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있는 서점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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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츠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 스콧 피츠제럴드, 1922

E.A.포는 단편을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정의했어. 그 당시에는 ‘앉은 자리‘라는 게 지금보다는 길었을 것 같다만. - P41

로링 캠프의 행운 / 브렛 하트, 1868

인생의 시기마다 그에 딱 맞는 이야기를 접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해주는구나. 명심해라, 마야. 우리가 스무 살 때 감동했던 것들이 마흔 살이 되어도 똑같이 감동적인 건 아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야. 책에서나 인생에서나 이건 진리다. - P57

에이제이는 동네 사람들의 신용카드를 긁으며, 죽음이 관계를 차단하는 상실인 반면 도난은 관계를 이어주는 견딜 만한 상실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 P61

"그리고 맨날 똑같은 책만 읽어달래. 근데 그게, 쓰레기 같은 유아용 보드북이에요. <이 책 끝에 나오는 괴물>?" - P80

그들은 <꼬마 완두콩>을 읽던 참이었는데, 후식으로 채소를 먹으려면 저녁으로 사탕을 다 먹어야만 하는 완두콩의 얘기였다.
"이게 아이러니라는 거야, 마야." 에이제이가 말했다. - P93

"이야, 귀여운 아가씨. 잘 지냈어?"
"입양됐어요." 마야가 말했다.
"그거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램비에이스는 에이제이를 쳐다보았다."이거 맞는 말이야? 진짜로 그렇게 됐어?"
입양절차에는 평균적인 시간이 소요됐고, 마야의 세번째 생일이 오기 전 구월에 판가름났다.에이제이의 가장 큰 약점은 운전면허증이 없다는 것(소발작 떄문에 애초에 딸 생각을 안 했다)과, 당연히, 애는커녕 개나 화초도 키워본 적 없는 독신 남자라는 사실이었다. 최종적으로는, 에이제이의 학벌과 지역사회와의 강한 유대(즉 서점을 운영한다) 그리고 아이 어머니가 아이를 그에게 맡기고 싶어했다는 점이 위의 약점들보다 더 크게 작용했다.
"축하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서점 사람들!" 램비에이스가 말했다. 그는 마야를 공중에 던졌다가 받아서 땅에 내려놓았다. 그는 카운터 너머로 상체를 내밀고 에이제이와 악수를 나눴다. "자. 이제 포옹을 하자고, 친구. 이건 포옹할 만한 소식이잖아." - P95

신을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에이제이는 눈을 감고 그게 누구든 하여간 저 높은 초월적 존재에게 그의 고슴도치 같은 마음을 총동원하여 감사 인사를 올렸다. - P99

이 세상 같은 기분 / 리더츠 바우슈, 1986

아버지가 되고 난 다음에야 이 이야기와 조우했으니, 프리마야(마야가 오기 전) 시대에도 이 소설을 좋아했을지는 모르겠다. 나는 인생에서 단편에 더 끌리는 시기를 여러 번 거쳐왔다. 그 중 한 시기는 네가 걸음마하던 시절과 일치한다. 내가 장편을 읽을 시간이 어디 있었겠니, 안 그래, 우리 딸? - P103

가게 너비는 십오 마야, 길이는 이십 마야다. 이걸 아는 이유는 한 나절을 바쳐 누워 굴러가며 측정했기 때문이다. 삼십 마야가 넘지 않아 다행이었다. 측정 당시 마야가 셀 수 있는 숫자가 거기까지였으므로. - P106

서점 문을 여는 오전 열시 직전, 마야는 자기 자리로, 즉 그림책이 전부 모여 있는 코너로 간다.
마야가 책에 다가가는 첫번째 방법은 냄새를 맡는 것이다. 책의 재킷을 벗겨내고 코앞까지 들어올려 딱딱한 표지가 두 귀를 감쌀 정도로 책 속에 얼굴을 묻는다. 책에서는 늘 그렇듯 아빠의 비누, 풀, 바다, 식탁, 치즈 잼새가 난다. - P106

마야는 어머니가 자신을 아일랜드 서점에 두고 갔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일정 나이가 되는 모든 애들한테 일어나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떤 아이들은 신발 가게에 남겨진다. 또 어떤 애들은 장난감 가게에 남겨진다. 또 어떤 애들은 샌드위치 가게에 남겨진다. 그리고 인생은 어떤 가게에 남겨지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거다. 마야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살고 싶지 않다. - P109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 플래너리 오코너, 1953

어떤 사람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한 가지만 물어보면 알 수 있어. ‘가장 좋아하는 책은 무엇입니까?‘ - P113

에이제이는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들에 관해 말할 때면 벌거벗은 기분이 든다. - P118

"때로는 적절한 시기가 되기 전까진 책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 법이죠." - P119

"<모비 딕>을 좋아하나요?" 그가 물었다.
"싫어해요." 어밀리아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들은 많지 않아요. 선생들은 숙제로 내주고, 부모들은 자식이 뭔가 ‘고급‘스러운 것을 읽는다고 즐거워하죠. 하지만 애들한테 그런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니까 애들이 자기는 독서랑 안 맞는 줄 알게 되는 거라고요." - P121

술이 나왔다."와, 봐요." 어밀리아가 말했다. "귀여운 작살이 꽂힌 새우라니. 이거 뜻밖의 즐거움인데."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난 술 사진 찍는 거 좋아해요."
"술은 가족 같죠." 에이제이가 말했다.
"가족 ‘이상‘이죠." 어밀리아는 잔을 들어 에이제이와 부딪혔다. - P123

"당신은 어떤 소설을 배경으로 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으면 좋겠어요?" 에이제이는 어밀리아에게 물었다.
"아, 어려운 질문이네요. 전혀 뜬금없긴 한데, 대학 다닐 때 <수용소 군도>를 읽고 있으면 그렇게 배가 고파지더라고요. 소비에트 교도소의 빵과 수프에 대한 그 온갖 묘사들 하며." 어밀리아가 말했다. - P124

"저기, 에이제이," 어밀리아가 불렀다. "서점 주인이 되는 것에도 나름 영웅적인 면이 있고, 아이를 입양하는 것에도 영웅적인 면모가 있다고요."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뿐입니다." - P130

"내가 경찰 노릇한 지 이제 이십 년이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인생에서 나쁜 일은 거의 모두 나쁜 타이밍에서 비롯되는 거야, 그리고 좋은 일은 모두 좋은 타이밍에서 비롯되고."
"거 좀 심하게 단순한 논리 같은데."
"생각을 해봐. <태멀레인>을 도둑맞지 않았다면 문을 안 잠그고 다니지 않았을 테고, 그러면 메리언 월리스가 아기를 가게에 놔두지도 않았겠지. 좋은 타이밍이라는 게 바로 그런 거야." - P134

(각주) 언제 어디서고 죽음을 맞을 수 있는 해적들은 장례를 치러줄 사람이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귀걸이를 했다는 속설이 있다. - P143

마야는 리츠 호텔만큼 커다란 노랑 다이아몬드를 골랐고, 그것은 얼추 양호한 상태의 <태멀레인> 초판가에 맞먹는 가격임이 드러났다. - P174

"결혼합시다." 그는 거의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난 섬에 처박혀 있고, 가난하고, 애도 딸렸고, 수익이 점점 줄어드는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거 잘 알아요. 당신 어머니가 나를 싫어하고, 작가 이벤트를 주최하는 일에는 영 젬병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특이한 청혼이네." 어밀리아가 말했다. "당신의 장점부터 시작해야지, 에이제이."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라곤......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라곤, 우린 함께 헤쳐나갈 수 있을 거예요, 맹세코. 나는 내가 읽는 책을 당신도 같이 읽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밀리아가 그 책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내 아내가 되어주세요. 당신에게 책과 대화와 나의 온 심장을 약속할 수 있습니다, 에이미." - P193

빛은,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밝다.
경적은, 나른하고 너무 늦다.
금속은 휴지처럼 구겨진다.
몸은 고통스럽지 않다, 이미 어딘가 다른 곳으로 날아갔으므로.

그래, 대니얼은 충돌 직후, 죽음 직전에 생각했다. 딱 그거군. 문장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 P212

두번째 이야기는 블랙하트 고등학교에서 온 버지니아 킴의 작품이었다. <여행>은 중국에서 입양된 아이에 관한 이야기다. - P228

고자질하는 심장 / E.A.포, 1843

그때 니콜이 문학적 삶을 살아가는 더 나은, 더 행복한 길이 있을 거라고 말을 꺼냈다. 내가 말했어, "그래, 가령 어떤?"
그녀가 말했다. "서점 주인."
"좀더 자세히 말해봐." 내가 말했다.
"내 고향에 서점이 하나도 없다는 거 알아?"
"진짜? 앨리스 정도 되는 동네면 하나쯤 있을 법도 한데."
"그래." 그녀가 말했다. "서점 없는 동네는 동네라고도 할 수 없지."

그렇게 우리는 대학원을 때려치우고 그녀의 신탁기금을 헐어 앨리스 섬으로 이주했고, 아일랜드 서점이라는 가게를 열었지. - P243

"가끔 그이의 유머 감각이 그립긴 해요. 하지만 그의 가장 좋은 부분은 책에 다 있어요. 그가 몹시 그리워지며 언제든 책을 읽으면 될 거라고 생각해요. - P250

"결정적으로, 근사한 표지가 중요해요. 내용이 얼마나 훌륭하든지 그건 문제가 안 돼요. 일분일초도 못생긴 대상에 내 시간을 쏟고 싶지 않아요." - P251

에이제이는 종종, 이 세상 최고의 것들은 죄다 고기에 붙은 비계처럼 야금야금 깎여나가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먼저 레코드 가게가 그랬고, 그다음엔 비디오 가게가, 신문과 잡지에 이어 이제는 사방에 보이던 대형 체인 서점마저 사라지는 중이다.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형 체인 서점이 있는 세상보다 더 나쁜 유일한 세상은, 대형 체인 서점‘조차‘ 없는 세상이었다. 적어도 대형 서점은 약이나 목재가 아니라 책을 팔지 않는가! 적어도 그런 서점에는 문학 공부를 한 사람, 책을 읽을 줄 알고 사람들에게 책을 골라줄 수 있는 사람도 좀 있지 않겠는가! - P262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 레이먼드 카버, 1980

내가 한참을 골똘히 생각해온 문제는, 어째서 싫어하는/혐오하는/결함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들에 관해 쓰는 것이 사랑하는 것들에 관해 쓰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걸까 하는 거야. - P289

책을 읽으면서 그는 마야를 위해 새로운 단편소설 목록을 만들고 싶어진다. 마야는 작가가 될 거야, 라고 생각한다. 그는 작가는 아니지만, 작가란 직업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마야에게 그 생각을 얘기해주고 싶다. ‘마야, 장편소설도 분명 그 나름대로 매력적이지만, 산문 세계에서 가장 우아한 창조물은 단연 단편이지. 단편을 마스터하면 세상을 마스터하는 거야." - P297

결국, 우리는 단편집이야. - P301

좋아, 그는 생각한다. 한 단어가 돼야 한다면 한 단어로 하지 뭐.
"사랑? 그는 말했다. 제대로 발화됐기를 빈다.
마야는 눈썹을 찡그리고 그의 표정을 읽으려 애썼다. "장갑?" 마야가 물었다. "손 시려요, 아빠?"
그는 고개르 끄덕였고, 마야는 아버지의 두 손에 자기 손을 포갰다.차갑던 그의 손이 이제 따뜻해지고, 그는 오늘은 이걸로 할 만큼 했다고 판단한다. 내일은, 어쩌면, 말을 찾아낼지도. - P304

"애한테 넌 독서를 싫어하는구나 하면 애는 그 말을 그대로 믿어버리지." - P308

"있잖아, 서점은 올바른 종류의 사람들을 끌어당겨. 에이제이나 어밀리아 같은 좋은 사람들. 그리고 난, 책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책 얘기를 하는 게 좋아. 종이도 좋아해. 종이의 감촉, 뒷주머니에 든 책의 느낌도 좋고. 새 책에서 나는 냄새도 좋아해." - P308

"난 평생을 앨리스에서 살았어. 내가아는 유일한 곳이지. 좋은 동네고, 이곳을 쭉 그렇게 살리고 싶어. 서점이 없는 동네는 동네라고 할 수도 없잖아, 이즈메이." - P310

나는 진심으로 아일랜드 서점을 사랑한다. 나는 신을 믿지 않고, 종교도 없다. 하지만 내게 이 서점은 이승에서 교회에 가장 가까운 곳이다. 이곳은 신성한 곳이다.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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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 개정보급판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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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에 보면 소위 ‘집행유예 망상‘이라는 것이 있다.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유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마지막 순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불그레한 뺨과 통통한 얼굴을 한 그들을 보는 순간 우리는 크게 용기를 얻었다. 그 사람들이 수감자 중에서 특별히 뽑힌 사람들이라는 것과, 수년 동안 매일 같이 이 역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책임지는 접대반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집행유예 망상- - P36

외부 사람들 중에는 강제수용소에 예술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뿐만 아니라 유머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 더 놀랄 것이다. 비록 그 흔적이 아주 희미하고, 몇 초 혹은 몇 분 동안만 지속되지만.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강제수용소에서의 유머- - P86

유머 감각을 키우고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기 위한 시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면서 터득한 하나의 요령이다.고통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수용소에서도 이런 삶의 기술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 번 유추를 해보자.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강제수용소에서의 유머-

만약 강제수용소에 있는 사람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이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으면, 그는 자기가 하나의 인간이라는 생각, 마음을 지니고 내적인 자유와 인격적 가치를 지닌 인간이라는 생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거대한 군중의 한 부분에 불과한 존재로 생각한다. 존재가 짐승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이나 의지가 없는 양떼처럼 무리지어 - 때로는 여기에 있다가 그 다음에는 저기로, 때로는 함께 몰려다니다가 때로는 서로 떨어져 다니는 - 다니게 된다. (...중략...) 그리고 양떼인 우리들은 오로지 두 가지 생각만 한다. 어떻게 하면 저 무서운 개들을 피할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생존을 위해 군중 속으로-
- P96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적 자유- - P120

수감자들을 심리학적으로 관찰해 보면 내면세계가 간직하고 있는 도덕적, 정신적 자아가 무너지도록 내버려둔 사람이 결국 수용소의 타락한 권력의 희생자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련의 의미- - P126

‘finis‘라는 라틴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이나 완성을 의미하고, 하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내적인 삶의 구조 전체가 변하게 된다.

-끌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 - P127

수감자들 역시 기이한 ‘시간 감각‘을 경험했다. 시시때때로 자행되는 폭력과 배고픔이 하루를 꽉 채우고 있는 수용소에서는 하루라는 작은 단위의 시간은 영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보다 긴 단위의 시간, 예를 들자면 일주일은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수용소에서 내가 한번은 동료에게 하루가 일주일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고 얘기하자 그 친구도 내 말에 동의한다고 한 적이 있다. 우리의 시간 감각이 얼마나 역설적이었던가!
이와 관련해서는 예리한 심리학적 관찰이 돋보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토마스 만은 서로 비슷한 심리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 즉 폐결핵에 걸려 요양소에서 언제 나가게 될지 모르는 환자들을 등장시켜 인간의 영적인 발달단계를 얘기하고 있다. 그들도 똑같은 상태, 미래도 없고 삶의 목표도 없는 생존의 상태를 경험한 것이다.

-끌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 - P128

평범하고 의욕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이 말을 들려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끌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 - P131

미래-그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삶의 의지를 불러 일으킨다- - P133

저녁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막사에 모였을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은밀하게 물었다.
"말해 보게. 자네 오늘 기뻤나?"
우리 모두 똑같은 느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 사람이 부끄러운 듯이 대답했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아니야."
우리는 글자 그대로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앞으로 천천히 그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이렇게 갇혀 있다가 석방된 죄수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을 정신의학적인 용어로 ‘이인증‘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꿈처럼 비현실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 얼마나 많이 꿈에게 사기를 당해 왔던가! 자유의 날이 와서, 석방되고, 집으로 돌아가고,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아내를 포옹하고, 테이블에 앉아서 그 동안 우리가 겪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는 꿈, 그런 꿈을 꾸었다. 오히려 너무나 자주 꾼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그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자유의 날을 맞은 그 꿈도 끝이 나고 만다. 이제 그 꿈이 지금 실현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그 꿈을 믿을 수 있을까?

-해방의 체험- - P154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에게는 더 이상 정신적 치료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게 심한 정신적 압박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받았던 사람에게는 자유를 얻은 후에도 그전과 똑같은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특히 그런 정신적 억압상태에서 갑자기 벗어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위험은 정신위생학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잠수병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물 속의 잠함에서 일하던 잠수부가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올 때 가장 위험한 것처럼 엄청난 정신적 압박을 받다가 갑자기 풀려난 사람은 도덕적, 정신적 건강에 손상을 입을 위험이 크다.

-해방 이후 나타난 현상들- - P157

"인생을 두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존재의 본질- - P182

사람은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나 혹은 자기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시련의 불가피성이다. 이런 시련의 도전을 용감하게 받아들이면 삶은 마지막 순간까지 의미를 갖게 되며, 그 의미는 글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보존된다. 다시 말해 삶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시련의 잠재적인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련의 의미- - P189

그 동안 써놓았던 책의 원고를 빼앗긴 대신 나는 물려받은 그 외투에서 히브리 기도책에서 찢어낸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유대교의 기도문 종에서도 가장 중요한 셰마 이스라엘이었다. 나는 이렇게 기막힌 ‘우연의 일치‘를 단지 종이에 적지만 말고 그대로 ‘살라고‘ 하는 신의 계시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련의 의미- - P190

요즘은 신경질환보다는 개인적인 문제 떄문에 정신과 의사를 찾는 환자들이 점점더 많아지고 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옛날 같으면 정신과 의사 대신 목사와 신부, 랍비를 찾아갔어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성직자에게 가지 않고, 의사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묻는다.
"내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임상에 따른 문제들- - P191

인간의 존재가 본질적으로 일회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로고테라피는 염세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것이다. 이것을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자. 염세주의자는 매일같이 벽에 걸린 달력을 찢어내면서 날이 갈수록 그것이 얇아지는 것을 두려움과 슬픔으로 바라보는 사람과 비슷하다. 반면에 삶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은 떼어낸 달력의 뒷장에다 중요한 일과를 적어놓은 다음 그것을 순서대로 깔끔하게 차곡차곡 쌓아 놓는 사람과 같다. 그는 거기에 적혀 있는 그 풍부한 내용들, 그 동안 충실하게 살아온 삶의 기록들을 자부심을 가지고 즐겁게 반추해 볼 수 있다.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젊은이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거나 잃어버린 자신의 청춘에 대해 향수를 가질 이유가 있을까? 무엇 때문에 그가 젋은이를 부러워하겠는가? 그 젊은이에게 놓여 있는 잠재 가능성 때문에? 아니면 그가 가지고 있는 미래 때문에? "천만의 말씀"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가능성 때신에 나는 내 과거 속에 어떤 실체를 갖고 있어. 내가 했던 일, 내가 했던 사랑뿐만 아니라 내가 용감하게 견뎌냈던 시련이라는 실체까지도 말이야. 이 고통들은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지. 비록 남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삶의 일회성- - P198

사실 책임이 전제되지 않는 자유는 방종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내가 동부 해안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에 보완이 되도록 서부 해안에 책임의 여신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범결정론에 대한 비판- - P213

나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우리 세대는 실체를 경험한 세대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셰마 이스라엘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정신의학- - P215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란 간단하게 말해서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세 개의 비극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 낙관적일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 개의 비극적인 요소는 인간의 삶을 제한하는 1)고통과 2)죄와 3)죽음을 말한다.

-비극 속에서의 낙관- - P219

유럽 사람의 눈에는 미국의 문화가 인간에게 ‘행복하기를‘ 끊임없이 강요하고 명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비극 속에서의 낙관- - P221

영화는 수천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장면에 다 뜻이 있고 의미가 있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부분, 개별적ㅇ니 장면들을 보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삶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의 최종적ㅇ니 의미 역시 임종의 순간에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최종적인 의미는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의미가 각 개인의 지식과 믿음에 최선의 상태로 실현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비극 속에서의 낙관- - P228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이렇게 주장한 적이 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굶주림에 시달리도록 해보자. 배고픔이라는 절박한 압박이 점점 커짐에 따라 각 개인의 차이는 모호해지고, 그 대신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표현하는 단 하나의 목소리만 나타나게 된다.

-비극 속에서의 낙관- - P241

빅터 프랭클린은 빈 의과대학의 신경정신과 교수이며 미국 인터내셔널 대학에서 로고테라피를 가르쳤다.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은 정신요법 제3학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 학파를 창시했다.
1905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고, 빈 대학에서 의학박사와 철학박사 학위르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3년 동안 다카우와 다른 강제수용소가 있는 아우슈비츠에서 보냈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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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 유시민의 30년 베스트셀러 영업기밀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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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 감정에 빠지면 길을 잃기 쉽다. 주제를 벗어나 글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게 되고 주제와 상관없는 것을 들여와 글을 망치게 된다. - P37

아무리 뛰어난 헬스트레이너의 지도를 받아도 실제 몸을 쓰지 않으면 복근을 만들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리 훌률ㅇ한 작가의 가르침을 받아도 계속 쓰지 않으면 훌륭한 글을 쓸 수 없다. 글쓰기에는 철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많이 읽어야 잘 쓸 수 있다. 책을 많이 읽어도 글을 잘 쓰지 못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많이 읽지 않고도 잘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많이 쓸수록 더 잘 쓰게 된다. 축구나 수영이 그런 것처럼 글도 근육이 있어야 쓴다. 글쓰기 근육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쓰는 것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그래서 ‘철칙‘이다. - P62

여기서 ‘읽혔다‘는 ‘팔렸다‘와 같은 뜻이다. 출판계에서는 지식산업의 품격을 지키려고 ‘팔렸다‘는 말보다 ‘읽혔다‘는 말을 쓰는 관행이 있다. - P63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독서광이 되어야 한다. - P79

글쓰기 근육이 부실한 사람은 무엇보다 첫 문장을 쓰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 P81

독해력을 기르는 방법은 독서뿐이다. 결국 글쓰기의 시작은 독서라는 것이다. 독해력은 글쓰기뿐만 아니라 모든 지적 활동의 수준을 좌우한다. 눈으로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텔레비전을 보거나 강연을 들을 때도 핵심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독해력은 체력과 비슷하다. 체력이 부족한 사람은 어떤 스포츠도 잘 할 수 없다. 독해력이 부족한 사람은 글쓰기만이 아니라 논리적 사고를 요구하는 어떤 과제도 잘해내기 어렵다. - P100

외국어로 쓰는 글도 모국어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더 잘 쓸 수 있다.....
우리나라 대학이 교수를 채용할 때 영어 강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지나치게 우대하는 것은 어린이 영어몰입교육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 - P109

통역이나 번역도 잘하려면 한국어를 잘해야 한다. 영어로는 다 이해한다고 해도 한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말의 뜻과 느낌을 정확하게 전하지 못한다. 영어책을 잘 읽어도 우리글을 제대로 쓸 줄 모르면 좋은 번역을 할 수 없다. 우리글은 잘못 번역한 영어문장에 심하게 오염되어 있다. 영어 실력이 없어서 잘못 번역한 게 아니다. 우리말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 P110

말 못 하는 아기한테도 자주 말을 걸어주어야 한다. 아기는 부모가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무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부모가 다정하게 말을 걸어줄 때 아기의 뇌에서는 행복한 비상사태가 일어난다. 청각신경이 포착한 음성 정보를 해독하고 적절한 대응을 하기 위해 아기의 뇌는 언어를 담당하는 영역에 더 많은 뉴런을 배치하고 교신을 더욱 강화한다. 따라서 반쪽짜리 말을 하는 아이라도 완전한 문장으로 대화해야 한다. ‘찌찌‘ ‘때때‘ ‘응가‘ 같은 반쪽짜리 말을 가르치고, 아이가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부모도 같은 방식으로 말하면 아이의 뇌는 쉬운 숙제를 받은 학생처럼 느긋하젠다. 더 많은 신경세포를 배치하고 더 많은 시냅스를 만들어 더 효율적으로 교신하려는 노력을 덜하게 된다.
아이가 언어 능력을 온전하게 발전시키도록 하려면 부모가 우리말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부모가 우리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말 공부를 새로 할 수도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말을 바르고 예쁘게 쓴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이다. - P119

독서도 억지로 하면 좋지 않다. ‘선행학습‘이라는 괴상한 풍조를 독서에 가져다 붙이는 것도 현명한 일이 아니다. 소위 추천도서 목록이란 것을 따라가면서 무작정 책을 가져다 먹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도움이 되기보다는 부작용을 낼 가능성이 더 크다. - P123

가장 좋은 독서법은 아이들 스스로 흥미를 느끼는 책을 읽게 하는 것이다. ‘어린이를 위한 고전 100선‘이니 ‘00추천 청소년 필독서 50선‘이니 하는 광고에 현혹되지 마시라. ‘어린이 논ㄴ어‘니, ‘어린이 사서삼경‘이니, ‘청소년용 그리스 로마 신화‘니 하는 책을 재미있게 읽을 아이는 거의 없다. 어린이 독서는 책 읽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독서를 생활 습관으로 만들고 자신이 읽은 것을 활용해 무엇이든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버릇을 들이면 된다. 많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독서 교육의 목표는 아니다. 재미를 붙이기만 하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기 나름의 독서 이력을 만들어간다. 만화, 판타지소설, 무협소설, 추리소설, 역사소설, 잡지, 그 무엇이든 괜찮다. - P124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책을 고르는 기준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인간, 사회, 문화, 역사, 생명, 자연, 우주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개념과 지식을 담은 책이다. 이런 책을 읽어야 글을 쓰는 데 꼭 필요한 지식과 어휘를 배울 수 있으며 독해력을 빠르게 개선할 수 있다.
둘째는 정확하고 바른 문장을 구사한 책이다. 이런 책을 읽어야 자기의 생각을 효과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문장 구사 능력을 키울 수 있다. 한국인이 쓴 것이든 외국 도서를 번역한 것이든 다르지 않다.
셋째는 지적 긴장과 흥미를 일으키는 책이다. 이런 책이라야 즐겁게 읽을 수 있고 논리의 힘과 멋을 느낄 수 있다. 좋은 문장에 훌륭한 내용이 담긴 책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으면 지식과 어휘와 문장과 논리 구사 능력을 한꺼번에 얻게 된다.

이런 책은 친구로 만드는 게 좋다. 친구는 오랜 세월 좋은 일은 함께 즐기고 아픔은 서로 나누며 자주 어울려야 친구다운 친구다. 어떤 책과 친구가 되려면 한 번 읽고 말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읽어야 한다. 시간이 들지만 손으로 베껴 쓰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그런 책 목록을 제안하기에 앞서 우선 세 권을 소개한다. <토지>와 <자유론> 그리고 <코스모스>다. 이 책들은 두세 번이 아니라 열 번 정도 읽어보기를 권한다. - P136

벌렁 누우면 양 손가락 끝이 벽에 닿는 0.7평짜리 독방에서 책 읽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던 때였기에 (토지) 1부와 2부를 다섯 번 읽게 되었다. 그 직후 사흘 동안 <항소이유서>를 썼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쩐지 내 글이 달라진 것 같아!‘ - P139

나는 <토지>를 우리말 어휘와 문장의 보물 창고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원하는 만큼 꺼내 써도 되는,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보물 창고. - P140

책 한 권이 때로는 기적이라 해도 좋을 만한 정신의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코스모스>가 바로 그런 책이라고 생각한다. - P150

어떻게 하면 잘못 쓴 글을 알아볼 수 있을까?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다.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이다. 만약 입으로 소리 내어 읽기 어렵다면, 귀로 듣기에 좋지 않다면, 뜻을 파악하기 어렵다면 잘못 쓴 글이다. 못나고 흉한 글이다. 이런 글을 읽기 쉽고 듣기 좋고 뜻이 분명해지도록 고치면 좋은 글이 된다.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 - P170

말과 글 중에는 말이 먼저다. 말로 해서 좋아야 잘 쓴 글이다. 글을 쓸 때는 이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 P174

글은 단문이 좋다. 문학작품도 그렇지만 논리 글도 마찬가지다. 단문은 그냥 짧은 문장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길어도 주어와 술어가 하나씩만 있으면 단문이다. 문장 하나에 뜻을 하나만 담으면 저절로 단문이 된다. - P199

누누이 강조한 것처럼, 글을 쓰려면 근육을 만들어야 한다. 이제 글쓰기 근육을 키우는 방법을 살펴보자. 우리는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글쓰기 근육을 만들려면 아날로그 방식으로 훈련해야 한다. 최대한 옛날 사람들이 하던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다. - P222

티끌은 모아봐야 티끌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하지만 글쓰기는 그렇지 않다. 글쓰기는 티끌 모아 태산이 맞다. 하루 30분 정도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수첩에 글을 쓴다고 생각해 보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매주 엿새를 그렇게 하면 180분, 세 시간이 된다. 한 달이면 열두 시간이다. 1년을 하면 150시간이 넘는다. 이렇게 3년을 하면 초등학생 수준에서 대학생 수준으로 글솜씨가 좋아진다. - P228

글을 길게 쓰는 것보다 ‘짧게 잘 쓰기‘가 어렵다. 똑같은 정보와 논리를 담는다면 2,000자보다는 1,000자로 쓰는 게 낫다. 이유는 자명하다. 읽는 데 시간이 덜 드는 만큼 경제적 효율성이 높다. 짧은 글이 좋은 이유는 또 있다. 같은 내용을 절반 분량에 담으려면 어떤 방법으로든 압축을 해야 한다. 압축하려면 군더더기를 없애야 하기 때문에 글의 예술성이 높아진다. - P231

굳이 없어도 좋은 접속사는 과감하게 삭제해야 한다. 단문으로 글을 이어나갈 때 문장 사이에 매번 ‘그러나‘ ‘그리고‘ ‘그러므로‘ ‘그런데‘ ‘그렇지만‘ 같은 접속사를 넣는 것은 나쁜 습관이다. 문장은 뜻을 답고 있다. 그 뜻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 접속사가 없어도 된다. 단문을 기본으로 쓰고 불필요한 접속사를 생략하기만 해도 글을 조금은 압축할 수 있다. - P237

글쓰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허영심은 지식과 전문성을 과시하려는 욕망이다. 이 욕망에 사로잡히면 난해한 글을 쓰게 된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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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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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라는 길이길이 기억될 다소 충격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책. 성석제의 문장처럼 말맛이 느껴져서 신명나게 읽다가도 뾰족한 문장에 잠시 읽기를 멈추게 된다. 딸에게는 아버지를 평생 알아왔던 세월보다, 장례식장에서 보낸 며칠이 아버지를 이해하기엔 더 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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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 P7

고통스러운 기억을 신이 나서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흔 넘어서야 이해했다. - P27

농부 주제에 작은아버지는 해가 중천에 솟은 뒤에야 숙취에 시달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킨다. 작은엄마가 윗목에 차려놓은 밥을 먹은 뒤 도살장에 끌려가는 늙은 황소보다 느릿느릿 일 나갈 채비를 한다. 그의 첫번째 필수품은 낫도 아니요 삽도 아니다. 작은아버지는 마당 한편에 쌓아놓은 궤짝에서 소주 다섯병을 꺼내 지게에 싣는다. 그게 그의 일용할 양식이다. 밭에 도착한 작은아버지는 그날의 일감을 눈대중하고 일의 양에 따라 한고랑, 혹은 두고랑마다 소주병을 하나씩 고이 안착시킨다. 참고로 그 시각 작은엄마는 남자들이나 하는 논농사를 짓느라 구슬땀을 흘리는 중이다. 작은아버지는 오직 술을 마실 목적으로 고추를 따고 들깨를 벤다. 다섯병의 소주를 다 마시면 몇시가 됐든 그걸로 그날의 작업 끝이다. - P40

아버지는 뼈속까지 유물론자였다. 부모가 여든 넘도록 장지 마련은 고사하고 영정사진 찍어둘 생각조차 못한 불효자식이었으나 아버지의 유지가 그러하였으니 따르면 될 터였다. 역시 유물론은 산뜻해서 좋다. - P94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 P181

언제 왔는지 상이용사의 얼굴이 벌써 시뻘겠다. 식전부터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하기야 술꾼에게 시간이 대수랴. 술꾼은 시간을 뛰어넘은 자, 아니 어쩌면 어느 시간에 못 박혀 끊임없이 그 시간으로 회귀하는 자일지 모른다. - P193

아직 사회주의를 모를 때의 아버지, 열댓의 아버지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질곡의 인생을 알지 못한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소년 둘은 입산해 빨치산이 되었고, 그중 한 사람은 산에서 목숨을 잃었다. 형들을 쫓아다니던 동생은 형을 잃고 남의 나라에서 제 다리도 잃었다. 사진과 오늘 사이에 놓인 시간이 무겁게 압축되어 가슴을 짓눌렀다. - P195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P231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 P249

아버지는 이곳에 묻히고 싶을까? 아무도 없이 적적하게 깊은 산속에 홀로? 아버지는 백운산에 가장 오래 있긴 했지만 이산 저산 떠돌며 48년 겨울부터 52년 봄까지 빨치산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건 고작 사년뿐이었다. 고작 사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옥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더 오랜 세월을 구례에서 구례 사람으로, 구례 사람의 이웃으로 살았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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