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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 수 있겠니
김인숙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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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겪은 사랑과 이별, 배신과 또다른 사랑은 어찌 보면 이 소설의 뒤를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쓰나미에 비해 정말 별 것 아닌 일이다. 하지만 자연재해로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최후의 시간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해 사랑한다거나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데 쓰는 걸 보면, 사랑이란 감정과 경험은 쓰나미만큼이나 거대한 사건이고 사고이기도 하다. 

"진은 그를 만나기 전에 몇 번의 사소한 연애를 거쳤다. 사소한 연애였으나 이별까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별은 슬픔과 남겨진 고독 때문에 매번 통렬했고, 환멸과 후회가 비 그친 후에도 벗지 못한 비옷처럼 질척했다." p.13  

그래서 이별이란, 아무리 겪고 또 겪어도 언제나 '통렬'하고 '질척'한 것.  

최근 SBS '짝'이란 프로그램의 일명 '돌싱특집'을 보면서 한 가지 느껴지고, 또 궁금한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연애하다 헤어지는 것'과 '결혼해서 살다 헤어지는 것'이 분명히 다르다는 새삼스런 깨달음과 그 두가지가 왜 그렇게 다른 것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진'은 '유진'을 만나기 전에도 이미 '몇 번의 사소한 연애를 거쳤다.' 그 몇 번의 사소한 연애와 유진과의 연애가 다른 점은 유진과의 연애는 결혼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변화와 결심과 또 배신이 진에게는 더 통렬하고 질척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애인의 배신과 남편의 배신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말이나 눈빛으로 한 약속과 서류상 약속의 차이인가, 애인과 헤어지면 쉽게 또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지만 남편과 헤어지면 다른 사람 만나기가 힘들어서인가, 애인과 헤어졌다고 다른 눈으로 보는 사람은 없지만 남편과 헤어지면 사람들이 다른 눈으로 보기 때문인가. 헤어질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헤어지는 것과 이제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헤어지는 일의 차이인가. 

잘 모르겠다. 겪어보지 않았고 겪어보고 싶지 않고 설사 겪어본다 하더라도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결혼하고도 먼 나라로 떠나 따로 살고 있는 남편의 배신은 한 평범한 여자를 살인자로 만들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것. 

7년이 흐르고, 여자는 매년 찾아간 그 섬을 다시 찾는다. 그리고 결혼을 목전에 두고 사랑을 잃은 또다른 한 남자, 드라이버 이야나를 만난다. 

"여자는 아마도 그 손의 주인이 걸어오는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파묻어버리고 싶었던 것은 정작 그 기다림이었을 것이다. 던져버리지 못하고 기껏해야 파묻었다가 다시 파내는 기다림이라니......" p. 65  

진은 유진을 기다리고, 이야나는 수니를 기다린다. 그러면서도 둘은 서로에게 끌린다.

"취하고 싶은 욕구와 취하고 싶지 않은 욕구가 동시에 여자의 붉은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p.74  

취하고 싶은 욕구와 취하고 싶지 않은 욕구, 되찾고 싶은 욕구와 벗어나고 싶은 욕구, 죽고 싶은 욕구와 살고 싶은 욕구, 삶은 이렇게 동시에 미칠 수 없는 두가지 혹은 그 이상의 욕구를 동시에 욕망하며 허비하기 쉽고 그래서 비극이다. 진과 이야나도 유진과 이야나, 수니와 진 사이에서 흔들리고 비틀댄다. 그러다 결국 서로를 통해서 과거를 극복하고 다음 단계의 삶을 준비하고 받아들이지만 나는 계속 그게 슬펐다.  

결국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어도 옛날로 되돌아갈 수는 절대로 없다는 것. 아름다운 섬을 덮친 쓰나미 피해를 복구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희망할 순 있어도 쓰나미가 덮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그 때의 죽은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 진과 유진이 어느 평범한 날 벤치에 앉아 옛날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흘러도 그 흐르는 시간은 내일을 향한 것이지 결코 어제를 향한 것은 아니다.  

"당신 나이 알아요. 그런데 왜 늙지도 못했어요?" 

"칭찬 아닌 거죠, 지금?" 

이야나가 다시 웃음소리를 내고, 어깨에 얹힌 진의 머리에 비로소 살짝 버티는 듯하던 힘이 느슨해진다. 

"봄이 오지 않아서요...... 늘 겨울이었거든요." 

"난 늘 여름이고요." p.208
 

진이 이렇게까지 늙지도 못한 채 어울리지 않는 젊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이유도 아직 아무것도 용서하거나 용서받거나 받아들이지도 못한채 그저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는 이유로 그만큼 변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모두에게는 7년이라는 시간이 저마다 흘렀지만 진에게는 멈추어있는 시간이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 벤치에서의 만남이 너무 슬펐고, 더 슬펐고,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다. 

"검색어에 지진을 입력하면, 수없이 많은 동영상들의 제목이 떴다. 진은 그 제목들을 클릭하지는 않았다. 제목만 봐도 마음속의 바닥이 흔들렸다." p.292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사랑도, 쓰나미도, 지진도, 그저 검색창에 입력하면 뜨는 몇 글자에 지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진은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내가 가장 예뻤던 시절에 널 사랑했다는 거, 그걸 너는 알고 있는 거지?" p.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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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걸 너는 알고 있는 거지?"
    from 야구가 끝나는 그때부터가 진짜 겨울 2011-07-21 23:51 
    한 사람이 겪은 사랑과 이별, 배신과 또다른 사랑은 어찌 보면 이 소설의 뒤를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쓰나미에 비해 정말 별 것 아닌 일이다. 하지만 자연재해로 죽음을 목전에 둔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최후의 시간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해 사랑한다거나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데 쓰는 걸 보면, 사랑이란 감정과 경험은 쓰나미만큼이나 거대한 사건이고 사고이
 
 
 
보광동 안개소년
박진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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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랫동안 서울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보광동’이 어디쯤 붙어있는지, 또 그 동네이름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가 어떤지 잘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광동 안개소년’이라는 제목만 봤을 때, 희미하게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었다. 문학에서 ’안개’라는 이미지는 워낙 강렬하고 지배적인 것이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보광동’이라는 동네와 그곳에서 산다는 ’안개소년’이라는 캐릭터.

1부 밤의 거리

예상대로 ’소년’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밝고 희망적인 명랑소설은 아니다. 주인공은 얼굴이 안개로 덮인, 할머니의 당부대로 "반지하방에 찹쌀떡처럼 붙어 있"다가 "밤에만 돌아다"니는 안개소년. 낯설지만, 그래서 뒷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눈에 띄는 발랄한 작가의 화법도 나의 기대를 부풀렸다. 

"립스틱을 바르면 입술이 탐스럽고 아이라인을 그리면 눈동자가 아련하게 초롱거렸죠." p.12 

"립스틱을 바르면" 입술이 탐스럽고 "아이라인을 그리면 눈동자가 아련하게 초롱거렸"다니. 이렇게 객관적인 표현을 통해 안개소년의 엄마는 타고난 미모가 있다기보다는 젊음 그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일 거라는 상상을 할 수 있게 됐고, 작가의 이런 예민한 표현이 좋았다.

그리고 동시에 이 표현은, 안개소년을 불쌍히 여기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기도 했다. 안개소년은 자기가 어리다고, 자기 엄마라고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가 무조건 예쁘다고 하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너무나 냉혹한 현실 속에서 어린아이다움을 잃어버린 데다, 자기를 버리고 도망간 엄마를 무조건 예쁘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일 거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안개소년에게 밤나들이는 그야말로 유일한 낙이다. 안개소년은 밤마다 걸어서 혹은 파란버스 막차를 타고 신사동으로 간다. 예전보다 더 늦은 시각까지 다니게 된 파란버스는, 파란버스를 운전하시는 분들에게는 피곤한 근무시간 연장에 지나지 않겠지만, 안개소년에게는 좀 더 많은 시간 동안 신사동 거리를 걸어다닐 수 있게 해준 세상과의 연결통로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렇게 파란버스를 타고 나간 거리에서 모든 일은 시작된다.  

"고등학생은 다 불안해." p.28  

그곳에서 안개소년은 자기를 두려워하거나 싫어하지 않는 ’지나’라는 소녀를 만나게 되고, 지나는 그저 고등학생이라서 불안하다. 그 덕에 둘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불쑥 안개소년은 지나에게 고백한다.

"나 너 좋아해."
그녀는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런 말은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p.34
 

참 짠한 대목이다. 안개소년은, 자기를 겁내지 않고 이렇게 같이 있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난지 몇시간도 되지 않는 소녀에게 ’좋아한다’고 쉽게 고백한다. 한번도 가족 아닌 타인과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으니, 타인과의 관계와 그 속에서 흐르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리도 없다.

그렇게 불안한 고등학생 소녀에게 빠져버린 안개소년은 오랫동안 밤마다 신사동 거리에서 소녀를 기다리고, 어느날 나타난 소녀는 성형외과 의사라는 사촌오빠를 소개해준다. 겁내진 않았지만, 소녀도 어쨌든 소년의 ’안개’를 일종의 ’질병’으로 보고 있다는 이야기다. 

안개소년은 그렇게 자신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올 사건에 휘말린다. 

"형, 그게 만져져요?"
선배는 고개를 저었지.
"암내처럼 냄새나는 것도 아니죠?"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어.
"그럼, 그건 못 없애요." p.53
 

신사동에서 만난 지나의 사촌오빠가 몸에 안개를 지닌 사람이 안개소년뿐만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리고 "재계에서 알아주는 기업가", 아마 "제일 유명한 안개남자일" 한 노인에게 안개소년을 데려간다.

2부 낮의 도시

그리고 일련의 사건 뒤에 안개소년은 낯선 낮의 도시에 내던져진다. 그곳에서 ’승냥이’ 윤덕호를 만나고 윤덕호를 통해 ’당나귀’ 강만호를 만나 또 한 번 사건에 휘말린다. 안개소년의 ’안개’를 이슈거리로 만들어 지하방에 숨어 나오지 못하던 안개소년을 인기인 ’안개소문’으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그의 인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여기에는 물론 자기 몸의 안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운 한 남자의 음모가 영향을 주지만 그가 아니었더라도 사람들은 곧 안개소문에 싫증을 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안개남자...... 남자... 다를 건 없지." p.197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지만, 이 대목은 또다른 안개남자의 혜안이랄 만큼 놀라운 통찰력과 잔인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솥뚜껑보다 놀란 가슴 자라보고 놀란다’고, 이미 신비의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된 안개는 실존 여부와 상관 없이 모두의 눈을 멀게 만든다. 그래서 ’안개남자’나 그냥 ’남자’나 다를바 없이 똑같은 파급력, 파괴력을 지니게 된다.

3부 안개로션

그리하여 ’안개소문’과 ’안개전염병’을 거쳐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안개소년’은 다시 밤에만 돌아다니는 생활을 한다. 처음 ’안개로션’이라는 3부의 제목을 보고는 꽤 멋진 작명이라고 생각했다. 안개소년은 이제 더이상 ’안개’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그저 ’안개로션’ 정도로,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한 단계 넘어 아픔을 일상으로 승화해낸다는 의미인가보다 생각했다. 물론 그런 의미도 담겨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개로션 개로션 개로션 개로...... 개로...... 개로...... 개로로로로 개로로로로 개로션." p.215 

그런데 안개소년이 일하게 된 나이트클럽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를 묘사하는 바로 이 부분이라니. 이 글자만 읽어도 어떤 음악을 묘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의 재치가 돋보이는 대목.

하지만 ’보광동 안개소년’은 전체적으로는 조금 아쉬운 소설이다.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각은 있지만 소설 한 권 안에서 너무많이 짚어내려고 욕심을 낸 걸까. 너무 많은 층위의 이야기가 조금은 단편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공감을 하면서도, 이야기가 좀 더 여러겹으로 쌓여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캐릭터 역시 너무 단순하고, 크게 변화가 없어 이야기가 다소 뻔하게 흘러가는 감이 없지 않다. ’이야기가 다소 뻔하다’는 지적은 사실 조심스럽다. 막상 나보고 쓰라면 이렇게 쓰지 못하고, 중간에 결말이 어떻게 될 것 같아 물어보면 틀렸을 지도 모르니까. 마치 현대미술작품을 보면서 ’저건 나도 그리겠다’ 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박진규 작가가 쓰는 다음 소설은 궁금하다. 다음 작품에서는 또 어떤 독특한 캐릭터가 탄생될까, 이제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해본 독자로서, 기다리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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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타이거
페넬로피 라이블리 지음, 김선형 옮김 / 솔출판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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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런 제목으로 글을 쓰려니 이상하지만, 워낙 신간평가단의 평가가 좋지 않은 편이라서 말이다. 아니, 뻔뻔스럽게도 기한을 한참 넘겨 리뷰를 쓰고 있는 내게는 다른 분들의 호의적이지 않은 평가가 오히려 책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결과적으로 만족도를 높이는 결과를 낳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좋았다. 

"세계의 역사를 쓰고 있어요." p.7

라는 첫문장 역시, 다른 분들의 리뷰를 미리 조금씩 읽어보았던 영향으로 다소 거만하고 젠체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줬다. 실제로 책의 꽤 많은 부분이 그렇게 대놓고 잘난 체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와 자기가 쓰려는 세계의 역사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나의 맥락 속에서 스스로를 명상해보자.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일까지." p.8  

"내러티브는 생략할 거야. 대신 살을 붙일 거다." p.9 

"그가 풍기는 향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 있는 거고, 우리는 잠자는 세계사들인 거야." p.122 

"언젠가 나는 엄청난 허세를 부리는 현학적인 책을 쓸 거야. 세계의 역사를 쓸 거거든." p.123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고 나니, 오히려 이 말은 "내 개인의 역사를 쓰고 있어요."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여겨졌다. 위의 문장에서도 그녀는 은근히 이렇게 힌트를 줬다. '세계의 역사'를 쓴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그녀가 쓰는 '세계의 역사'라는 것은 철저히 그녀의 '맥락 속에서', 심지어는 '아무것도 아닌 일까지', '내러티브는 생략'하고 '살을 붙'여 쓰여질 것이라고 말이다. 

자존심 강하고 꼿꼿한 젊은 여성이었던 그녀가 늙고 병들었다고 해서, 그리고 그렇게 세계 역사의 중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그녀가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했고 그 사랑을 잊지 못한다고 해서, 갑자기 자존심 버리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던 게 아닐까. 그러니까 "세계의 역사를 쓰고 있어요."는 죽음을 목전에 둔 늙은 여자의 헛소리쯤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것이 철저히 개인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될 거라는 걸 숨기기 위한 일종의 트릭 같은 것인 게다. 물론, 모든 개인의 역사는 '세계의 역사'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는 진실이 될 수도 있지만.  

 

"희한하게도, 집단의 과거라는 게 죄다 이런 식이야. 공공의 자산이지만 또한 심오하게 사적이기도 하거든. 우리는 모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니까. 내가 보는 빅토리아 사람들은 당신이 보는 빅토리아 사람들이 아니야. 나의 7세기는 당신의 7세기가 아니야. 존 오브리, 다윈, 아니 누구든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내게 이런 음조로 속삭이면, 또 당신에게는 다른 음조로 속삭이기 마련이지. 내 과거의 신호들은 내가 수용한 과거에서 나오는 거야. 타인들의 삶은 내 삶의 틈새에 끼워져서 철해지기 마련이라고. 나, 나, 바로 클라우디아 H." p.10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사적이거나 의미적이었고(차 마실 시간, 저녁식사 시간, 시간 낭비......)." p.12

항상 이단적인 시각을 제공하며 이견이 있는 집단과는 싸움도 마다 않는, 오히려 즐기는 클라우디아 햄프턴이었기에, 이렇게 자신 있게, 자신이 '수용한 과거에서 나오는' 역사를 '세계의 역사'라고 지르고 볼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딸에 대한 죄책감과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조금씩 조금씩 더 드러난다. '나도 알고보면 연약한 여자랍니다'까지는 아니라도, 그리고 의도한 게 아니었을지 몰라도.  

 

"하지만 진실은 말에, 활자에, 책장의 증언에 묶여 있는 거잖아. 순간순간은 소나기처럼 떨어져 사라져버려. 우리 삶의 나날들은 철저히 휘발되어버리니, 오히려 꾸며낸 삶보다 더 허망하고, 픽션이 현실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것 같기도 하지." p.16 

"옛날에는 용이 살았던 적이 있나요?" 

그래서 모든 증거들로 볼 때 그렇지 않을 거라고 했지. 

"하지만 용이라는 말이 있다는 건 한때 틀림없이 용이 있었다는 거죠." 

바로 그거다. 언어의 힘. 덧없는 것들을 보존하고, 꿈에 형태를 부여하고, 햇살의 반짝임에 영속성을 주는 그것. p.22 

그러니까 그녀는 자신이 '잘나고 독한 여자'로 실제로 살아온 삶을, 이렇게 글(언어)로 씀으로써 그녀가 원하는 대로 새로 정리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저 다른 역사가에 의해 이단아나 독설가로, 자신의 딸에게는 엄마 같지 않은 엄마로 기억되기 싫어서 말이다. 

 

1. 리사 

"하지만 자식의 불만은 묘하게 마음이 편치 않더군. 책상에서 고개를 들어보면 리사가 커튼에 매달려 손톱을 자근자근 씹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곤 했어." p.100 

이 얼마나 가슴아프고 섬뜩한 장면인가. 하지만 클라우디아는 그저 '묘하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는 정도로만 쓰고 만다. 그래놓고는 계속해서 중간중간 리사를 등장시켜 그녀의 생각을 독자에게 들려주는데, 그게 실제 리사의 생각인지, 리사가 그렇게 생각할 게 분명하다는 그녀의 자격지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2. 재스퍼

"운명은 확실히 재스퍼의 전문 분야야. 아주 딱 들어맞아. 운명을 지배하는 인간으로 말이지." p.75 

이 말은 클라우디아의 영혼의 동반자인 친오빠 고든의 입을 통해서 나오긴 했지만, 클라우디아 역시 재스퍼에 대해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클라우디아의 인생이 조금은 덜 다사다난했을 거라고 말하는 고든에게 동의를 표하는 걸로 봐서는 말이다. 그녀의 자존심이, 모두를 사로잡는 능력자, 심지어는 '운명'까지도 자신의 전문 분야로 삼을 수 있는 범상치 않은 이 남자를 단순히 섹스파트너이자, 그런 관계에서 어쩔 수 없이 우연히 비롯된 임신을 통해 태어난 딸의 아버지 정도로만 두려고 하는 것도 실제로는 자기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받은 상처가 크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자존심은 불안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p.124   

재스퍼 앞에서는 이렇게 자신의 불안을 감당하면서까지 자존심을 내세우는데, 이건 적어도 그녀가 '글로 쓰고 있는' 그에 대한 감정의 양과 깊이가 실제로 더 크고 깊다는 걸로 받아들여진다.

3. 톰 서던 

"당신을 만난 건 다 히틀러 덕분이에요." p.144  

의식 있는 그녀가 이런 말을 내뱉을 정도로 진짜 사랑한 남자는 소설의 중반이 가까워와서야 등장한다.  

"감정은 조용히 도사리고 있으면서 때를 기다린다. 그러다 아주 가끔 뭔가가 그 감정을 건드리면 포효하고 뛰쳐나오며, 그녀는 10년 전으로 고스란히 되돌아간다." p.278  

톰 서던은, 아무리 머릿속에서 혼자 쓰는 세계사라도 쉽사리 꺼낼 수 없는 이름과 추억(인 동시에 상처)이었을 거다.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세계의 역사를, 그리고 전쟁의 기록을 남기게 된다. '문타이거'라는 제목 역시, 그녀의 다사다난했던 긴 인생 가운데, 톰 서던을 만났던 이집트에서, 그 여름에, 함께 피웠던 모기향을 추억하기 때문에, 제목의 자리를 당당히 차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소설이 결국은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는 역자의 해석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부정할 수도 없는 이유가 바로 이 제목 때문이다.

어쨌든 위에서 언급한 이 세사람 외에도 친오빠 고든이나, 그와 결혼하고도 늘 고든과 클라우디아 사이의 아슬아슬한 감정 때문에 외로울 수 밖에 없었던 실비아, 리사에 대한 죄책감을 그에 대한 무한한 이해와 지원으로 투영했던 라슬로, 자신의 어머니, 재스퍼의 부모님 등이 그녀가 쓰는 세계사 속에 시시각각 끼여든다. 그녀는 '고든'과 '톰 서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데, 이것 역시 실제로 그러했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냉정하게 사실에 가깝게 그림으로써 일종의 '반성문'이다. 병들고 늙은, 죽음을 앞둔 사람치고, 이렇게 자책하고 후회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연의 일치지만, 이번 5월 신간도서 두 권은 모두 전쟁, 1차 대전 및 2차 대전의 크나큰 영향력 아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직간접적으로 '숨 쉬러 나가다'의 '조지'와 '문타이거'의 '클라우디아'는 이 전쟁이라는 소용돌이의 영향권 안에 있으며, 이러한 경험이 그들의 인생을 크게 바꿔놓는다.

"'최전선'이란 장소라기보다 하나의 관념이다." p.172 

"전쟁을 치르는 건 아이들이야. 미친 악마 같은 어른 머리에서 나온 전쟁을 소년들이 싸워내지. 이건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그때 사람들이 얼마나 젊었는지 새삼 화들짝 놀라서," p.195  

그리고 물론 이 두 사람의, 전쟁에 대한 생각은, 부정적이다. 클라우디아의 경우, 한 남자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들을 만나게 해준 '히틀러 덕'을 칭송하는 망언을 내뱉고 말지만, 결국 그를 잃게 한 것도 그의 탓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결론은, 이집트의 그 여름, 전쟁 속에서도 모기향 피워놓고 평화롭게 사랑을 탐했던 그 두 사람을 갈라놓은 전쟁, 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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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러 나가다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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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섬뜩했다. 책을 읽다가 다시 표지로 가, 이 책이 나온 연도를 몇 번이나 확인하곤 했다. 분명, 1939년에 나온 소설인데, 너무도 지금의 이야기 같았다.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마저 없었으면, 바로 지금을 살고 있는 한 중년 가장이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에 조금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직접 확인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반면 그가 회상하는 전쟁 이전의 삶이라는 건, 중년의 누군가의 회상 속에 존재할지는 모르나 지금을 사는 나로서는 전혀 겪어본 적 없는 낙원과 같기도 했다. 

"노동계급의 고통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헛소리들이 많았다. 나는 프롤레타리아를 그리 딱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다. 잠자리에 누워 해고걱정을 하는 막일꾼을 본 적이 있는가? 프롤레타리아는 몸은 고생을 해도 일하지 않는 동안엔 자유인이다. 그에 비해 치장 벽토를 바른, 획일적이고 작은 교외주택에는 집집마다 '언제나' 자유롭지 못한 가련한 가장이 있다." p.22

'가장'이란 예나 지금이나 자유롭지 못한 가련한 존재이나, 한때 '노동자(프롤레타리아)'란 일하고 월급만 제때 받으면 적어도 해고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였던 적도 있었던 모양이다.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언급은, 조지 오웰이 아무리 당시 위건부두에서 직접 노동을 체험해보았다고는 해도, 그의 부유했던 가정환경을 고려할 때 오해의 소지는 있으나 그만큼 전쟁 이전의 세상이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자유롭고 인간다웠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였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엘즈미어로드에 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집값을 다 치렀다 해도 사실상 집을 소유한 게 아니다. 부동산 소유권이 자유보유권 아닌 임차권이기 때문이다." p.23

1930년대에도 이랬다는 거다. 서울 어느 동네가 아닌, 엘즈미어로드에 사는 사람들도 그랬다는 거다.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그런데 사람들은 점점 더 경제력을 행복의 기초로 여기고 상황은 이러니까 경제적으로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더 나아지거나 행복해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던 조지였기에, 17파운드라는 아주 별 것 아닌 핑계로 과거의 기억으로 피신을 떠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나이가 들수록 과거를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데는 아주 일가견이 생기니까. 

 

회상 속의 어리고 '날씬한' 조지 볼링은 45세의 '뚱뚱한' 조지 볼링이 지긋지긋해하는 개구장이 아들들 못지 않은 말썽꾸러기였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쓴다.

"아이들은 작고 잔인한 동물일 뿐이다. 어떤 동물도 아이들의 4분의 1만큼도 이기적이지 않다는 점만 빼놓고 말이다. 어린 사내아이는 초원이니 숲이니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경치를 바라보는 법도 없고, 꽃 따위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맛이 좋다든가 하는 게 아닌 한, 식물들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도 알지 못한다. 무언가를 죽이는 것! 그게 소년이 도달하는 시심(詩心)에 가깝다. 그런가 하면 어린아이에겐 무언가를 절절히 바라는 갈망의 힘이 있다(어른이 되면 불가능해지는 특유의 강렬함이다). 그리고 시간이 무한정 자기 앞에 펼쳐져 있으며 무얼 하든 영원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있다." p. 109 

조지 오웰은 이 문단을 '아이들은 작고 잔인한 동물'이라는 일종의 경멸과 자기반성(?)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어른들이 갖지 못하는 갈망의 힘과 순수한 믿음을 가진 존재라는 결론으로 끝을 맺는다. 그가 얼마나 어린 시절, 전쟁 이전의 삶을 그리워하는지 느껴지지 않는가.  

 

"한적한 연못가 버드나무 아래 온종일 앉아 있는다는 생각 자체가, 그리고 앉아 있을 만한 한적한 연못가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전쟁 이전, 라디오 이전, 비행기 이전, 히틀러 이전의 시대에 속하는 것이다. 영국 민물고기들의 이름만 해도 어딘가 평화로운 데가 있다. 로우치, 러드, 데이스, 블릭, 바블, 브림, 거즌, 파이크, 처브, 카프, 텐치. 모두가 속이 찬 느낌을 주는 이름이다. 그런 이름을 지은 사람들은 기관총이란 건 들어본 적 없는 이들이었다." p.110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숨 쉬러 나가다]가 한 가정의 가장이자 한 직장의 직원이라는, 책임은 크고 재미는 별로 없는 중년남자의 탈출기일 거라는 예상을 했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가 그리워하는 것은 단순히 '어린 시절'이 아니라 '전쟁 이전의 삶'이라는 게 드러난다. 하다못해 물고기들의 이름조차 평화로웠던 그 시절 말이다. '로우치, 러드, 데이스, 블릭, 바블, 브림, 거즌, 파이크, 처브, 카프, 텐치' 같은 민물고기들은 여전히 영국 어느 민물에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민물고기들이 더이상 똑같은 민물고기들은 아니라는 걸 조지도 알고, 나도 안다. 

"그 뒤로 나는 한 번도 낚시를 해보지 못했다. 도무지 기회가 없는 것 같았다. 전쟁은 더 이어졌고, 그 뒤엔 나도 남들처럼 직장을 구하느라 사투를 벌였고, 직장을 잡았고, 그다음엔 직장이 나를 잡았던 것이다." p.126 

'낚시'는 그야말로 조지 오웰이 그리워하는 세상을 표현하기에 최적의 소재이다. 사람의 귀를 멀게 할 수도 있는 폭격의 소음, 도시를 메운 크고 작은 소음이 상존하는 세계와 물고기를 달아나게 할까봐 아주 작은 소리도 낼 수 없는 세계의 대비는 얼마나 극명한가. 잠시의 침묵도 참지 못하는 현대의 삶과, 오로지 침묵 속에서 물과 물 속의 물고기와 또 잡고 있는 낚시대, 주변의 공기와 소통하는 낚시터의 시간의 대비만큼 효과적인 설정도 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대비는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엘즈미어로드'와 어린 시절 그가 살았던 '로어빈필드'의 대비 속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시종일관 심각하고 진지하지만은 않다. 

"아버지는 대단히 심각하게 말을 이어나갔는데, 어금니 빠진 자리에 낀 음식 조각을 처치하느라 효과가 반감되었다." p. 135 

이 장면은 KBS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 "생활의 발견"을 떠올리게 한다. 터무니 없는 헛소리로 독자를 웃기는 게 아니라, 현실 속에서, 분명한 사실에 대한 솔직하고 담백한 묘사로 독자들을 웃게 한다. 소설 초반부 '뚱뚱한 남자'에 대한 묘사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만의 통찰력으로 날카롭게 유쾌하면서도 일면 쓸쓸하기도 한 해석을 내놓는다. 

이 책의 결론 역시 이런 식의 유머로 마무리되는데, 역시나 우스운 동시에 씁쓸하다. 그가 결국 택한 일탈은 사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실망스럽기도 했는데, '뭐 그게 인생 아니야?' 라고 물으신다면 '그건 그렇죠'라는 대답보다 더 적당한 대답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임을 인정하기로 한다. 

 

어쨌든, 무서운 작가다, 조지 오웰. 좀 더 많은 책을 남겨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그 책 속에서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세상은 어디로 갈 건지를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을 텐데. '그래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는 여전히 미궁 속에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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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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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라는 강렬한 첫문장을 많이 언급한다. 하지만 나는 이 첫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결말에 대한 섣부른 예상을 방해하는 글쓰기의 한 수법으로 많이 쓰이는 방식의 문장이라서 '나'는 '내 아버지'의 실제 '사형집행인'이 아닐 거라는 짐작을 쉽게 할 수 있었고, 의식적으로 첫문장부터 강렬한 인상을 주기 위해 지나치게 애를 쓴 느낌이 들었다. 

글쓰기라는 게, 첫문장을 쓰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하는 말을 많이 들었고, 그래서 모든 작가에게 첫문장에 대한 부담이나 아이디어가 있을 거라는 건 짐작한다. 정유정 [7년의 밤]의 첫문장은 단지 내 마음에 호감을 주지 못했다는 건데, 그래도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이런 자극적인 문장에만 열정적으로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내 자신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본능적으로 '나는 이 문장을 싫어한다'라고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7년의 밤]을 읽는 3일의 밤은 내게 굉장히 긴 시간이었다. 몸도 힘들었고, 그렇게 몸이 힘든데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잘 못 찾겠어서 마음도 힘들었고 그래서 오히려 더 이 책읽기에 무리하게 매달렸다. 하지만 서원이 보낸 7년의 밤에 비하면 굉장히 짧은 3일밤이기도 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 그리고 그밖에 내가 겪고 있는 감정적인 증상들도 서원이나 세령이 겪은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가장 안타까웠던 건 서원의 아버지 최현수였다. 내가 굉장한 야구팬이어서이기도 하지만, 몇년전 은퇴 후 사업에 실패하고 애인과 그 딸들까지 살해한 후 자살해버린 한 야구선수를 떠오르게했기 때문이었다. 두사람 모두, 야구에 쏟던 순수하고 맹목적인 열정을 다른 것에 그대로 투영시키고, 그 열정이나 사랑이 위태롭거나 실패하게 되면 이성이나 선한 의지를 결국 상실하게 되는 나쁜 케이스인 것 같아서 더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웠다. 

그러고보면, 정유정 작가가 이번 작품을 성공시킨 가장 큰 열쇠는 탄탄한 구성도 구성이지만, 각각 확실한 캐릭터를 탄생시킨 데 있다. 최현수와 최서원, 은주, 오영제와 문하영, 승환 모두. 모두가 각자의 사연과 과거를 갖고 있고 그래서 그 캐릭터들의 설득력도 더해진다. 

자살시도일까, 실수일까. 전자라면 재시도가 수순이고 그땐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 실수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실수를 거듭하다 보면 언젠가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법이니까. p.306 

정말로 죽어버릴까 봐 무서워서 실제 신발은 던지지도 못했어. 그저 웊물 앞에 서서,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인간들을 떠올리면서, 내 마음 속의 신발들을 집어 던졌지. 아버지, 남동생, 여동생, 막내 꼬까고무신까지. 상상 속에선 못 던질 게 없었다네. 심지어 우리 집을 통째로 던져버린 날도 있었어. 내 마음이 온갖 사악한 것들을 다 꺼내 던지고 나면 죄책감이 찾아드는 거야. 그러면 동생들이나 아버지한테 조금쯤은 진심으로 대할 수 있게 되지. p.373
 

500페이지가 넘는 [7년의 밤] 장면 가운데 가장 슬펐던 한 장면을 소개하며 이번 리뷰를 마무리한다.

"침착하겠다고 약속하면 데려갈게." 

쓸데없는 다짐이었다. 우스운 우려였다. 서원은 샛문에 쓰러진 아빠를 보고도 흥분해서 덤비지 않았다. 피투성이 발을 보고도 소리치거나 울지 않았다. 제 아빠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주문을 거는 것처럼 속삭여서 의식을 깨웠다. 

"아빠, 눈떠요. 진료소에 가게 일어나세요."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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