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로 책을 읽다 보면 중복되는 성이 거의 없다.

신문에 등장하는 전국적인 인물들의 성들도 제각각이다.

일본에서는  똑같은 이름은 많아도 같은 성을 찾기란 드물다.

현재 일본 열도의 총 인구 수는 1억 2천 명으로 성씨는 30만개 정도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한국의 성씨는 현재 호적에 등록된 성은  300여개 정도 뿐인데 일본은 성性씨 한 명당 400여명 정도가 같은 성일 뿐이여서 학교나 사회 생활에서 이름보다 성씨로 사람을 구별한다.

일본은 헤이안 시대인 3-4세기 경까지 오로지 권력을 갖고 있는 특권층들만 성씨를 가질 수 있었다.

이후 각 번을 통치 하는 영주들에게 종속된 사무라이들이 성을 갖기 시작하면서 무사계급까지만 성씨를 사용하고 대를 물려서 부와 재산을 지켜 나갔다.

1875년 메이지 시대 일본 정부는 새 호적법을 개정하면서 일본 전국민들에게 성씨를 가져야 한다는 통보를 한다.

갑작스러운 정부의 령을 받은 일본 국민들 중 권력층에 속하지 않은 대다수 일반인들이 자신들이 현재 살고 있는 지역과 지명, 마을의 이름을 성씨로 등록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일본에서 가장 흔한 성씨들은  1.佐藤사토 2 . 鈴木스즈키 3.    高橋다카하시 4.  田中다나카

이 성씨들의 한자어를 살펴 보면 모래, 나무, 다리 ,밭 같이 삶의 터전에서 유래한 성씨들이 대부분이다.

너무 많은 인구가 한꺼번에 갑작스럽게 성씨를 만들다 보니 상-중-하로 짓거나 ‘하야시(林)’, ‘모리(森)’ ‘하라(原)’ 같이 한 단어 한자어를 성씨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위에 언급한 성씨들이 일본내에 많은 인구층을 형성하고 있다 해도  일본 인구에서 21퍼센트 정도 차지 할 뿐이다. 

일본 아사히 신문에 '선택적 부부 별성(別姓) 제도'를 선택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사설이 실렸다.

메이지 시대 전 국민에게 성씨를 등록하는 절차와 함께 여성은 결혼을 하면 남자의 성씨로 개명하는 호적법을 유지했던 일본 정부는  쇼와시대가 끝나는 1989년 부부동성제를 적용했다.

법률상으로는 남편의 부인 중 한 쪽의 성씨를 선택해도 되지만,일본의 고착화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95%는 여성이 남편 성으로 개명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대한 차별과 불이익은 상당하다. 이혼을 하거나 재혼을 할 경우 자녀들의 성이 하루 아침에 바뀌어 버려서 급우들 사이에 차별과 이지메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특히  여성은  자신의 호적에 여러 번 줄을 긋고 복잡한 절차를 밟아서 전 남편의 성을 바꾸고 자신의 성씨를 되찾거나 새로 재혼한 남편의 성으로 바꾸기 위해  각종 공공기관에 등록된 공인 인증서에 기재된 성씨를 전부 수정해서  면허증, 보험증, 은행계좌, 여권 등을 갱신해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일본 정치인 중 최초로 재직 중 육아 휴직을 한 고이즈미 신지로가 지난 총리 선거 가두 유세 연설 당시 선택적 부부 별성(別姓) 제도를 도입해서 결혼 후 여성이 남성의 성(姓)을 따르는 일본 전통에 맞서자며 일본에 고착 된 여성 성씨 선택권의 불씨를 터트렸다.

  고이즈미 신지로는 자신이 총리 자리에 올라서면 1년 안에 이 정책을 실현 하겠다며 공약 실행 의지를 강력하게 드러냈었지만 당시  자민당 지지 종교단체와 전통문화단체들이 맹렬히 반대하며  반고이즈미 세력결집의 명분이 되어서 극우 세력들이 똘똘 뭉치며 빌미를 던져 주어 선거에 패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부계 사회지만 버블 경제 시기를 지나 잃어버린 30년의 경제 불황 속에 가족이라는 의미 퇴색 되어서   쇼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와 영화에서나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로 1인 가구 인구가 절정에 달할 정도로 <나혼자>도 먹고 살기 힘든 사회다.

보수와 극우의 지지로 먹고사는 정치인들은 <쇼와 시대의 가부장적인 가정>의 모습을 일본 사회의 가장 이상적인 삶의 양상이라 주장하며 두터운 노년층 세대의 표로 정치 생명을 이어 가고 있다.

일본은 선택적 부부 별성제도   법안 제출에 실패 한지 어느덧 28년의 시간이  지났다.

일본은 지진과 자연 재해를 제외 하고는 정치로 일본 전 열도를 뒤 흔들지 못한다.

일본인들 대다수는 정치인들의 이름도 잘 모르고 어떤 정책을 펼치고 있는지에도 관심이 없다.

일본 국민은 정치나 이념이 아닌 일상의 소소한 삶을 중요하게 여기며 일상의 주된 화제와 논의의 중심은 [먹고 보고  즐기는]  '나'의 생활에 맞춰져 있다.

일본은 텔레비전이나 각종 미디어 그리고 여러 잡지의 첫 시작과 첫 장마다 공통된 단어들이 등장한다.

귀여워 !가와이( 可愛い  かわいい )   맛있어 !오이시(おいしい)

 일본 극우 세력의 힘을 받아 총리에 당선된 다카이치 사나에가 법률상 성은 남편을 따르더라도 일상에서는 결혼 전 성을 사용하도록 허용하자는 법안을 추진 하다며 여론을 살피고 있지만  1898년 메이지 시대 민법 개정 당시 부부 동성제를 채택해 130년 가까이 유지하고 있는 일본 사회가 쉽게 허용 하지 않고 있다. 

1996년, 법제 심의회가 선택적 부부 별성 제도의 도입을 제안했으나, 자민당에서 "가족의 일체감이 상실된다"라고 반대론이 일어나 법안 제출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1990년대 중반 부터 촉발된 선택적 부부 별성제도는 일본에서 총선의 시기마다 튀어나온 문제였고 지난 반세기 동안 일본 여성들은  '성씨는 여성이 바꾸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펼치며 집단 소송을 헌법 재판에 제기 해왔다.

한편 일본 대법원 대법정은 과거 2회에 걸쳐 선택적 부부 별성 제도에 대해 합헌으로 판결을 내렸지만, '국회에서 논의되고 판단되어야 할 사안'이라고  지적 하며 2021년에 내려진  판결의 보충 의견에서  향후 '위헌으로 평가될 가능성도 있다'라고까지만  언급하며 이 모든 논란을 정치계로 넘겨 버렸다.

사회와 의식의 변화에 부단히 주의하며 대응하도록 국회에 요청했다.  

현재 일본의 여론은 선택적 부부별성제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59% 반대는 24%로 

일본 국민 10명 중 6명은 결혼 후에도 부부가 결혼 전 성을 그대로 쓸 수 있는 '선택적 부부별성(別姓) 제도'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명에 대한 거부감은 혼인 기피로도 직결되었고 급기야  같은 성씨(姓氏)를 가진 이들만 연결해 주는 이른바 ‘동성혼(同姓婚) 중매 서비스’까지 등장해서 같은 성씨끼리 결혼하는 동성혼이 젊은 층 사이에서 유행이 되고 있다.

만일 일본 극우층과 보수층의 반발로 선택적 부부별성제가 도입되지 않는 다면 일본은 30년 안에 열도 전체 국민이 대 여섯 개 성씨로 통일 되는 국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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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9-10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일반 평민들은 성이 없었다고 하는데 일본이 메이지 유시을 맞이하여 성을 자기 맘대로 지어 30만개나 되었다면 한국은 오히려 당시 유명 문벌 가문의 성씨를 채택하는 경우가 많아서 성씨가 대략 300개(물론 같은 성이라도 본은 틀린경우가 많음) 정도로 한정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더 극단적인 것은 베트남인데 ‘응우옌(Nguyễn·阮·완)‘ 씨가 베트남 전체 인구의 약 38~40%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1위 성씨라고 하네요,
 
와인즈버그 사람들 ㅣ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8
셔우드 앤더슨 지음, 김욱동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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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깨어 누운 채 창밖의 나무를 보고 싶어 했던 어느 작가는 새로 이사 온 집의 창문의 높이가 너무 높아서 침대에서 누웠을 때 나무가 보이지 않자 쉽사리 잠을 청하지 못한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작가는 침대에 누웠을 때 밖을 내다 볼 수 있도록 창문의 높이에 맞추기 위해 목수를 부른다.

작가가 목수에게 저 높은 천장 가까이에 붙어 있는 창문의 높이에 맞게 침대를 수리 해 달라고 요구하자 전쟁 참전 군인 출신이였던 목수는 작가의 방 주변을 둘러 보던 중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시가 꽁초를  피워 대며 늦장을 부리기 시작한다.

목수는 침대를 수선해 달라는 작가에게  자신은 한때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죄수로 수감 중에 형제를 잃었다며 눈물을 글썽이자 작가는 침대 수선을 잊어 버리고 목수의 이야기를 들어 준다.

예순을 훌쩍 넘은 작가는 자신 처럼 흰 콧수염이 자란 동년배 목수의 굴곡진 인생 이야기를 들어준다.

작가의 집에 다시 방문한 목수는 그가 원하는 높이에 맞게 침대를 고쳐 주지만 노쇠한 허리와 무릎 통증을 앓고 있었던 작가는 천장 가까이에 붙은 창문의 위치와 맞게 높아진 침대 위로 올라가기 위해 의자를 겹쳐 놓고 겨우 기어 올라갔다.

마침내 침대에 누워서 창밖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작가는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언젠가는 갑작스럽게 침대 위에서 죽음을 맞이 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는 침대에서 보이는 세상을 보는 동안 한 때 뛰어난 외모로 숱한 여자들과 달콤한 사랑을 나눴던 기억을 떠올리며 행복한 감정에 잠시 취해 보지만 아침마다 힘겹게 침대에서 내려가는 자신의 노쇠한 육신이라는 슬픈 현실을 깨달아간다.

침대에서 작가는 꿈이 아닌 꿈을 꾸었다. 조금씩 졸리기 시작했지만 그는 여전히 의식이 있었고 그런 그의 눈앞에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작가는 자신 안에 있던 형용할 수 없는 젊은 뭔가가 자신의 눈앞에서 사람들의 긴 행렬을 몰아대고 있는 것이라고 상상했다.

-셔우드 앤더슨의  <괴상한 사람들에 관한 책> 중에서 

​

침대에서 창밖 세상을 보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과 추억에 젖어 있던 작가는 침대에서 내려와 하얀 백지와 마주하며 자신의 삶에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이 품고 있었던 수백 가지의 진실들을 열거하기 시작한다.

순결이라는 진실, 열정이라는 진실, 부와 가난, 절약과 낭비, 부주의함과 방종이라는 진실까지 이렇게  수만 가지의 진실들 모두  아름다워 보였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며 그것이 진실이라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최첨단  디지털 신 기술로 가짜가 진짜로 둔감해도 진짜인지 모르는 무시무시한 세상이다.

누구나 쉽게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가짜를 진짜처럼 조작 할 수 있는 시대에 오랜 세월 동안 신뢰와 사실 보도를 유지 했던 언론 마저 가짜와 진짜가 뒤섞여 있다.

진실과 거짓이 모호해지는 탈 진실 시대는 21세기 AI시대에만 존재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수 세기 전부터 인류의 삶에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이 불투명했었다.

2600여년 전 인도의 부처님은 북 인도에서 교세를 확장하며 대중의 지지를 넓혀 가던 중 진실을 기만한 거짓에 호되게 당했던 적이 있다.

신도들이 부처에게만 공양을 올리자 그의 제자인 브라만과 사문들이 거리에서 걸식을 하고 보시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브라만과 사문은  어느 여신도의 배를 거짓으로 부풀려서 부처의 설법을 듣는 자리에 들여 보낸다.

여인이 부처의 아이를 뱄다는 거짓은 금세 탈로 나자 브라만과 사문은 화를 당할 것이 두려워서 그 여인을 죽이고 시신을 부처가 설법 했던 사원에 묻어버린다. 자신들의 범죄 행각을 지우기 위해 헛소문을 내기 시작하고 그 헛소문은 부처가 어느 여인과 불륜을 저지르고 그걸 감추기 위해 그 여자를 죽였다는 끔찍한 소문을 내기 시작한다.

거짓 소문은 점점 커져서 이웃 마을까지 퍼지고 브라만과 사문에게 살해 지시를 받고 돈을 챙긴 일꾼들이 서로 싸움을 하다가 사원에 시신이 묻혀 있다는 진실을 발설 해 버린다.

거짓으로 이득을 취해서 세력을 확장해서 궁극적으로 민심을 이용하고 사회를 뒤흔드는 검은 손들의 활동으로 인류는 숱한 위기에 빠졌고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큰 화를 입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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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9-09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며 그것이 진실이라 믿고 있는 사람이 정말 넘쳐나고 있는것 같아요.

scott 2026-09-19 15:14   좋아요 0 | URL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더 심각해 졌죠.
 

미국을 기준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빅맥 값을 비교한 빅맥지수(Big Mac Index)는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1986년 처음 만들어서 매년 1월과 7월에 발표되어왔다.

지금까지 빅맥지수는 각 나라의 물가 수준과 화폐 가치를 평가하는 경제 지표로 자리 잡으면서 스타벅스 커피값을 비교하는 '라테 지수', 이케아 가구 제품 가격을 비교하는 '이케아 지수' 등과 같이 전 세계 다양한 도시에 수 천개의 매장을 운영하는 글로벌 기업의 대표 상품들의 가격 책정 변동에 따라 나라별 체감 물가 지수를 한눈에 파악 할 수 있게 되었다.

일명 커피 공화국으로 불리는 한국에서는 맥도날드 매장 보다 모퉁이만 돌아가면 간판이 보이는 스타벅스 지수에 더 민감하다. 

 고물가 시대에 커피 중독자들은 가성비가 좋은 커피를 마시게 되니 스타벅스 가격 변동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물가가 급등할 때 면 가성비 반찬으로 식탁을 지키던 김 가격이 치솟아서 즐겨 사 먹던 김밥이 가격이 두 배로 급등하거나 조미김 한통에 김이 10장에서 8장으로 줄어 들게 되면  이보다 더 속상할 수가 없다.

기후 이상으로 바다 온도가 상승해서 발생하는 적조현상으로 인해 김 생산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한국의 김은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 잡아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싹 쓸어가는 대표적인 상품이고 K푸드 열풍에 냉동 김밥 수출양이 대폭 늘어나서 수출로 물량이 빠져나가게 되어  국내 소비자들에게 공급할 김이 부족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 이어 전 세계 두 번째로 김 생산량이 많은 일본은  그동안 반 세기 넘게 전 세계 김 수출의 60퍼센트를 장악했던 시절도 있었다.

일본은 7세기 무렵 부터  미역보다 얇은 바다말을 얇게 펼쳐 말려 먹었다. 이 바다말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던 것은 도쿠가와 가문이 에도에 입성하고 나서 부터였다.

도쿠가와 가문은 안정된 식재료를 수급하기 위해 에도성 앞에 어장을 조성했다.

 그 시절에 생겨난 어장은 가니스기, 혼시바. 시나가와로 점차 이 어장이 번성하면서 주변에 상권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어장과 상권이 번성하기 시작하자 시나가와가 주변 포구를 총괄 하는 중심 어장이 되어서 본격적으로 김 양식을 재배 했다.

17세기 에도에 시나가와에서 생산한 김은 색은 붉고 형태는 닭 벼슬처럼 작고 비린내가 난다 해서 노리(海苔) 불렀다. 김을 가공하기 시작한 것은 뜻밖에도 사찰에 종이를 대량 공급했던 아사쿠사 제조자로 당시 아사쿠사는 헌 종이를 수거 해서 재생종이를 생산했던 수공업체였다. 종이를 가공했던 수공업자가 미역보다 가는 김을 종이처럼 건조 시키는 방법을 고안했다.

바다에서 수거한 바다말을 담수에 섞어 대나무 판지에 얇게 펴서 바람에 건조 시키고 나서 숫불에 살짝 구우니 비린 냄새가 사라졌고 태운 종이처럼 입 속에서 바삭거리다 스르르 녹아 내리자 일본인들은 밥을 얹어 먹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공한 김을 조미한 간장에 찍어 먹으면서 에도 시대 일본인들은 바다 채소라 불렀다.

 일본이 김을 종이처럼 얇게 가공 하기 훨씬 전부터 한국은 13세기 말인 신라 시대 부터 바다에서 김을 건져서 건조 시켜 먹었다. 삼국 시대 때 김은 혼인을 앞둔 왕의 폐백 품목 중 하나 였고  조선 시대는 임금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검은 바다풀이였다.

이 검은 바다풀이 김이라 불리게 된 건  조선시대 인조 임금이 자신의 수라상에 오른 검은 바다풀을 맛있게 먹고 무슨 음식인지 묻자 한 신하가 음식 이름은 모르고 전남 광양에 사는 김여익이란 자가 만든 음식이라 답했다. 이후 조선 왕실에서는 김여익이 만든 바다풀이라 해서 그의 성을 따 ‘김(金)’이라 부르게 했다. 

현재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 먹는 김밥의 기원은 일본 마키스시(巻き寿司)의 일종인 '노리마키(海苔巻き)'에서 왔다. 

에도 사람들은  식초와 설탕을 섞어 넣은 밥에 김을 싸서 먹기 시작했고 각종 속재료를 넣고 대나무발로 말아 원통형으로 만든 '후토마키(太巻き)'는 메이지 시대 들어서면서 부터 만들어 먹었다. 메이지 시대때 '후토마키(太巻き)'의 속재료는 생선회 였다.

1930년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 들어 온 일본식 김밥은 한국인 입맛에 맞게 변형 되어서 당근과 계란, 우엉, 햄, 깻잎 등 우리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대체됐다.

일본은 쇼와 시대에 들어서면서 부터 노리마키의 기본이 되는 식초와 설탕으로 밥에 초절임을 하는 방식이 사라졌고 현재 일본 식당에서 파는 김밥은  미원과 소금, 참기름을 넣고 속재료도 한국 처럼 다양하지 않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김과  즐겨 먹는 김밥이 어느 나라에서 먼저 유래 되었는지 따지기도 전에 한국의 김밥은  일본의 라면 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한국의 식재료와 뛰어난 조리 기술로  다채롭게 발전 시켜 나간 음식이다.

햄버가 한 개 먹은 포만감 보다  김밥 몇 줄을 먹은 포만감은 세계 물가 지수 지표로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김밥은  한국인에게 무척 특별한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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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비 2026-09-07 0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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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9-07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밥이야 서민들이 먹는 간단한 한끼 식사란 이미지가 있어서 그렇지 사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라 인건비와 식자재비가 오르는 지금 가격이 안 오를래야 안 오를 수가 없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물가를 판단할 적에 혼자만의 와퍼 지수란 것을 사용합니다.버거킹을 자주 이용하는데 몇년전까지만 해도 버거킹 와퍼 세일시 1개에 3천원 이었는제 지금은 3.900원선이고 와퍼주니어도 기본 1+1할적에 약 3,00원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5.900원으로 올라것 정말 물가가 많이 올랐다고 뼈속깊이 느끼는 중이죠.

scott 2026-09-19 15:19   좋아요 0 | URL
한국 음식(분식)이 해외에서 (영국에서 한국식 핫도그 한 개 2만원 )비싼 가격에 팔리는 이유가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미국 홀푸드 마켓(고급 음식 파는 곳)에서 1인당 한국 김밥 3개 한정 판매 하고 있는데 개당 만원이여도 미국인들(골고루 영영 섭취 할 수 있는)에게 건강한 음식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가격 적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그동안 기본 물가(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와 음식 가격 책정이 적당한 수준이였다가 시급이 올라가면서 손이 많이 가는 분식들 가격도 치솟고 있죠. 결국엔 인건비 ㅠ.ㅠ 미국에서 햄버거 세트 먹으면 서비스 페이까지 지불해서 오만원에서 7만원을 쥐야 음료까지 먹을 수 있습니다. ㅠㅠ
 

지독한 책벌레 였던 조선 제22대왕 정조(正祖·1752~1800)는  1791년  창덕궁 어좌 뒤에 있던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를 치우고 책거리 병풍을 세우라고 명하고 신하들에게 이런 발언을 합니다.

 "서재에 들어가 책을 만지기만 해도 기쁜 마음이 솟는다. 경들은 그렇지 아니한가?"

왕이 좋아한다는  책거리를 고관대작이 앞다퉈 병풍을 집에 들였고 곧바로 시중에 대유행하면서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열풍을 일어났습니다.

​과거에 급제하고 출세하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했던 조선 시대 유교 사회에서 책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였기에 책을 비롯해 도자기, 문방구, 향로, 화병 등을 진열해 놓은 모습을 그린 그림인 책가도가 고위층 부터 서민 계층까지  널리 유행  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책 사랑은 조선 왕실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아서 아무리 가난해도 어느 집이든 책이 있어서 1886년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 해군 장교 주베르는 헛간 같은 곳에서도 책이 나와서 자신들의 자존심이 상했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입에 풀칠할 정도로 가난해도 땔감이 없어서 추운 겨울 천장에 고드름이 줄줄이 매달려 있어도 조선 팔도 어디에서든 초가 산간에도 글 읽는 소리가 새어 나올 정도로 한국인에게  책은 끼니를 때우는 것보다  소중한 존재 였습니다.20세기 서양 예술의 혁신적인 기법보다 앞선 역원근법, 초현실적 기하학, 그리고 착시 효과를 능숙하게 다루고 있는 조선의 천재 화가들이 그린  책가도 @Scott-MoveableFeast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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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원맘 2026-09-06 0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곁에 두고 많히 읽어야겠어요~

scott 2026-09-19 15:20   좋아요 0 | URL
책값 너무 많이 올랐습니다 ㅠ.ㅠ
 

 

 


데미언 허스트가 골드 스미스 대학 시절 친구들과 기획 했던 전시 이름에서 차용된 잡지 <프리즈>는 4년 후 1995년 뉴욕과 베를린에 아트페어 개최를 시작으로 지난 30여년 세월 동안 현대 미술계의 광범위하면서도 촘촘한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아트페어 개최를 비롯해 출판물,비디오, 팟캐스트, 웹사이트 등을 통해 전 세계 예술가와 컬렉터를 연결 하는 세계적인 아트 ,컬쳐 멀티 플랫폼으로 성장했다.21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리즈>는 본격적으로 전세계 예술 작품을 한 곳에 전시 하는 아트 페어를 2003년 런던에서 개최 하면서 예술과 문화가 대중에게 더 가깝게 다가 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2012년 랜들스 아일랜드 에서 개최한 <뉴욕 페어>와 런던 <프리즈 마스터 페어>를 시작으로 영상과 작품을 다양한 매체로 적극 소개 하며 단순히 미술품을 구매 해서 전시 하는 것 뿐 만 아니라 문화와 패션, 음식,영화와 연결 시키며 전 세계 예술의 교두보로 우뚝 성장했다.

반면 1966년 독일 쾰른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아트 페어가 열린 이후 줄곧 아시아 지역은 일본과 홍콩을 제외하고 예술계 변방으로 한국은 몇몇 소수의 작가들 작품을 제외하고 해외 거물 급 갤러리 소장품으로 등록 되지 못했다.

1980년대 까지 아시아 미술 시장의 중심은 일본으로 막강한 엔화 자금력을 동원해서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모네의 '수련'작품 같은 최고의 명작을 긁어 모아서 세계 미술계 시장을 움직이는 한 축으로 우뚝 성장했다.1990년 버블 경제로 일본 경제가 기나긴 침체에 빠져 버리자 싱가포르가 아시아 미술 시장 자리를 차지 했지만 2007년 싱가포르 정부가 미술품에 7퍼센트 부가 가치를 부과 하는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면서 세계 주요 경매 회사들이 세금이 없는 홍콩으로 건너 갔다.

외국의 메이저 급 화랑들이 홍콩 미술 시장 곳곳에 문을 열며 아시아 문화 예술 중심지가 되었지만 홍콩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불안한 사회 경제 상황과 중국 공안의 극심한 검열로 정치적 불안이 요동 치던 중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 되면서 유럽 명문 갤러리들이 서울에 사무실을 열기 시작했다.

그동안 일본과 싱가포르 그리고 홍콩에 밀렸던 서울은 2022년 9월 세계적인 아트페어 <프리즈>를 개최 하면서  아시아 예술계의 변방에서 벗어나  예술산업이라는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게 되었다,

국내외 거장 예술가들 작품들과 세계적인 갤러리들이 총 집결하는  세계적인 아트페어 <프리즈>가 열리는 동안 단순히 그림을 사고 파는 것 뿐만 아니라 행사 기간 동안  출품 전시된 작품에 관한 영상 전시,소더비 인스티튜트의 프리미엄 컬렉션 코스, 토크 프로그램,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클래식 연주회 그리고 야간 행사를 통해 작가와 작품, 컬렉터와 수집가를 연결 시키며 미술계의 중요한 화두와 의제에 관해 소통하는 거대한 '아트 테마 파크' 같은 프로그램이 빼곡하다.

 세계 메가 갤러리들이 총 집결하는 2026년 프리즈에 참석한 가고시안은 데이미언 허스트의 솔로 부스를에  ‘Pill Cabinets’를 비롯해 ‘Spin Paintings’, ‘Spot Paintings’, ‘Treasures’ 등 대표 연작을 한자리에서 선보이고 있다.

2026년 프리즈에서는 이전과 달리 서구 중심 미술사에서 상대적으로 덜 조명 받았던 한국 미술과 세계의 20세기 작가 15명의 작품과 함께 도자와 섬유, 유리, 금속, 목재, 한지 같은 재료로 만든 공예 작품들도 출품 되었다.세계 제 1일의 반도체 공정을 창출하는 한국인의 DNA에는 탁월한 미적 감각이 스며 있어서 물과 불, 흙과 조개 껍질 그리고 옻나무 같은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로 수천년 동안 빛을 바라지 않는 예술작품을 만들어 왔다.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이 인간의 삶 전체를  재편하는 시대에 인간의 본능과 신체적 감각으로 빚어낸 예술 작품이 품고 있는  생명력은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귀한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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