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운동을 한다는데 - 운동 못하는 스포츠기자가 만난 운동하는 여자들
이은경 지음 / 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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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대 여자들은 TV 속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쥐는 세계 최고의 한국 여자 운동선수들을 생생하게 지켜보면서 자랐지만, 동시에 올림픽에서 펼쳐지는 그 어떤 종목도 학창 시절에 제대로 배워본 적 없는 사람들이다.
여자 연예인들의 탄탄하고 예쁜 십일자 복근을 보면서 감탄은 해도, 현실에서는 복근은커녕 근육량을 늘리는 기본 운동 동작조차 잘 모르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운동과 그토록 멀어지게 된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내가 이토록 운동을 어려워하고 싫어하는 건 단순히 나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한국 여자들이라는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문제점일지도 모르겠다. - P12

여성이 남성에 비해 스포츠를 접하는 기회를 얻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 그 자체로 스포츠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 P19

이 밝고 앳된 여학생들도 10대가 지나고, 그 이후 성인이 되어 인생을 살아보면 또 알게 될 것이다.사회생활이 곧 체력이고, 육아가 곧 체력이고, 인생이 곧 체력이라는 사실을. - P132

제가 과거에 연구한 여러 주제 중 하나인데, 사회학에서 나오는 구조적 억압이 바로 거기에 해당하죠. 그 누구도 여자 선수들에게 성형하고 꾸미라고 대놓고 강요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여자 선수들은 자신들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괴로워합니다.‘내가 너무 살이 졌나?‘ ‘성형을더 해야 하나?‘ 그런 생각으로요. 누구도 공식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이고 암묵적인 분위기 탓에 ‘여자 선수는 예뻐야 한다‘고 억압받는 거죠. 이런 걸 ‘개인적 환원주의‘라 합니다. 개인 탓으로 돌리는 거예요. 실제는 구조 탓인데. - P183

댄스스포츠나 발레, 승무원처럼 여초현상이 심한 집단에서는 오히려 남성들이 ‘유리천장‘으로 억압받는 게 아니라 그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더 빨리 승진하고 대접받는 ‘유리 에스컬레이터‘를 경험합니다. 손쉽게 높은 지위까지 올라가는 거죠. 대학교 발레 전공자 중에서 남자가 들어오면 일단 교수가 황태자처럼 받들어주면서 제발 나가지 말라고 하면서. 나중에 교수 임용도 발레리노들이 훨씬 유리하다고 하죠. 스포츠에서도 이처럼 유리 에스컬레이터 현상이 나타나는 사례들이 꽤 있을 거라고 봅니다. - P184

운동, 특히나 어느 정도 이상의 열정적인 스포츠 활동은 2인 이상 가족 안에 속해 있을 경우 다른 가족구성원의 이해 혹은 희생을 필요로 한다. 운동에 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흔히 잊고 넘어가는 부분이다.
미국에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녀가 야구를 할 때 엄마가 감수해야 하는 돌봄 노동에 관한 연구 보고서도 있다고 한다. 자녀의 운동복을 세탁하고, 옷과 장비를 챙기는 소소한 일부터 시작해서 아이가 훈련장에 오갈 수 있도록 실어 나르고, 경기를 관전하고 응원하며, 또 그럴 때 온가족이 함께 간다면 가족이 경기를 보면서 먹을 도시락, 음료수 등등을 모두 전담하는 게 엄마다.
남편이 운동에 미쳤을 경우는 어떤가. 남편이 주말에 운동을 즐기는 동안 독박 육아, 독박 가사노동은 아내의 몫이다. ‘너는 실컷 즐기는데 나는 식모 노릇이나 하고 있냐‘는 내적 분노와 스트레스도 기본 옵션으로 따라온다.
여가 시간에 운동을 즐긴다는 것 자체가 이처럼 젠더 평등과 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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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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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식 닭장>

붐비는 엘리베이터에 탄다고 상상해 보라. 너무 붐벼서 옆 사람에게 부딪치지 않고서는 (그리고 그를 화나게 만들지 않고서는) 몸을 돌릴 수도 없을 지경이다. 엘리베이터가 어찌나 붐비는지 발이 땅에서 뜨는 떄도 있는데, 차라리 그게 다행이다. 경사진 바닥이 철조망으로 되어 있어서 발을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좀 지나면,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은 남 생각을 할 기력을 잃을 것이다. 난폭해지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미쳐 날뛰는 이들도 나올 것이다.먹을 것도 희망도 빼앗기면, 몇몇은 남을 잡아먹으려 할 것이다.
휴식도, 구원도 없다. 엘리베이터 수리공 따위는 오지 않는다. 문은 단 한 번, 삶을 마감할 때, 이보다 더 나쁜 단 하나의 장소로 떠나는 여행을 위해 열릴 것이다. (‘처리 공정‘ 항목 참조) - P65

<감상주의>

현실보다 감정에 가치를 두는 것. 감상은 흔히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순진함이나 나약함으로 간주된다. 가축들이 사육되는 조건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면(혹은 관심만 보여도) 감상주의자라고 무시를 당하기 일쑤다. 하지만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누가 감상주의자이고 누가 현실주의자인지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 좋겠다.
농장 동물들이 어떻게 취급되는지 안다면 동물과 우리 자신에 대한 사실을 대면하거나 회피하는 데 도움이 될까? 더 값싼 햄버거(아니면 햄버거를 먹는 행위 자체)보다 동정의 감정에 더 큰 가치를 두어야 한다는 주장은 감정과 충동에서 나온 표현인가 아니면 현실과 우리의 도덕적 직관을 연결시킨 것인가?
두 친구가 점심 식사를 주문한다 치자. 한 명이 "햄버거거 먹고 싶은 기분인데." 이렇게 말하고 햄버거를 주문한다. 또 한 명도 "햄버거를 먹고 싶은 기분이야." 라고 말하지만, 어느 순간 무엇을 하고 싶은 기분인지보다 자신에게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다른 것을 주문한다.누가 감상주의자인가? - P100

잠든 사람은 언제라도 꺠울 수 있지만, 잠든 척하는 사람은 아무리 지독한 소음으로도 도저히 깨울 수 없다. - P137

한때는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이 최첨단의 대항문화 성명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요. 지금은 저를 채식주의로 이끄는 가치가 다른 어디에서보다도 뒷마당에 일구는 제 가족의 작은 텃밭에서 나온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 P302

우리는 무지를 변명 삼을 수 없다. 그것은 무관심일 뿐이다. 오늘날 세대는 더 많은 것을 안다. 우리는 공장식 축산업에 대한 비판이 대중의 양심 속으로 파고든 시대에 사는 기회와 부담을 다 안았다. 우리는 동물을 먹는다는 것인 어떤 것인지 진실을 알았을 어떻게 하셨나요라는 질문을 받게 될 사람들이다. - P319

닭고기 패티와 채식주의 버거 중에서 무엇을 주문하느냐가 심각하게 중요한 결정이라고 한다면 철딱서니 없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다.그러면 다시 말해 보건대, 1950년대에는 식당이나 버스에서 어디에 앉느냐가 인종 문제를 근절하는 시작이 될 수 있다고 했다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1970년대 초, 세사르 차베스의 노동자 권리 운동 이전에 포도를 먹지 않는 것이 농장 노동자들을 노예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구해 주기 위한 시작이 될 수 있다고 했다면, 똑같이 정신 나간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뜬구름 잡는 말처럼 들릴지 몰라도, 잘 들여다본다면, 매일의 선택이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 P326

미래가 얼마나 나쁠 수 있는지 아는 것은 더 나은 미래를 가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이유가 된다. -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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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사람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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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심장은 비누와 같아서 손에 잘 쥐어지지 않는다. 긴장의 끈을 놓는 순간 금세 표류하고 사랑에 빠지고 상처를 받는다. - P16

겨울 몇 주 동안 스칸디나비아 중심부에서는 하늘이 감동을 선사하려는 시도조차 없이 흙탕물에 빠진 신문지색드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새벽이 지나면 누가 유령에 불을 지른 것 같은 안개만 남는 시기가 이어진다. - P67

"...일상적으로 잘 쓰지 않는 단어들의 출처는 대개 부모님이고요. 부모님과 사이가 좋은 사람들의 경우 말이죠." - P124

"...돈을 어떤 데 쓰세요?"
"다르사람들과의 거리를 사는 데 쓰죠."
심리상담사로서는 처음 듣는 대답이었다.
"비싼 음식점은 테이블 간 간격이 넓어요. 비행기 1등석은 가운데 자리가 없고요. 특급 호텔에는 스위트룸 고객들이 드나드는 출입문이 따로 있죠.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곳에서는 가장 비싸게 팔리는 것이 남들과의 거리예요." - P145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를 보면 백발백중 알아맞힐 수 있었다. 함께 지낸 세월이 길수록 단 몇 마디로 싸움이 시작된다. - P161

"손자가 생기면 그분이 중요한 사람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나요?"
안나레나는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세 살짜리의 손을 잡고 유치원에서 집까지 가본 적 있어요?"
"아뇨."
"그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될 수 없어요." - P259

"아들, 코끼리를 먹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그는 똑같은 농담을 천 번 들은 아이답게 대답했다. "조금씩 천천히요." 그녀는 부모답게 천 번째로 박장대소했다.그러고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심지어 사람조차 바꿀 수 없을 때도 많지. 조금씩 천천히가 아닌 이상. 그러니까 기회가 생길 때마다 어떻게든 도우면 돼. 구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면서. 최선을 다해. 그런 다음...... 그걸로 충분하다고 수긍하고 넘어갈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지. 실패하더라도 그 안에 매몰되지 않게." - P292

"항구에 머무는 배는 안전하지만 배가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게 아니잖니." - P301

"카지노 직원이 그랬어요, 돈을 잃어서 망가지는 사람은 없고 잃은 돈을 다시 벌려다 망가지는 거라고." - P318

"그거 알아요? 동물 복지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동물 복지에 신경을 쓴다면 행복하게 자란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
나디아는 눈을 부라렸다. "그게 제 질문하고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네요."
사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유기농법, 놓아기른 닭, 행복하게 자란 돼지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행복하게 자란 돼지고기를 먹으면 더 비도덕적인 거 아니에요?" - P319

"크누트하고 나는 결혼한 지 아주 오래됐어요. 나이를 먹으면 그렇게 돼요. 그이를 만나기 전의 세월은 그냥 없었던 게 되어버려요." - P347

야크: 결국에는 이해가 안 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고, 그래놓고 평생 이해하려고 애를 쓰게 된다고 하셨거든요. - P356

예전에 아이들을 재우며 읽어주던 책에서 피터팬이 이렇게 선언했던 기억이 났다. "죽는 것도 정말 짜릿한 모험이 될 거야." 죽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그럴지 모르지. 에스텔은 생각했다. 하지만남겨진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천 번의 해돋이와 아름다운 감옥과도 같은 삶이었다. - P357

"모든 아이를 좋아할 필요는 없어요. 한 아이만 좋아하면 되지. 그리고 아이들한테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부모는 필요 없어요. 자기 부모면 되지. 솔직히 아이들한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운전기사예요." - P372

"...하지만 한 건물에 살았던 이 남자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항상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있었어요. 나도 그랬고요. 하루는 그가 자기 책을 건네면서 말했어요. ‘저 이거 다 봈는데 꼭 읽어보세요.‘ 이걸 계기로 우리는 서로 책을 바꿔 보기 시작했어요. 그는 정말 엄청난 책들을 읽었어요.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는데, 꼭 어떤 사람과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어요. 행선지는 상관없었어요. 우주 공간이랄까. 그게 한참 계속됐어요. 나는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는 책장 모서리를 접기 시작했고 그는 가장자리에 단상을 적기 시작했어요. 그냥 한마디씩. ‘아름답다‘ ‘진솔하다‘ 그게 문학의 힘이에요. 오직 다르 사람의 감정에 빗대어야만 자기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러브레터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거든요. 어느 해 여름에는 책장을 펼쳤다가 모래가 떨어지는 걸 보고 그가 너무 재밌게 읽느라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책장이 좀 쭈글쭈글한 책을 보면 그가 울었다는 걸 알 수 있었고요.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내가 그 얘기를 꺼냈떠니 그가 대답하길 자기의 그런 부분을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 P377

... 옆 사람이 하품하면 그 입에 손가락을 넣어서 입을 다물기 전에 다시 뺄 수 있는지 실험했다. - P409

거의 막판에 이웃집 남자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그는 어떤 남자 작가가 쓴 아주 두툼한 책을 주었다. 몇백 쪽 중에 그가 밑줄을 그어놓은 것은 한 문장이었다.우리는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는 잠들어 있는 셈이다. 에스텔은 답례로 여자 작가가 쓴 책을 주었기 때문에 몇백 쪽까지는 필요가 없었다. 에스텔은 도입부에 밑줄을 그어놓았다. 사랑은 당신이 존재하길 바란다. - P436

그러다 에스텔이 크누트 없이 보내는 마지막 밤이, 다른 모두가 에스텔과 함께 보내는 마지막 밤이 찾아올 것이다. - P451

흔히 인간의 성격은 경험의 총합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전적으로 맞는 말은 아니다. 과거가 모든 것을 규정한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절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어제 저지른 실수들이 우리의 전부는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의 선택, 다가올 미래도 우리의 전부라고 말이다. - P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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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시작 민음사 모던 클래식 37
존 맥그리거 지음, 이수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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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줄리아 아줌마가, 메리 아니었어? 하고 말했다. 어머니가 쳐다보았다.그 애는 며칠만 갔다 오면 될 거라고 우겼잖아, 줄리아 아줌마가 말했다, 하지만 물론 우리는 다시 그 애를 못 봤지, 그 애는 완전히 행방을 감췄어. 너무 슬퍼, 불쌍한 애야, 하고 말하고 고개를 돌려 데이비드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래서 네 어머니가 나한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해서, 내가 후유 도로시야, 저 조그만 아이를 이제 네가 키워야 할 것 같아, 하고 말했지. 안 그래? 너는 너무 사랑스러운 아기였고, 어쨌든 우리는 분명 너를 돌려보낼 곳이 없었으니까, 그렇지?
데이비드는 도로 앉아서, 줄리아 아줌마를 보고, 어머니를 보고, 다시 줄리아 아줌마를 보며, 마루가 꺼질까 두렵다는 듯이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어머니가 쟁반을 내려놓았다. 잔과 받침들이 서로 마구 부딪쳤다.
아 줄리아, 어머니가 말했다.
그 불쌍한 여자애는 네 이름도 안 지어 주고 갔어. 그래서 우린 데이비드로 골랐지, 그 배우 이름을 따서. 너 알지, 그 배우 이름이 뭐였지? 줄리아 아줌마가 말하고,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도와 달라는 듯이 어머니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어머니는 양손을 올려 입을 가렸다.
아, 줄리아.
데이비드와 어머니는 곧 밖으로 나와 당초 계획보다 일찍 기차를 탔다.둘이 가려 하자 줄리아 아줌마는, 내가 뭐 잘못했어? 도로시, 내가 뭐 잘못 말했어? 하고 물었다. - P124

데이비드가 어머니에게 그 일에 대해 다시 묻는 것만이 둘 사이 유일한 대화가 된 지 몇 주가 지났다. 뭔가 더 있는 게 분명하다고, 묻곤 했다. 성이나, 태어난 날 같은 것이. 말 좀 해 줘요, 제발. 왜 전헤는 말 안 했어요? 하고 다시 묻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더 할 얘기가 없다고, 더 이상 숨기는 게 없다고 고집하며, 잘못했다는 건 알지만 제발 좀 그만둘 수 없냐고, 너무 힘들다고 말하곤 했다.그러면 데이비드는 늘 문을 쾅 닫고 나가곤 했다. - P1

어머니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데이비드, 난 한 번도 너한테 거짓말한 적이 없어. 뭄ㄹ어봤으면 사실을 말해 줬을 거야. 하지만 너는 언제나 그대로 행복해 보였단다. 그걸 망치는 건 잘못인 것 같았어. 너한테 거짓말하지 않았을 거야. 적어도 그건 믿지, 응? - P173

피부는 너무 부드러워서 차가운 북쪽 바람으로 윤을 낸 것 같아. - P191

진실은, 데이비드, 내가 널 선택했다는 거야. 난 너를 기르기로 선택했어. 난 때로 네가 그걸 잊고 있는 것 같구나. 아니면 애초에 이해를 못 했거나. 난 너를 병원으로 도로 데려가서 모두 털어놓을 수도 있었어. 아니면 줄리아가 대신 네 엄마가 되게 할 수도 있었지. 하지만 그때 너를 처음 안아 들자마자, 내 옆에 있는 수전이랑 벽난로 위에 있는 앨버트 사진이랑 같이, 넌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었고 나는 널 키우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단다. 난 처음 시작부터 네 곁에 있었어, 데이비드. 널 내 자궁에 넣고 키우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네 기저귀를 갈고 널 먹이고, 네가 걸음마를 할 때도, 말을 배울 때도 그리고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고 할 때도 나는 네 옆에 있었단다. 내 가슴에 안아 들던 때의 네 몸무게나, 네가 첫 걸음을 뗄 때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손을 잡아 주던 느낌이랑, 밤에 침대에 넣어 줄 때 네 살갗에서 나던 냄새를 지금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어. 네가 처음 한 말은 엄마였어, 데이비드, 나에게 해 준 말이었어. - P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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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 시절, 담임이 ‘직각의 순간‘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었다. 어떤 세계를 하나의 그림으로 이해해내는 섬광 같은 순간이라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눈을 가리고 있던 무의식의 막이 한 손에 찢겨나갔다. ‘설마‘라는 저항의 벽이 한 방에 부서졌다. 갇혀 있던 상상이 급류처럼 쏟아져내렸다. 그런 걸 상상할 수 있는 자신의 머리통이, 정말이지 끔찍스러웠다. - P366

비명조차 지를 틈이 없었다. 입 한 번 열기도전에 새카만 어둠이 몰밀어왔다. 눈이 내리 감겼따.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손도끼칼을 치켜든 유나였다. 그것이 자신을 향해 내리꽂히기 직전, 어둠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아득한 곳에서 유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둑년......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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