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가 있다. 책도 잘 안 읽혀지고, 페이퍼도 잘 안 써질 때. 컴퓨터 로그인은 수없이 하면서도 차마 페이퍼 쓰기로는 커서가 옮겨가지 않을 때. 내가 지금 그런 지경이다. 그러니까 이런 걸 일종의 슬럼프라고 하는가. 대단한 글을 쓰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내가 글을 올리지 않는다고 해도 누구 하나 섭섭해하지 않을 순 있지만 이상하게 내가 계속 찝찝하다. 알라딘에 책 이야기 쓰는 버릇이 거의 생활처럼 되어 버린 탓인가보다. 뭔가 해야 할 일을 안하는 것 같고 그래서 해야 하는데 왜 난 안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을 수없이 하게 되는, 그러면서도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지금 이 '슬럼프'의 시기에 이 책을 만난 것에 애석함마저 느꼈었다. 좀더 활발하게 글 쓸 때였으면 장마다 글을 썼을텐데, 책 한장 한장 빼곡이 밑줄을 그어대면서도 페이퍼를 하나 제대로 쓰지 않는 내게 화도 났다. 근데 어쩌겠는가. 인간의 무력함이란,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냥 지나가길 기다리는 수 밖에. 어쨌든, 이 책에 미안했다, 내내.

 

정말 좋은 책이다. 한 구절 한 문단 줄 치지 않고 넘어가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다 마음에 와닿고 마음에 새겨두고 싶은 글들이었다. 이론가가 사상책 여러 권 읽고 써내는 책이 아니라 실천가가 현장에서 정말 여러 사람을 만나고 행동하고 그 와중에 좌절하면서도 신념을 지켜나갔을 그 경험이 오롯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여성주의 책읽기를 하면서 이 책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매매춘을 애기하면 누군가는 얘기한다. 원래 있던 건데 어쩌겠어. 없앨 수 없어, 이건 남성의 욕망과 관련한 거야. 이런 직업을 택하는 여성들이, 여기에 생계를 의지하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그럼 이거 없애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 남자들은 어떻게 해. 없애지 못하면 유지하고 그들이 탄압받지 않고 잘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맞는 거 아니겠어.

 

너무 이상적이라고?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p374)

 

 

그래서 매매춘을 없애자, 여성에 대한 권력적 성 탄압을 없애자 라고 얘기하면 사람들은 말한다. 그건 이상이야. 현실에선 이루어질 수 없어. 이건 수천 년 전부터 이어왔던 일이야. 그래서 하지 말자고?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건 성경 말씀이다. 시작할 떄 될 거라고 생각하는 한도 내에서만 덤비면 이루어낼 수 있었던 일은 하나도 없다. 이 책에서도 얘기하지만, 노예제도가 그랬다. 지금 여건만으로 될 거라고 상상하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현실이지만, 원칙을 세우고 시간을 들여 지속적으로 투쟁하면 어느 순간, 이루어진다. 그게 역사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과학의 발전도 그렇다. 토마스 쿡이 말했었다.

 

 

과학의 발전은 선형이 아니다. 정상과학이라 믿고 있는 절대 논리 아래에서 계속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끊임없는 탐구와 노력이 일어나고 있다. 항상 올바른 길로 가지 않을 수 있고 이런저런 논쟁이 붙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계속 문제제기를 하고 여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만 밖으로 보이지 않거나 남들에게 무시될 뿐이다. 그게 말이 되냐?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 그러나 그게 모이고 모여 어느 새 대단한 동력이 되어 갑자기(아니, 예측할 수 없었던 타이밍에) 과학의 수준이 한 단계 높아지는 그 상태. 그게 혁명이다.

 

우리는 여성주의에서도 그런 혁명을 꿈꾸는 거다. 조금씩 발전하면서 조금씩 나아지기를 기대하는 바도 있지만, 인식을 전환하고 대반전이 일어날 그 날을 위해 지금 많은 사람들이 애쓰는 거다. 나는 사실, 그 힘을 믿는다.

 

 

 

 

 

기꺼이 정상적인 생활을 이끌고자 원하는 매춘부들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국가로부터 일정한 돈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기업이라도(민간이거나 공공 기업이거나) 매춘부들에게 고용을 제안하는 기업들은 모든 구체적 사례마다 그에 맞는 기금을 할당받을 것이다. 생산적인 노동을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창출하는 개혁 센터에는 신용 대부금을 줄 수 있다. (p375)

 

이미, 베트남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경제적으로 타격이 올 지라도 매매춘을 소멸시키겠다는 전략이 수행되고 있고 거기에 대한 정책적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불가능한 일이 아닌 거다. 생각이 바뀌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매매춘이 없는 세상....

매매춘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1820년대에 노예제 없는 미국을 상상하는 일과 같다. 미국에서 노예제가 한창일 때, 소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노예제가 사라질 수 있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생각을 품은 예외자 중에서 소수는 단호하고 열렬한 노예 폐지주의자였고, 대다수는 노예제가 불가피하는 일상에 만연한 이데올로기의 인정을 거부하는 페미니스트들이었다. 그들은 노예제가 역사 초기부터 있어 왔다는 주장에 포섭되거나 패배하기를 거부했다. 노예 폐지주의는 어떤 시기에는 전위적인 운동으로 여겨졌고, 또 다른 시기에는 사회의 다른 곳에서는 적용할 수 없는 괴상한 사람들과 노예제를 합리화하는 신성한 미국 헌법에 항의하는 기이한 사람들로 구성된 퇴행적인 운동으로 인식되었다. 단호한 폐지주의의 핵심 그룹은 그들의 주장이 대중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밀고 나갔다. (p391-392)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다. 노예제 대신에 여성주의(페미니즘)을 넣으면 딱 지금 현실이다. 놀랍지 않은가.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끝내 승리하던 '전지구적인 양식' 말이다.

 

 

매매춘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모든 여성에 대한 성 착취의 근절을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길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강간 위기 센터 활동과 학대받는 여성들에 대한 보호는 단지 내가 '에비앙 해결법'이라고 부르는, 즉 가뭄으로 고통받는 시골에 에비앙 물 한 상자를 보내는 일처럼 우리의 활동을 물 한 양동이에 물방울 하나를 더하는 것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p392)

 

그래서, 저자는, 매매춘에 국한되지 않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권력적 정치적 성 착취에 대한 체제를 없애야 한다고, 그래서 다른 새로운 세상을 열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여성들이 연대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 '연대'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하기 쉽지 않지만, 한번 하면 절대적인 파워를 드러내는 존재 양식이기 때문이다. 단지 매춘 여성에게, 그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세상에 성적으로 핍박받는 수많은 여성들의 상황 중 일부만을 개선하는 일이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라, 철학적으로 더 심층적인, 저변에 깔린 상황들,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어리든 나이가 들든 가난하든 가난하지 않든(패트리샤 허스트의 예를 보라) 여성이라는 성별로 인해 겪어야 하는 착취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인식하고 연대하고 투쟁하는 것이 필요하다... 라는 것을 재삼 확인할 수 있었던 책이었다.

 

이제까지 다양한 여성주의 책들을 읽었지만, 이 책은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완벽히 쉽지 않고 현실을 알려주면서도 이론적 배경을 생각하게 하고 또, 생각할 거리를 사정없이 던져주는, 좋은 책이다.

 

자, 이제 다음 책은 이거다. 만만치 않아 보인다... (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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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8-24 07: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베트남의 사례 읽으면서 하려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시도도 해보지 않고 그건 없앨 수 없어, 원래부터 있던거야, 라는 핑계로 사실은 개선할 의지 자체가 없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좋은 독서는 읽으면서 계속 생각하게 하는 독서고 그래서 좀 더 알고 싶게 하는 독서라고 생각해요. 이번 책은 너무나 그런 책이었고, 그래서 좋았습니다. 게다가 모두가 좋다고 얘기하고 이렇게 글을 써주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9월도서도 정말 만만찮아 보이지만...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우리 열심히 읽고 씁시다. 이렇게 여성주의 책을 읽고 쓰는 사람이 많아지고 자주 노출되는 건 작게나마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해요. 화이팅이에요, 비연님!

비연 2020-08-24 10:06   좋아요 1 | URL
이 책을 추천한 분의 통찰력에 감사하며(^^) 9월에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 저 책을, 자알 읽어내기로~
저도.. 아무 것도 없는 곳에 길을 내듯이, 작게 작게라도 자꾸 반복해서 얘기하고 그 얘기를 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면서 변화는 일어나는 것이라고 믿어요. 우리 함께 화이팅해요!

단발머리 2020-08-25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쓰기 전에 비연님 글 한 번 더 읽기.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의지하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네요.
다락방님이 제가 페이퍼를 쓰면 그렇게 고맙다는 말을 하는데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오늘 비연님 글 읽으면서 딱 그 맘이 느껴져요.
비연님, 고마워요. 하트뿅뿅! 😍

비연 2020-08-26 11:45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감사요^^ 하트뿅뿅~
이 책을 읽으면서, 다같이 읽는 기쁨을, 그리고 공감하는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 있어서 다시한번 행복했어요. 누구는,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자기들끼리만 좋아라 한다고 하지만, 사실 살면서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난다는 자체가 행운이 아닌가 싶구요. 앞으로도 홧팅해요 우리!

공쟝쟝 2020-08-26 07: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슬럼프라고 하기엔 넘넘 멋진 글! 저도 어려운데 홀릭되어 읽었답니다. 이걸로 양이 안차신다니... 다음 책에서는 슬럼프 없이 날아다니는 비연님의 페이퍼를 볼 수 있기를~ 플라이~~~>.<

비연 2020-08-26 11:47   좋아요 2 | URL
이제 슬럼프를 조금씩 벗어나나 싶은데.. 이게 같이 읽어야 하는 책이 있으니 어쨌든 계속 책을 잡아야 한다는 의무감 덕분인 듯 해요. 읽다보면 슬럼프를 벗어나게 되는? ㅎㅎ 다음 책은..흑흑. 슬럼프 아니라도 뭔가 많이 힘들 것 같지만, 우리 다 같이 플라이 플라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