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몰려서 연구하는 학문이나 분야를 우리는 '주류'라고 표현한다. 살면서 이 주류에 끼고 싶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테지만, 그 주류의 잘못된 점을 간파하고 주류가 아닌 일을 가치있게 만드는 일에 열심인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이 책의 저자 낸시 폴브레가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돌봄경제학. 경제학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공부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허다한데 이 사람은 그거 다 외면하고 돌봄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경제학, 그들에 대한 관심, 그들의 가치를 얘기하고자 한다.
현재의 GDP 지수는 실제로는 해를 끼치는 것들에조차 긍정적인 경제 가치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대량으로 유출된 기름을 청소하는 데 돈을 썼다면 GDP는 상승한다. 기름을 뒤집어쓰고 죽은 가마우지나 물개는 아무 '가치'가 없으므로 GDP를 감소시키는 걸로 간주하지 않지만, 기름으로 범적이 된 해안을 청소하기 위해 고용된 노동자들의 임금은 GDP에 산입된다. 홍수나 태풍이 집과 건물을 파괴할 때 돈으로 평가한 가치가 손실되었다고 한다. 자원의 감가상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해가 수질이나 공기의 질을 떨어뜨리거나 기후의 변화를 야기하면 가치의 손실이라고 계산하지 않는다. 일차적으로 자연 자원에는 가치를 부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삼나무가 캘리포니아 원시 우림에서 잘려 나갈 때는 생산된 통나무가 팔린 액수만큼 GDP가 증가한다. 나무 자체에 체화되어 있는 자연 자원이나 생태학적으로 나무들에 의존하고 있던 식물과 동물 종들의 가치의 손실은 전혀 감안하지 않는다. '생산되지 않은' 것들로 간주된다. 우리는 어머니 자연을 우리 자신의 어머니처럼 당연시한다. (p111)
만약 내가 아래의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 저자의 궤변인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러니까, 우리가 경제지표로 삼는 그 너무나 일반적인 GDP를 부정하고 있으니까. GDP의 산정 방식에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하지만 꼭 필요한 가치의 손실은 들어가지 않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논의들은 이미 다른 나라에서도 제기되고 심지어 위원회까지 꾸려서 얘기되고 있었다. 어디? 대표적으로 프랑스.
이 책의 서문에는 심지어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의 글이 실려 있다. 제목도 <GDP는 상승하는데, 사람들의 생활은 왜 더 어려워지나> 이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가 경제 성과의 측정 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우리의 행동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내 확고한 믿음이다." 놀랍다. 대통령이 이런 글을 써서 서문에 넣는 나라.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만든 위원회는 조지프 스티글리츠, 아마르티아 센, 장 폴 피투시라는 놀라운 경제학자들이 참여했다. 이들 중 앞의 두 사람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이다.
국민의 희망사항을 들어주고, 그들의 복지를 위해 노력하는 정치 지도자는 정반대의 길을 걸을 것이다. 그들이 경제 성과를 자기 뜻대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와 관련해 국민의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국민은 환경을 비롯해 삶의 질에 관한 여러 요소들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현재의 계량 방식은 환경을 개선하면 성장 지표는 악화될 수 없다는 식의, 마치 둘 사이에 상쇄 효과가 있는 것처럼 말한다. 만약 우리가 행복지수를 측정하는 포괄적인 방식을 가진다면, 이런 성장 지표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환경이 개선된다면 통상적인 방식으로 측정된 산출지수는 낮아져도, 인류의 행복지수는 높아질 수 있다. (p25)
이 위원회 보고서(이 책)는 2010년에 나왔다. <보이지 않는 가슴>은 2001년에 쓰여졌고.. 그렇게 세상은 좋은 방향으로 생각이 전환되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처럼 천박하게 무슨 말을 해도 먹고 사는 것만 얘기하는 곳에서 이런 토론이 될 리는 만무하다는 게 정말 슬프지만, 어쨌든 이런 논의들이 세상의 지성인들 사이에서는 이루어지고 있다.
다시 <보이지 않는 가슴>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는 항상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왜 엄마는 은퇴가 없나 이다. 아빠만 일을 가졌든 엄마와 아빠가 일을 다 가졌든 아빠는 직장에서 은퇴하면 집에서 자기 일만 하지만 엄마는 직장에서 은퇴해도 밥하고 설겆이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이런 가사노동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 지금의 세대는 이렇게 완전히 도맡아 하는 건 점점 적어진다고 해도, 여전히 이 몫은 엄마다. 그래서 엄마가 힘드니 도움을 청하자.. 고 도우미를 들이면 그 분도 여성이다. 여성의 편안함을 위해 여성의 노동을 빌려야 한다. 딸이나 아들이 아이라도 낳으면 엄마가 도와주게 된다. 친정엄마 혹은 시어머니 찬스. 힘들다고 하면 보모를 들인다. 역시 여성이다. 나이가 들어서 요양원에라도 가게 되면 거기서 노인들을 돌보는 사람도.. 대부분 여성이다. 그러니까 낸시 폴브레의 문제제기처럼 이 세상은 이러한 노동이 버티고 있기에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음에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 당연함 때문에 정당한 보수를 허락하지 않는다.
여성은 오늘날 엄청난 어려움과 긴장을 겪으면서도 돈벌이와 돌봄을 병행하고 있다. 후기 산업 사회의 복지 사회는 그 어려움과 긴장을 제거할 수 있도록 제도를 뜯어고쳐 남성도 여성과 똑같이 돈벌이와 돌봄을 병행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이것을 보편적인 양육자라고 부를 수 있겠다. - 낸시 프레이저, <훼방받는 정의: 사회주의 이후 상황에 대한 비판적 고찰 (p310)
너무나 지당하다. 남성이 그렇게 하면 경제가 안 돌아간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면 입닥치라고 말하고 싶다. 설사 그렇게 해서 정말 경제가 안 돌아간다 해도 (그럴 리 만무하지만) 같은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같은 부담을 주는 건 당연한 것이다. 모성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여성이라고만 생각하는 자체가 불평등이다.
교육의 사례를 상당히 많이 들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지금 상당히 문제가 많이 되었던 부분이지만, 평등이라는 것은 늘 그렇듯 하향 평준화가 아니다. 돈을 한쪽에만 몰지 말고 다 같이 돈을 투자해서 교육시키자 라고 하면 부유한 사립학교에서는 수준이 저하될 것을 우려한다. 그러지 말고 예산을 잘 짜서 다 같이 상향평준화할 수 있는 수준의 돈을 투자하면 된다.
우리는 타인을 더 돌보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어떻게 돌봄을 조직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고 공평한 것인가에 동의하지 못하면 모두 돌보지 않으려는 유혹에 쉽게 빠져들 것이다. 정부를 이용하여 그런 조율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 문제 해결에는 돈이 들 것이고, 남성에게서 여성에게로, 부모가 아닌 사람에게서 부모에게로, 부자에게서 가난한 사람에게로 자원의 재분배가 대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원한다면 그것을 보모 국가라고 불러도 좋다. 나에게는 그 말이 가족 국가처럼 들린다. (p150)
그렇게 재분배하기 위한 철학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언제까지 한 쪽 성별에 기대어 낮은 보수와 낮은 대우를 주면서도 그걸로 충분하지? 그건 너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니 라는 말로 사람을 몰아가며 버텨나갈 수 있겠는가. 세상의 버팀목이 되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게 사라지면 세상의 체계 자체가 위협될 수 있는 그런 곳에 관심을 더 기울이고 거기에 자원을 투자하고 그래서 평등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을 멈추면 안되는 것이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확인할 수 있었다. 세상이 변하는 것은, 작은 노력들이 모여 느닷없는 변혁을 통한다고 알고 있고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겠다) 따라서 지금 이 책처럼, 프랑스의 위원회처럼 조금씩 조금씩 문제를 제기하고 변화를 위해 화두를 던지는 것부터가 변혁의 시작이요 토대일 수 있겠다. 이것이 진보라면 진보일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