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동 안개소년
박진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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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랫동안 서울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보광동’이 어디쯤 붙어있는지, 또 그 동네이름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가 어떤지 잘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광동 안개소년’이라는 제목만 봤을 때, 희미하게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었다. 문학에서 ’안개’라는 이미지는 워낙 강렬하고 지배적인 것이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보광동’이라는 동네와 그곳에서 산다는 ’안개소년’이라는 캐릭터.

1부 밤의 거리

예상대로 ’소년’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밝고 희망적인 명랑소설은 아니다. 주인공은 얼굴이 안개로 덮인, 할머니의 당부대로 "반지하방에 찹쌀떡처럼 붙어 있"다가 "밤에만 돌아다"니는 안개소년. 낯설지만, 그래서 뒷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눈에 띄는 발랄한 작가의 화법도 나의 기대를 부풀렸다. 

"립스틱을 바르면 입술이 탐스럽고 아이라인을 그리면 눈동자가 아련하게 초롱거렸죠." p.12 

"립스틱을 바르면" 입술이 탐스럽고 "아이라인을 그리면 눈동자가 아련하게 초롱거렸"다니. 이렇게 객관적인 표현을 통해 안개소년의 엄마는 타고난 미모가 있다기보다는 젊음 그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일 거라는 상상을 할 수 있게 됐고, 작가의 이런 예민한 표현이 좋았다.

그리고 동시에 이 표현은, 안개소년을 불쌍히 여기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기도 했다. 안개소년은 자기가 어리다고, 자기 엄마라고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가 무조건 예쁘다고 하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너무나 냉혹한 현실 속에서 어린아이다움을 잃어버린 데다, 자기를 버리고 도망간 엄마를 무조건 예쁘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일 거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안개소년에게 밤나들이는 그야말로 유일한 낙이다. 안개소년은 밤마다 걸어서 혹은 파란버스 막차를 타고 신사동으로 간다. 예전보다 더 늦은 시각까지 다니게 된 파란버스는, 파란버스를 운전하시는 분들에게는 피곤한 근무시간 연장에 지나지 않겠지만, 안개소년에게는 좀 더 많은 시간 동안 신사동 거리를 걸어다닐 수 있게 해준 세상과의 연결통로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렇게 파란버스를 타고 나간 거리에서 모든 일은 시작된다.  

"고등학생은 다 불안해." p.28  

그곳에서 안개소년은 자기를 두려워하거나 싫어하지 않는 ’지나’라는 소녀를 만나게 되고, 지나는 그저 고등학생이라서 불안하다. 그 덕에 둘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불쑥 안개소년은 지나에게 고백한다.

"나 너 좋아해."
그녀는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런 말은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p.34
 

참 짠한 대목이다. 안개소년은, 자기를 겁내지 않고 이렇게 같이 있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난지 몇시간도 되지 않는 소녀에게 ’좋아한다’고 쉽게 고백한다. 한번도 가족 아닌 타인과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으니, 타인과의 관계와 그 속에서 흐르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리도 없다.

그렇게 불안한 고등학생 소녀에게 빠져버린 안개소년은 오랫동안 밤마다 신사동 거리에서 소녀를 기다리고, 어느날 나타난 소녀는 성형외과 의사라는 사촌오빠를 소개해준다. 겁내진 않았지만, 소녀도 어쨌든 소년의 ’안개’를 일종의 ’질병’으로 보고 있다는 이야기다. 

안개소년은 그렇게 자신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올 사건에 휘말린다. 

"형, 그게 만져져요?"
선배는 고개를 저었지.
"암내처럼 냄새나는 것도 아니죠?"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어.
"그럼, 그건 못 없애요." p.53
 

신사동에서 만난 지나의 사촌오빠가 몸에 안개를 지닌 사람이 안개소년뿐만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리고 "재계에서 알아주는 기업가", 아마 "제일 유명한 안개남자일" 한 노인에게 안개소년을 데려간다.

2부 낮의 도시

그리고 일련의 사건 뒤에 안개소년은 낯선 낮의 도시에 내던져진다. 그곳에서 ’승냥이’ 윤덕호를 만나고 윤덕호를 통해 ’당나귀’ 강만호를 만나 또 한 번 사건에 휘말린다. 안개소년의 ’안개’를 이슈거리로 만들어 지하방에 숨어 나오지 못하던 안개소년을 인기인 ’안개소문’으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그의 인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여기에는 물론 자기 몸의 안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운 한 남자의 음모가 영향을 주지만 그가 아니었더라도 사람들은 곧 안개소문에 싫증을 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안개남자...... 남자... 다를 건 없지." p.197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지만, 이 대목은 또다른 안개남자의 혜안이랄 만큼 놀라운 통찰력과 잔인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솥뚜껑보다 놀란 가슴 자라보고 놀란다’고, 이미 신비의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된 안개는 실존 여부와 상관 없이 모두의 눈을 멀게 만든다. 그래서 ’안개남자’나 그냥 ’남자’나 다를바 없이 똑같은 파급력, 파괴력을 지니게 된다.

3부 안개로션

그리하여 ’안개소문’과 ’안개전염병’을 거쳐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안개소년’은 다시 밤에만 돌아다니는 생활을 한다. 처음 ’안개로션’이라는 3부의 제목을 보고는 꽤 멋진 작명이라고 생각했다. 안개소년은 이제 더이상 ’안개’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그저 ’안개로션’ 정도로,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한 단계 넘어 아픔을 일상으로 승화해낸다는 의미인가보다 생각했다. 물론 그런 의미도 담겨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개로션 개로션 개로션 개로...... 개로...... 개로...... 개로로로로 개로로로로 개로션." p.215 

그런데 안개소년이 일하게 된 나이트클럽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를 묘사하는 바로 이 부분이라니. 이 글자만 읽어도 어떤 음악을 묘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의 재치가 돋보이는 대목.

하지만 ’보광동 안개소년’은 전체적으로는 조금 아쉬운 소설이다.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각은 있지만 소설 한 권 안에서 너무많이 짚어내려고 욕심을 낸 걸까. 너무 많은 층위의 이야기가 조금은 단편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공감을 하면서도, 이야기가 좀 더 여러겹으로 쌓여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캐릭터 역시 너무 단순하고, 크게 변화가 없어 이야기가 다소 뻔하게 흘러가는 감이 없지 않다. ’이야기가 다소 뻔하다’는 지적은 사실 조심스럽다. 막상 나보고 쓰라면 이렇게 쓰지 못하고, 중간에 결말이 어떻게 될 것 같아 물어보면 틀렸을 지도 모르니까. 마치 현대미술작품을 보면서 ’저건 나도 그리겠다’ 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박진규 작가가 쓰는 다음 소설은 궁금하다. 다음 작품에서는 또 어떤 독특한 캐릭터가 탄생될까, 이제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해본 독자로서, 기다리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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