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야, 백인남자가 세상 모든 것을 다스리는 지배자란다. 흑인남자가 힘을 쓸 수 있는 세상이 저 바다 어디엔가 있을지 모르겠다만 본 적이 없으니 알 수 없지. 백인남자는 자기가 할 일을 흑인남자에게 던져 주고 그 짐을 들라고 한단다. 흑인남자는 어쩔 수 없이 그 짐을 받아들기는 하지만 짊어지지는 않는단다. 대신 그 짐을 여자식구들한테 들이민단다. 내가 보기에 흑인여자야말로 이 세상의 짐을 지는 노새란다. - 조라 닐 허스톤, 1937, 16 (p93)

 

 

이 책을 읽다보니 두 개의 영화가 생각났다.

 

 

 

 

 

 

 

 

 

 

 

 

 

 

 

 

 

<HELP>는 원래 원작이 있다. 문학동네에서 나왔는데 캐스린 스토킷이라는 작가가 썼다. 저자의 경험을 토대로 백인 가정에서 일하는 1960년대의 흑인 가정부들이 한 젊은 백인 여성과 연대하여 변혁을 일구어내는 이야기이다. 그 당시에는 백인 가정에 하루 종일 있는 흑인 가정부들이 있었고 그들이 생활의 전반과 육아를 담당하였었다. 충격이었던 것은 화장실을 같이 쓰지 않기 위해 따로 만드는데, 집안도 아니고 바깥에 덩그러니 만들어서 화장실 가고 싶을 때는 집문을 열고 나가서 가야 한다는 대목에서였다. 그들에게도 남편과 자식이 있지만, 가정부로 하루종일 일하다보니 오히려 자신의 가정에는 소홀해 지게 마련이고, 백인 가정에서는 가족인 것도 아니고 가족이 아닌 것도 아닌 상태로 있게 되는 흑인여성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 책 <흑인 페미니즘 사상>에서는 이것을 "내부의 외부인(outsider-within)"이라고 했다(p38).

 

 

흑인여성은 백인 "가정"에서 일하면서 가사노동의 의무를 다했을 뿐만 아니라 종종 자신들이 양육하는 백인 어린이와 그리고 고용주와 강력한 유대를 형성했다. 어떤 면에서 백인가정의 내부인(insider)이 된다는 것은 관계자 모두를 만족시켰다. 흑인 가사노동자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여성들이 인종차별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자기들을 신비화함으로써 자신들의 노동을 착취한다는 점을 꿰뚫어보는 탈신비화 과정을 겪으며 이 과정이 스스로를 긍정하는 경험으로 이어짐을 관찰할 수 있다. 동시에 이 흑인여성은 자기들이 일하는 백인 "가정"에 결코 소속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노동자일 뿐이며 백인 가정의 외부인이다. 흑인여성 가사노동자는 내부의 외부인(ousider-within)이라는 흥미로운 사회적 위치에 처하며 내부의 외부인 위치는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흑인여성 고유의 관점을 가지게 한 특수한 주변적 위치이기도 하다. (p37-38)

 

이 책/영화는 인종차별이라는 까다롭고 어쩌면 어두울 수 있는 주제를 따뜻하게 풀어나간다. 책이든 영화든 재미있고 세 여성의 연대는 감동을 자아낸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읽으면서 흑인여성이 노예제도가 있던 시대와 그 시대 이후를 거쳐 가사노동자로서 경험했어야 하는 대목들이 나올 때마다 이 책/영화가 떠오른다. 정확히 책에서 애기한 상황을 소설과 영화로 나타내어서 머릿 속에서 좀더 이해가 쉽다고나 할까.

 

<헬프>는 마틴 루서 킹을 위시한 흑인 지도자들이 시민권 운동을 벌이던 시기,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서서히 미국 전역을 휩쓸던 시기인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자신의 아이들은 남에게 맡기거나 집에 버려둔 채, 생계를 위해 백인 가정에 들어가 그 집을 위해 일하고 백인 아이를 돌보아야 했던 사람들. 작가 캐스린 스토킷은 자기에게 어머니와 같았던 흑인 가정부 디메트리를 떠올리며, 자신이 한 번이라도 진정으로 그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를 자문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이 민감하고 어려운 소재를 소설로 탄생시킨다.


인종에 대한 차별, 남녀에 대한 차별, 계급에 대한 차별,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놓은 거대하고 높은 벽. <헬프>는 접점이 별로 없어 보이는 세 여성이 함께 이 거대한 벽에 도전하는 이야기, 그러한 작은 힘들이 하나둘 모여 거대한 벽을 허물고 세상과 삶을 보다 인간답게 그리고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이야기이다. (알라딘 책 소개 中)

 

 

 

 

 

 

 

 

 

 

 

 

 

 

 

 

 

<Hidden Figures>는 영화로 봤다. 사실 책이 있는 줄 몰랐는데 원작이 있었네. (ㅜ)

 

나사와 나사의 전신인 미 항공자문위원회(NACA)에서 일한 흑인 여성 수학자들에 대한 실화 에세이. 1950년대와 1960년대, 노예 해방이 이루어지고 백여 년이 흐른 뒤지만 미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흑백 차별이 성행하고 있었다. 흑인 여성이 버스의 백인 칸에 앉았다가 승차를 거부당했고, 백인 식당은 흑인에게 음식을 서빙하지 않았으며, 흑인 입학을 명령받은 학교는 자진 폐교하여 아예 학생을 받지 않기도 했다.

남녀 차별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암흑의 시기에 흑인이자 여성으로서 자신들의 재능을 빛내 인류를 달에 보낸 인물들이 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닌 수십 혹은 수백 명이다. 그 숫자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그야말로 '히든 피겨스' - 가려진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기계가 아닌 인간을 칭하던 시절, 인류가 우주를 꿈꾸기 시작하던 그 시절에 흑인이자 여성으로서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자신들의 재능을 꽃피운 그녀들의 이야기는 한계를 극복하고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간 도전과 용기, 감동 그 자체이다.  (알라딘 책 소개 中>

 

 

이것은 실화다. 노예 해방 이후, 여전히 인종 차별이 만연해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 당하고 식당이나 대중교통에서 거부 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여성들의 경우는 말해 무엇하랴. 재능이 있어도 수업을 들을 수 없고 직장을 얻어도 무시당하고 그렇게 구석에 쳐박혀 있어야 했던 여성들이, 수학자들이, 우주선을 띄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는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무시당하던 흑인여성들이 실력으로 의지로 노력으로 하나하나 깨나가고 사람들에게 진한 인상을 주고, 그래서 어느 순간 빛을 발하는 그 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그리고 그들이 흑인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세상의 벽을 향해 한걸음 나아갔기에 지금 21세기에 조금은 나은 세상이 왔다고 믿는다.

 

“그(그녀)를 데려오라.”

 

1962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 지구 궤도 비행을 앞둔 우주비행사 존 글렌은 뜻 밖의 요구를 한다. “그(그녀)가 괜찮다고 해야만 떠나겠다.”

 

사상 첫 지구 궤도 비행이다. 한 치 오차가 없어야 한다. 자칫하면 우주 미아가 된다. 그런 만큼 당대 최고 기술들이 총동원됐다. 가장 중요한 ‘비행 궤도’는 IBM7090로 계산했다. 지구상에 있는 컴퓨터 중에선 가장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제품이다. 그보다 더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기계는 없다.

 

그런데 그 순간, 글렌은 ‘그’를 찾았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그가 괜찮다고 해야만 떠나겠다.”

 

절체절명의 순간 글렌이 찾은 인물은 캐서린 존슨이었다. IBM 컴퓨터의 계산을 검증한 존슨은 “OK” 신호를 줬다. 그제야 존 글렌은 사상 첫 지구궤도 비행을 떠났다. (영화 中)

 

 

이 장면은 정말 짜릿했다. 존 글렌은 우주에 가야 하고 숫자 하나 틀리면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캐서린 존슨을 찾는다. 그가 괜챦다고 해야만 떠나겠다. 정말 저릿. 보면서 발끝에서부터 전율이 올라왔었다. 이런 신뢰감을 주었던 캐서린 존슨이 올해 10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NASA는 캐서린 존슨 별세 소식을 알리면서 “인종 평등의 선구자이자, 미국이 우주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또 “캐서린 존슨은 NASA에서 가장 뛰어난 영감을 가진 인물 중 한 명”이라면서 우주 영웅의 죽음을 애도했다." (ZDNet 기사 中) 라고 한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도 흑인여성 지식인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중요한 화두로 삼는다. 

 

 

오직 흑인여성만이 이러한 중심을 차지하며 흑인여성의 영혼을 파고드는 "강철을 느낄" 수 있다. 흑인여성의 경험은 다른 이들의 경험과 유사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독특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흑인여성이 주도적으로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생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서 다른 이들이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생산에 참여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현실을 정의하는 일차적 책임은 그 현실을 사는 사람, 그러한 경험을 실제로 겪는 사람에게 있다는 뜻이다. (p76)

 

 

100페이지 정도 읽은 지금, 사실 저자가 처음에 얘기한 것과는 달리 그렇게 녹록한 책이 아님을 깨닫는다. 빡빡한 글들 속에서 자꾸만 정신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려는 걸 간신히 붙잡고 읽고 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아주 먼 세상의 일이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수많은 경험들 속에서 뽑아낼 수 있는 이론이라는 걸 생각하고 읽는다면 좀 나을 수 있겠다 싶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흑인여성' 에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럴 수 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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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5-12 15: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오, 지금 시작 안한 사람은 저뿐인가 하노라... 이렇게 비연님도 글 써주시고..겟타님도 시작한다 하시고 .. 아직 펼쳐보지 않은 저는 초조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거 시작 전에 내가 좀 보고 싶은 책들이 있는데 아이참 큰일났네.

써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쓴 글 읽는 게 참 좋으네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될지 읽기전부터 기대되기도 하고요. 비연님, 열심히 읽고 계속 열심히 써주세요!

비연 2020-05-12 16:56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은... 늦게 시작해도 금새 읽을텐데요 뭐 ^^ 저도 읽고 싶은 책들 일단 뒤로 미루고 보고 있긴 한데.. 자꾸만 곁눈질을 하게 되네요 ㅎㅎ;;; 다락방님이 이 책 스타트 하시고 올릴 글들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

단발머리 2020-05-12 20:34   좋아요 2 | URL
늦게 시작해도 금새 읽을텐데요. 이 정확한 예언의 말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연 2020-05-13 09:2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5-13 13:40   좋아요 1 | URL
저도 시작한 후 금세 읽기를 바라지만 여러분들의 글을 보노라면 금세 읽히는 글이 아닌 것 같아서...지금 다른 책을 펴놓고도 고민이 많아요. 도서관에 책 안읽고 반납할까...

비연 2020-05-13 13:45   좋아요 0 | URL
병행을... 하기엔 시간이 부족하고. 이게 마치 교과서처럼 읽혀지는 것 같아요. 매일 조금씩 읽어야 달성이 될 느낌. 한꺼번에 다 읽기엔 머리에 부하가...;;;;

단발머리 2020-05-12 2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내부의 외부인, 저도 인덱스 해두었던 부분이에요. 백인 가정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의 가정을 돌볼 수 없었던 여성들에 대해서 저도 할 말이 있는데 그건 다음 페이퍼로 찾아뵙겠습니다.
저 아직 82쪽이고요, 이제 제대로 시동을 걸어볼까 하고 있습니다요^^

비연 2020-05-13 09:26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의 페이퍼, 기대하고 있겠나이다 ;)
전 이제 110페이지 정도인데... 우웅.. 좀더 속도를 내야겠어요~ 부릉부릉

공쟝쟝 2020-05-13 12:32   좋아요 1 | URL
저두 형광펜 쫙 체크 해놨어요~ 우히히

비연 2020-05-13 13:0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0-05-13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랄까 흑인여성의 이야기가 (멀리 동양 여성인 제게는) 약간은 멀게 느껴져서 인지, 저도 책을 보면서 영화들을 떠올려요. 영화속에서 스테레오타입화되었던 그녀들. 히든피겨스는 좀 봐야것네요. 인용이 많이되네 ㅋㅋ

비연 2020-05-13 13:02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 생각이 많이 나더라구요. 히든 피겨스 재밌어요. 추천.

블랙겟타 2020-05-13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두 영화 다 봤어요.. ㅋㅋ
헬프 같은 경우는 예전 사귀었던 사람과 처음 본 영화인걸로.. 기억이 나네요 ㅋㅋㅋ
둘 다 좋은 영화죠 ㅋㅋㅋ

다락방 2020-05-13 13:17   좋아요 2 | URL
저도 두 편 다 봤어요!

블랙겟타 2020-05-13 13:22   좋아요 1 | URL
두 영화에 다 나오는 배우도 있어요 ㅋㅋㅋ 옥타비아 스펜서라고.

다락방 2020-05-13 13:40   좋아요 2 | URL
그런데 둘다 뭐랄까, 결국은 백인이 끼어야만 구원되는 서사인 것 같아서 그건 좀 별로였어요. 히든 피겨스도 결국 화장실 간판 뽀개는게 케빈 코스트너의 역할이었잖아요.
그래서인지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록산 게이‘도 영화 [헬프]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죠.

˝나는 나 자신을 진보적이고 마음이 열린 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에게도 치우친 부분이 있을 것이고 《헬프》를 읽고 영화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편향되어 있었는지 아프게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정말 심각한 문제는 《헬프》가 백인 여성에 의해 쓰였다는 사실이었다. 시나리오는 백인 남성들이 썼고 백인 남성이 연출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난 생각한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p.302)˝

˝사실 역사의 중심은 흑인이고 백인이 ‘도우미‘였다. 흑인 인권 운동의 기획자, 지도자, 운동가, 가장 밑바닥에서 활동한 노동자는 백인이 아니라 아프리카 아메리칸이었다.˝ (p.294)

비연 2020-05-13 13:44   좋아요 1 | URL
겟타님 ㅎㅎ 추억의 영화였다니.
다락방님. 사실 저도 그게 좀 불만이었어요. 백인에 의해 쓰였고 백인에 의해 문제가 해결되는 방식. 근데 또 생각해보면, 그렇게라도 애초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동등하게 맞설 기회조차 못 가져본다 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방향으로 했었어요. =.=; 소수자가 소수자만으로 어찌해보려한다는 게 이리 어려운 일인가 싶었죠. 그리고 어떤 계기가 주어질 때 확 낚아채기 위해서는 어쨌든 그 속에서 비등하는 힘이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싶기도 했구요.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비연 2020-05-13 21:14   좋아요 1 | URL
헉. 옥타비아 스펜서 이 배우, 찾아보니 심지어 <설국열차>에서 주연이었네요?!
근데 왜 기억이 안 나는 거죠....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