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시몬 드 보부아르가 이 책의 초판을 낸 연도이다. 그러니까 70년 전에 이 책이 나왔다. 아 근데 지금 읽어도 전혀 이질감이 들지 않는 이 책. 촘촘빽빽에 여백도 별로 없고 책 중간에 그림 하나 없는 이 지루해보이는 책이, 내게 흥미로 바짝 다가오는 것은 왠일인지. 처음에 펼쳐들었을 때, 가슴이 턱 막힐 정도로 책의 밀도가 너무 높아보였었는데 읽다보니 시몬 드 보부아르는 천재로구나, 생각보다 재미있구나 라는 생각이 많이 들고 있다. 열심히 열심히 읽어도 진도는 많이 못 나가지만. (두 권 다 합해서 1,000페이지다. 허허허)

 

여자는 난소와 자궁을 가지고 있다. 이런 특이한 조건 때문에 여자는 언제까지나 주관성 속에 갇혀 있고, 한정된 속성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여자는 자궁으로 생각한다고들 말한다. 남자는 자신의 신체에도 고환이 있으며 거기서 호르몬이 분비된다는 사실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산다. 남자는 자기 신체를 세계와의 직접적이며 정상적인 관계로 보며, 따라서 자신이 세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한편 남자는 여자의 육체를, 여성이라는 특성을 규정하는 것들로 억눌려 있는 장해물이나 감옥처럼 여긴다. (p18)

 

그래서 이러한 인식의 한계를 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성 토마스가, 미슐레가, 여자에 대한 설명을 남자를 기본으로 한다. 결국 남자는 '주체이고' 절대'이나, 여자는 '타자(他者)'이다. (p19) 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거론되는 이러한 생물학적인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여자를 정의하는 데에 턱없이 부족하다.

 

여자의 육체가 남자의 육체보다 더 연약한지 아닌지, 또 그것이 유인원의 육체에 더 가까운지 아닌지 하는 물음은 무의미하다. 막연한 자연주의를 그보다 훨씬 더 막연한 도덕론이나 심미론과 혼동하는 이런 논의들은 모두 말장난에 불과하다. 남녀 인류의 비교는 오로지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인간이란, 주어진 존재가 아니라 현재의 자기를 스스로 만들어 나아가는 존재이다. 메를로 퐁티의 아주 지당한 말처럼, 인간은 자연의 종이 아니라 역사적인 관념이다. 여자는 응고된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생성(生成)이다. 그러므로 이런 생성의 관점에서 여자와 남자를 비교해야 한다. 즉 여자의 '가능성'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많은 논쟁들이 그토록 과오를 범하는 것은, 여자의 능력을 문제삼으면서 여자를 과거나 현재의 상태로 고정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p64)

 

 

뭔가 생물학적인 측면을 얘기할 때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으나 그럴싸한 말로 얘기 못하고 속에서만 부르짖게 될 때 이 내용을 상기시키면 되겠다. 인간은 역사적인 관념이고 여성을 고정화해서 규정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라는 말. 생물학적 차이만으로 설명하려고 할 때는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생물학적인 육체를 타고 났지만 사회와 관계 속에서 유지하는 존재이므로 그런 맥락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기 위해 시도해야만 한다.

 

 

베벨이 묘사한 여자와 프롤레타리아의 유사성은 아주 훌륭한 근거를 지닌 셈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수적으로 열세하지도 않고 또 그들만의 집단이 형성된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존재는 역사적 발전에 의한 것으로서 설명이 가능하며, 또 그들이 그 계급에 배분된 것도 설명이 된다. 프롤레타리아가 언제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자는 언제나 있었다. (p21)

 

 

따라서 과거의, 현재의 여성의 억압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이 상황. 비슷한 처지의 계급, 대상, 부류 모두에게는 근원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여자는 계속 이 자리에 존재해 있었고 남자와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전혀 다른 방향의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 그것에 대해서 계속 고민한 필요가 있는 것이로구나. 시몬 드 보부아르가 일깨워준다.

 

예속현상은 객관적으로 자기의 우월성을 성취하려고 하는 인간 의식의 제국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의 의식 속에 타자라는 근본적 범주와 타자를 지배하려는 근본적 의지가 없었더라면, 청동기의 발견도 여성의 억압을 초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p86)

 

역사와 사회의 맥락 속에서도 어떤 내재된 무엇인가가 억압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생물학, 정신분석학, 유물론적 사관 등을 쪼개어 하나씩 예를 들어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무언가 통합적인, 실존적인 의미와 설명이 있으리라 보여진다...

 

내용이 많고 어려운 말들도 많지만, 그냥 내가 이해되는 만큼 조금씩 머리속에서 정리하고 있다. 주중에 도저히 시간이 안되어 주말을 틈타 좀더 읽어보려고 하는데, 글자수가 많아 진도 팍팍은 아니더라도 뭔가 지적인 부분이 채워지는 느낌, 그리고 설명 안되는 부분들에 대한 문제제기와 여러 설명들을 보면서 느끼는 충족감들로 인해 뭔가 좋은 시간이다. 아. 시몬 드 보부아르의 책을 제대로 읽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그냥 말로만 이런 사람이구나 라고 듣는 것과는 천지 차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다. 대단한 사람이다. 대단한. 70년 전에 이런 얘길 쓰다니.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들이 여전히 지금도 찬찬히 읽으며 나의 인식을 확대시킬 수 있는 자양분으로 작용할 수 있다니. 감탄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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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11-03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쌰으쌰!! 😣

비연 2019-11-03 18:07   좋아요 0 | URL
열심히 좇아가고 있습니다만... 역부족 -.-;;

카스피 2019-11-03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오래전에 간행된 제 2의 성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비연님 말씀처럼 촘촘빽빽에 여백도 별로 없고 책 중간에 그림 하나 없어 중간에 포기했던 기억이 나네요ㅜ,ㅜ

비연 2019-11-04 09:27   좋아요 0 | URL
정말 어렵다기보다 읽기 어려운 구조의 책이라는... 흑흑

다락방 2019-11-04 0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비연님. 정말 대다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우리가 지금 주장하고 있는 것들을 보부아르는 앞서 깨닫고 주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읽으며 내내 감탄합니다.
그리고 상권을 저는 다 읽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전하고 갑니다. 꺄울 >.<

비연 2019-11-04 09:21   좋아요 0 | URL
이 아침, 제게 좌절감을 안기는, 우등생 다락방님 ㅠㅠㅠㅠㅠ

공쟝쟝 2019-11-04 2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하하... 이런 글을 읽었던 것 같은 데 이런 내용이란 말이었다는 말인가?? 이렇게 물르르듯 한 번역이었어....(을유문화사 책을 집어던진닼ㅋㅋㅋ)

비연 2019-11-04 21:57   좋아요 0 | URL
공쟝쟝님 ㅎㅎㅎ 을유문화사 버리시고 동서문화사로 얼렁 갈아타소서 ㅋㅋㅋㅋㅋ

공쟝쟝 2019-11-04 21:59   좋아요 1 | URL
그럼 다시 읽어야 하잖아욬ㅋㅋㅋㅋㅋ!! 절레절레!!!💆🏻‍♀️ 후후!!

비연 2019-11-04 22:00   좋아요 0 | URL
헉 ㅎㅎㅎㅎㅎ

공쟝쟝 2019-11-04 2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힘내요! 저 뒤따라 가고 있어욥 ㅋㅋㅋ🏃🏽‍♀️

비연 2019-11-04 22:01   좋아요 1 | URL
컥. 저 이제 집에 왔어요 ㅠㅠㅠ 천천히 오세요 ... 흑흑

공쟝쟝 2019-11-04 22:02   좋아요 1 | URL
저 아직 도착 안햇다는 거 ㅋㅋㅋ (물론 늦은 퇴근 후 요가하러 왓지만요 ㅋㅋㅋ)

비연 2019-11-04 22:03   좋아요 0 | URL
와우 요가! 저 이제 씻고 제2의성 펼칠거에요. 불끈! (아 금방 코박고 졸듯 ㅠㅠ;)

공쟝쟝 2019-11-04 23:08   좋아요 0 | URL
20분뒤의 제 모습입니다. 가까운 미래...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