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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러 나가다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섬뜩했다. 책을 읽다가 다시 표지로 가, 이 책이 나온 연도를 몇 번이나 확인하곤 했다. 분명, 1939년에 나온 소설인데, 너무도 지금의 이야기 같았다.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마저 없었으면, 바로 지금을 살고 있는 한 중년 가장이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에 조금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직접 확인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반면 그가 회상하는 전쟁 이전의 삶이라는 건, 중년의 누군가의 회상 속에 존재할지는 모르나 지금을 사는 나로서는 전혀 겪어본 적 없는 낙원과 같기도 했다. 

"노동계급의 고통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헛소리들이 많았다. 나는 프롤레타리아를 그리 딱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다. 잠자리에 누워 해고걱정을 하는 막일꾼을 본 적이 있는가? 프롤레타리아는 몸은 고생을 해도 일하지 않는 동안엔 자유인이다. 그에 비해 치장 벽토를 바른, 획일적이고 작은 교외주택에는 집집마다 '언제나' 자유롭지 못한 가련한 가장이 있다." p.22

'가장'이란 예나 지금이나 자유롭지 못한 가련한 존재이나, 한때 '노동자(프롤레타리아)'란 일하고 월급만 제때 받으면 적어도 해고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였던 적도 있었던 모양이다.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언급은, 조지 오웰이 아무리 당시 위건부두에서 직접 노동을 체험해보았다고는 해도, 그의 부유했던 가정환경을 고려할 때 오해의 소지는 있으나 그만큼 전쟁 이전의 세상이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자유롭고 인간다웠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였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엘즈미어로드에 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집값을 다 치렀다 해도 사실상 집을 소유한 게 아니다. 부동산 소유권이 자유보유권 아닌 임차권이기 때문이다." p.23

1930년대에도 이랬다는 거다. 서울 어느 동네가 아닌, 엘즈미어로드에 사는 사람들도 그랬다는 거다.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그런데 사람들은 점점 더 경제력을 행복의 기초로 여기고 상황은 이러니까 경제적으로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더 나아지거나 행복해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던 조지였기에, 17파운드라는 아주 별 것 아닌 핑계로 과거의 기억으로 피신을 떠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나이가 들수록 과거를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데는 아주 일가견이 생기니까. 

 

회상 속의 어리고 '날씬한' 조지 볼링은 45세의 '뚱뚱한' 조지 볼링이 지긋지긋해하는 개구장이 아들들 못지 않은 말썽꾸러기였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쓴다.

"아이들은 작고 잔인한 동물일 뿐이다. 어떤 동물도 아이들의 4분의 1만큼도 이기적이지 않다는 점만 빼놓고 말이다. 어린 사내아이는 초원이니 숲이니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경치를 바라보는 법도 없고, 꽃 따위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맛이 좋다든가 하는 게 아닌 한, 식물들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도 알지 못한다. 무언가를 죽이는 것! 그게 소년이 도달하는 시심(詩心)에 가깝다. 그런가 하면 어린아이에겐 무언가를 절절히 바라는 갈망의 힘이 있다(어른이 되면 불가능해지는 특유의 강렬함이다). 그리고 시간이 무한정 자기 앞에 펼쳐져 있으며 무얼 하든 영원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있다." p. 109 

조지 오웰은 이 문단을 '아이들은 작고 잔인한 동물'이라는 일종의 경멸과 자기반성(?)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어른들이 갖지 못하는 갈망의 힘과 순수한 믿음을 가진 존재라는 결론으로 끝을 맺는다. 그가 얼마나 어린 시절, 전쟁 이전의 삶을 그리워하는지 느껴지지 않는가.  

 

"한적한 연못가 버드나무 아래 온종일 앉아 있는다는 생각 자체가, 그리고 앉아 있을 만한 한적한 연못가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전쟁 이전, 라디오 이전, 비행기 이전, 히틀러 이전의 시대에 속하는 것이다. 영국 민물고기들의 이름만 해도 어딘가 평화로운 데가 있다. 로우치, 러드, 데이스, 블릭, 바블, 브림, 거즌, 파이크, 처브, 카프, 텐치. 모두가 속이 찬 느낌을 주는 이름이다. 그런 이름을 지은 사람들은 기관총이란 건 들어본 적 없는 이들이었다." p.110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숨 쉬러 나가다]가 한 가정의 가장이자 한 직장의 직원이라는, 책임은 크고 재미는 별로 없는 중년남자의 탈출기일 거라는 예상을 했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가 그리워하는 것은 단순히 '어린 시절'이 아니라 '전쟁 이전의 삶'이라는 게 드러난다. 하다못해 물고기들의 이름조차 평화로웠던 그 시절 말이다. '로우치, 러드, 데이스, 블릭, 바블, 브림, 거즌, 파이크, 처브, 카프, 텐치' 같은 민물고기들은 여전히 영국 어느 민물에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민물고기들이 더이상 똑같은 민물고기들은 아니라는 걸 조지도 알고, 나도 안다. 

"그 뒤로 나는 한 번도 낚시를 해보지 못했다. 도무지 기회가 없는 것 같았다. 전쟁은 더 이어졌고, 그 뒤엔 나도 남들처럼 직장을 구하느라 사투를 벌였고, 직장을 잡았고, 그다음엔 직장이 나를 잡았던 것이다." p.126 

'낚시'는 그야말로 조지 오웰이 그리워하는 세상을 표현하기에 최적의 소재이다. 사람의 귀를 멀게 할 수도 있는 폭격의 소음, 도시를 메운 크고 작은 소음이 상존하는 세계와 물고기를 달아나게 할까봐 아주 작은 소리도 낼 수 없는 세계의 대비는 얼마나 극명한가. 잠시의 침묵도 참지 못하는 현대의 삶과, 오로지 침묵 속에서 물과 물 속의 물고기와 또 잡고 있는 낚시대, 주변의 공기와 소통하는 낚시터의 시간의 대비만큼 효과적인 설정도 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대비는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엘즈미어로드'와 어린 시절 그가 살았던 '로어빈필드'의 대비 속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시종일관 심각하고 진지하지만은 않다. 

"아버지는 대단히 심각하게 말을 이어나갔는데, 어금니 빠진 자리에 낀 음식 조각을 처치하느라 효과가 반감되었다." p. 135 

이 장면은 KBS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 "생활의 발견"을 떠올리게 한다. 터무니 없는 헛소리로 독자를 웃기는 게 아니라, 현실 속에서, 분명한 사실에 대한 솔직하고 담백한 묘사로 독자들을 웃게 한다. 소설 초반부 '뚱뚱한 남자'에 대한 묘사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만의 통찰력으로 날카롭게 유쾌하면서도 일면 쓸쓸하기도 한 해석을 내놓는다. 

이 책의 결론 역시 이런 식의 유머로 마무리되는데, 역시나 우스운 동시에 씁쓸하다. 그가 결국 택한 일탈은 사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실망스럽기도 했는데, '뭐 그게 인생 아니야?' 라고 물으신다면 '그건 그렇죠'라는 대답보다 더 적당한 대답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임을 인정하기로 한다. 

 

어쨌든, 무서운 작가다, 조지 오웰. 좀 더 많은 책을 남겨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그 책 속에서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세상은 어디로 갈 건지를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을 텐데. '그래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는 여전히 미궁 속에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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