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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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3일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 장편 夏帆─The Tale of KAHO─ 출간 자정부터 도쿄 대형 서점에서 오픈런이 벌어지는 등 현지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면서 초판 25만 부 발매된 이후 단 4일 만에 5만 부 추가 증쇄(2쇄)가 결정되었습니다. 

 하루키는  현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앞서 출간한 작품에서  아버지와 아들 서사를 주로 다뤘던 것과 달리 이번에 출간한 새 장편  夏帆─The Tale of KAHO─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 여성의 시선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며 인공지능(AI)이 과거 데이터를 종합해 유추하는 글쓰기와는 달리, 소설은 "허공에서 불쑥 새로운 것을 끌어오는 작업"이라고 강조 하며  개인의 서사가 아닌 가족을 둘러싼 문제를 중심으로 내세운 작품이라고 소개 했습니다.

하루키 장편 사상 최초로  26세 여성 그림책 작가 '가호'를 단독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모녀 관계의 갈등'이면에 비춰진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관이 투영된 이번  신작 장편은 일본의 mz세대로 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다는 호평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 문학계에서는 77세에 다다른 하루키 필력이 이전에 비해 느슨해 졌고 20대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서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도한 "모녀 살해"라는 장치가 전체 서사에 매끄럽게 녹아들지 못한채 이야기 속 판타지 설정이나 흐름이 지나치게 현실과 괴리 되어 있거나, 기존 작품들에 비해 억지스럽게 설정했다는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상반된 평가에도 불구하고 현재 일본 내 누적 발행 부수는 총 30만 부를 돌파하며 하루키의 오랜 팬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을 처음 읽는 독자들로 부터 역대 출간 된 하루키의 소설 중에서 신간 <가호>가 가장 쉽고 재미있으며 스릴 넘친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2024년 3월 와세다 대학 국제문학관에서 열린 낭독회 때 하루키는 두 페이지 분량의   짧은 단편 <顔> * 발표 당시 여주인공의 얼굴을 의미 하는 한자 가호로 함  를 행사에서 직접 낭독했습니다. 

2024년 6월 월간 문예지 《신초(新潮)》에 연재 당시 수정을 거쳐 여주인공의 이름 (夏帆)로 발표 했고 그 해   7월 미국 뉴요커의 여름 소설 특집편에 영어 번역본이 실렸습니다.


 2023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발표한지 3년 만에 나온 하루키의 16번째 장편소설 <가호> 夏帆 - The Tale of KAHO 완성본이 출간 될 때까지 저는 소설의 도입부인 제 1장 가호와 모터 사이클의 남자를 읽으면서  하루키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끌고 갈지 상상 하며 여러 번 탐독 했습니다.

'여름 하(夏), 돛 범(帆)'을 의미하는 이름의 26살 여성 가호는 이야기 그림책을 쓰고 그리는 작가입니다.

 2월 중순에 태어난 가호의 이름에  여름이라는 의미의 한자가 들어간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가 한여름의 요트 꿈을 사흘 내내  꿨기 때문입니다. 계절과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 가호는 기이하게도 태생적으로 자신의 얼굴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성인으로 성장 합니다.

그러던 중 스물 여섯 살 생일을 지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처음 만난 남자에게 '못 생겼다'는 말을 듣자마자 순간 당황하지만 자신의 외모를 지적하는 남자의 무례함에 분개 하거나 충격을 받지 않고 그저 순수한  놀라움에 사로 잡힙니다.

편집자의 소개로 만난 남성과  블라인드 데이트를 하고 난지  두 달이 지났을 무렵 가호는 기나긴 꿈 속에서 기이한 경험을 하고 나서 현실로 돌아와 다음 날 동이 틀때 까지 꿈에서 본 이야기를 전부 떠올려 새 그림책을 완성하게 됩니다.

가호가 완성한 그림책의 이야기는 곤히 잠든 사이 누군가 훔쳐간 자신의 얼굴을  찾으로 가는 이야기 입니다.

얼굴 찾기 여행을 하기 시작하는 가호의 그림책 소녀의 이야기와 현실의 그림책 작가인 가호의 비 현실적인 이야기가 서로 맞물리면서 이야기의 전개는 독특한 캐릭터가 곳곳에 등장하면서 '꿈속인지, 혹은 꿈 같은 것 인지' 수수께끼 같은 입구로 독자들을 이끌고 갑니다.

가호가 처음 맞닥뜨린 꿈속인지, 혹은 꿈 같은 존재는 '말하는 개미핥기 부부'입니다.

' 개미핥기 부인'이 가호에게 도쿄 서쪽 외곽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고 말하니 가호는  불가해한 힘에 이끌려 그곳으로 이사를 합니다.

그곳에 새롭게 정착한 가호는  이번엔 '칼 가는 집'으로 가서 '죽은 흰개미를 오일에 절인 병조림'을 밀반입해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가호가 칼 가는 집에 가니, 이번엔 또 느닷없이 개미핥기 '남편'이 등장해 칼 가는 집 주인을 찌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세상에 존재 하지 않거나 존재하는   개미핥기 부부와 흰개미 여왕, 재규어 같은 동물들이 이야기 곳곳에 등장 하지만 이 소설에서 핵심을 이루는 갈등은 가호와 그의 어머니 사이에서 벌어지지만 모녀 간의 갈등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가호가 현실에서 겪는 사건들과  그림책에 쓰여지는 광경이 마치 장기판의 말이 움직이듯 입체적으로 펼쳐 집니다.

가호가 쓴 첫번째  그림책의 주인공인  소녀가 자기 얼굴을 찾으러 가는 이야기는 편집자의 소개로 만났던 남자가 대뜸 그녀의 얼굴을 두고 모욕적인 평을 퍼부은 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가호의 두 번째 그림책인 개미핥기 부부가 천적인 재규어를 물리치는 과정과  어머니와의 갈등을 겪고 있는  소녀가 감추어진 비밀 출구를 찾는 세번째 작품까지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 책은 단지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세계 속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가호> 223p

소설 속에서 가호가 완성한 첫번째 그림책은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가호 자신의 마음도 치유하게 되는데 그녀는 편집자로 부터 이 책의 아이디어를 어디에서 떠올렸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합니다. 

“어딘가 어둡고 깊은 곳에서”

여기 까지 펼쳐진 스토리를 하루키의 광팬들이 읽게 된다면 20대 여성인 가호가 그림책 작가라는 사실을 제외 하면 앞서 출간한 하루키의 대표작 '해변의 카프카'처럼  어느 날 문득 모종의 계기로 인해 일상에서 벗어나 비일상의 세계로 들어가 그곳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성장하고 깨달음을 얻은 뒤 일상으로 복귀하는 스토리로 귀결 될 것임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예언과 부친 살해를 다룬 '해변의 카프카'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여성이 주인공인 '가호'는  아버지에게 부성을  느끼고 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어머니를  경쟁자로 인식하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가졌다는 심리학적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키는 광팬들이 예측한 대로 이야기에 복선을 교묘하게 비틀어버렸습니다.

가호의 모친 살해 의도는  생물학적인 어머니를 죽이는 게 아니고 어머니의 몸을 '가로챈' 흰개미 여왕을 죽이면서 자신을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로 부터 가호 (夏帆)라는 이름의 의미를 부여 받아  역설적인 현실의 부조리한  세계를 부수고, 자신만의 돛(帆)을 펼치면서 본연의 모습을 되찾게 됩니다.

2023년 부터   세계 마라톤 대회 참가를 하지 못하게 된 하루키는  2024년 6월호부터 2026년 3월호까지 '여름(夏帆)' 시리즈로 나뉘어 총 4회에 걸쳐  <가호> 원고를  수정 하는 동안 그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져서 약 20kg의 체중이 줄어드는 투병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하루키는 매일 한 시간씩 집 주변을 달리며 체력을 다졌음에도 투병 후  달리 걷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기력이 떨어졌지만 다시 펜을 잡고 글을 썼고 마침내 원고지 650매를 채운  352 페이지 분량(한국어판 374페이지)의 장편 소설을 완성 했습니다.


저 역시 몇 년 전 부터 업무 과다와 심리적 부담감 등 여러가지로 인해 피로가 지속적으로 누적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건강에 대한 자만감에 사로 잡혀 있었던 중에 올 초 부터 급격한 체력 저하와 피로감에 시달려 왔습니다.

무심코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도 몇 일 쉬면  자연 치유 되리라 과신 하며  지나쳤던 것들이 큰 병이 발발할 적신호라는 걸 쓰러지기 전까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병원에 실려가서 의사의 호통과 강제 입원을 하고 나서야 그동안 제 스스로 몸을 돌보지 않았다는 후회를 하면서도 여전히 이 병이 왜 발발 했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투병 중에 어떤 것도 눈에 들어 오지 않았고  무조건 안정을 취하라는 의사의 말에 몇 일 동안 병실 천장만 멍하니 보고 있으니 시간이 지날 수록 도저히 견디지 못해 아이패드로 이런 저런 영상을 클릭하다가 이북으로 하루키의 에세이 책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0월 21일 하루키의 16번째 장편 <가호>가 도착 했고 병상에서 단숨에 읽어 버렸습니다.

앞서 출간한 하루키의 소설 중에 제가 가장 아끼는 소설은 초기작인 '쥐'가 등장 하는 삼부작과 '태엽을 감는 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 랜드' 그리고 수 십편에 달하는 단편집 입니다.

투병 중에 읽어서인지 이번에 출간한 <가호>는 제 마음에 와 닿은 문장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습니다.

마치 바다 건너 77세에 접어든 노작가가 제 마음을 읽고 활자로 옮겨 놓기라도 한 것 처럼 <가호>라는 소설은 제가 겪은 이야기도 스며 있습니다.

[소녀는 걸어서 세계를 누빈다. 높은 산을 넘고, 깊은 강을 건너고 광대한 사막을 가로 지르고 빽빽한 정글을 헤쳐나간다. 가혹한 여정 이지만 절대 포기 하지 않는다. 자기 얼굴을 찾으면 제 것임을 바로 알아보리라는 확신이 있다. 아무튼 나라는 존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일부니까. 여행 하면서 숱한 사람을 만나고 갖가지 기묘한 체험도 한다. 코끼리 무리에 짓밟힐 뻔하거나 야구 글로브만한 거대한 거미가 달려들거나 사나운 말에게 걷어차일 뻔한 적도 있다. 깊은 정글 속 좁은 길에서 온화해 보이는 개미핥기 부부와 스쳐지난 적도 있다. 소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개미핥기 부부 역시 살짝 고개를 숙였다. "흉포한 재규어만은 모쪼록 조심하도록 해요." 개미핥기 부인이 친절하게 충고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가호> 31p

저는 스무 살부터 세상 곳곳을 유랑 하면서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며 문화와 피부색이 다른 국가에서 살아 남기 위해 제 본연의 얼굴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았습니다. 나와 피부색이 다른 그들이 자신들과 나를 다른 부류로 나누며 선을 그을 때마다 하루키의 소설 <가호>에 등장하는 개미핥기 부부 같은 은인도 만났고 불가해한 힘에 이끌려 이사간 곳에서 기이한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밖을 나가면 보이는 것은 온통 낯선 타인의 얼굴이라는 것,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유일한 아시안 여성이라는 사실을 깨닫던 순간 슬픈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제가  출근길 전차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하루키 소설 <가호>에 등장하는 칼 가는 집에서 칼을 갈은 저는 지독할 정도로 앞만 보고 달려서 목표했던 것을 성취 했지만 이에 대한 댓가는 달콤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하루키가 제 마음을 읽기 라도 했는지  <가호>에 이런 문장을 발견 했습니다.

[임시 방편으로 붙이고 다니던 얼굴이 이미 진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여행하며 체험한 갖가지 일이 가는 곳마다 마음을 스쳤던 색색깔의 생각이, 희망이며 슬픔이며 동경이며 실망의 조각조각이 그녀 자신의 진정한 얼굴을 풍요롭고 생생하게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그녀 본래의 얼굴 외에 무엇도 아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가호> 32p

원하던 원치 않았던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우리 인생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고 누구나 각자의 이야기 세계에서는 신화적 주인공의 역할을 맡아서 그에 걸맞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긴 투병을 마친 뒤 이 작품을 완성한 하루키는  번역으로 돌아가 매일 7000자의 활자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일본 출판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는 매일  원고지 20장을 채우며   365일 글을 쓰는 작가로 통하고 있습니다.

일본어는  원고지 한 장에  400자를 채울 수 있습니다.

한글처럼 띄어쓰기가 없는 일본어 400자를  원고지에 가득 채우려면 하루 평균 7000자 이상의 글을 써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출판 되는 장편 소설 분량은  책 한 권에 10만자가 기본입니다.

이 기준을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적용한다면 그는 보름마다 책 한 권을 완성 하며 단 하루도 헛되게 살지 않는 철두 철미한 작가입니다.

그가 이번에 16번째 완성한 <가호>에 마치 작가의 분신처럼 이런 문장이 등장 합니다.

“왜냐하면 이건 당신 자신의 세계 속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필연적으로 그 세계의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선도 악도 아닌 것도 다 같이 당신 품으로 밀려듭니다. (…) 그리고 당신은 밀려 드는 그것들 가운데서 어떤 것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단호히 제거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주인공인 당신의 책무입니다—받아들일지 내칠지 판별해서 좋은 이야기로 만들어가는 것, 그게 당신 역할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가호> 중에서

병상에서 잠든 동안 저는 꿈 속에서 너무 많이 울었는데 실제로 깨어나 보니 베갯잇이 전부 젖어 버릴 정도 였습니다. 

80세를 앞둔 무라카미 하루키 과연 남은 생애 동안 몇 편의 작품을 더 발표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이번 <가호> 소설 마지막에 깊은 여운을 남긴 문장을 새겨 넣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호는 정말 오랫동안 툇마루에 앉아 온 몸을 쥐어 짜내듯 울었다. 말 그대로 눈물이 바닥날 때 까지. 마침내 눈물이 더 나오지 않자 자리에서 일어나 세면대로 가서 얼굴을 씻고 수건으로 닦았다. 그리고 세면대 거울을 보며 크게 한번 심호흡한 다음, ‘미소라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늘 앉는 작업용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무라카미 하루키 <가호> 374p

어쩌면 현 시대에  무라카미 하루키는  인공지능과 협업 하지 않고 작가적 상상력과 필력으로 쓴 마지막 20세기 아날로그형 작가 세대 일 지 모릅니다.

하루키가 긴 투병을 마친 뒤 도전하는 마음으로 써낸 16번째 소설 <가호> 많은 독자들이 긴 감동의 여운을 느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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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6-10-25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cott님 늘 건강 잘 챙기시고 하루키보다 오래오래 쓰고 싶은 글 잔뜩 쓰시길 빕니다.
 

OTT 채널에 매 시즌 마다 쏟아져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의 장르 중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것들 모두 "서바이벌' 장르다.

몸 근육을 쓰는 것 부터 노래를 부르는 오디션 프로그램들까지 모두 다 경쟁하는 한국인들에게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마치 내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아 생존 경쟁을 담은 서바이벌 서사에 열광한다.

짧은 시간 안에 음식을 완성하고 탈락을 피하기 위해 촌각을 다투는 요리 서바이벌의 살벌한 전쟁터를 생생하게 보여준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프로그램은 전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다양한 예능 방송 출연하는 셰프는 인기 연예인 못지 않는 예능인으로 거듭 나고 있고 다양한 요리를 방송에서 선보이면서 파인다이닝에 대한 대중적 관심까지 높아졌다.

현재 한국에서 전 세계 유명 맛집과 프랜차이즈점들이 들어서서 언제 어디서든 다양한 국가의 음식을 맛볼 수 있게 되었지만 오랜 시간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외식은 중국 음식이었다.

특별한 날에 먹는 중국 음식에서 오랫동안 한국인들에게 짜장면과 짬봉은 최고 인기 메뉴였고 지금까지도 중국 음식점 메뉴판을 볼 때면  짜장면 아니면 짬뽕 사이에서 갈팡질팡 할 때가 많다.

짜장면도 짬뽕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중국 음식점에 갈 때면 군만두만 먹었다.

부모님은 막둥이가 검고 시뻘건 색깔 때문에 짜장면이나 짬뽕을 먹지 않는다고 생각 하셨는지 군만두를 주문 할 때면  울면을 시켜 주셨다.

처음 울면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울음도 그칠 정도로 맛이 기가 막힌 면요리라 생각했다.



 다양한 해물과 돼지고기, 닭고기 채, 버섯과 채소가 들어가는 울면은 매운 맛이 없고 순한 국물에 녹말을 풀어 걸쭉한 국물을 내어서  한 그릇만 먹어도 속이 든든한 요리다.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난 외할아버지는 전쟁 발발 이전까지 짜장과 울면이 가장 인기 메뉴였다는 말씀을 하셨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때 중국 음식점은  '청요리'로 불렸는데 경성의 유명 호텔이나 고급 레스토랑의  파인다이닝에서 식사하는 것과 같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저렴하게 서민들이 먹을 수 있는 중국 음식은 대륙에서 넘어온 중국 노동자들이 포장마차에 차린  호떡과 밀가루 반죽을 기름에 튀겨낸 유타오라는 일종의 꽈배기, 그리고 따뜻하게 데운 콩물을  팔았다.

그릇에 담긴 면 요리나 탕수육은 서민은 물론이고 중상층도 1년에 한 번 먹기 힘들 정도로  굉장히 고가의 음식이었다. 

1930년대 중국 베이징과 북동부 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고급 국수는 북경(베이징)식 짜장면(검은색이 아닌)과 다루멘(打滷麪) 또는 지역 사투리로 원루멘(溫滷麪)이었다. 

녹말을 풀어 하얗게 된 국물의 빛깔이 마치 염전에서 소금이 엉긴 소금물 같다는 뜻인 따뜻할 온(溫)과 , 소금밭 로(滷)의 원루멘의 한국식 한자 독음인 '온로멘'이 발음의 변화를 거치면서 울면이 되었다.

근대화 이전에는 녹말을 대량으로 제조하기 어려워 녹말을 많이 쓰는 요리일수록 가격이 높아서 호텔이나 고급 레스토랑에서만 맛볼 수 있었지만  개화기 즈음 공장에서 대량으로 녹말을 생산하는 기술이 생기면서 예전의 고급 요리들이 상대적으로 먹어볼 만한 가격이 됐고 이 때문에 울면과 탕수육의 인기가 높아지게 되었다.

중국인과 화교들에게 고향의 맛인 울면은 단연 인기가 높았지만 녹말을 풀어내어 끈적하게 입 속에 머무는 국물이 낯설었던 한국인들 중 부유한 계층은 녹말을 풀지 않은 맑은 국물의 일본식  우동을 더 선호 하게 되었다.

전후 경제 부흥기 시절에 청춘을 보냈던 아버지의 기억에 의하면  짬뽕이 처음 나왔던 때가 1970년대이고 시뻘건 색깔의 짬뽕은 1970년대 후반에 등장 했다고  기억하고 계셨다.

짜장과 짬뽕이 한반도에 등장 하기전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밥과 된장, 간장을 먹는 식문화를  1000년 이상의 지속 시켜 왔다. 

반면 지금처럼 밥보다 빵과 면을 주식 처럼 먹는 것,  된장국보다 된장찌개를  더 자주 먹게 된 것, 조선간장이 아닌 공장제 간장을 먹게 된 것은 불과 100년도 되지 않은 일이다.

매운맛을 가장 좋아 하는 한국인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청양고추가 개발된 것은 1983년이고 이 매운 고추가 널리 퍼진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다.

 그전까지 한국 요리의  매운 맛은 청양고추가 아닌 일반 붉은 고추의 고춧가루와 후추가 들어갔다.

다양한 식재료에 청량 고추를 넣어 먹기 시작 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로  그전까지 한국인에게 매운맛의 대명사는 신라면이였다.

 청양고추보다 더 매운 음식이 잔뜩 쏟아져 나온 것은 마라탕이 밀려 들어 오면서 불닭볶음면이 유행했을 때 즈음으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 식탁에는 맵지 않은 음식들이 지금보다 많았고 다양한 식당가에서도 순한 맛, 맑게 우러 낸 재료 본연의 맛의 음식들을 쉽게 찾아 먹을 수 있었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은  중국 요리점에서도  울면과 중국 우동 외에 닭고기와 닭뼈 육수에 가늘게 썬 닭고기 고명이 올라가는 기스면도 인기 메뉴였다.

 볶음밥을 시키면 따라 나오는 국물의 경우도 미리 만들어 둔 짬뽕 국물이 아니라 시원한 중국식 고기 육수에 보드랍게 계란을 풀고 파와 참기름을 띄워 주는 계란국까지 순한 맛의 국물들을 지금 보다 더 다양하게 맛 볼 수 있었다. 

짜장과 짬뽕을 고민 하지 않는 나는 울면을 앞에 두고 1937년에 출간된 채만식의 장편소설 '태평천하'에서 주인공 윤직원(윤참판)이 춘심이와 중국집에서 우동과 탕수육을 먹고 기생들과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거라는 대목을 찾아 본다.


윤직원 영감은 쿨럭 갈앉은 큰 배를 슬슬 만집니다. 춘심이는 그 속을 모르니까 뚜렛뚜렛합니다.

"아뇨, 왜요?"

"배고푸다머넌 우동 한 그릇 사줄라구 그런다."

"아이구머니! 영감 죽구서 무엇 맛보기 첨이라더니!"

"저런년 주둥아리 좀 부아!"

"아니, 이를테믄 말이에요……! 사주신다믄야 밴 불러두 달게 먹죠!"

"그래라. 두 그릇만 시키다가 너허구 한 그릇씩 먹자!"

"우동만, 요?"

"그러먼?"

"나, 탕수육 하나만……."

"저 배때기루 우동 한 그릇허구, 또 무엇이 더 들어가?"

"들어가구말구요! 없어 못 먹는답니다!"

"허! 그년이 생부랑당이네! 탕수육인지 그건 한 그릇에 을매씩 허냐?"

"아마 이십오 전인가, 그렇죠?"

윤직원 영감의 말이 아니라도 계집애가 여우가 다 되어서, 탕수육 한 접시에 사십 전인 줄 모르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동 두 그릇, 탕수육 한 그릇 얼른 빨리…… 우동 두 그릇, 탕수육 한 그릇 얼른 빨리…… 삼남이는 이 소리를 마치 중이 염불하듯 외우면서 나갑니다. 사실 삼남이한테는 그걸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하루 세 끼 중에 한 끼를 잊어버리지 않음과 일반으로 중요한 일이어서, 그만큼 긴장과 노력이 필요하던 것입니다.

-채만식의 태평천하 중에서 

식문화는 가장 바뀌기 어렵지만 동시에 가장 많이 바뀔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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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10-24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중국집들은 배달 위주의 식당이 많다보니 과거와 달리 기본인 짜장면이 하향 평준화되어서 맛있는 짜장면 찾기가 매우 힘들다고 하더군요.게다가 볶음밥은 고슬고슬하게 볶는 것이 아니라 기름에 절은 밥이어서 먹고 남면 더부룩 해 지더군요.
그나마 메뉴판에 우동과 욺면이 있는 중국집은 기본 이상이라고 해서 요즘은 이런 집이 맛집이라고 각광받는다고 하네요.
 

매자나무 열매는 벌써 익었습니다.

꽃밭에 시들어가는 과꽃이 여린 숨을 내쉽니다.

지금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여름이 지나가고 있기에,

언제고 기다릴 뿐 아무것도 손에 놓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의 어둠 속에서 일어서기 위해

내면의 밤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는

숱한 환상들이 있음을 스스로 믿기에

지금도 눈을 감을 수 없는 사람은

노인처럼 세월만 흘리고 말 것입니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어떤 날도 일어나지 않으며,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를 속일 뿐입니다.

나의 신이여,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매일 그를 심연으로 끌고 가는 돌과 같습니다.


-릴케의 기도 시집,순례의 서- '매자나무 열매는 벌써 익었습니다.' 중에서



시어 속에 가을의 향기와 맛, 정취를 즐겨 넣었던 릴케는 태양의 길이가 짧아지는 늦가을 무렵이면   '과일들이 완성을 재촉 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며 들게 해달라'라는 기도를 저녁 시간에 올렸다.

그는 1년 동안 포도주를 숙성 시키듯 시어들을 차곡 차곡 담아 익어가는 매자 나무 열매에서 생의 끝자락을 보았다.

그가 이 시를 썼을 무렵엔 극도로 생활고를 겪었던 시기로 1903년 조각가 로댕의 작업실에서 숙식을 해결 하면서 낮에는 로댕의 작업 일지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고 밤이면 시를 썼다.

'들판을 가로질러 먼 길을 달려온 듯 이내 피곤해질'만큼 하루를 보내며 시를 쓴 릴케는 로댕의 파리 뒷골목 작업실 안으로 가득 찬 진료서 약품 냄새와 골목마다 자리한 식당에서 조리 한 음식 냄새로 뒤섞이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중 인간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요오드포름 냄새와 식욕을 채우려는 음식 냄새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1904년 <말테의 수기>를 쓰기 시작한다.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젊어서 시를 쓰게 되면,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다며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와 감미를 모아야 한다.는 조언을 했다.

글쓰기는 항아리 속에 담근 술이 익어가는 동안  발효 과정에서 내뿜는 기포 같은 번민과 상념, 후회와 상실, 기쁨과 행복 같은 감정을 서서히 가라 앉혔다가 떠오르는 순간을 포착하듯 써야 한다.

운명은 여러 무늬와 형상을 고안해 내기를 좋아하기에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닌 살아 온 시간이 응축 된 언어다.

봄과 여름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가을의 태양 아래서 익어가는 과일들은 저마다 다른 색과 향 그리고 각기 다른 크기의 씨를 품고 있다.

그 씨들은 다음 생명을 위한 씨가  되어 가을의 시간이 지나가도 생명의 빛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제8 비가

모든 눈으로 생물들은

열린 세계를 보고 있다. 우리들 인간의 눈만이

반대 방향을 보는 듯,

그들의 자유로운 출구를, 덫이 되어 둘러막고 있다.

출구 밖에 <있는> 것, 그것을 우리는

동물의 표정에서 읽을 뿐이다. 어린아이 때부터 우린 이미

아이의 등을 돌려놓고 형상의 세계를 뒤쪽으로 보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얼굴에 깊이 깃들어 있는 열린 세계를 보지 못하게

한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그 세계를.

죽음을 보는 것은 우리들뿐이다. 자유로운 존재인 동물은

언제나 몰락을 뒤에 두고

앞에는 신을 보고 있다. 걸을 때에는 영원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마치 샘물이 흘러가듯이.

<우리는> 단 한 번도, 단 하루의 날도

꽃들이 끊임없이 피어 들어가는 그 순수 공간을

만나는 적이 없다. 우리가 만나는 것은 언제나 세계이다,

결코 <부정이 없는 어디도 아닌 곳>,

공기처럼 숨쉬고, 무한정이라고 <알기에> 탐내지 않는

순수한 것,

감시받지 않는 것이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어릴 때에는

아무도 모르게 거기 몰입했다가 누군가에게 흔들려

깨어난다. 혹은

죽을 때 그것이 되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죽음에 이른 사람이 보는 건 이미 죽음이 아니라

<먼 곳>이기 때문이다

-『두이노의 비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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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10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탄 산타 마리아 호는  쿠바에서 출발해서 미지의 섬을 향한 항해를 시작했다.

두 달 전 아메리카 대륙에 첫 발을 내딛었던 콜럼버스는 타이노 원주민으로 부터 신비한 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 원주민이 알려준 신비한 섬 <바네케baneque>에 황금과 보석이 가득하다는 말을 진심으로 믿은 콜럼버스는 황금과 보석을 독차지 하기 위해 10월부터 시작된 항해가 12월까지 이어졌지만 결국 그 섬을 찾지 못한다.


 (C) oscar santillan,2016

수세기의 시간이 흐른후 에콰도르 출신의 작가 오스카 산틸란이 2016년 15세기 콜럼버스가 남긴 지도를 참조해서 직접 황금과 보석이 가득한 보물섬인 <바네케baneque> 을 찾아 나섰다.

바네케 섬은  현재 도미니카 공화국 북쪽 해안, 대서양의 한가운데 있는 섬으로 콜럼버스가 남긴 지도에 새겨진 그 섬의 위치로 추정되는 지점은 불에 그을려 버린 흔적처럼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구멍 난 지점을 찾아 나선 작가 오스카 산틸란은 해안에서 4.2 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지점에서 100리터의 바닷물을 퍼 올려서 자신의 작업실에서 물을 증발 시키고 부유물과 소금 결정체로 이루어진 덩어리를 만든다.

(C) LLANO _ Oscar Santillán,2016

작가의 상상력으로 탄생한 <바네케>섬은 어느 누구도 차지 할 수 없는 바다 한 가운데서 퍼 올린  바닷물에서 쏟아져 나온 소금 알갱이처럼 콜럼버스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황금과 보물로 가득 찬 섬도 아닌  지도에 구멍이 뻥 뚫려 버린 것 처럼  인간의 헛된 욕망이  만들어 낸 섬이다.

작가가 만든 이 소금 덩어리들도 시간이 흐를 수록 공기 속 수분과 습도로 인해 녹아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생각하는 그 섬은 만물의 생성의 소멸과 중간 어디 즈음에 존재 할 뿐이다.


사람들 꿈속에서 보는 것은 

사는 동안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

깨어 있을 때 그들이 생각하고 보고 행하는 것

그러니 놀랄 일은 하나도 없네

아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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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청취자 질문에 답하다. 1편

https://tobe.aladin.co.kr/n/153495

-하루키 청취자 질문에 답하다. 2편

https://tobe.aladin.co.kr/n/167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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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청취자 질문에 답하다 8편

https://tobe.aladin.co.kr/n/678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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