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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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광고를 보고 왔습니다."

마리오가 버트 랭커스터 뺨치는 미소를 지으며 관리에게 말했다.

관리는 지루해하며 물었다.

"자전거 있나?"

마리오는 얼씨구나 싶었다.

"네."

관리는 안경을 닦으면서 말했다.

"좋아. 이슬라 네그라를 담당할 우체부 직이야."

"우연이네요. 제가 이슬라 네그라 옆 포구에 살거든요."

"그것 참 잘됐군. 하지만 문제는 수신인이 단 한 사람뿐이라는 거야."

"한 사람뿐이라고요?"

"그렇다니까. 포구 사람들은 모두 까막눈이야. 계산서조차 못 읽으니까."

"그 수신인이 누구죠?"

"파블로 네루다씨."

마리오는 한 사발은 족히 될 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건 쌈박한 일이잖아요." -p. 17-18쪽

한없는 인내를 지닌 태평양도 못한 일을 산안토니오이 단출하고 정겨운 우체국이 이루어냈다. 마리오는 동이 트면 휘파람을 불며 일어났고 코도 막히는 법 없이 멀쩡했다. -p.21쪽

심지어 두어달 동안은 초인종으로 쓰는 종을 칠 때마다, 절묘한 시구를 빚어낼 찰나에 있는 시인의 영감을 살해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p.22쪽

두번째 월급봉투를 받았을 때 당연하다는 듯이 로사다 판 <신 일상송가>를 샀다. 꿈에 그리던 산티아고여행을 포기해야만 했을 땐 일말의 슬픔이 밀려왔다. 거기에다 약아빠진 서점 주인이 "다음 달에는 <제3송가>를 준비해놓습죠."라고 말했을 때는 공포가 엄습했다.-p. 23-24쪽

네루다는 지쳐서 말을 끝맺었다. 그리고 남은 힘으로 마리오에게 포구로 가는 길을 가리켰다. 하지만 마리오가 적절히 초를 쳤다.

"제기랄. 나도 시인이나 되었으면."

"허허! 칠레에서는 모두가 시인이야. 계속 우체부를 하는 게 더 독창적이라고. 자네는 적어도 많이는 걸으니 살은 안 찌잖아. 칠레 시인들은 다 배불뚝일세." -p. 28쪽

바다의 모든 것이 웅변적이었건만 마리오는 침묵만을 지켰다. 너무도 굳게 침묵을 지켰기에 자신과 비교하면 돌멩이들까지도 수다쟁이 같았다.-p. 35쪽

마리오는 소녀가 골을 넣어 쇠골대가 울렸을 때 그녀 쪽으로 시선을 들며 가능한 한 최고로 꼬리치는 미소를 지었다. -p. 36쪽

그 꼬락서니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위해 잔도 샴페인도 없이 건배를 제의하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p. 37쪽

마리오가 프롤레타리아적인 근성을 발휘하여 비틀스보다 더 덥수록한 머리를 하고 다녀도 참을 수 있었다. -p. 39쪽

마리오는 곁으로 갔고, 말을 다시 잇기 전에 십초간이 헐떡임을 네루다에게 선사했다. -p. 41쪽

"과부가 속담포병대를 이끌고 메타포 전쟁에 임하기로 한 것 같아 정말 두렵군." -p. 94쪽

청년 마리오는 과부가 자손만대에까지 기억될만큼 문을 쾅 닫으며 나가는 것을 보았다. -p. 96쪽

네루다가 덤덤한 표정을 말했다.

"자, 주점으로 가서 그 유명한 베아트리스에 대해 알아보자고."

"농담이시겠죠."

"진담일세. 주점에 가서 포도주 한 잔 하면서 자네 애인을 한 번 보자고."

"우리가 같이 있는 걸 보면 감동해 까무러칠 거예요. 파블로 네루다씨와 마리오 히메네스가 함께 주점에서 포도주를 마신다! 까무러치고말고요!"

"그건 너무 슬픈 일이군. 소녀에게 시 대신 비문을 써줘야 한다면."-p. 47쪽

"테이블 축구이 제왕이시여. 무엇을 드시겠나이까?"

마리오는 시선을 소녀의 눈에 고정시키고는 삼십초동안 '내가 누구지, 내가 지금 어디 있지, 숨은 어떻게 쉬지, 말은 어떻게 하지?' 등등 자신을 억누르는 치명적인 충격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를 떠올리려고 기를 썼다. -p. 50쪽

마리오는 트럭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떠나는 것을 보았다. 마리오는 그 흙먼지가 아예 자신을 생매장시켜 버렸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마리오는 목숨을 끊지는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시인에 대한 충정이 우러나 삼천쪽에 달하는 작품전집을 한 쪽 한 쪽 다 읽을 때까지는 결코 죽을 수 없었다. 첫 오십쪽은 시인이 집 마당에 있는 종루 아래서 해치워버렸다. 그러는 사이 바다가 마리오를 산란하게 만들었다. 네루다에게는 절묘한 이미지를 숱하게 안겨준 바다이지만 마리오에게는 단조로운 대사를 읽어주는 사람같았다. 그저 '베아트리스, 베아트리스.'라는 후렴을 선사할 뿐이었다. -p. 52쪽

흰옷차람이 남자 두명이 그 시끌시끌한 차에서 내리더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인근에서는 보기 드문 그런 웃음이었다. 이발 빠진 사람들이 많은 포구에서 함박웃음은 호사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p. 53쪽

마리오는 먼저 토레 상표 공책에 습작을 한 메타포들을 가다듬은 뒤, 앨범에는 그중 최고의 것만 가려서 비누로 손을 정결하게 씻고 시인처럼 초록색 볼펜을 쓸 작정이었다. -p. 57쪽

베아트리스는 나날이 아름다움의 극치를 향해 치달았지만 자신이 변화가 마리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알지 못했다. -p. 58쪽

"손님 의견은 묻지 않았어요."

마리오는 가죽가방에 시선을 내리꽂았다. 가방 속으로 파고 들어가 포도주 병을 벗삼았으면 하는 심성이었다. -p. 59쪽

"이봐요, 따님. 정치와 시도 혼동할 정도로 똥오줌 못가리면 곧 미혼모가 되시고 말걸요. 마리오가 무슨 말을 했지?"

베아트리스는 혀끝에 맴도는 말을 몇초간 뜨거운 침으로 다듬었다.

"메타포요." -p. 61쪽

"'그대 머리카락을 낱낱이 세어 하나하나 예찬하자면 시간이 모자라겠구려.' 그러더라고요." -p. 63쪽

"엄마!"

"넌 지금 풀잎처럼 촉촉해. 후끈 달아올랐을 때에는 약이 딱 두가지밖에 없지. 교미나 여행"

어머니는 딸이 귓불을 놓고 침애 밑에서 가방을 꺼내 침대 위에 패대기쳤다.

"가방 싸!"

"싫어요! 여기 남을 거예요!"

"강물은 자갈을 휩쓸어 오지만 말은 임신을 몰고 오는 법이야. 가방 싸!"

"전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요."

"흥! 스스로를 지킬 줄 아신다고요! 제가 보기엔 손끝만 스쳐도 무너질 것 같은데요. 이 몸이 그대보다 훨씬 먼저 네루다 시를 읽었다는 것을 기억하시죠. 남정네들이 달아오르면 간덩이까지 시로 변하는 걸 모를 것 같으신가요?" -p. 65쪽

"기막혀! 남자애 하나가 내 미소가 얼굴에서 나비처럼 날갯짓한다 그랬다고 산티아고에 가야 되다니."

과부역시 열을 올렸다.

"닭대가리 같으니! 지금은 네 미소가 한마리 나비겠지. 하지만 내일은 네 젖통이 어루만지고 싶은 두마리 비둘기가 될 거고, 네 젖꼭지는 물오른 머루 두 알, 혀는 신들의 포근한 양탄자, 엉덩짝은 법선 돛, 그리고 지금 네 사타구니 사이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는 고것은 사내들이 그 잘난 쇠몽둥이를 달구는 혹옥 화로가 될 걸! 퍼질러 잠이나 자!" -p. 67쪽

마리오는 목구멍에 온갖 메타포가 걸린 채로 일주일을 보냈다.-p. 69쪽

마리오는 혀끝으로 추켜올리고 싶은 그 미니스커트 주인공의 그림자라도 나타날까 하여, 오후마다 주점 바깥에서 비탄에 잠긴채 흘러나오는 <돛단배>를 들었다. -p. 69쪽

애교로 봐줄법한 낭만에 사로잡힌 마리오는 공들인 메타포 하나하나와 한숨 하나하나 그리고 장차 자신이 귓불과 사타구니엣 예고편처럼 노닐 소녀의 혀가, 정액을 영글게 하는 대우주의 기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p. 70쪽

"선생님, 오늘은 메타포를 생각할 기분이 아니에요. 제발 편지를."

네루다는 버터칼로 편지를 뜯었다. 일부러 굼뜨게 굴어서 일분 이상이나 걸렸다. 시인은 '복수는 신들이 즐거움이란 말이 맞군.'이라고 생각하면서 봉투에 붙어 있는 우표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우표 속 위인의 생동감 있는 턱수염을 시시콜콜 뜯어보고, 산안토니오 우체국의 희미한 직인을 판독하는 척하고, 발송인 이름 위에 들러붙은 바삭거리는 빵 한조각을 떼어냈다. 어떠한 추리영화의 거장도 마리오를 그런 서스펜스로 몰아넣지 못했을 것이다. -p. 73쪽

"따님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요?"

과부가 침을 뱉듯 말했다.

"메타포요."

시인은 침을 꼴까닥 삼켰다.

"그런데요?"

"네루다씨. 메타포로 제 딸을 용광로보다 더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니까요!"

"지금은 겨울입니다, 부인."

"불쌍한 베아트리스는 그 우체부 때문에 완전히 맛이 가고 있단 말입니다. 가진 것이라곤 알량한 무좀균뿐인 작자때문에 말입니다. 발은 병균으로 득실거리는 주제에 주둥아리만 살아서 나불대죠. 주둥아리도 그냥 주둥아리가 아니라 칡넝쿨처럼 얽혀오죠. 가장 심각한 것은 뻔뻔스럽게도 제 딸을 꼬드기는 데 쓰는 메타포들이 당신 책에서 베낀 거라는 사실입니다."

"그럴리가요!"

"그렇다니까요! 처음엔 순수하게 나비 같은 미소 어쩌고 저쩌고 했죠. 하지만 다음번에는 벌써 딸에게 젖가슴이 두줄기 불꽃같다고 말했어요."

시인이 캐물었다.

"그가 사용한 이미지가 시각일까요, 아니면 촉각일까요?" -p. 80쪽

"과부이 협박이 빈말일수도 있지만 진짜라면 자네는 '삶이 칠흑처럼 어둡다'는 그 상투적인 어구를 평생 뇌까릴 수 있는 권리를 얻을거야." -p. 83쪽

"하지만 저는 젊고 건강한걸요. 아코디언보다 더 팽팽한 허파도 있고요."

"하지만 베이트리스 때문에 한숨쉬는 데만 허파를 사용하잖아. 벌써 유령선 뱃고동 같은 천식소리가 나는 걸." -p. 84쪽

나를 하얀도포를 입은 서글픈 왕으로 만들어버려. 벌써 입까지 차올라 입술을 덮어서 아무말도 할 수 없네. -p.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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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한 V양 사건 버지니아 울프 전집 10
버지니아 울프 지음, 한국버지니아울프학회 옮김 / 솔출판사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라뺑과 라삐노바

 

과부와 앵무새: 한 편의 실화

아무에게도 이롭지 않은 바람은 불지 않는다

 

공작부인과 보석상

길고 뾰족한 코로 반쯤은 킁킁 냄새를 맡고 반쯤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그 일을 위해 워털루로 갔다-햄프튼 코트에 가기 위해서- 혼자였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러나 어리석게 그녀가 바라지도 않은 동정심을 가졌다.

 

밖에서 본 여자대학

 

필리스와 로자먼드

그런데 우리 손에 들어오는 초상화들의 대부분이 무대를 뽐내며 활보하는 남자들의 것이니만큼 그늘에 다닥다닥 모여있는 여자들 중의 하나를 모델 삼아 그린 초상화도 값어치가 없지 않으리라고 본다.

그 집은 딸이 다섯이다. 모두 딸이라고, 그들은 서글프게 말할 것이다. 그들은 일생 동안 이 근원적 과오 때문에 부모를 매우 안쓰러워했다.

그들은 응접실에서 살도록 태어난 사람들같이 보였다.

밤이 깊었고, 두 자매는 얼굴의 혈색을 위해서 촛불을 끄고 잠을 자야 한다고 사무적으로 결정했다.

그녀는 자기가 생각해낸 이론에 견주어 그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를 검증했다. 

아주 예리하고 유능한 두뇌를 가진 로자먼드는 인간성을 관찰하는 것밖에는 자신의 지성을 단련할 방편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을 꿰뚫어보는데 능했고, 그 관찰은 사심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판단은 신뢰할 만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가장 예리한 통찰도 더 깊은 탐색을 위한 출발점이 될 뿐이고 결론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웠다.

필리스는, 트리스트람 자매가 기독교를 야유한 가벼운 농담을 하고 마치 종교라는 것이 사소한 문제인 것 같이 재미있어 한 것을 본능적으로 비난하고 나서 다음 순간 자신의 뺨이라도 때리고 싶었다.

사랑이란 필리스와 로자먼드에게는 정해진 타산적인 언행의 결과로 생성되는 것이었고, 그것은 무도회장이나 꽃 향기 가득한 온실이나, 의미심장한 눈길이나 부채의 펄럭임이나, 더듬거리는 암시적인 말 속에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방 안에서는 사랑이라는 것이 대낮의 햇빛에 노출된 건장하고 꾸밈없는 것으로서 누구나 마음대로 한 조각 떼어내서 면밀히 관찰할 수 있는 벌거벗은 견고한 실체였다. 필리스와 로자먼드는 만약에 그들에게 마음대로 사랑할 자유가 주어진다 해도 이런 식의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젊은이다운 조급한 충동으로 그들은 스스로를 가망 없는 인간들로 규정했고,

그러나 트리스트람 자매는 두 사람이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고, 그래서 동생인 실비아 트리스트람 양은 언니가 귓속말로 뭐라 이르자 필리스와 둘만의 대화를 시도했다. 필리스는 마치 뼈다귀를 받아먹는 개처럼 황송해서 실비아와 대화를 했다.

필리스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 앞으로 몸을 굽히면서, 마치 자기가 열병에 걸린 손으로 인위적인 잡동사니의 더미를 헤치고 그 아래 존재하리라고 믿는 순수한 자아의 견고한 몸체를 만지려고 휘젓고 있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불가사의한 V양 사건

지금 당장 의자를 넘어뜨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아래층 사람이 최소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알게 되겠지.

V양 자매는 한 십오년 동안 런던 거리를 소리없이 돌아다녔는데, 어떤 집들이 응접실에서나 미술관 같은 곳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에게 마치 매일 만나는 사람에게 하듯이 "안녕하세요, V'하고 인사를 하면 그녀는 "날씨 참 좋지요?"라든가 "날씨가 너무 궂네요."라고 대답했으며, 이쪽에서 먼저 걸음을 옮기면 그녀는 안락의자나 서랍장속으로 스며들어버린 듯이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어쨌든 그러고 나서 한 일년쯤 후에 그 가구들에서 분리되어 나왔는지 그녀가 다시 나타났고, 다시 같은 인사가 반복되었다.

혈연이-V양의 혈관에 흐르는 액체가 피라면-

어느 이른 아침, 새벽에 잠에서 깨어서, 나는 "메리 V! 메리V!" 하고 외쳤다. 그것은 내게 처음 있는 일이었고 아마도 어느 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그렇게 확실하게 불러본 일이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녀의 이름은 다만 막연한 기호로서 긴 문장을 채우기 위해서 삽입되었을 뿐이지 않을까 싶다.

 

세 개의 그림

 

탐조등

 

어떤 모임

지성을 계발하기 시작하기 전이 사내아이보다 매력적인 게 어디 있겠니. 보기에 아름답고, 잘난 체하지도 않고, 미술과 문학의 의미를 본능적으로 이해하지.

 

현악 4중주

무엇에 관해서지? 이제는 무엇인지 말할 수도 없고, 심지어는 그런 일이 있었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할 수도 없다고 믿으면서,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기 왜 앉아 있는지 말하는 것이 매 순간 더 어려워진다.

제가 잘못 알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기억하고, 무언가를 은밀하게 찾고 있다는 징조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저는 춤추고, 웃고, 핑크색 케이크, 노란색 케이크를 먹고, 약하고 짜릿한 와인을 마시고 싶어요.

 

어느 소설가의 전기

사망이 집안에 드리웠고, 지옥이 그 앞에서 하품하도다"라고 그녀는 기록했다. 그러나 그녀가 기록한 감정들이 전적으로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진지한 태도는 단지 부분적으로 그녀의 바람막이가 되었을 뿐, 무한한 고통의 여지를 남겨놓았다. 1841 5월에 그녀는 "내가 자연의 얼굴 위에 남겨진 유일한 오점인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예견되었듯이, 친구 윌랏 양보다 세상을 향한 혐오감을 덜 가지고 있었고, 자기 자신의 짐을 인류의 어깨 위에 전이시킬 수 있었던 엘렌 버클은 자신의 회의를 완전히 잠재워준 어느 엔지니어와 결혼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시간의 그녀의 편지들은 지독하게 지루하다. 그 부분적인 이유는 사랑이란 단어와 그 말로 인해 오염된 전체 구절이 생략 부호인 별표로 축소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하면서 여러 가지 미덕이 부족하다고 인정했다. 그래서 적어도 다른 미덕을 소유하고 있음을 자기 자신에게 입증하는 일이 꼭 필요했다.

괘종시계의 째깍째깍하는 초침 소리와 더불어 그 소재들이 축적된다는 비밀을 그들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예의 그 자의식이 그녀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아랍인이나 그의 신부로 상상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녀의 글 중에 백미는 그녀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씌어졌다.

윌랏 양은 너무나 영리하여 누군가가 어떤 문제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잡종견 집시

남녀가 사랑에 빠지게 된 경위를 설명하기도 어려운 일인데, 테리어 잡종과의 사랑에 빠진 얘길 꺼내는 것은 더욱 어려워 보였다.

 

본드 가의 댈러웨이 부인

아마 우리들 중 누군가가 (한심해라!) 말을 못 탔었지. 그러니 어떻게 여자들이 국회에 앉아 있을 수 있겠어? 어떻게 남자들과 일을 할 수가 있느냐고.

그녀가 원치 않는 사람들이 올 거야. 오길 바라는 사람들은 오지 않을 테고.

 

단단한 물체들

 

새 옷

그녀는 계속 거울 속을 들여다 보았고, 고약스럽게 정체를 폭로하는 그 파란 물웅덩이 안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그녀가 노란 드레스를 입은 것은, 그녀가 받아 마땅한 속죄행위처럼 보였다.

그들 모두에게는 로맨스도, 어떤 극단적인 일도 없었다. 그들은 바닷가의 휴양지로 그저 그만하게 하나씩 흩어져 소멸되어갔다. 물놀이 행락지 어디에나 그녀이 이모 하나쯤은 지금도 앞 창문이 완전히 바다를 향하지는 않은 어떤 하숙집에서 자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주 그들다웠다.

 

동감

내가 상상을 해볼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다른 사람의 삶에는 항상 우리를 제외시키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드러난 표시만을 보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것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소음 가운데서도 나는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더 많이 들을 거라고. 그녀의 공허에는 공허의 유령이 따를 것이기에 이 모든 것 때문에 나는 그녀를 부러워할 것이다. 나는 그녀를 부러워할 것이다.

나는 내 의도와는 다르게, 급하게 충동적으로 대답한다.

그는 그의 삶을 우리가 밟고 지나가도록 외투처럼 깔아놓았다.

외마디 외침이 내 왼쪽에서 시작되고 또 하나, 급작스럽고 토막 난 외침이 오른쪽에서 들린다.

비록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이들은 그에게 편지를 보낼 것이다.

 

사냥꾼 일행

 

행복

스튜어트 엘톤은 자신이 하나 위에 또 하나 차곡차곡 단단히 놓여진 많은 꽃잎들, 즉 모두가 빨갛게 물이 들고 모두가 온통 따뜻하고 모두가 이 형용하기 어려운 광채를 띤 많은 꽃잎들이 압축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어떤 내과적 병의 확실한 순교자였다.

"정말 혼자서요."

서튼 부인은 반복했다. 그것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점이라며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칼의 머리를 절망적으로 떨구면서 말했다-행복하다는 것 말입니다. 완전히 혼자서요.

 

어느 영국 해군 장교의 생활 현장

그의 얼굴은 수세기 동안 많은 질문을 받았지만 아무 대답도 내놓지 않은 우상이 불가해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브레이스 함장의 등은 뱀가죽처럼 몸에 꽉 끼는 양복 안에 들어있었다.

 

유령의 집

 

반야 아저씨

 

청색과 녹색

 

 

***

소설가가 여자(남자일 때도 마찬가지이고)일 때, 그 여자 소설가가 쓴 작품에 나오는 모든 여자 주인공을 그 '여자 소설가'라고 생각해버리는 게 나쁜 습관이라는 걸 안다. 무엇보다, 그 소설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자기의 치부를, 가뭄에 바닥이 드러나버린 강바닥처럼 철저하게 바닥까지 드러내는 용기의 불꽃이 사그라지게 하는 일이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버릇은 고치지 못해서 버릇이라고, 여전히 나는 단편집에 든 수많은 단편을 읽으면서 모든 여자 주인공을 버지니아 울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행복한 결혼이어야 하지만, 정작 그렇지 않은 자신은 환상을 빌어 연기를 하다가 결국 현실에 질식해버리고 마는 아내도, '응접실에서 살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같이 보인다는 부르주아 사교계 속의 젊은 처녀도,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글을 썼다'는 어느 소설가도, '남자들이 좋은 글을 쓰기 전까지는 절대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친구들과 약속하는 소녀도모두 그녀다.

 

모두가 ''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용기와는 상관없이, 나는 버지니아 울프가 페미니즘 작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록 '여성'의 얘기가 소설의 주를 이루지만, 여류 소설가가 대개 그렇지 않나.

 

그런데, '버지니아 울프'의 이름은 참 아이러니하다. virgin이아 울프. 어렸을 때는 의붓 오빠들에게 끊임없이 성폭행을 당했고, 커서는 동성애에 끌렸지만 스스로를 강력한 이성으로 억눌렀고, 늘 자신이 '불가사의한 v' 처럼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결혼 생활 속에서 질식하고 싶어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우즈 강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 "나는 내가 다시 미쳐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당신은 놀라울 정도로 나를 잘 참아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인생을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글을 남기긴 했지만, 정말로 강으로 걸어 들어간 이유는 '당신의 인생을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였다고 믿는다.

 

그녀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결혼을 지속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은 바로 환상이며, 환상은 저 우주의 행성처럼 분열하고 또 분열하다가 결국은 죽는 법이니까. 그럴 때 용기 있는 사람은 결혼을 끝내지만, 나약한 사람은 환상도 없이 생생한 현실에 주저앉고 만다.

 

감히 범접할 수 없다고 느끼거나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광경을 '그림'이라고 정의하고는, 한 순간 죽어버리며 한 순간 사그라지는 행복을 '그림'이라고 했던 걸 보면(세 개의 그림), 그녀는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도 모르게 단언하게 된다.

 

그런 버지니아 울프에게 글 쓰기는 '아래층 사람이 최소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알게' 하려고 '지금 당장 의자를 넘어뜨'리는 행위였을 거다(불가사의한 v양 사건). 

 

그러면서도 여전히 스스로 '늘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글을 써왔다'며 자신의 글쓰기 행위를 비하한다(어느 소설가의 전기).

 

그래서 그녀는 수면제 백 알을 삼켰고집 근처 우즈 강 속으로 들어갔던 것일 거다.

 

처음부터, 불가사의한 V양이었던 버지니아 울프가 그것 외에 달리 무얼 선택할 수 있었을까. 그토록 치열하게 내면에 수많은 방을 만들고 그 방 안을 또 치열하게 채워나가고 방을 채워놓은 그것들을 치열하게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던 그녀가 달리 무얼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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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 시인선 294
김기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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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 적은 없었다.


제 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소가죽은 축축하고 차가운 발을 힘주어 감싼다.
-(소가죽 구두)쪽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
-(얼룩)쪽

한번도 떠보지 못한 눈과
한번도 뛰어보지 못한 심장과
물 한 모금 먹어본 적 없는 노란 부리와
똥 한번 싸본 적 없는 똥구머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뒤섞야 응고된
계란 프라이-(계란 프라이)쪽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짐만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소)쪽

벙어리장갑처럼 뭉툭한 혀


그가 수박씨 다음으로 내뱉은 말들-(혀)쪽

휘어진 등뼈
-(직선과 원)쪽

등을 구부리고 엎드려-(황토색)쪽

비둘기들은 검은 먼지와 매연을 뒤집어쓰고
언제나 아스팔트를 보호색으로 입고 다녀서
상계역에 비둘기들이 사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상계동 비둘기)쪽

둘은 지휘봉처럼 떨리는 팔을 힘차게 휘둘렀고


그들은 때로 너무 격앙되어
상대방 손과 팔 사이의 말을 장풍으로 잘라내고
그 사이에다 제 말을 끼워 넣기도 하였다.
나는 그들의 논쟁에서 끓어 넘친 침들이
내 얼굴로 튈까 봐 자주 움찔하였다.-(수화)쪽

습관화된 적개심이 욕이 되어 튀어나왔다.


아무리 급해도 도저히 빨라지지 않는 걸음이었다.


속으로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본 걸음이었다.-(무단 횡단)쪽

눈물은 눈알을 밀어낼 듯 쏟아져나왔으며-(재채기 세 번)쪽

방바닥이 발바닥에 와 닿지 않는다.-(다리가 저리다)쪽

작살 같은 햇살을 꽂아본다. 액셀러레이터와 엘리베이터에 익숙한 발바닥으로 흙을 맛나게 핥아본다. -(주말 농장)쪽

갑자기 그 위에 엉뚱한 미래가 겹쳐보였다.
어린 토끼 한 마리를 가슴에 안아보니
뜻밖에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 속에서 떨고 있었다.
토끼의 두려움은 내가 쓸데없이 걱정한 미래와 상관없이
오로지 지금 내 팔에만 집중되어 있었다.-(토끼)쪽

피리 구멍 같은 코는 얼마나 정확하게 바람을 조절하던지
배는 큰북처럼 얼마나 탄력 있게 진동하던지


숨 쉴 겨를도 없이 말들이 쏟아져나왔으나
어느 발음도 이에 깨물리거나 혀에 걸려 넘어지지 않았다-(수다 예찬)쪽

상한 데 없는 맑고 어린 웃음이 경로당에서 나온다.-(전자레인지)쪽

그 나이테의 무늬 속에는 생명이 바삐 드나들던 맑은 소리와 함께


아랑곳하지 않는 저돌적인 생명,-(가로수)쪽

말린 명태들은 간신히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물고기보다는 막대기에 더 가까운 몸이 되어 있다
-(명태)쪽

막힘 없이 춤추는 물로 건축한
얼음의 결정체처럼


겨울 하늘에 검은 점으로 촘촘하게 박혔다.
-(교동도에서)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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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전야
산도르 마라이 지음, 강혜경 옮김 / 솔출판사 / 2004년 3월
품절


이 '시민 계급의 집'의 제일 아래층부터 꼭대기 층까지 다양하게 살고 있는 청년들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크리스토프는 그들의 준비를 예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더 이상 그 무리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p. 34쪽

재판정에 선 두 사람은 대개 같은 이유로 서로를 비난했다. 둘 중 하나가 죄를 짊어지긴 했지만 재판관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는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잘못은 어쩌면 엉뚱한 데 있을지도 모른다. -p. 73쪽

이 장애, 이 감전 같은 현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가, 아니면 어제는? 또는 일 분 전엔? 어쩌면 그렇게 대답해선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혹 영혼 속에 들어 있는 확성기가 자기 성격에 근거한 한 가지 대답만을 강요해서 다른 대답이 불가능한 순간들이 있다. -p. 114쪽

누이는 놀라우리만큼 느긋했는데, 그녀의 그런 무심함은 정말이지 배울 만했다. 지글지글 타는 석탄 위에 눕는 무술인처럼 그녀에게도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곧 너무 지나친 비약이라고 스스로를 질타했다. 지글지글 타는 석탄이라니. 그러다가 문득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서로 좀 더 참았어야만 했어." -p. 122쪽

그라이너는 그 말을 입에 올리기가 민망한 것처럼 재빨리 말하곤 마치 변명하듯이 조금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p. 201쪽

"...그것의 정체를 전문적으로 해명해보려고 시도했다네. 그렇지만 정체가 밝혀졌다고 해서 현상의 본질이 바뀌는 건 아니었어..." -p. 203쪽

"...사랑은 더 이상 한가로운 유희가 아니라 일종의 경쟁이며 시합이 아닐까?..." -p. 204쪽

"...안나는 항상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실눈을 뜬 채 나를 지켜보았네. 그 거리는 잴 수가 없었어. 오로지 나 혼자만 그녀를 느낄 수 있었네..." -p. 205쪽

"...바로 그 순간...... 아아,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네. 그저 그 순간이 어땠는지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군. 아마 믿어지지 않을거야. 갑자기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주위를 둘러보았지.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어. 바로 그 곳, 그 시간, 내 집에 말일세. 문에는 내 이름이 적힌 문패가 달려 있고 전화번호부엔 우리 집 전화번호와 주소가 나와 있고 눈앞엔 내가 산 가구들이 진열되어 있었어. 방에선 안나가 자고 있고...... 그런데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야. 그 상황을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군. 나도 모르겠어, 왜 그랬는지. 도대체 무슨 의미가 필요한 거지? 꼭 의미가 있어야만 하는 건가? 처음부터 어떤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저 이런 게 현실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p. 225쪽

"...그렇지만 방금 전 또는 이미 오래전부터 뭔가 일어난 게 틀림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네. 우주 속에서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별빛을 지구에서는 한참 후에야 알게 되는 것처럼. 그래, 그건 이미 옛날에 일어난 거야. 그렇지만 그게 언제였을까?..." -p. 227쪽

"자넨 아마 잘 모를 걸세. 건강하니까. 억압되어 있거나 우울한 일 따윈 없잖나."

그 말에 크리스토프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마에 식은 땀이 맺히자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결혼 구 년째가 되던 해에 우린 결국 이혼하기로 결심했네. 소문을 들은 친지와 동료들은 모두 충격을 받고 슬퍼했다네. 그때까지 우린 아주 모범적인 부부였거든. 이상적인 부부로 늘 우리를 꼽을 정도였으니까. 우린 서로를 단 한 번도 속인 적이 없다네. 싸운 적도 없어. 그저 부부가 비밀스럽게 간직해야 할 것들을 극복할 수 없었을 뿐이야. 자기만의 것, 아까 말한 바로 그것이지. 그리고 안나는 여행을 떠났네. 육 개월동안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어." -p. 235쪽

"...결국 이런 방식으로도 살 수 있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살고 있고. 모든 사람이 완전한 것만을, 하나의 진정한 해결책만을 찾으려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되겠나!..." -p. 238쪽

"...그 다음엔? 신혼 초처럼 함께 가구를 고르는 건 어떨까? 모든 부부가 대개 그렇게 시작하는데 끝날 때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p. 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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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자
실비아 플라스 지음, 공경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2월
절판


나랑은 상관없었지만, 전기 사형을 당하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경이 산 채로 몸이 타면 어떨까.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p. 5쪽

하지만 난 휩쓸고 다니지 못했다. 내 자신조차 마음대로 못 했다. 호텔에서 사무실로, 파티장으로, 파티장에서 호텔로, 다시 사무실로 멍청한 무궤도 전차처럼 다닐 뿐. 다른 여자애들처럼 들떠서 지내야 마땅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마음이 가라앉고 공허한 느낌이었다. 주위가 소란한 가운데 둔하게 움직이는 폭풍의 눈 같다고 할까. -p. 7쪽

그녀는 무슨 말을 하든, 내 뼛속에서 튀어나와 말하는 은밀한 목소리 같았다. -p. 12쪽

마침내 보드카가 내게 맞는 술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 맛도 나지 않으면서, 뱃속으로 넘어간 느낌은 차력사가 칼을 삼킨 것 같았다. 기운이 나고 신이 된 기분이었다.-p. 19쪽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점점 열을 올리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기운이 빠진다. 같은 방에 있으면서 우두커니 소외된 사람의 입장에서는 특히 그렇다.

그것은 파리를 떠나는 고속 열차의 맨 뒷칸에서 파리를 쳐다보는 것과 비슷하다. 시시각각 파리는 점점 작아지고, 나도 점점 작아지고 외로워지는 느낌. 파리의 휘황찬란한 불빛과 흥분에서 시속 100만 마일의 속도로 멀어지는 기분. -p. 24쪽

온종일 길에 쏟아진 후텁지근한 열기가 마지막 모욕처럼 얼굴에 확 밀려왔다. -p. 25쪽

차들이 시끄럽게 달리고, 차에 탄 사람들과 불 밝힌 건물에 있는 사람들이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강물도 소리를 내며 흘렀지만,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창문에 도시가 걸려 있었다. 포스터처럼 평평하게 걸려서 반짝이고 깜빡거렸지만, 내게는 없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침대 옆에 놓인 하얀 전화기가 나를 주위와 연결시켜줄 수도 있었지만, 전화기는 죽은 자의 머리처럼 잠자코 놓여있기만 했다. -p. 27쪽

밤도 낮도 아닌, 소름 끼치는 제 3의 시간같이 느껴졌다. 갑자기 밤과 낮 사이에 끼어서 끝나지 않는 시간. -p. 30쪽

그 날 밤 도린에 대해 결정을 내렸다. 그녀를 지켜보고 말을 들어주기야 하겠지만, 마음속으로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p. 31쪽

"정말 모르겠어요."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을 하면서 스스로 깊은 충격을 받았다. 말을 이 밖에 낸 순간, 그게 사실임을 알았으니까.

그 말은 사실로 들렸고, 나는 깨달았다. 오랫동안 집 주변을 기웃대던 정체 모를 사람이 갑자기 다가와서 친아버지라고 말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나와 똑같이 생겨서 그가 생부고 평생 아버지로 여긴 사람은 가짜였다는 생각을 할 때처럼, 그 말이 사실로 다가왔다.

"정말 모르겠어요." -p.42쪽

화학은 더 끔찍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화학 실습실에 걸린 아흔 몇 개의 원소 차트를 본 적이 있으니까. 금, 은, 코발트, 알루미늄 같은 멋진 말이 숫자와 함께 흉한 약어로 적혀 있었다. -p. 46쪽

난 천연색 영화가 싫다. 천연색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죄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야한 새 의상을 입고, 진초록색 나무나 진노란색 밀밭이나 사방으로 흘러가는 진파란색 바다 앞에 빨래걸이처럼 서 있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 같다. -p. 52쪽

"그러지 뭐. 좋아."

내가 대답했다.

나는 버디가 면바지의 지퍼를 내리고 벗어서 의자에 던져놓고, 나일론 망사팬티를 벗는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시원해.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세탁도 잘 된대."

버디가 설명했다.

그는 내 앞에 버티고 섰고, 나는 계속 쳐다봤다. 칠면조 목과 내장 같다는 생각만 들었고, 아주 실망스러웠다. -p. 85쪽

평생 처음으로 유엔 건물의 방음이 되는 심장부에서, 테니스를 치는 동시 통역사 콘스탄틴과 관용어구를 많이 아는 러시아 여자 사이에 앉아 있으니, 내가 끔찍하게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늘 부족했는데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내 특기는 장학금 따기와 상 타기였는데, 이제 그것도 끝나갔다.

경마장이 아닌 거리에 던져진 경주마가 된 기분이었다. 대학 우승자인 풋볼 선수가 양복 차림으로 월스트리트와 마주선 느낌과 비슷했다. 그의 영광의 나날은 선반에 놓인 트로피로 끝나버리지 않았던가. 트로피에 새겨진 날짜는 묘비의 날짜와 다름없었다. -p. 94쪽

버디는 보이지 않는 철사로 입매를 위로 잡아맨 양 계속 빙그레 웃었다. -p. 109쪽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동시에 하고 싶은 게 노이로제라면, 난 끔찍한 노이로제에 걸렸어. 난 죽을 때까지 완전히 다른 것들 사이를 날아다닐 거야." -p. 115쪽

울음이 터질까봐 사진 찍기가 싫었다. 왜 울 것 같은지 몰라도, 누가 말을 걸거나 빤히 쳐다보면 눈물이 줄줄 흐르고, 목구멍에서 흐느낌이 치솟아 일주일 내내 목 놓아 울 것 같았다. 물이 가득 차서 넘칠 것 같은 컵처럼, 눈물이 차올랐다. -p. 123쪽

아침마다 소설 편집자의 사무실에는 눈사태 난 것처럼 원고가 쏟아졌다. 미국 전역의 서재, 다락방, 교실에서 사람들이 은밀히 글을 쓰는 것 같았다. -p. 125쪽

등을 뒤로 기대고, 쓴 부분을 읽었다.

충분히 생생한 것 같았고, 벌레 같은 땀방울 부분이 자랑슬웠다. 다만 오래 전 다른 데서 그런 묘사를 본 것 같은 인상이 어렴풋이 들었다.

한 시간쯤 그렇게 앉아서 이제 어찌할지 고민했다. -p. 147쪽

매트리스와 침대 틀 사이로 들어가, 매트리스를 관 뚜껑처럼 내 몸에 덮었다. 어둡고 안전한 기분이었지만, 매트리스가 충분히 무겁지 않았다.

잠들려면 1톤쯤 더 무거워야 될 것 같았다. -p. 150쪽

"문제가 뭐 같아?"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책도 못 읽겠고요."

차분한 태도로 말하려 했지만, 귀신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목이 막혔다. 나는 두 손바닥을 위로 향하도록 해서 쫙 폈다. -p. 153쪽

잠을 못 잔 지 7일이나 됐다.

엄마는 내가 분명히 잤을 거라고, 7일이나 안 잘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잤다고 해도 눈을 크게 뜨고 잤을 것이다. -p. 155쪽

1년의 하루하루가 흰 상자들처럼 줄줄이 늘어서 있고, 상자와 상자 사이에 검은 그림자 같은 잠이 있었다. 유독 내게는 상자와 상자 사이에 놓인 긴 그림자가 갑자기 쑥 빠져서, 하루하루가 끝없이 쓸쓸한 흰 대로처럼 내 앞에서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다음날 또 옷을 빨고 머리를 감아야 하는데, 오늘 그러는 게 멍청한 짓 같았다.

그 생각만 해도 지겨웠다.

모든 걸 딱 한 번만 하고 끝까지 그대로 버티고 싶었다. -p. 156쪽

못생기고 친절하고, 직관이 있는 남자가 올려다보면서, 내가 모르는 것을 안다는 듯 격려하는 말투로 "아!" 하고 말하는 것을 상상했다. 그러면 나는 빠져나갈 길 없는 숨막히는 검은 주머니 속에 점점 처박히는 것 같이 겁난다고 말할 것 같았다. -p. 157쪽

가장 신경 쓰이는 게 필체란 말은 하지 않았다.

...아이가 쓴 것처럼 크고 삐뚤삐뚤한 글씨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거의 대각선으로 내려갔다. 누가 글씨에 대고 비스듬히 입김이라도 분 것 같았다.

그런 편지를 부칠 수 없어서 짝짝 찢어서 핸드백에 넣었다. 의사가 보여달라고 할까 콤팩트 옆에 쑤셔 넣어두었다.

물론 내가 그 이야기를 안 했으므로, 닥터 고든은 편지를 보여달라고 하지 않았다. 내 영리함이 흐뭇해지기 시작했다. 말해주고 싶은 것만 말해야지. -p. 158쪽

하지만 닥터 고든이 그 일에 대해 엄마랑 대화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나를 병원에 가둬야 한다고 말할 것 같았다. 편지 조각을 모았다. 그가 편지를 이어 붙여, 내가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면 곤란했다. 난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p. 165쪽

가장 마음에 드는 나무는 '흐느끼는 학자 나무'였다. 일본산 나무일 것 같았다. 일본인들은 정신에 대한 것들을 이해했다.

그들은 일이 어긋나면 스스로 할복했다.-p. 167쪽

앞자락이 지저분한 유니폼을 걸친 덩치 좋은 간호사는 사팔눈이었다. 안경알이 워낙 두꺼워서 눈 네 개로 날 쳐다보는 것 같았다. -p. 172쪽

사람들이 어느 늙은 로마 철학자에게 어떻게 죽고 싶은지 묻자, 그는 따뜻한 물속에서 동맥을 끊을 거라고 말했다. 욕조에 누워, 팔목에서 흐른 붉은 피가 투명한 물속으로 퍼지는 것을 보는 것은 쉬울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양귀비꽃처럼 화려한 수면 밑, 잠 속으로 빠져들겠지.

하지만 시작하려는 순간, 팔목의 살갗이 너무 허옇고 무방비 상태여서 칼을 댈 수가 없었다. 죽이고 싶은 게 그 살갗이나 엄지 밑에서 뛰는 파란 핏줄이 아니라, 다른 데 있는 것만 같았다. 더 깊고 은밀하고, 다다르기가 훨씬 어려운 곳에. -p. 178쪽

노란 실크 끈을 고양이 꼬리처럼 목에 매달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목을 맬 곳을 찾다가, 엄마의 침대에 앉아서 끈을 꽉 당겼다.

하지만 끈을 바싹 당겨서 귀가 벌게지고 얼굴에 피가 솟구치는 기분이 들 때마다 끈을 풀었고, 그러면 다시 괜찮아지곤 했다.

그 때 내 몸이 온갖 종류의 속임수를 쓴다는 걸 알았다. 중요한 순간에 양손이 늘어졌고, 그러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내 뜻대로 한다면 순식간에 죽는 거였는데. -p. 193쪽

엄마는 말했다. 자기에 대해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생긴 병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돕는 게 치료법이라고. -p. 196쪽

눈을 뜨면, 색깔과 형체들이 간호사처럼 내게 몸을 굽히고 있을 것 같았다. -p. 207쪽

"오늘 아침에는 기분이 어떠세요, 미스 그린우드?"

...기분이 뭣 같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쾌활한 목소리로 "기분이 어떠냐?"고 묻고 "좋아요"란 답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싫다.

"거지 같아요." -p. 215쪽

기니 여사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그녀가 유럽 행 티켓이나 크루즈 왕복표를 줬다 해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내가 어디 있든-배의 감판이든 파리나 방콕의 거리 카페든-나 자신의 시큼한 공기 속에서 속을 태우며 벨자(종 모양의 유리 그릇) 밑에 앉아 있을 테니까.-p. 225쪽

"하지만 지금은 괜찮잖아."

내가 분명하게 말했다.

조앤은 반짝이는 회색 눈으로 날 쳐다보며 대꾸했다.

"그럴 거야. 너도 그렇지 않아?" -p. 243쪽

"난 네가 좋아."

나는 책을 들면서 대답했다.

"그건 곤란해, 조앤. 난 너를 안 좋아하니까. 이유를 알고 싶다면 말하지. 널 보면 토할 것 같아서 그래."

방에서 나왔다. 조앤은 내 침대 위에서 늙은 말처럼 늘어져 있었다. -p. 268쪽

예전부터 퇴원할 때는 앞에 펼쳐진 모든 것을 알고 확신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내가 '분석'되었으니 모든 게 분명해질 터였다. 그런데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물음표뿐이었다. -p.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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