고 나이를 먹고 나의 다음 세대가 크고 그런 게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면서도 가장 쉬운 일이긴 하지만 막상 당하고 보면, 마음은 아직 이팔청춘인데 받아들이는 게 쉽지는 않은 것 같다. 노인분들 중에 자리 양보하면 막 화내는 분들도 겪어봤었는데... 그 분들 심정이 이제야 절렬히 이해되고 말이다.

 

어제 지진을 겪고 (사실 난 운동 중이고 집이 서울이라 느끼지는 못했다.. ) 아무리 사람이 잘난 척 하고 뭐라뭐라 해도 자연의 힘 앞에서는 다 성냥개비같은 존재구나 싶었는데, 오늘 나이의 힘을 겪고 보니... 사람은 누구나 비껴갈 수 없는 것이 있는 거구나. 그래서 공평한 거구나 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그나저나 요즘 피곤해서 더 나이들어 보이나. 피부과라도 가야 하나... 흑. 

(하고 또 못 받아들이는, 어리석은 비연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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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6-09-13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머 축하드려요^^ 어르신이 되셨군요..호호호
처음엔 좀 거시기하시겠지만 금방 익숙해지실거예요 ㅎㅎㅎ
참고로 저는 아직 뭐 어르신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비연 2016-09-13 13:07   좋아요 0 | URL
붉은돼지님... 흑흑흑. 금방 익숙해...지기 시러욧...ㅜㅠㅜㅜ

syo 2016-09-13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하, 65세 양보설은 비연님 기준이지요. 애들은 양보를 안하면 모를까, 할때는 대상의 나이를 어림하기보다는 그저 어른이다 싶음 양보하는 걸거예요.

비연 2016-09-13 13:07   좋아요 0 | URL
syo님. 그런 거겠죠? 그냥, 그냥 어른이라고 양보한 거겠죠? 왠지 위안이 됩니다...으흑..ㅜ

컨디션 2016-09-14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스 안 상황이 아주 생생하게 머릿 속에 그려집니다.^^ 원래 중딩 남자 아이들은, 자리 에 조용히(?) 앉아있는거 잘 못해요. 그 나이는 힘이 남아돌아 주체를 못하는데다 앞에 애들도 일어섰으니 같이 덩달아 일어서야만 했을..거라고...봅니다. ㅎㅎ 그러니 충격 같은 거 받지 마세요^^

비연 2016-09-14 21:23   좋아요 0 | URL
컨디션님... 흑흑... 위안받아 봅니다.. 감사요 으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